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0:19:37

화승총

아퀴버스에서 넘어옴

||<tablebordercolor=#000,#000><colbgcolor=#fff,#fff><tablealign=center><-6> 파일:musketsilhouette.png 근대 총기 발전사 ||
장전 방식 전장식 후장식
격발 방식 매치락 휠락 플린트락 퍼커션 캡 탄피
강선 유무 머스킷 소총(라이플)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1072101594_1.jpg
일반적인 화승총의 모습

1. 개요2. 역사
2.1. 핸드 캐논2.2. 발전과 세분화
3. 득세
3.1. 진형3.2. 사격방법
4. 단점5. 여담6. 맨패즈의 북한식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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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승총() 또는 매치락(matchlock)[1] 은 15세기 유럽에서 처음 발명되었고 16세기 들어서는 동아시아 일대에 전파되었으며, 이후 유럽에서는 17세기 말~18세기 초, 그 외 지역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중반까지 사용된 총포의 한 종류이다. 설계상으로는 화승(도화선)을 이용해 점화하는 전장식 흑색화약 총기의 구조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에 유입되었던 조총 역시 이러한 화승총의 한 종류이다.

심지를 사용해 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격발하지만, 그렇다고 심지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매우 원시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이러한 방식은 화승총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용된 승자총통 등의 핸드 캐논류가 사용했던 방식이고, 화승총은 심지를 방아쇠와 연결해두었다가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은 심지가 화약에 닿아 점화하며 격발시키는 방식이었다.

화승총은 비록 최초의 개인용 화약병기는 아니었으나[2], 방아쇠의 존재 덕분에 격발이 한층 수월해지면서 이전의 화약병기들에 비해 화력통제가 한결 수월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군사 교리와 전쟁이 이전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변하는 데에 한몫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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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을 활용하여 투사체를 날린다'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무기는 총이 아니라 대포였다. 12세기 초 중국에서 처음 개발된 대포[3]를 접한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포를 줄여서 개인용 화약병기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발상에 따라 만들어진 무기가 바로 핸드 캐논이었다.

2.1. 핸드 캐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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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액터가 재현한 모습
13세기 중국에서 처음 개발된 핸드 캐논[4]은 중국과 가까운 순서대로 타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에 들어서는 유럽까지 전파되는 데에 이르렀다. 핸드 캐논 자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핸드 캐논 항목 참고.

리인액터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핸드 캐논은 총이라기보다는 창에 가까운 구조의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적을 조준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명중률이 낮았다. 그뿐만 아니라 화승이 꺼지지 않게 곁눈질로 보면서 동시에 화약접시의 화약이 날아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하는 등 격발 과정도 번거로운 점이 많았다. 이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한 명이 핸드 캐논을 조준하면 다른 한 명이 화승으로 점화하는 방식으로 2인 1조로 운용하기도 했으며, 승자총통처럼 총알을 여러 발 집어넣어 산탄 사격을 가해 떨어지는 명중률을 보강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써도 핸드 캐논의 설계로는 떨어지는 명중률과 번거로운 운용이라는 큰 단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는데, 서유럽에서 15세기 중반 핸드 캐논에 방아쇠를 도입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5]

2.2. 발전과 세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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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방아쇠의 모습. 화승이 닿는 부위엔 Pan이라는 화약접시가 보이고, 그 위에는 바람에 화약이 날아가지 않게 보호하는 덮개가 달려 있다.

처음 핸드 캐논에 장착된 방아쇠는 현대 기준으로 보기에는 방아쇠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물건이었다. 그냥 화승을 물린 지렛대만 달려 있는 형상이었는데, 이것만으로도 화승을 직접 화약접시에 갖다 대거나 도화선이 타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기존의 핸드 캐논에 비하면 혁신적인 변화였다. 후대에 나올 점화 방식에 비하면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 장치가 끼친 영향은 절대적으로, 이후 개머리판 기계식 조준기와 합쳐져 개인화기의 명중률과 운용에 엄청난 진보가 일어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방아쇠는 단순한 지렛대에서 벗어나 스프링을 이용해 현대 총기에 달린 방아쇠와 비슷하게 변해갔는데, 크게 완발식순발식이라는 두 가지 구조가 있었다.

