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3:50

아카시 모토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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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대만총독
아카시 모토지로
파일:0221_1.jpg
<colbgcolor=#d71718><colcolor=#fff> 출생 1864년 9월 1일
지쿠젠국 나카군 케고촌 다이묘정
(현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주오구 다이묘정)
사망 1919년 10월 26일 (향년 55세)
후쿠오카현
재임기간 제7대 대만총독
1918년 6월 6일 ~ 191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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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d71718> 신장 155cm 이하[1]
작위 남작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89년 ~ 1919년
최종 계급 대장
주요 참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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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반기2.2. 러일전쟁 당시 첩보 활동2.3. 대한제국에서의 활동2.4. 대만총독2.5. 사망
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제7대 대만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러시아 내외에서 첩보 활동을 벌여 일본이 승전국이 되는데 기여했다.

2. 생애

2.1. 초반기

1864년 후쿠오카번의 번사 아카시 스케쿠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오사카 오인중의 일원으로 유명한 아카시 테루즈미의 후손이라 한다. 이후 육군 유년학교를 거쳐 1883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 1889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다. 임관 후 헌병대[2]에 소속돼 정보 수집을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파견된 이후 마닐라에서 관전무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을 참관했다. 이후 1901년 프랑스로 주재무관으로 근무하다 190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주 러시아 일본 공사관에 부임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양국 사이에 정보 협력이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아카시는 영국 비밀정보부의 스파이였던 시드니 레일리 (Sydney Railey)와 친분을 맺는다. 이때 아카시의 요청으로 레일리는 1903년 건축용 목재 무역상으로 위장해 뤼순으로 이주한후 현지 러시아 사령부의 신뢰를 얻어 러시아 군사 동향과 뤼순 요새 도면을 얻어오기도 했다.

2.2. 러일전쟁 당시 첩보 활동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아카시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 스톡홀름에 자리를 잡고 러시아 제국 내에서 차르에게 불만이 커져가던 소수민족들과 반정부 세력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실권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결단으로 일본군은 아카시에게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250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엔[3]을 지급해 러시아 내분 공작을 획책했다.

이후 아카시는 러시아 내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이나 불평분자 등 폴란드, 핀란드, 크림 반도, 투르키스탄 등지에 분리주의 세력들과 접촉해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독려했다.

러시아 혁명 정당 에스엘의 브노 아제프, 폴란드 국민 동맹 도모프스키, 바리츠키, 사회혁명당 차이코프스키, 조지아당 데카노지, 폴란드 사회당 좌우 양파 # 가폰 신부나 공산주의 사상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4] 아나키즘 사상가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 폴란드(당시 프리비슬린스키) 민족주의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핀란드(당시 핀란드 대공국)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소설가 막심 고리키, 반러시아 운동 지도자 카스트레인, 스웨덴 육군 장교 아미노프, 그루지야(조지아)·라트비아·벨로루시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일본의 지원을 시작으로 세력을 일군 이들은 정치적으로든 아니면 개인적인 대의를 품어서든 일본의 목적대로 러시아 내에서 공화주의와 노동자를 위시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한다.[5]

아카시의 공작이 성공하여 단기전을 꾀한 일본 입장에서 제정러시아 내부의 이런 반체제 인사들이 내부에서 계속 종전을 주장하면서 입지가 강화되는 것이 큰 도움되고, 이토 히로부미는 아카시 혼자 일본군 10개 사단의 일을 했다고 찬양하였으며 독일제국 빌헬름 2세아카시 한 명이 일본군 20만명에 필적하는 전과라고 하였다. 이러한 공작을 하면서 일본정부 공작금은 73만엔을 지불하였고 27만엔 정도가 남았는데 러일전쟁 승리 후에 일본 정부에서 아카시를 계급 영전과 동시에 포상금으로 남은 공작금을 아카시에게 수여하려고 하였지만 아카시는 정중하게 거절하였고 남은 공작금을 일본 정부에 반납하였다. 이후 아카시는 그 당시에 경험을 토대로 러시아에 대한 교란공작 기법을 <낙화유수(落花流水)>라는 자신의 저서에 남겼는데 이 책은 1930년대 일본군 정보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아카시는 유럽에 외교관으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유럽의 외교관들이 저자하고 사귀었다간 공작당할지 모른다며 아카시를 회피하여 제대로 일할 수가 없었다.

