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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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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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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엿 또는 가래엿[1]

1. 개요2. 설명
2.1. 지역의 유명한 엿
3. 역사4. 관련 문화
4.1. 엿치기4.2. 입시 응원 선물
5. 외국의 엿6. 속어7. 기타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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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곡식을 증기로 찐 고두밥 엿기름(정확히는 녹말을 분해하는 아밀레이스 효소)에 삭힌 뒤에 자루에 넣고 당분 물을 짜낸 뒤 열을 식혀 굳혀 먹는 한과.

2. 설명

묽은 엿은 이()라 하고 된 엿은 당(餳)이라 한다. 좀 더 짧게 설명하면, 졸인 식혜. 굳기 전의 상태를 물엿, 조금 졸인 것을 조청이라고 하며, 바로 굳힌 것을 갱엿(= 강엿, 검은엿)이라고 한다. 갱엿을 먹기 좋게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든 것이 흔히 먹는 흰엿이다.[2]

엿은 정석대로 만들면 만드는 과정에서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달한 맛이 나는 이유는 엿기름에 들어있는 아밀레이스가 고두밥의 녹말을 엿당( 말토스)으로 가수분해 하기 때문이다. '밥을 삭힌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엿당을 추출해내는 과정이다.[3]

잘 굳은 갱엿은 엄청나게 단단하므로 덩어리라면 둔기로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단단하다. 지금도 일부 한약방 등에서 약초 등을 우린 것을 섞은 갱엿을 약엿 등의 이름으로 파는데, 씹는 건 엄두도 못낼 정도며, 냉동 보관할 경우 언 갱엿들을 살살 부딪히면 깡깡거리는 쇳소리가 난다. 그래서인지 갱엿은 그대로 먹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패로 얇게 긁어내어 나무막대에 붙여먹거나, 망치로 깨서 작은 조각을 단단한 사탕을 먹는 것처럼 입안에서 녹여서 먹거나[4], 갱엿을 굳힐 때 물을 조금 섞어서 무르게 만든 속칭 '불탱이'로 먹는 식. 특히 잘 만든 불탱이는 인절미 마시멜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부드럽다. 그것도 아니면 사람 팔뚝만하게 굳혀 몽둥이 엿이라는 이름으로 문구점의 뽑기나 오락기의 상품으로 지급되곤 했다. 식용보다는 상징으로 사용된 셈.

약엿이라는 것도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로는 호두, 참깨, 생강, 잣 등을 넣고 잘 편 다음에 대추를 박아 만든 걸 말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구기자, 모과 등의 약효를 가진 식물을 우려내어 그 물로 만드는 엿을 말한다.( 구기자엿 관련 기사 링크) 그냥 먹으면 시거나 쓴 것도 엿으로 만들면 달게 먹을 수 있어 지금도 한약방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약엿은 근래에 창작된 게 아니라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오래된 처방법으로, 전문 용어로는 고(膏), 고제(膏劑)라고 한다.( 한의학대사전 링크)

2.1. 지역의 유명한 엿

  • 담양 창평쌀엿은 엿기름(맥아)를 이용하여 쌀에서 당을 추출하여 만들어지는 흰가락엿이다. 창평쌀엿은 다른 엿과 달리 엿 안에 공기구멍이 있어 바삭하게 씹히며 치아에 달라붙지 않는 특징이 있다.
  • 울릉도 호박엿이 있다. 다만 호박엿의 경우 통상의 엿들과는 만드는 방법이 다르고 고소한 맛을 배가시키기 위해 콩가루를 묻혀서 준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과거에는 후박나무 진액으로 만드는 후박엿이었으나 후박나무가 귀해지고 외지인들이 이름을 하도 착각해서 호박엿이 되었다고 한다. 요즘 호박엿은 맛도 좋지만 만드는 기술도 과거보다 좋아져서 씹을때도 이빨에 잘 눌러붙지 않는게 큰 매력이다.
  • 설악산에서는 된엿을 나무젓가락에 감아 엿과자로 판매한다.
  • 제주도에서는 전통 특산 엿으로 고기가 들어간 고기엿이 있으며 을 고아낸 꿩엿도 있다. 최근에는 과 함께 선인장(백년초)을 제주도의 특산품으로 밀면서 선인장 엿도 있다.
  • 북한에서는 개고기 토끼고기를 엿에 넣는다. 간식보다는 주로 환자의 보양식으로 먹었다.
  • 평안도 지방에서는 엿에 고기를 자주 첨가해 먹는다고 한다.
  • 충청도 지방에는 불린 쌀과 엿기름, 무채를 넣고 만드는 무엿이 있다. 일반적인 딱딱한 갱엿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떠먹는 부드러운 엿이라고 한다.