완발식[6]은 스프링의 힘이 항상 용두(Cock)와 방아쇠에 작용하고 있어서 방아쇠를 누른 만큼 용두가 고개를 숙여 화승이 화약 접시에 닿는 방식이다. 방아쇠의 압력이 강해서 방아쇠를 누를 때 많은 힘이 들어가는 만큼 손 떨림 때문에 명중률이 저하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화승총이 주력으로 사용되던 시기는 교전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7] 큰 단점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방아쇠 압력이 강하다는 점 덕분에 외부 충격으로 오발사고가 일어나는 일이 덜하여 안정성이 높았고, 유럽에서는 순발식보다 훨씬 많이 쓰였다.

순발식[8]은 용두를 수동으로 젖히고(코킹) 방아쇠를 누르면 스프링의 힘으로 화약 접시에 화승을 박는 방식이다. 현재의 싱글 액션 방식과 동일한데, 방아쇠 압력이 약해 오발사고가 나기 쉬웠고 화승이 화약 접시에 박을 때의 충격으로 화승이 용두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점화약에서 발생한 폭압 때문에 화승이 꺼지는 문제가 있어서 완발식에 비해 성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유럽 국가들의 경우 군용으로는 잘 쓰지 않았다. 다만 총기의 안정성보다는 명중률과 반응속도가 더 중요했던 사냥꾼들은 꽤 많이 사용했다. 동아시아의 경우 일본에 처음 전래된 화승총이 순발식이었고, 이후 일본과 관련된 루트를 통해 화승총이 퍼져나갔기 때문에[9] 대부분의 화승총이 순발식으로 만들어졌다.

화승총은 크게 아르퀘부스(Arquebus)머스킷(Musket)으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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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퀘부스
아르퀘부스는 휘어진 총이라는 뜻으로, 15세기 중반에 처음 등장하여 이후 17세기까지 쓰였다. 초창기의 아르퀘부스는 본격적인 화승총이 아니라 지렛대식 방아쇠가 달린, 약간 발전된 형태의 핸드 캐논류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후 화약병기의 발전이 급물살을 타면서 본격적인 형태의 화승총이 퍼지기 시작했고, 대구경의 머스킷이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자 아르퀘부스는 차츰 '머스킷보다 짧고 가벼운 총'이라는 의미로 바뀌어 나갔다. 당시 표준 아르퀘부스는 대략 1m의 길이와 5kg의 무게에 50구경(13mm)이고 탄자의 무게는 19g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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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킷
머스킷은 아르퀘부스에 비해 무겁고 길고 큰 구경을 가진 총을 뜻한다. 당시 표준 머스킷은 1.4m의 길이와 7kg의 무게에 75구경(19mm)이고 탄자의 중량은 38g. 머스킷은 무거운 탄자와 긴 총신에 힘입어 아르퀘부스에 비하면 확실히 위력적이었지만, 대신 무거워서 다루는 데에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아 흔히 포크(Fork)라고 부르는 단각대를 받치고 사격했다. 참고로 포크는 주로 서유럽에서 쓰였으며 그 외의 지역에서는 다양한 거치대가 존재했다. 러시아 제국 스트렐치는 특유의 도끼창을 받침대로 사용하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한 제자일이나 티베트에서 20세기까지 존속했던 사냥용 화승총은 양각대가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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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밀총
아르퀘부스와 유사한 중국 명나라 때의 노밀총(魯密銃). @ 중동 지역에서 전래된 화승총을 중국에서는 노밀총이라 불렀다.

머스킷과 아르퀘부스가 공존하던 시대에는 방탄 흉갑을 입고 권총과 아르퀘부스를 튕겨내는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갑옷을 확실히 관통할 수 있는 머스킷을 아르퀘부스보다 높게 쳤다. 거기다 용병은 아르퀘부스 대비 몸값을 2배 가량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르퀘부스는 점차 도태되고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7~10kg에 달했던 머스킷이 아르퀘부스 수준으로 가벼워지자 아르퀘부스는 사라지고 머스킷만 남아서 발전하게 된다. 같이 읽기

3. 득세

초창기의 '아르퀘부스', 즉 '원시적인 방아쇠가 달린 핸드 캐논'은 1411년 유럽, 1425년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에 개발된 본격적인 형태의 화승총은 15세기 말 예니체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5세기 말이라는 것만 확실할 뿐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승총은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1526년에는 바부르가 화승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앞세워 델리를 함락시킨 것을 계기로 인도에 퍼져나갔다.

