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피 총알 발전사 | |||||
12사도/ 종이포 | 핀파이어/ 종이탄피 |
림파이어/ 후장식 종이포 |
센터파이어 | 무연화약 | 림리스 |
? | 1830년대 후반 | 1850년대 중반 | 1860년대 후반 | 1880년대 후반 | 1890년대 초반 |
1. 개요
전장식 머스킷에 쓰이던 총알의 휴대방법중 하나로, 사진속의 17세기 화승총병의 혁대에 매달린 12개의 가죽 또는 나무로 이루어진 통에 1회분에 해당하는 납탄과 화약을 담아 둔것이 바로 12사도이다. 멀리보자면 종이포나 종이탄피의 직계조상뻘이며, 현대의 탄창이나 탄띠란 개념은 여기서 나왔다고 봐야할 정도다. 거기다 반드시 12발을 들고 다닌것도 아니여서 "그 정도 들고 다녔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2. 발생 배경
12사도가 탄생하기 전, 전장식 화승총을 장전한다는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었다. 화약이 담겨진 가죽 주머니와 계량컵으로 하나하나 재가며 넣어야하는데, 이게 전장에서 도저히 할 짓거리가 못되었다.그렇다고 막 부어버리면 탄두가 채 총구를 떠나기도 전에 총강 내 압력이 너무 올라가서 총열이 폭발해서 분대나 일렬로 서있는 주변 전열보병들을 몰살시키는 파편 수류탄이 되거나, 적게 넣으면 아예 발사 자체가 안되고 탄알이 총열내에 고착되어 총열을 교체해야 하거나 발사되더라도 위력이 너무 약해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매우 지대한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화약을 양에 맞게 미리 통에 넣은 후 야전에서 통의 뚜껑을 열고 통의 내용물[1]을 총구에 넣고 꼬질대로 쑤신 후 발사하는 것인데, 평균적으로 12개면 충분했기에 병사들은 12개를 들고다녔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수와 일치한다 해서 12사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12발 뿐이라서 적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쓰일 적에는 한 발마다 다시 새 통을 열어 장전해야 하고 장전시간도 오래 걸렸기 때문에 12발을 모두 다 쓸 정도면 아주 격렬한 전투였다.[2][3]
[1]
35g에 해당하는 납탄과 적당한 화약.
[2]
12발 이라는 수가 전장에서 부족해지기 시작한건 근대에
니들건이 개발된 이후이다.
[3]
장교나 부사관에 의해서 통제가 잘 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다. 통제가 안될경우 효과가 없을게 뻔한 먼 거리서 부터 마구잡이로 쏴대기에 금방 소모한다. 참고로 병자호란때 대패한
쌍령 전투에서 조선군 조총병이 보급받은 총알과 화약은 10발 분량인데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마구잡이로 쏴서 금방 탄약을 소모하고 탄약 보급을 받던중 조선군 진지로 돌입한
청나라
팔기군에게 조선군이 붕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