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0:17:24

전쟁론

1. 개요2. 내용
2.1. 1 권
2.1.1. 전쟁의 '신비롭고도 역설적인' 삼각형
3. 평가4. 내용5. 영향6. 초판본7. 번역 문제

1. 개요

Vom Kriege / On War
전쟁은 1) 자국의 의지를 상대 국가에게 강요하기 위한 폭력적인 행위이며, 2)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전쟁은 경이로운 삼위일체이다.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이자 군사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쓴 책이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고, 사후에 그의 아내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와 처남 프리드리히 폰 브륄 그리고 부하였던 프란츠 아우구스트 오에첼 소령이 클라우제비츠의 노트와 메모를 보고 보완하여 펴냈다. 말하자면 미완성 유고 묶음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의 전법을 학문적으로 일반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서 강조한 것은 '무게중심(重心; center of gravity)'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의 중심을 공략하는 데 집중해야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자면 단순히 한 전장에서 전력을 집중하는 국지적 개념이 아니라, 전략수립 단계에서 승리를 달성하기 위하여 무엇을 공격하는 것에 집중할 것인지를 확정하고 이를 작전술 단계에 반영하는 것이다. 이때 적의 무게 중심은 적의 통수권자(왕, 대통령, 사령관 등)나 지휘부이거나 적의 병력 또는 적의 결전병기, 부대 또는 적의 전쟁수행능력 전반일 수 있다.

나폴레옹의 전훈을 분석한 클라우제비츠는 그가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궁극적인 이유로는 무게 중심을 적 수도 점령에 두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모스크바까지의 진격보다는 러시아의 군대 자체를 무게중심으로 설정하여 전투력을 섬멸하였다면 러시아 전역에 또다른 국면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전에서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관하여 1차 이라크 전쟁의 무게중심을 이라크의 군병력의 섬멸에 두었으나, 결국 이라크 군의 사실상 붕괴 이후에도 해당 전역에서 미국이 의도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었다. 미국은 2차 이라크 전쟁에서 후세인 정권 자체를 섬멸하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하여 작전을 수행했으며, 바로 이부분이 바로 무게중심의 개념이 반영된 전형적인 예시이다.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미국은 무게 중심을 알카에다의 테러 및 전쟁 수행능력을 제거하기 위한 아프카니스탄 정권의 전복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로 전략 목표를 수정하며 전쟁을 수행 하였으나, 이후 복잡한 국제정세와 테러리즘의 변화에 따라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였음에도 명확한 목표가 될 수 있는 무게중심을 찾지 못하고 결국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러한 전쟁의 본질적 속성을 무게중심 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에는 큰 의의가 있다.

동 시기에 각광받던 앙투안 앙리 조미니(전쟁술의 저자이자 나폴레옹의 군사 참모 역임)의 저술은 '결정적 지점(decisive point)'을 강조했다. 적이 결집하거나 지형상 우세를 점하기 이전에 결정적 지점을 확보하는 것으로 군사 운용에서 제약 조건인 병력과 보급, 화력 규모, 지형 같은 여러 변수를 나폴레옹의 용병 방식으로 해석, 설명했다. 이는 나폴레옹의 전법을 실제 전장에서 구현하기를 원했던 유럽 군사 전문가들에게 실용적인 연구로 애용되었다.

2. 내용

2.1. 1 권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이란 결투의 확장으로, 수천 또는 그 이상의 인간이 벌이는 '단체 결투'와 같다. 클라우제비츠는 "합리적"으로 전쟁을 재단함으로써 전쟁의 위협[1]을 피하려는 행동을 노력의 낭비라고 비판한다.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마치 결투라는 행동이 참으로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반드시 일어나며 [2] 전쟁 또한 마치 결투 처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선가는 반드시 발생하며, 일단 발생하면 반드시 끝을 향해 간다[3]고 단언한다.

