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아마데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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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21대, 23대, 24대 |
AS 로마 주장 | ||||
귀도 마제티 (1939~1943) |
아메데오 아마데이 (1943~1948) |
세르조 안드레올리 (1948~1950) |
SSC 나폴리 역대 주장 | ||||
에지디오 디코스탄초 (1948~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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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아마데이 (1951~19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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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페사올라 (1953~1960) |
아메데오 아마데이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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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메데오 아마데이 Amedeo Amade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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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7월 26일 이탈리아 왕국 라치오주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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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3년
11월 24일 (향년 92세)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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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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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3cm | 체중 72kg |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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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선수 |
AS 로마 (1936~1938) 아탈란타 BC (1938~1939) AS 로마 (1939~1948)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48~1950) SSC 나폴리 (1950~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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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SSC 나폴리 (1956~1959) SSC 나폴리 (1959~1961) 루케세 1905 (1963) 이탈리아 여자 대표팀 (1972~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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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3경기 7골( 이탈리아 / 1949~1953)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번호 | AS 로마 - 9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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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마데이가 중원에서 볼을 컨트롤하는 것은 골을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귀도 마제티
귀도 마제티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2.1.1.1. AS 로마
아마데이는 로마에서 태어나 AS 로마에서 프로 데뷔를 한 선수로 아마데이의 아버지는 제빵사였다. 아마데이의 부모는 어린 시절에 아마데이가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아마데이는 몰래 로마 구단의 입단 테스트를 치렀고 여기에 합격해 로마의 선수가 되었다.아마데이는 1937년 5월 2일에 있었던 ACF 피오렌티나전에서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데뷔했는데 당시 아마데이는 만 15세로 세리에 A 최연소 데뷔 기록[2]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1주일 후에 루케세 1905를 상대로 아마데이는 첫 골을 기록했고 이는 아직도 세리에 A 최연소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아마데이는 1938년, 주세페 보노미의 이적에 대한 대가로 아탈란타 BC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로마로 돌아와서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로마 귀환 당시 아마데이는 자리를 잘 잡지 못하던 아르헨티나 출신 센터 포워드 프란시스코 프로비덴테(Francisco Providente)를 대신해 센터 포워드로 뛰게 되었다. 그리고 1940-41 시즌에 그는 18골을 넣어 확실한 로마의 센터 포워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로마에 역사적인 1941-42 시즌, 당시 주장이었던 귀도 마제티를 필두로 아마데이는 AS 로마의 창단 후 세리에 A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43년부터 아마데이는 마제티에게 주장 완장을 물려받아 5년간 팀을 이끌었다. 아마데이는 로마 프랜차이즈 내 역대 득점 3위[3]를 기록했던 초창기 AS 로마의 스타이자 에이스였고 그 역시 항상 로마에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로마와 아마데이의 결별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2.1.1.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말았다. 문제는 바로 AS 로마의 재정.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로마는 심각한 재정 적자에 허덕였고 결국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아마데이를 이적 시장에 올려놓게 되었다. 아마데이에 관심을 보인 팀들은 여럿 있었지만 결국 아마데이는 가장 좋은 카드를 내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팔리고 말았다. 인테르는 아마데이의 이적 제안에 현금과 선수 2명을 내놓았고 로마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아마데이는 타의로 팀을 떠났지만 로마와의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고 인테르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아마데이가 인테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경기는 1949년 11월 6일에 있었던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였다. 당시 인테르는 AC 밀란에 전반 19분 시점부터 1:4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테르는 아마데이의 해트 트릭을 앞세워 결국 6:5의 대역전극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4]
2.1.1.3. SSC 나폴리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2시즌을 보낸 아마데이는 1950년부터 SSC 나폴리에서 6시즌을 보냈다. 아마데이는 1953-54 시즌까지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며 나폴리에서도 스타로 자리매김했고 1952-53 시즌엔 당시 나폴리의 최고 성적인 세리에 A 4위로 시즌을 마쳤다.2.1.2. 국가대표
아마데이는 1949년부터 이탈리아 대표팀 경기에 뛰기 시작했으며 당해 3월 27일, 스페인을 상대로 대표팀 첫 출전과 첫 골을 기록했다. 이탈리아는 아마데이의 골을 포함해 이 경기에서 스페인에 3:1로 승리를 거뒀다.[5]아마데이는 1950년 월드컵에도 참가했고 이탈리아의 두 번째 경기였던 파라과이전에 출전했다.
2.2. 감독
아마데이는 1956년 1월 25일, 에랄도 몬첼리오를 해임하고 공석이 된 SSC 나폴리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아마데이가 나폴리를 지휘할 때 큰 성과는 없었고 3번에 걸쳐 재임과 해임이 반복되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아마데이는 빠르고 강력하며 중원에서 공을 소유하고 전진하는 스타일의 센터 포워드였다. 여기에 위치 선정 능력, 정확한 바이시클 킥을 포함한 골 결정력으로 현역 시절엔 이탈리아의 최고급 센터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다.로마 시절엔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로마의 8번째 왕[6]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4. 어록
5. 우승 기록
5.1. 대회 우승
5.2. 개인 수상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이 기록은 2016-17 시즌에
제노아 CFC 소속이었던
피에트로 펠레그리가 경신했다.
[3]
1위는 당연히
프란체스코 토티, 2위는
로베르토 프루초이다.
[4]
마시모 모라티는 이 경기가 열릴 당시 4살이었지만 나중에 이 경기와 아마데이에게 상당한 임팩트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5]
여담으로 이 경기는
수페르가의 비극 이전의 마지막 이탈리아 대표팀의 경기로
그란데 토리노의 멤버들인
발렌티노 마촐라,
마리오 리가몬티 등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이기도 하다.
[6]
호베르투 파우캉의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원조는 아마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