3. 역사

과거 고려시대 때,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5] 이 밖에도 허균의 성서부부고 중 제 26권인 도문대작(屠門大嚼)에도 흰엿과 검은엿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엿은 옛날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그나마 사먹기 쉬웠던 군것질 거리였고, 평민들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다른 한과들과 달리[6] 평민들도 접할 수 있었던 한과였으며, 길거리 음식이라 한과들 가운데 사실상 유일하게 대중화된 한과였다. 영조대에도 엿장수와 떡장수, 술장수들이 과거시험장으로까지 가서 장사판을 벌이는 등 과거시험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다고 힐난하는 기록이 있다. 정조 시대 김홍도 씨름도에도 씨름판 관중들에게 엿을 파는 엿장수가 묘사되어 있다.

1909년의 엿장수에 관한 기록을 보면 2관(貫·한 상자분)의 흰 엿과 검은 엿(대추엿)을 하루 종일 걸어다니면서 팔았다고 한다. 이걸 전부 팔면 1원(100전)의 순이익이 남았다는데 당시의 물가 상황을 보자면 한 끼 식사가 5전 정도였으니 독거하는 사람이면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는 돈벌이일 수도 있으나 가족을 부양하고 어쩌고 하면 생각보다 잘 벌리는 장사는 아니었다.

6.25 전쟁 이후에는 엿장수가 돈 대신 고물을 받아 되파는 고물상을 겸하기도 했다. 검정 고무신에서도 이런 게 잘 표현되어있다.[7] 이때 생겨난 말이 바로 '○○는 엿바꿔 먹었냐?'가 되시겠다. 또 고물을 갖다주면 쇠가위[8]로 기다란 엿을 잘라 고물에 알맞는 값어치만큼 주었는데, 말이 알맞게지 사실상 주는 사람 마음이어서 똑같은 고물을 가져다줘도 그때 그때 받는 엿의 양이 달랐기에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도 생겨났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어느 슈퍼를 가도 볼 수 있는 아이들이 접하는 흔한 군것질거리로 군림했지만, 달콤하고 맛있는 먹을거리가 매우 다양해진 2000년대 부터는 쇠퇴하여 현재는 지역축제나 전통시장에서나 볼 수 있으며, 주로 각설이 컨셉으로 공연을 하면서 엿을 판매하는 경우도 많다. 리어카에 배터리를 장착하고 음향 시스템을 장착하여 트롯트 음악을 틀고 장사를 하는데, 신나는 분위기가 특징이다.

4. 관련 문화

4.1. 엿치기

엿에 공기를 넣는 소위 '엿을 뽑는' 과정 때문에 엿 속에는 빈 구멍이 있는데, 옛날에는 서로 엿가락을 부러뜨린 뒤[9] 속의 구멍 크기를 재서 겨루는 '엿치기'라는 놀이가 있다. 어느 부분을 부러뜨리냐에 따라 구멍의 크기가 달라지며 진사람은 엿값을 내야하니 꽤나 신중한 결단이 필요하다. 물론 아이들의 놀이가 그러하듯 돈내기 싫어서 혹은 동네마다 룰이 제멋대로라서 대판 싸움이 발생하곤 했다. 구멍 수가 많으면 이긴다든지, 누구 구멍이 더 큰지, 두번 부러뜨려서 구멍의 갯수를 더한다든지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상술한 검정고무신에서도 '엿장수 마음대로' 스킬이 시전된 엿치기 장면이 나온다. [10]