화승총이 본격적으로 전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1525년에 벌어진 파비아 전투였다. 파비아 전투에서는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8천여 명의 기사가 포함된 23,500여 명의 프랑스군과 3천 명의 스페인 총병대를 포함한 23,000여 명의 군대가 격돌했는데, 스페인 총병대는 프랑스 기병대의 후미를 교란, 수십회의 일제 사격으로 기병대를 흩어버리는 데 성공한다. 반면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운용하지 못한 프랑스군은 크게 패주해 반나절 사이에 전멸하고 만다. 현재는 파비아 전투의 결과는 화승총의 위력보다는 여러 요인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10], 어쨌든 잘 조직된 화승총 운용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잘 보여줬다는 점에서 파비아 전투의 의의는 작지 않다.[11]

동아시아에는 대항해시대가 펼쳐진 유럽 선박들 중 태풍을 만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 표류되어 흘러들어가기 시작하면서 16세기 중반부터 화승총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1543년 일본 타네가시마 섬에 포르투갈 선원들이 표류해 왔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던 화승총을 타네가시마 영주가 사들이고 리버스 엔지니어링한 것이 시초라고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명나라 군대가 유럽 세력과 교전을 벌여 승리한 뒤 화승총을 노획한 사례가 존재하지만, 척계광 기효신서에서 조총을 두고 이 무기는 중국에 원래 존재하지 않고, 왜구에게서 전해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 서양 세력으로부터 확보한 화승총을 군용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보자면, 1548년 명나라 군대가 밀무역 거점이었던 쌍서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왜총'을 노획한 것이 중국 화승총의 시초이다.

조선은 16세기 중후반 들어서 왜관이나 대마도 등을 통해 일본제 화승총을 접할 기회[12]가 있었으나, 주적이었던 여진족과 왜구가 화약무기를 거의 쓰지 않았던 것[13]과 한번 쏘면 오랜 장전시간이 걸리고 비오면 무용지물이라는 단점만 보았고 선조는 일본의 침공 징후는 감지했지만 그 규모를 오판하였기에 기존의 원시적인 화약무기로도 충분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삼단사격(발포조-대기조-장전조)과 같이 잘 조직된 조총부대에게 큰 피해를 입은 뒤 화승총의 유용함에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왜란 도중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하거나 항왜 중 조총 제작 기술을 가진 자들을 우대하고, 명나라로부터 조총을 수입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화승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17~18세기 들어서는 아예 군대 전체가 화승총 위주로 조직될 정도로 화승총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숙련도 덕에 효종 시절 소규모 전투인 나선정벌 당시 청나라 측에서 파병을 요청을 하였다.

청나라의 건국 이후 동아시아는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개인화기 발전이 느려졌다. 일본은 에도 막부가 지방 세력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화승총 제작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고, 섬나라 특성상 국경을 접한 나라가 없어서 안보적 위협도 거의 없어서 그 정책을 폐기할 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다. 청나라는 극소수 만주족이 수억 명의 한족을 다스려야 하다 보니 의도적으로 화약무기 개발을 억제해서 한족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총기 개량 자체가 불법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청나라는 주변국에 비해 국력이 너무 강력해서 화승총만으로도 전쟁 수행에 큰 무리가 없었던 터라, 전쟁을 자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반란의 위험을 감수하고' 총기를 개량하려는 시도가 적었던 것도 있다. 조선은 청과 일본 사이에 끼여 항상 안보적인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중일 3국 중 가장 조총 개량에 적극적이었지만, 질 좋은 부싯돌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플린트락으로 넘어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화승총이라는 틀 내에서만 크고 작은 개량이 이루어졌을 뿐 기본적인 설계 자체는 큰 변화 없이 19세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때문에 러시아와의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던 나선정벌 당시 청나라 측은 조선에게 조총수 100명을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3.1. 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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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창병과 같이 움직였는데, 사격을 하는 동안 창병들이 기병대의 견제를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사격대형은 느린 사격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줄로 된 대형에서 선두가 발포한 뒤 마지막 줄로 가고, 그 다음 열이 발포하고 나면 또 뒤로 가는 등 순차적으로 교대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Counter March(뒤로 행군)라고 한다. 이는 진형의 전진속도는 매우 느렸으나 대형이 매우 촘촘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창병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 근접전에서도 대처하기 편리했다.

