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나르 노르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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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24대 |
AC 밀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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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로 토뇬 (1953~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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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나르 노르달 (1954~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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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리드홀름 (1956~1961) |
군나르 노르달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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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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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군나르 노르달 Gunnar Nordah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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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닐스 군나르 노르달 Nils Gunnar Nordah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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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2년
10월 8일 스웨덴 발데마르스비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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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5년
9월 15일 (향년 75세) 이탈리아 쿠카로몬페라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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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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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5cm | 체중 90kg |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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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회르네포르스 IF (1937~1940) 데게르포르스 IF (1940~1944) IFK 노르셰핑 (1944~1949) AC 밀란 (1949~1956) AS 로마 (1956~1958) |
감독 |
AS 로마 (1958 / 선수 겸 감독) AS 로마 (1958~1959) 칼스타드 BIK (1959~1961) 데게르포르스 IF (1961~1964) IFK 노르셰핑 (1967~1970) IF 사브 (1971~1973) IK 슬레이프너 (1974) 외스테르스 IF (1975~1976) AIK 포트볼 (1977~1978) IFK 노르셰핑 (1979~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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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33경기 43골[1] ( 스웨덴 / 1942~1948) | |
가족관계 | 형 크누트 노르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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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노르달의 기록을 깨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곤살로 이과인
스웨덴의 前 축구선수.곤살로 이과인
요즘 축구팬들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스웨덴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즐라탄 이전에 군나르 노르달이 존재했다. 커리어의 전성기는 세리에 A의 AC 밀란에서 보냈으며,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 3위에 랭크되어 있다. [2] 또한 곤살로 이과인 이전에,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 골[3] 기록 보유자이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왕 기록(5회)과 세리에 A 외국인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스웨덴과 북유럽, AC 밀란과 세리에 A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가운데 한 명이었던 셈이다. 스웨덴 국가대표로서는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 등과 함께 ‘그레-놀-리(Gre-No-Li)’ 삼총사라 불리며 당대 최고의 3각 편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2. 클럽 경력
2.1. 스웨덴 리그
1940년 스웨덴의 데거포스 IF에서 데뷔하였고, 1944년에는 노르쾨핑으로 팀을 옮겨 활약했다. 두 팀을 거치며 알스 베스칸 4회 우승과 스웨덴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4차례의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하였다.2.2. 세리에 A
전설의 ‘그레-놀-리(Gre-No-Li)’ 삼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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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로서는 1942년부터 차출되어 1948년까지 뛰었고, 33경기에 나서서 43골을 터뜨리는 등, 경기당 1골을 넘어선 괴물같은 득점력을 선보였다. 이러한 활약 속에서 1948 런던 올림픽에서는 득점왕과 대회 우승을 동시에 이뤄냈고, 이것이 세리에 A의 AC 밀란으로 이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의 규정 상, 프로 팀이 소속으로는 국가대표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고[6], 프로 축구 팀인 AC 밀란으로 이적한 1949년부터는 국가대표로 차출되지 못했고, 1958년 스웨덴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는 활약하지 않아 조국이 준우승하는 것을, 필드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아쉬움이 있다.[7]4. 플레이 스타일
185cm라는 당시로서는 장신에 속하는 키를 가진데다가, 90kg의 육중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공격수로서, 전형적인 파워 포워드였다. 큰 키와 우월한 피지컬을 가진 공격수인데다가 스피드까지 빠른 편이어서, 당시 수비수들이 쉽게 막아낼 수 없는 유형의 공격수였다.
5. 기록
5.1. IFK 노르셰핑
- 알스벤스칸 우승 4회
- 스웨덴 컵 우승 1회
5.2. AC 밀란
- 세리에 A 우승 2회
- 라틴컵 우승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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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 밀란 최다 득점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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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국적 | 골 |
1 | 군나르 노르달 | Gunnar Nordahl | 221 | ||
2 | 안드리 셰브첸코 | Andriy Shevchenko | 175 | ||
3 | 잔니 리베라 | Gianni Rivera | 164 | ||
4 | 조제 알타피니 | José Altafini | 161 | ||
5 | 알도 보피 | Aldo Boffi | 136 | ||
6 | 필리포 인자기 | Filippo Inzaghi | 126 | ||
7 | 마르코 반 바스텐 | Marco van Basten | 125 | ||
8 | 주세페 산타고스티노 | Giuseppe Santagostino | 106 | ||
9 | 카카 | Kaká | 104 | ||
10 | 피에리노 프라티 | Pierino Prati | 102 |
5.3.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 1948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
5.4. 주요 개인 수상
- 스웨덴 알스베스칸 득점왕 5회
- 이탈리아 세리에 A 득점왕 5회
- 1947년 스웨덴 올해의 선수
- 1948년 런던 올림픽 득점왕
- AC 밀란 명예의 전당
[1]
대표팀 역대 득점 3위.
[2]
291경기 225골. 1위는
실비오 피올라, 2위는
프란체스코 토티
[3]
35골
[4]
1949년부터 1957년까지 개최된 대회로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프로팀이 1팀씩 출전해서 겨루는 방식이었는데 챔피언스 리그가 출범하기 전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던 유럽 대항전 대회였다.
[5]
그가 떠난 이후 AC 밀란이 1957/58 시즌에 유로피언 컵 결승까지 진출하여 준우승을 이뤄냈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조금만 더 AC 밀란에 남아있었더라면 최소 준우승은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6]
1948년에 그가 뛰었던 스웨덴 리그는 아마추어 리그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올림픽 출전이 가능했다.
[7]
다만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 등 그의 스웨덴 국가대표 동료들은, 군나르 노르달과 같은 세리에 A의 AC 밀란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하여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이 두 선수는 프로 축구 팀인 세리에 A의 AC 밀란에서 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는데, 이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너무 약체화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스웨덴 축구 협회의 규정 변경을 통한 것이었다. 참고로 군나르 그렌은 1958년 당시 스웨덴 2부리그에서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