전쟁이 비이성적이라서 일어난다고 판단하는 것 또한 클라우제비츠는 부정한다. (물론,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미치광이 말곤 없을 것이므로) 분명 전쟁에는 이유가 있다.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이 성립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적대성"인데, 이 적대성에서 문명인과 비문명인의 차이라곤, 전자의 경우 적대적인 의도에 기반하며 후자의 경우 적대적인 감정에 기반한다는 것 뿐이다. 그냥 적대감을 가지냐, 적대적 목적을 가지고 적대감을 가지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 이 두 부류의 사람 중 누가 더 많든간에 적대성이 존재하는 한 전쟁을 위한 조건이 달성되므로, 이성적으로 전쟁을 방지하려는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4]

클라우제비츠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전쟁의 목적은 언제나 적의 무장 해제, 곧, 적대 대상이 적대성을 표출할 수단을 박탈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능한 빨리 상대를 무력화 시켜야하니, 언제나 최대 무력의 즉각적인 동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치 결투라는 것이 총이나 칼을 뽑는데 시간이 좀 걸릴 뿐 승부는 단판에 나듯 전쟁도 본래는 그래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수정이 행해지게 되므로, 지연이 발생하게 되며 이것이 전쟁과 개인 결투의 중대한 차이점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전쟁의 특이성은 일반적인 결투와 다르게, 전쟁은 결코 독자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전시에 돌입하게 되는 이유는 상당히 복잡한 배경을 가지기 때문에 그 "이유"가 종촉되기 위하여 계속 수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요컨데, 집단 결투에 참가한 사람마다 서로 결투하는 이유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총칼 뽑는데 지연이 당연히 발생한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1대1 단판 결투와 달리 한번에 끝나지를 않는다. 클라우제비츠가 이미 설명하였듯, 상대가 적대성을 표출할 수단을 박탈하는 것이 전쟁을 종결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전쟁이란 집단 결투에서는 이것이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쟁이 일단 종결되어 둘 중 하나가 무장해제 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상황 종료를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해당 국면에서만 일시적으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기에 다른 전쟁으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특성은 전쟁의 구성 요소에 대중의 적대성만 있는 것이 아닌 그 대중을 지배하는 정치의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강화되는데, 대중의 적대성이야 양측에서 둘 중 하나가 죽어버리면 그대로 끝이지만 정치의 목표는 그렇지 않으므로, 정치적 이유가 전쟁의 진행을 지연시킨다.

물론, 본질은 엄연히 집단 "결투"이므로 지연은 원천적으로는 불가능해야 맞다. 그러므로, 클라우제비츠가 보기에, 전쟁에서 "방해"가 발생하여 "지연"이 발생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군사적인 행동이 이루어짐에 따라 전쟁은 반드시 점점 격화되며 더 빨라지게 되어있음에도, 전쟁의 당사자 양 측간의 양극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착착 맞아 떨어져서 에스컬레이션 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에서 군사적 행동이 "중단" 되는 것은 오직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고민하여 "수를 미루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승리해야하므로 승리를 위한 최선을 논하게 되고, 이론상의 극단적인 최선인 단판승부는 실제 전쟁 환경의 오만가지 요소의 작용으로 인해 방해를 받음에 따라, 전쟁의 페이스는 매우 느려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지연이 일어날 경우, 전쟁에서 일으킨 "실수"를 수습하는데 더욱 유리해지며, 장군들은 지연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대담 해져서, 극단적인 상황보다는 확률적으로 합리적이라 추론되는 상황을 가정하기 시작하며, 서로 이렇게 머리를 굴리다보니 전쟁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지리멸렬해보이는 요소들을 논한후,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합리적 판단과 필연적인 판단의 상호작용이 이끄는 지속적인 (그러나 지리멸렬한[5]) 변화라 결론을 짓는다. 즉, 당장 상대를 죽여서 끝내야하는 결투임에도, 계속 상황이 변화하면서 지연, 혹은 차연이 반복되는 것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이성적으로나 비이성적으로나 단순한 잣대로 규정짓고 분석하려는 행동은 클라우제비츠가 보기에 시간 낭비이다.