단 화승총은 흑색화약 특성상 몇 번 쏘고 나면 연기가 자욱해져서 시야 확보가 전혀 안 된다는 문제가 있어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교대사격을 가해 적의 접근을 원천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4] 이 때문에 처음 몇 발만 부대 전체가 교대사격하고 이후에는 소대 단위로 개별사격하는 경우도 많았고, 연사력은 포기하고 최대한 근거리로 접근한 뒤 일제사격을 가하여 화력을 극대화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5]

3.2. 사격방법

화승총을 사용하는 병사는 흔히 12 Apostle, 혹은 단순히 Apostle, 즉 12사도[16]라고 부르는 한 번에 발사할 수 있는 정량의 화약이 들은 카트리지를 밴들리어라는 밴드에 달고 다녔다.

왜 12사도냐 하면, 그 당시는 탄의 무게가 기준이어서 1파운드의 납을 가지고 총알을 얼마나 만드느냐에 따라 총알의 크기를 계산했기 때문이다.[17][18] 표준 머스킷의 경우 1파운드(453g)의 납으로 38g의 총알을 12개 만들었다. 그러나 반드시 12개일 필요는 없고 15개를 만드는 바스타드 머스킷, 8개를 만드는 헤비 머스킷도 전부 12사도라고 불렀다.
설명도 같이 듣고 싶다면 이 영상을 보자. 한글 자막본

보다시피 장전이 매우 느렸기 때문에 보통은 12사도를 다 쓰는 경우는 없었고 당시 병사들도 5발 이상 쏘면 꽤 험한 격전을 치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예외는 있어서 뭐든지 튕겨내는 스페인 테르시오에 속한 병사라면 12발 다 쏘거나, 그보다 더 많은 횟수의 화력을 투사하거나 추가로 보급받는 일도 곧잘 일어나곤 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자호란 시기에 인조와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조선 근왕군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10발 내외를 지급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전황이 워낙 급박했던 탓에[19] 탄약을 9발 혹은 그보다도 못하게 지급 받은 부대도 흔했다. 지방 병력을 집결시키거나 보급을 완료할 시간 조차 부족했기 따문이다. 가뜩이나 탄약 여유가 아슬아슬 했던 상황에 경상도 근왕군을 비롯한 대다수는 훈련부족으로 인해 정확한 사격통제를 하지 못했으며 기병대에게 도륙 당하기 일쑤였다. 반면에 광교산 전투를 치른 전라도 근왕군은 사정이 정반대로 1인당 50여발로 추정되는 엄청난 보급량과 화력을 자랑했으나, 이마저도 부족할 정도로 광교산에서 치열한 고지방어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결과적으론 패배했다고 볼 수 있으나,[20]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청나라군에게 제대로 한방 먹인 몇 안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이들은 다른 근왕군들처럼 농민 징집병 위주로 구성된 부대로, 본래라면 오합지졸의 전투능력을 보여주어야 했으나 넉넉한 화력과 화력집중, 일부 뛰어난 포수들의 사격술을 바탕으로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군의 고위급 장수들을 사살하기까지 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21] 지휘관들의 노련한 방어 위치선정,[22] 용감하고 유연한 진두 지휘는 아군의 전투효율과 사기를 극대화시켰다. 눈과 안개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자 병사들은 자연스레 사격통제 원칙을 어기지 않게 되었다.뭐가 뵈야 쏘지 않겄냐[23] 이렇듯 다방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치열하게 저항하던 조선군이 보급의 한계로 자발적으로 철군하기 전까지, 청나라군은 마땅한 대안없이 계속해서 보병들을 갈아넣어야만 했다.

동아시아에서 운용된 화승총의 역사와 운용방식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조총 항목 참조.