4.2. 입시 응원 선물

상당히 달고 녹으면 끈적거린다. 이빨에 끈적끈적하게 쩍쩍 달라붙는 음식의 대명사로서, 수능 등 시험을 치르기 전에 "꼭 붙어라"하는 의미에서 엿을 선물해 주기도 한다. 이는 조선 시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일종의 전통으로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엿을 챙겨들기도 갔다고 하며, 과거시험장에서 노점상들이 엿을 수험생들에게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다만, 제대로 만든 전통 엿은 요즘의 엿과는 다르게 다 먹으면 입안에 달라붙지 않는다. 만드는 방식이 달라지며 변한 것. 요즘은 이게 약간 유머러스하게 변형돼서, 수능시험날 시험장 교문 앞에서 플래카드" 재수없다 엿먹어라"라고 써서 응원한다.[11]

5. 외국의 엿

일본어 표기는 飴(あめ, 아메, 엿 이). 사탕도 あめ라 표기하며 일본에서 엿은 사탕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일본어로 사탕(さとう, 사토-)이라 하면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설탕이 된다.

중국에도 엿이 존재한다. 중국 후난성의 전통 과자 가게에서 주로 파는데,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파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손으로 만든다. 만드는 법도 비슷하다. 다만, 한국의 전통 엿은 뽑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것과 달리, 중국은 벽에 고리를 걸어서 거기에 엿을 건 다음 홀로 엿을 뽑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하는 곳이 있다. 그리고 뽑아낸 엿을 끊을 때에도 한국의 엿처럼 가위로 끊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뜯어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굵기가 조금 들쑥날쑥한 편. 그리고 이 엿의 정식 명칭은 '짜오탕(灶糖, zàotáng)'이다.

6. 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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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상대를 무시할 때 쓰는 것으로 비슷한 위치의 욕인 좆까보다 Fuck You에 더 직접적으로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혹은 골탕을 먹일 때도 쓰곤 하는데, 골탕을 먹이는 사람이 쓰는 경우는 없고, 당한 사람이 쓰거나 (ex: 저 X끼가 나에게 엿을 먹였어!) 이를 지켜보는 제3자가 쓰곤 한다. 골탕먹이는 스케일이 매우 큰 경우 '빅엿을 먹이다'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빅엿의 경우 인터넷 방송인 나는 꼼수다에서 쓰인 표현이다). 2000년대에 외국영화에서 fuck you가 나왔을 땐 엿먹어라라고 주로 나왔다. 축약하되 의미를 살려 '멕이다'[13]라는 관용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는 다르게 'X이나 까잡숴'라는 표현을 순화시켜 사용한 '엿이나 까잡숴'같은 표현도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이 관용구를 더 순화시킨 ' 물먹다'라는 표현도 종종 쓰이는 편

'엿 먹어라'의 어원이 1964년 중학교 입시 시험에서 왔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2000년대 초반 사용자끼리 질문과 답변을 하는 디비딕닷컴에서 나온 잘못된 정보[14]로 이걸 TV에서 사실처럼 말해놔서 아직도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다.[15] 그러나 1920년대에도 비속어로 쓰인 문헌이 남아 있다. 그 밖에 '염 먹어라'( 염습 참조)에서 나온 욕설이라는 가설도 잘못인 정보다.
“아 저런 죽일 놈 봐라 배를 돌리라니까..... 아 이놈아 네 목숨이 앗갑지 안흐냐[16]
“이놈들아 엿이나 먹어라 나를 누군 줄 아느냐 흥 나는 장소공(張梢公)이다”
윤백남(尹白南), 신석수호전(新釋水滸傳), 1929년 3월 17일 동아일보 연재분
풍속사학자인 송사(松士) 김화진(金和鎭)이 쓴 칼럼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시대 강원도 일부 지역의 군역 대상자들이 서울로 차출돼 왕십리 쪽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했고, 일부는 군역이 끝나도 귀향하지 않았고 그들이 살던 초막이 집처럼 매매가 되기도 했는데, 이같은 부동산 거래를 할 때에 엿을 사주면서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아 이들이 일종의 공증인 역할을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풍속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그것이 '엿 먹어라'가 비속어로 쓰이는 된 것과의 연결고리는 찾기 쉽지 않다. 이 사람이 쓴 다른 칼럼에서는 '경을 치다'를 민간어원으로 잘못 풀이한 전례[17]도 있어서 '엿 먹어라'도 100% 신뢰할 수는 없다.

