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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로스 왕국 스파르토코스 왕조 10대 군주 Εύμηλος | 에우멜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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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에우멜로스 |
그리스어 | Εύμηλος | |
영어 | Eumelus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304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309년 ~ 기원전 3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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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포로스 왕국 스파르토코스 왕조 10대 군주.2. 생애
파이리사데스 1세와 코모사리예의 아들로, 남자 형제로 사티로스 2세, 프리타니스, 고르기포스가 있었고, 여자 형제로 아키스가 있었다. 기원전 31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사티로스 2세가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그는 권좌에 도전했다. 그는 사르마티아 부족으로부터 시라크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아 총 42,000명의 전사를 모았다. 사티로스 2세는 이에 맞서 스키타이 인들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아 34,000명의 병력을 모아 그를 향해 진격했다.양자는 쿠반 강의 지류 중 하나인 팟 강 유역에서 조우했다. 사티로스는 강을 건너 진영을 세우고 수레로 사망을 에워쌌다. 이후 전투를 위해 군대를 정렬하고 자신은 전투 진형의 중심에 섰다. 그는 이에 맞서 군대를 편성하고 우익에 섰다. 이윽고 벌어진 전투에서, 사티로스는 적의 중앙 부대를 격파했고, 그는 좌익 부대를 격파했다. 이후 사티로스가 스키타이 기병을 친히 이끌고 그를 측면에서 공격해 도주하게 만들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잔여 병력과 함께 아리판 요새로 도주했다. 이 요새는 강으로 둘러 싸였고 높은 절벽과 숲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사티로스는 요새 주변의 모든 정착촌을 파괴한 뒤 숲을 모조리 베어내서 길을 뚫었다. 요새 수비대는 나무를 베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사티로스는 이를 무릅쓰고 계속 밀어붙인 끝에 4일째 되던 날에 숲을 돌파하여 아리판 요새에 당도했다.
사티로스가 고용한 용병 사령관 메니스코스가 첫번째 공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하자, 사티로스 본인이 두번째 공성전을 벌였으나 격퇴당했고, 그 과정에서 팔이 창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사티로스는 천막으로 옮겨진 뒤 치료받았으나 부상이 악화되는 걸 막지 못하고 밤중에 사망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이 때가 그가 왕위에 오른 지 9개월째 되던 날이었다고 서술했다. 이후 사티로스의 형제 프리타니스가 군대 지휘권을 물려받은 뒤 군대를 철수시킨 후 왕실 금고가 보관되어 있는 가르가자로 이동하여 사티로스 2세의 장례식을 장엄하게 치른 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프리타니스에게 왕국의 지분 일부를 자신에게 양도하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프리타니스가 가르가자에 수비대를 남겨둔 후 판티카파에움으로 이동하자, 그는 사르마티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북상해 가르가자와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했다. 프리타니스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마에오틱 호수 인근에서 그와 교전했으나 크게 패하고 계곡에 갇혀 며칠간 굶주린 끝에 항복했다. 프리타니스는 잔여 병력을 그에게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려났다. 하지만 프리타니스는 포기하지 않고 판티카파에움으로 돌아가 재차 왕위를 되찾으려고 반란을 꾀했으나 발각당하자 '가르단'이라는 곳으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그는 판티카파에움에 도착한 뒤 사티로스 2세와 프리타니스의 일가족과 친구들을 모조리 처형한 후 왕위에 올랐다. 다만 사티로스 2세의 아들 파이리사데스 2세만은 가까스로 빠져나가 스키타이인들의 영역으로 망명했다.
그는 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뒤 영토 확장 정책을 단행했다. 함대를 동원해 흑해에 횡행하는 해적들을 제압하고 판티카파에움의 경제를 되살렸다. 또한 대부분이 사르마티아인으로 구성된 군대에 더 많은 그리스인을 모집한 뒤, 주변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리시마코스에게 쫓겨난 뒤 정처없이 떠돌던 1,000명의 피난민들에게 토지를 제공했다. 그리고 유목민족에게 여러차례 공격당한 후 버려졌던 타나이스를 탈환하여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보소포로스 해협을 둘러싼 모든 부족을 정복할 야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원전 304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희생제를 준비하고자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를 몰고 가던 중 말들이 갑자기 날뛰면서 전차가 전복될 위기에 몰리자, 급히 뛰어내렸다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바퀴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마차에 질질 끌려가다가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아들 스파르토코스 3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