4. 단점

  • 장전 시간이 상당히 길다. 화약을 두 번에 걸쳐 넣고, 총알을 끼우고, 막대기로 화약과 총알을 잘 눌러 섞어주고, 고정대에 화승을 꽂고, 화승에 불을 붙이고 사격하는 식이다. 고작 한 발을 쏘기 위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우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하니 1분에 두세 발을 쏘는 사람이 명사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24] 물론 밑에 서술된 것처럼 이 험난한 과정 중 한두 가지를 빼먹어 화승총을 못 쓰게 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실제로 임진왜란 신립이 이 점을 강조하여 화승총이 조선군에게 큰 위협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강조했고,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신립의 기병대는 늪지대에서 기병을 운용했던 탓에 그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집중 포화를 당해 전멸당한 것이지, 화승총의 성능만으로 기병을 제압했다기엔 무리가 있다.
  • 을 쏘려면 화승에 불을 붙여야 하며, 화승에 점화하기 위해서 횃불이나 모닥불을 피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야한다. 아니면 부싯돌이라도 튕겨서 불 붙이든지. 밤에 습격을 받으면 대응사격 따위는 불가능하다. 비상용,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다가 급하게 뽑아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임무 역시 휠락이 차지했다. 당시에도 현대의 라이터 비슷한 물건이 있긴 했지만 작은 상자에 부싯돌, 철편, 부싯깃을 담아두고 다니는 형태였기 때문.
  • 화승을 점화하면 꺼지지 않게 계속 일정시간마다 뽑아줘야 한다. 그래서 화승총병은 보통 팔이나 모자에 여분의 화승을 줄줄 감고 다녀야한다. 특히 30년 전쟁 당시 총병들은 모자와 상의 곳곳에 흰 화승줄이 감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에서도 철포병이 팔에 화승을 둘둘 맨 장면이 잘 구현되었고,[25] 영화 알라트리스테를 보면 화승의 불똥을 살리기 위해 가끔씩 후후 불어주는 모습이 잘 표현된다.
  • 사격 중에도 화승 관리는 계속 주의해야 한다. 발사 시에 화약접시에 고개를 처박은 화승이 폭발압에 불이 꺼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문에, 숙련된 사수는 반 접기라고 해서 화승 끈의 양쪽 끝단 모두에 불을 붙여두고 있다가 한쪽이 꺼지면 다른 쪽으로 붙이는 기법을 쓰기도 했다.
  • 타는 냄새가 솔솔 나기 때문에 매복, 기습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냄새만 나는 게 아니라 불꽃도 선명하다.
  • 이미 불이 붙어있는 화승을 상시 휴대하기 때문에, 화약고 같은 화재위험구역에서는 절대 경계 근무를 설 수 없다! 이런 임무에는 보통 휠락이 사용되었다.
  • 화약접시의 뚜껑을 수동으로 열어야 하는 구조가 대부분. 사격 전에 절차가 하나 더 생길 뿐만 아니라, 화약접시를 열어둔 채로 격렬한 움직임을 하면 점화약이 쏟아져 불발이 날 수 있다. 즉 기마 사격 같은 것이 어렵다. 이 문제는 운용해보면 금세 깨닫는 것이라, 휠락이나 플린트락에서는 격발하면 자동으로 열리는 구조를 만들어 어떻게든 개선했다.
  • 비가 오면 사용에 있어 매우 큰 지장을 초래한다. 하지만 비가 오면 거의 못쓰게 되어버린다는 단점은 이후의 수발식 머스킷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화승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비가 오면 화약 접시의 점화약이 젖어 못쓰게 되기 때문이다. 퍼커션 캡의 개발 이후에는 습기에 좀 더 강해졌지만 흑색화약 자체가 습기를 머금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밀폐식 탄피 무연화약의 발명 이후다. 그래서 무연화약과 후장식 총기의 발명 이전까지 습지에선 이 운용하기 더 좋았다. 활의 경우 아교풀을 사용하는 각궁 등의 복합궁의 경우를 제외하면 습기에 그렇게까지 크게 영향받지는 않는다. 쇠뇌도 복합궁제를 제외하면 습기와 관계 없이 운영 가능하다.
  • 후대 플린트락 시대에서도 종종 벌어진 일이지만, 가끔 병사들이 총알 넣는 장전봉(꼬질대)을 빼지 않고 사격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모든 전장식 총들은 장전봉 없으면 장전을 못한다. 당시 총알 없이 화약만 넣고 공포탄 사격할 때 방심하고 병사들 앞에 있던 교관이 발사된 장전봉에 관통상을 입는 사고도 있었다.[26] 이를 고증하기 위해서인지 개그로 풍자하기 위해서인지 찰튼 헤스턴과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한 영화 사총사에서 위그노 군에 잡힌 로슈포르가 총살을 당할 뻔 할 때 총알과 함께 장전봉이 날아오는 장면이 있다. 총신 내부의 마찰과 장전봉 자체 질량 그리고 손잡이 부분이 뭉툭한 특징 때문에 발사된 장전봉에 맞아죽는 일은 거의 없지만 아주 근거리라면 이걸로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 위와 비슷한 유형의, 사용자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사례로 깜빡하고 화약을 안 넣고 총알을 장전하는 상황. 순서를 헷갈려서 화약보다 먼저 총알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장전할 때 와딩을 대고 꼬질대로 꾹꾹 눌러서 장전하므로 거꾸로 놓고 탁탁 치는 정도로는 당연히 안 빠지며 전장식의 특성상 뒤에서 밀어낼 방법도 없으므로 한방에 사용 불능이 되어버린다. 길다란 막대에 끝부분이 와인 오프너처럼 생긴 전용 도구를 사용해서 납탄을 후벼파서 고정한 뒤 당겨서 빼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27]