고풍ㆍ금속 ① 엿 먹어라 - 김화진 【펼쳐 보기ㆍ접기】
>지금 항간에서 무관한 친구 사이에 가당치 아니한 말을 하면 ‘듣기 싫여 엿 먹어라’고 하는 말이 종종 있다. 그러나 ‘엿’ 먹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대칭(代稱)으로 된 유래는 알 사람이 없다.
옛 경국대전 병제에 국민은 개병으로 남자는 열다섯 만 되면 호패를 가지게 되는 것이 지금 시민증이나 국민병수첩 같이 꼭 가지고 있게 되고 매년 추동 농기에는 군에 가서 교련을 받고 20세가 되면 경영(京營)에서 징소(徵召)를 하여 6삭(朔)의 병역을 한다. 이것도 윤번제로 5호가 1보가 되고 5호 중에 한 집이 병역에 가면 4호는 그 집에 농사나 생활 책임을 부담한다.
그러므로 병역 나간 사람은 정병이고 집에 있는 사람은 군보라 한다. 이것은 다음 병역 풍속으로 미루고 강원도의 영월, 평창, 인제, 정선 4군 사람은 경영 훈련도감에 속하여 6삭의 의무를 마치고 가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영문에 들어가면 1채 부식에 5홉 밥을 먹으며 3일은 영내에 있고 3일은 자유로 나와 지내며 의복은 군보가 부담하여 가져오게 되고 출영 3월간 식사료로 매삭에 쌀 3되만으로 지낼 수가 없으므로 처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출번한 동안은 야채행상 하기도 한다. 이 사람들의 집단생활지역은 지금 왕십리다.
먼저 온 사람들이 6삭 의무를 경과하여도 아니 가고 그 지방 사람의 대신으로 병역을 하여 주기로 한다. 차차 생활의 근거가 잡히면 처음의 초막이 집도 되고 집의 매매도 한다.
이 매매하는 데도 문자라고는 ‘언문’도 모르므로 집을 누가 사게 되면 동리 아이들을 불러 놓고 ‘엿’을 나누어 주며 이 엿은 어느 집을 누가 얼마에 샀다는 엿이라고 하여 불문(不文)의 대중 공증을 하여 온 동리가 다 알게 된다.
그런 뒤에 혹시 딴소리를 하면 동리 사람이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내가 몇 살 때 엿을 먹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다시는 아무런 이론도 없게 된다. 이것이 지금의 등기서류보다 더 분명하다. 그리하여 ‘엿먹어라’가 가당치 않은 말을 막는 대칭(代稱)이 된 것이다.
1954.08.22. 경향신문

이 외에 남사당패 은어로 '엿'이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말이어서 보통 욕이나 비속어가 성기나 성교를 지칭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주장도 있다.[18] 그러나 이 주장도 문헌상의 근거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19]

이후 국어사전에 관용표현으로 서술되었다.