2.1.1. 전쟁의 '신비롭고도 역설적인' 삼각형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전쟁이란 지극히 자명해 보이면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괴현상이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 설명한다. 1권 내내 논한 것들을 정리하며 클라우제비츠가 말하기를, 전쟁이란 정치적 목표, 대중의 폭력성, 우연성(불확실성)의 역설적 삼각형(paradoxical trinity)으로 구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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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의 마그눔 오푸스인 역설의 삼각형

물론, "불확실성" 곧, 전장의 안개(fog of war)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삼각형은 사실 거짓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존재하게 만들어야만 하며, 그것을 담당하는 존재를 클라우제비츠는 제복을 입은 사람으로 비유한다.[6][7]

이렇게 "제복을 입은 존재"는 불확실한 것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을 도출하여 판단, 허구의 개연성을 창출한다. 그리고 이 가상의 개연성이, 정치성폭력성에 결합되어 가상의 전쟁 삼각형을 도출하여 전쟁이라는 이해 불가능한 괴현상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클라우제비츠는 총론인 1권에서 전쟁이란 곧 속이는 것이다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가 보는 명장은 통제하기가 힘든 우연성에 강한 임기응변이 능숙한 장군이다. 즉각적으로 매 순간 저 삼각형을 다시 성립시켜 판단을 해내는 장군이 승리하는 장군이라는 것이다.

덤으로, 이 삼각형은 전쟁 상황, 혹은 전쟁에 준하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한 극단적인 결과의 도출이 이루어지게 되는 조건이 성립하였는지 통찰하는 도구로도 사용 가능하다. (1권 도중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전쟁의 일면을 살핌으로써 전쟁의 형태와 흡사한 일상의 오만가지 현상 또한 살필 수 있을 것이라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재미있는 점은 이 삼각형에서 사실 개연성[8]의 실체는 "우연성"이며 절대 개연성이 아님에도, 대부분의 경우 마치 이것이 일반적인 "변증법적 삼각형 모형" 처럼 오른쪽 방향으로 확장될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저 "개연성"을 임의로 부여하게 만든 주체는 대중의 폭력성과 정치의 정치성이기 때문에, 1권 내내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참 편리한) 정반합의 반복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클라우제비츠가 제시하는 모델은 헤겔의 정반합 모델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으론, (전쟁으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변화란 저렇게 매 순간 일시적으로 허구의 삼각형이 성립되여 변화가 이루어진 후 "중단"되어버리며 일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것이지, 점진적이고 연속적이며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변화가 아니다.[9] 그렇기 때문에 클라우제비치는 전쟁을 재단하려는 행동을 보고 노력의 낭비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과 정치의 애매한 연결선"이 전쟁에 있어 항상 가장 취약한 부분이 된다.[10] 이것이 끊어지게 될 경우 폭력성은 방향을 상실할 것이며, 그것은 대중과 양복입은 사람과 제복 입은 사람간의 연결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전쟁이 성립되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이 연결선이 매우 취약하므로, 전쟁을 회피하려는 시도도 가능하다 해석 가능한 부분인데, 결국 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나타나 개연성을 부여하면 삼각형이 성립하여 전쟁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3. 평가

전쟁론은 발표 당시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로 취급되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발표 후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조차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였다. 이는 군인이 읽기에는 글이 너무 철학적이고, 그렇다고 군사 분야와 무관한 일반인이 읽기에는 너무 전문적이라 상식적인 가르침으로써도 이해하기 어려우며, 학술가들이 읽기에도 문리가 자결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서술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인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전쟁론의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였고, 이미 저술한 부분의 퇴고도 부분적으로만 된 상태이기에 글 자체가 미완성이다. 저자인 클라우제비츠가 "2, 3년이면 다 읽히고 잊힐 책을 쓰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한다."라며 학문적 각오로 자신의 반평생을 들여 집필한 데다가, 그가 집필 도중 생각을 바꿔서 다시 쓰던 도중 콜레라로 갑작스럽게 요절해버렸기 때문이다.