5. 여담

조선의 화승총은 오버테크놀로지라고 한다.[28]

창궐에서는 이 총을 연발로 발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느린 재장전과 삼보방포, 삼수병 등 화승총의 사격특성과 당시 운용교리를 비교적 잘 재현한 추노 남한산성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사극에서는 아예 핸드캐논에도 안 쓰였을 심지를 박고 나무로 감싼 쇠막대 수준으로 재현하고 있다. 사실은 한국 사극에선 이 화승총의 작동 및 운용 방식을 제대로 고증하는 경우가 매우 적은데, 이 꼬라지가 난 이유는 예산상의 문제도 있지만 흑색화약 총기를 고증대로 만들 경우 한국에선 총포법에 걸리기 때문이다. 구식 화약병기를 무기가 아닌 골동품으로 분류해 법적 제한이 없거나 적은 미국, 유럽권과는 다른 상황. 덕분에 연구기관의 화약무기 재현도 제동이 걸리는 마당에 예산 등 여건이 제한된 방송사나 프롭제공사들이 어차피 대다수 시청자들은 신경쓰지 않는 고증요소에 굳이 법적으로까지 골치를 썩어가며 비싼 돈 들여 골몰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보다 싸고 간편한 심지총이나 시대배경이 안 맞는 프롭들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옛날 이야기고, 201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사극에서 화승총이 심지총으로 나오는 경우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한국은 플린트락같은 비교적 신형 전장식 총기를 거의 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장식 총기를 모조리 화승총으로 번역하는 뒷목잡을 일이 자주 터지는 편이다.

6. 맨패즈의 북한식 명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미사일의 제식 명칭
<rowcolor=#fff> 지대지 미사일
화성
SLBM기반 미사일
북극성
순항 미사일
금성 · 화살 · 바다수리
지대공 미사일
화승총 · 번개· 별찌
대전차 미사일
수성포 · 불새

북한에서는 휴대용 대공 미사일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화승'도 아니고 '총'도 아닌데 어째서?라는 말이 나올 텐데, 김길선의 증언으로는 김정일이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휴대용 대공 유도 무기를 '화승총계렬'로 부르라고 했다고 한다.[29]