일본어에도 엿을 먹이다( あめをしゃぶらせる)라는 관용구가 있다. 다만 위에서 말하는 욕이 아니고, 특정 상대에게서 큰 이득을 얻으러 작은 미끼를 던지거나 상대가 기뻐할 만한 말들을 하여 기분을 좋게 한다는 표현이다. 즉 목적을 이루려고 사탕발림으로 꼬드겨서 이익을 얻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한다란 뜻이다. 단순히 골탕먹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서 한국의 '엿먹이다'와는 분위기나 쓰임새가 조금 다르다. 한국어의 의미와 비슷하게 사용하려면 '糞(くそ)食(く)らえ', 직역하면 " 똥 먹어라" 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에서도 1905년 문헌에 쓰인 용례의 경우 위 일본어의 용례와 거의 같은 어감으로 사용되었다.
기찰(畿察) 달찰(達察) 평찰(平察)[20]은 군수(郡守) 천보(薦報)[21]한 공로(功勞)로 승급(陞級)한다지 그게 승급(陞級)이라던가 떼여먹으량으로[22] 엿먹이는 일이라네
(현대어역) 경기도,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는 군수를 추천한 공로로 승진한다고 하는데 그게 승진이겠는가. 한몫 뜯어낼 의도로 미리 사탕발림하는 것이네.
1905년 8월 11일 대한매일신보 3면

위 일본어 용례와 한국의 1905년 사용례를 보면 기호식품인 엿이 욕으로 쓰이게 된 의미 변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엿을 먹는 행위는 처음엔 미끼를 무는 짓이지만 나중엔 뒤통수를 맞고 낭패를 보는 결과를 맞게 되므로 엿을 먹이는 것이 저주나 험담의 의미로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군가 뒤에서 진짜 엿을 가지고 누구에게 100% 선의로 권하면서 "엿 먹을래?" 라고 하면 상대는 본능적으로 순간 섬칫하면서 "어? 지금 나 욕한거야!" 라는 반응을 보이기 십상인 웃픈 경우가 다반사다. 이것은 완전한 선의라고 보기 힘든게 오해사기 싫으면 "이거 먹을래?"나 구체적인 엿 이름을 말해서 권하는[23] 등의 순화할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고 친한 사람한테 반쯤 농담으로 장난치기 위한 방법이다.

'좆 같다'는 표현을 '엿 같다'라는 식의 순화어나 대체어로도 사용된다.

7. 기타

  • 엿과 관련된 일화로 아직 중학교 입시가 존재하던 1964년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시험에 출제되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지만 문제의 보기에 있던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었다. 이는 디아스타제가 무즙에도 들어있기 때문. 실제로 교과서에도 그렇게 써 있었다. 당시 흥분한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교육청에 엿 먹어보라며 항의했고, 이는 중학교 입시제도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무즙 파동 참고.
  • 딱딱한 음식이 으레 그렇듯이 먹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금 따위로 이를 해 넣었거나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해서 이가 약한 사람들은, 먹다가 이빨이 엿에 달라붙어 쏙 하고 빠지는 수가 있다. 특히 금니의 경우는 빠지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24]
  • 엿의 재료 중 하나인 엿기름이 소화효소 중 하나인 아밀레이스를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에는 엿을 소화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 신비아파트 시리즈에서는 신비가 시리즈 초반에 먹어오던 간식인데 신비가 가지고 있는 엿을 인간이 먹게 되면 귀신을 보게 되는 능력이 생긴다. 구하리 구두리 그리고 이들의 아빠 구인남 파일럿판에서 이것을 먹은 바람에 귀신을 보게 된 설정이 있다. 이후 정규 1기에서는 오컬트 매니아인 김현우도 이 엿을 먹으며 귀신을 보게되었다.[25] 시즌이 흐르면서는 이 엿의 설정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되어 엿을 먹지 않은 사람에게도 귀신이 보이기도 한다. 게임판에서는 포획모드에 필요한 아이템으로 나온다.