후대의 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주석을 덕지덕지 붙여가며 편집해야할 판인데, 클라우제비츠가 활동한 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동서 어디에도 전쟁론의 적절한 편집을 감히 주장할 만한 대단한 편집가가 나온 바가 없으니, 전쟁론은 요컨데 주석은 커녕 후대 학자들의 편집조차 못 받은 중국 고서를 원문 그대로 읽는 수준의 독해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그리스 고전 철학 및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에, 고전 그리스 철학 및 문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으면 오독하기 딱 좋다. 게다가, 고대 철학으로 만이 아니라 당대 유럽 철학과 각종 학문적 기본 소양까지 다 필요하다.[11]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배경 지식 자체가 굉장히 까다로운 중에, 각 권마다 편집 양식이 따로 놀고 있고, 클라우제비츠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을 총론을 다루는 1권조차도 철저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논문을 지향하는 듯한 편집과 정면 배치되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튀어나오는 결론, "괴현상을 신비하게 설명해내는 역설적 삼각형"으로 이어지는 등, 문리가 좀 틔였다 느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기에 딱 좋은 저서이다.[12]

얼마나 읽기 어렵고 읽더라도 해석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전쟁론이 독일어로 쓰여진 책이란게 믿겨지지 않을 지경이다. 분명히 딱딱하고 재미없고, 에누리 없이 철저하게, 문법 자체에 모종의 방향 표시까지 내포되어 있어 군대 최적화 언어란 별명이 있는 독일어로 쓰인 책인데 읽다보면 뭔 중국 고서를 라틴어로 읽는 것 같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13]

그러나, 난해한 저서란 문제에도 불구하고 헬무트 폰 몰트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의 애독서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에 전쟁론의 위상이 널리 퍼지게 되는데, 이러고나서도 도통 알아먹기 어려운 난해함 때문에 타국에서는 물론이고 본국에서조차 저자의 의도를 다르게 받아들이거나 요상하게 확대 해석하는 폐해가 있었다.[14]

하지만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본질을 다룬 집필 방식은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그가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유용하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기술도 지식도 진보하고 전쟁의 양상도 계속 바뀌었지만 전쟁의 본질도 실존도 변한 거 없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전쟁론은 병법 그 자체로 불려 손색 없는 병법서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있는 것이다.

비교한다면, 앙투안 조미니의 전쟁술은 과학적 계량과 이성적 판단이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술은 어느정도 직감과 유연성이며, 훗날 후학들 사이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참호전 소모전을 넘어설 수 있는 이론으로 각광받았으며, 이후 독일 소련은 1920-30년대 공군, 기갑부대 이론과 결합하여 새로운 교리체계를 개발하였다. 단, 여기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문리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규모와 양상이 이전과 달라지면서 '정치적 목적성'이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싸우는 기존의 전쟁 방식에서 적 종심지[15]를 타격하여 전쟁수행능력 자체에 타격을 주는 양상으로의 변모는 클라우제비츠가 예견했다기보단 그의 책을 읽은 후학들이 당시 전장 현실을 클라우제비츠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당시 전쟁은 그저 군주와 군대와의 싸움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전쟁론은 ' 총력전'의 도래를 예언했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예언대로 맞아 떨어졌다. 즉, 국력의 결집 유무가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끼친다는 예상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16]