아마도 이건 이건 북한이 처음 라이선스 생산한 휴대용 대공미사일이 소련제 스트렐라 계열 대공미사일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스트렐라'라는 러시아어 명칭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화살' 내지 '화승총'인데 북한에서는 외국어 사용을 최대한 지양하는 정책을 따르므로 원산지의 고유명칭 대신 후자의 번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번역명칭이 이후 라이선스 생산된 이글라 계열 미사일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이로 인해 '화승총'이라는 어휘는 북한에서 생산되는 휴대용 대공 미사일의 총칭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김정일이 그렇게 부르라 했으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김정일의 교시는 '스트렐라'를 저렇게 번역하라는 것이었을수도 있고, 이글라 계열까지 화승총 제식명칭을 쭉 쓰라고 내린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김길선이 '화승총계렬'이라고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후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1] 'matchlock'은 '화승(slow match)'을 사용한 '발사구조(firelock)'를 뜻한다. [2] 화승총보다 더 원시적인 개인용 화약무기인 핸드 캐논이 있었기 때문이다. [3] 대포의 정확한 개발 시기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1128년에 제작된 충칭의 다쭈 석각에 대포를 묘사한 조각이 등장하기 때문에 대체로 12세기 초에 대포가 개발되었다고 본다. [4] 대포와 마찬가지로 핸드 캐논 역시 구체적인 발명 시기가 담긴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핸드 캐논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 13세기 말 흑룡강 유역에서 발굴된 것이라 이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5] 동양권 역시 고대부터 사용한 석궁 때문에 방아쇠라는 개념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화약무기에 도입할 생각은 하지 못했던 탓에, 서양으로부터 진보된 형태의 화승총이 직도입되기 전까지는 핸드 캐논식 개인화기만이 사용되었다. [6] 영어로는 트리거 락(Trigger lock)이라고 한다. [7] 화승총이 사용되던 시기에는 창칼을 비롯한 냉병기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흑색화약 특성상 몇 번 쏘고 나면 시야 확보가 안 될 정도로 연기가 자욱해져서 교전 거리가 극히 짧았다. 특히 연기 문제는 총검이 발명되면서 냉병기의 비중이 확 줄어든 전열보병 시대 들어서도 해결되지 않아서 당시 영국군은 (비유적인 표현에 가깝긴 하지만)'적의 눈 흰자가 보이기 전까지는 사격하지 마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으며, 화승총치고는 꽤 먼 거리에서 사격을 시작했던 조선군 역시 근현대의 교전거리에 비하면 매우 가까운 편인 100m 내외에서 사격을 시작하라는 교리가 있었다. [8] 영어로는 스냅 락(Snap lock)이라고 한다. [9] 중국은 16세기 중반 왜구를 통해, 조선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화승총을 역설계하거나 항왜를 통해 기술을 전수받는 식으로 화승총을 도입했다. 다만 중국의 경우 포르투갈 등 서양 국가들과 교역을 트고 있었기에, 화약무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명청교체기에는 순발식 외에 여러 종류의 화승총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0] 당시 프랑수아 1세가 영입한 스위스 용병의 군기가 전성기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고, 방어하는 입장이었던 합스부르크군은 성벽에 의존하여 화력을 집중하기 용이했던 반면 공격하는 입장이었던 프랑스군은 전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는 등 프랑스군에게 불리한 요인이 화승총의 위력 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1] 일반적인 파비아 전투에 대한 인식은 과거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 과거에는 총기가 없었던 조선군이 일본군의 화승총 공격에 일명 '조총 쇼크'를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정설처럼 퍼져 있었으나, 현재는 전국시대를 통해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일본군의 전술적 역량을 당해내지 못한 것에 가깝다는 쪽으로 굳어지고 있다. [12] 일부에서는 대마도 영주 소 요시토시는 장인어른 관계인 고니시 유키나가랑 반전파였고 전쟁이 벌어지면 규슈 나고야 - 대마도 - 부산 항로의 중간지점이라 영주민들의 고생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조총을 헌상하였다. 이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조총이라는 무기의 간편함과 화력에 놀라워했지만 활에 비해 연사속도가 느리고 장전에 시간이 걸려 한번 쏘면 기병의 카운터가 된다는 판단 하에 무시했다. [13] 다만 왜구는 을묘왜변에서 화약무기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 조정에서는 개인용 소화기 개량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탄생한 무기가 승자총통이다. [14] 과거에 정설처럼 돌아다니던 오다 노부나가가 사격조 - 사격준비조 - 장전조 3개로 줄을 나눠서 총알을 쉴틈없이 쏟아부어 나가시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위 '삼단철포' 이야기가 불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삼단철포가 실제 역사가 아닌, 에도 시대 군기물에서 나온 소설 속 내용이기는 한데 그것과 별개로 애초에 불가능한 전술이라는 것이다. [15] 광교산 전투가 일제사격을 잘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16] 예수 12사도 할 때 그 사도가 맞다. [17] 현재도 산탄총의 구경은 아직도 이렇게 계산한다. 