8. 관련 문서



[1] 복수표준어 규정으로 둘 다 표준어다. [2] 갱엿 자체는 투명하면서도 거무튀튀한, 단단한 덩어리이다. 이것을 잡아당겨 접는 과정을 반복해 내부에 공기가 들어가면서 색이 하얗게 변하고 식감도 말랑말랑하게 되는 것이다. [3] 식혜의 단맛도 같은 원리. 다만, 식혜는 만드는 과정 중 양을 늘리기 위해 설탕을 첨가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4] 전통시장에는 이런 식으로 깨서 파는 곳도 있다. [5] 실제로 중국 호남성에 전통 엿가게가 있다. 아마도 이 곳이 원조인 듯. [6] 다만 조선 성종 시기부터는 평민들도 생일이나 명절 같은 잔칫날에 약과를 먹게 되는 일이 흔해졌다는 언급도 성종실록에 전해진다. [7] 다만 6.25 전쟁 전인 1947년에 출간된 백범일지에는 김구가 어릴 적 집에 있던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으로 바꿔먹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김구는 1876년생이니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엿장수가 고물상을 겸했을 수도 있다. [8] 이 쇠가위는 지금도 엿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져 야시장 같은데 각설이 분장을 한 엿장수들이 꼭 들고 다닌다. 트로트 음악에 맞추어 쇠가위 특유의 절걱절걱 소리를 내는 것이 주 패턴. [9] 이 때 바람을 불어넣으면 구멍이 커진다. [10] 다만 이쪽은 엿장수가 주장했던 내용이 더 정석에 가깝긴 했다. 상황은 구멍이 큰 엿(엿장수) vs 구멍이 많은 엿(똥퍼아저씨) [11] 2016년( 병신년)에 치러진 2017 수능 때에는 병신년 재수없다라는 플래카드가 모 학교 교내에 내걸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2] 한국어 말장난을 살리려면 'Eat my Sweet', 또는 'Eat my short candy'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조롱조로 쓰이는 표현인 'Eat my dust'의 변형. 이 자막판의 다음 대사와 자막은 자그마치 무슨 엿이오?( What The Fuck?)인데 아마 두 대사의 언어유희를 살리고자 일부러 Fuck 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 자막에 따라 'Suck it'(이거나 빨아라)으로 번역된 경우도 있다. [13] '먹다'의 사동사인 '먹이다'가 ㅣ 역행 동화한 것이다. [14] 출처: 《너 그거 아니?》 문학세계사, 2001년) [15] 허영만의 식객의 24권의 에피소드 <엿>에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다만 다른 가설도 하나 덧붙여서 썼다. [16] 아깝지 않으냐. [17] '경(黥)을 치다'는 과거 죄인의 몸에 죄명을 새기는 경형(黥刑)(이 형을 받은 사람 중에서 유명한 사람으로는 영포 등이 있다.)에서 비롯된 것인데 한밤에 시간을 알리는 '경(更)을 치다'로 잘못된 해석을 한 적이 있다. [18] 미승우,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것들>, 범우사, 1986. [19] 남사당패 은어로는 여자 것은 "뽁", 남자 것은 "작숭이"라고 한다. [20] 각각 경기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달(達)'은 경상도 관찰사 소재지인 대구(달구벌, 달성)를 뜻한다), 평안도 관찰사 [21] 천거하여 보고하는 일. 당시 관찰사에게 군수를 천거하는 권한이 있다보니 이로 인한 부정부패가 많았다. [22] 떼어먹을 의도로 [23] 예를 들면 호박엿을 권할 경우 "호박엿 먹을래?"라고 권하는 경우 [24] 힘든게 아니라 안 된다. 이는 표면에 세라믹 처리를 했기 때문. [25] 여담으로 구하리와 구두리는 신비가 먹는 장면을 보고 뺏어 먹은 다음 귀신을 보게 되자 이 엿 때문임을 알게 되었고, 구인남은 그저 흘리고간 엿을 먹은 바람에 이 효과를 먹기 전후 어느때도 듣지 못하고 귀신을 보게 되었고, 반면 김현우는 그 엿의 효과를 들은 상태에서 귀신이 보고 싶다며 신비가 먹던 것을 뺏어먹는 등 갖은 방법으로 각각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