2.3. 대한제국에서의 활동

러일전쟁 이후 아카시는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가 된 대한제국으로 파견돼 초대 한국통감부 경무부 경무총장 겸 주차헌병사령관으로 부임받아 조선헌병대를 이끌고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을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13도 창의군을 이끌던 허위를 고문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대한제국에서 부임하던 시절 일본 극우 단체 흑룡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들의 많은 정치적 목표들을 확실히 나누었어도 그의 이름은 그들의 회원 명단에 나타나지 않았고 자신이 사실 회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과 함께 대한제국에 머물러 대한제국 식민지화에 나섰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 헌병사령관이 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과 함께 무단통치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1914년 49세에 중장으로 진급하고 일본육군 참모차장에 임명되어 조선에서의 임기를 끝낸다.

2.4. 대만총독

1918년 일본육군 제6사단장에서 그동안의 공로로 대만 총독(친임관)으로 임명되고 1개월 후 대장으로 진급한다. 대만에서는 조선과는 달리 유화적으로 통치했다. 1년 4개월 대만 총독으로서 짧은 임기 동안 대만의 전기 보급을 위해 대만전력주식회사를 세우고 일월담(日月潭) 수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또한 오늘날에도 대만 최대 은행인 화남은행 설립을 주도하고, 철도 화물 운송을 제대로 하기위해 종관선 해선을 부설하는 등 여러 사회 기반 시설들을 적극적으로 대만에 도입하였다. 이렇게 주도한 정책 사업들 중 아카시가 추진한 대만에 거대한 공로는 두 가지인데 1만 6천 마일(26,000km)이나 되는 가남 관개망(嘉南大圳, 자난다춘) 정비였다. 관개망 정비에는 당시 총독부 1년 예산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는데, 아카시는 직접 일본 국회를 방문하여 촉구했고 1918년 2천 6백만 엔의 여분의 할당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일본 내각의 법 개정을 촉구하여 대만인도 일본인처럼 제국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한 것이다.

2.5. 사망

이렇게 대만 총독직을 원활히 수행하며 다음 총리로 큰 기대를 받고 있었지만 대만 총독 재임중 잠시 고향인 후쿠오카를 방문하다가 지병으로 사망[6]하였는데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대만에 안장해달라고 하며 대만에 묻힌 유일한 대만 총독이 되었다.

그의 묘지는 타이베이시에 세워졌는데 일제 패망 이후에도 계속 자리를 차지하다 1999년 신베이시 싼즈(三芝)에 있는 푸윈산 기독교 묘지로 재안치됐다.

3. 대중매체에서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서 러일전쟁의 숨은 공로자이자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2024년 9월 14일 대구 KBS에서 그의 의병 활동을 다룬 다큐드라마인 '왕산 허위'에서는 김인우가 원어로 연기했다.


[1] # [2] 당시 일본 육군 헌병은 해외공작 및 첩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도 활동했다. 나치 독일 게슈타포나 군사정권 서절 한국의 국군보안사령부와 같은 위상. [3] 오늘날 가치로 400억엔(약 4151억6601만원) [4]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그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사 아카시가 레닌도 접촉하여 지원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하여(레닌과의 회담은 아카시 모토지로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편) 레닌은 지원받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다. [5] # # # # 한반도 정보공작 설계한 日헌병대장 '러 파괴공작서' 첫 번역 #, 일본의 러시아 후방교란 작전과 도거뱅크 사건을 통해 본 러일전쟁의 재해석.김종헌 # [6] 당시 유행중인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설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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