가량 12게이지 산탄이라고 하면 1/12 파운드짜리 납탄 지름과 같은 구경을 뜻한다 [18] 반대로 대포는 포탄을 만드는 데 몇 파운드의 납을 쓰느냐가 포탄 크기의 기준이었다. 이 역시 2차대전까지 '~파운더'라는 식으로 쓰이던 명칭. [19] 개전 초기 청나라 별동대는 빠른 기동으로 불과 사흘 만에 조선 국왕의 피난/농성거점인 강화도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조선군과 조선 조정은 이러한 비상식적인 수준의 초고속 기동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징집병 부대를 제대로 편성하기도 전에 한양을 공격당했고, 이를 요격하기 위해 나온 (사실상 유일한 방어병력인) 소수의 조선 기마대마저도 순식간에 격퇴당했으며, 한양은 결국 무방비 상태로 포위 되었다. 그 결과 인조는 강화도와 남한산성 중에서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버린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20] 결국 광교산 거점을 포기하고 철군했고, 인조와 남한산성을 구원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혈전을 벌이며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감사 이시방은 이들에게 추가보급에 실패했으며, 철군 도중에 이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인내심의 한계에 달해 자연스레 부대가 와해(탈영, 이탈)되었다. 다량의 화력을 기반으로 놀라운 전투력을 선보인 부대라 할지라도 결국 보급이 떨어지자마자 와해된다는 점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시킬 수 있는 대목. 그만큼 후기 조선은 유독 조총병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1] 그것도 일반적인 장수들이 아닌, 슈무루 양구리를 포함해 명청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렸던 베테랑 지휘관들이다. [22] 삼각의 방어고지를 향하는 길은 좁은 산길 외에 마땅히 없는 상황이었다. 산길로 쏟아지는 화망을 돌파하기 어렵다면 숲과 산을 뚫고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공격 방향과 기동수단(기병)이 제한되었고, 조선군은 이들에게 화력을 집중하기 용이했다. 즉, 청나라군의 강점인 기동성(기병)과 백병전을 모두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비록 도중에 청나라군은 '더 높은 고지'로 우회해 아래로 타격하는(명청 전쟁기에 써먹던 특기)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으나, 조선군 지휘관들의 침착한 사격 통제와 유연한 예비대 투입으로 격퇴했다. 명나라와의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청군의 백병전은, 적어도 광교산 전투에서 만큼은 조총의 화력과 지형의 불리함에 압도당해 그것이 무의미했다. [23] 본래 눈과 안개는 조총병 입장에서 그리 좋은 환경이라 볼 수 없는 게 일반적이다. 안개로 인해 고지 확보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넓은 관측거리 또한 확보할 수 없었고, 습한 안개와 눈은 비올때 만큼은 아니지만 조총의 불씨를 관리하기가 까다로워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광교산 전투에서는 이것이 장점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 근왕군들의 전투에서는 멀리서 접근하는 청나라 기병대와 보병대를 보고 긴장한 나머지 조총의 유효사거리 바깥에서 성급하게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광교산의 전라도 근왕군은 안개로 인해 적이 근접할 때까지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고, 지휘관들이 침착하게 사격통제를 지휘했기 때문에 근접한 적 보병들을 일제히 녹여버리고 사기를 꺾이게 만드는 사격이 가능했다. [24] 그 와중에 한반도의 사냥꾼들은 1분에 4~5발을 쏘았다는 기록이 결코 적지 않은데, 20초와 12~15초의 차이가 많은 듯 적고, 적은 듯 많은 차이라 화력이 33~67% 상승했다 볼 수 있어 나선정벌 시기부터 쭉 조선의 포수들을 많이 요구했다. [25] 그 외에도 총병이 총을 한 번 쏜 다음에 재장전할 동안 활과 투석으로 원거리를 보조하는 것도 나왔다. [26] 플린트락 머스킷이긴 하나, 영드 샤프 시리즈 1편 샤프의 소총수에서도 패트릭 하퍼가 꼬질대를 넣고 사격해 프랑스군을 관통상으로 사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27] 이건 총알이 총신과 꽉 맞물리는 경우에 해당하는 내용이고, 총알의 직경이 총구보다 작은 경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총알이 작으면 명중률이 좀 떨어지고 총구를 조금만 아래로 향해도 총알이 굴러나와 아래를 조준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으나 재장전이 월등하게 빨라져서 일부러 작은 총알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 숙련병들은 초반에는 꽉물리는 총알을 쓰고 탄매가 껴서 장전이 어려워지는 후반부엔 일부러 작게 만든 탄을 장전했다. [28] 세 개중 중 첫 번째는 모형 플린트락 머스킷에다 정작 부싯돌 격발기는 그대로 둔 채 약실과는 무관한 영 이상한 위치에 대강 도화선 박아놓고 화승총이라 우기고 있고, 두 번째는 대놓고 화승은커녕 플린트 락 머스킷도 아니라 훨씬 더 미래에나 나올 수 있는 볼트액션 소총을 어디서 구해와서 장난질해놨고, 세 번째는 아예 모양만 그럴싸한 핸드캐논. [29] 해당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