전쟁론이 편집 정리를 아예 못 받은 것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 사후 원고를 정리한 인물은 그의 아내인 마리였으며, 그녀는 당대 여성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인 데다가 남편의 사상적 이해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기에, 분명 유의미한 편집 정리 기여를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녀가 정리하였기에 지금의 전쟁론이 단순한 '미완성 원고'가 아닌 '완성된 책'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편집에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클라우제비츠가 책을 쓰던 중에 전쟁의 정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크게 바꾸고 그에 해당하는 1, 2, 3장을 완전히 다시 썼기 때문이다. 총론에서 완전히 벗어나 각론, 곧, 전략과 전술에 대해 직접 논하는 본격적인 "병서"인 4장 이후의 내용들도 고쳐진 정의에 기반을 두어 다시 작성하여 일관된 저술을 유지할 수 있게 하여야했으나, 안타깝게도 클라우제비츠가 이 작업을 하려는 시점에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이 부분은 이전 원고 그대로 남아버렸고, 이건 클라우제비츠의 아내인 마리는 커녕 동서의 전설적인 편집자들이 나서도 해결 못할 문제다. 따라서 적어도 4권 이후의 내용들은 독자가 뇌피셜(...)로 뇌내 편집해서 읽는 수 밖에 없다.

"전투 의지"를 정신력 드립, 즉 엘랑 비탈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1970년대 이후 영미권의 번역은 '전투 의지'를 '전투에 필요한 지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다.[17] 현재 제일 최근판 한글번역(김만수 대전대 군사학 연구소)에서도[18] '국가의 의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은 적극적이지만 약한 수단이고, 수비는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수단이다(클라우제비츠는 방어가 공격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공격은지전 또는 충돌의 장소와 시간을 정할 수 있는 우위의 입장에 서 있고, 양측이 정지상태일 때 먼저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므로, 적극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1812년 자신이 직접 참전한 러시아 전역에서처럼 대규모의 적군은 국경 안으로 깊숙히 끌어들여 소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4. 내용

전쟁론은 총 3권 8편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1편 전쟁의 본질, 2편 전쟁의 이론, 3편 전략 일반, 4편 전투로 이루어져 있으며, 1832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다.
2권은 5편 전투력, 6편 방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1833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다.
3권은 7편 공격, 8편 전쟁계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834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다.
그래서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이다.
Der Krieg ist also ein Akt der Gewalt, um den Gegner zur Erfüllung unseres Willens zu zwingen.
1편 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다른 수단의 개입으로 정치적인 교섭을 계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der Krieg ist nichts als eine Fortsetzung des politischen Verkehrs mit Enmischung anderer Mittel.
8편 6장 B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

5. 영향

일단 러시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가 클라우제비츠의 나라인 프로이센 왕국(후의 독일 제국)을 제외하면 러시아였다. 어느 정도냐면,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국방군이 자신들이 점령한 러시아 도시들의 도서관을 뒤졌더니 모든 도서관에서 최소한 1권 이상의 전쟁론이 나오더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공산주의 혁명의 핵심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조차 수차례 반복해 읽고는 세계 적화를 위해선 반드시 정독하라고 권했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련의 젊은 장교들은 전쟁론을 읽고 토론하면서 점차 붉은 군대를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에서 그럴싸한 전술을 구사하는 군대로 발전시켜 나갔고, 이대로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쭉 성장했다면 독일군과도 호각일 강한 붉은 군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스탈린이 "전쟁론은 낡았다." 소리만 안 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2차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초기에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고전했던 가장 큰 원인을 대숙청에서 찾지만 이것도 무시 못 할 원인 중 하나다.

스탈린 사후에서야 러시아 내에서 재평가되었으며, 전쟁학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뤄질 수 있었다.

머니볼의 저자 마이클 루이스의 말에 의하면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금융계에서도 유행하는 책이었다고 한다. 또한 2000년대 후반 금융 위기 때에도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하는데, 전쟁론이 강조하는 전쟁요소 중 '우연성'이 인간 심리에 의해 요동치며 경제 이론과 다르게 움직이는 금융시장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대안으로 꼽힐 가능성이 있다 본다고... 그런데 '우연성' 이라는 개념을 '불확실성', '무작위성'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독해일지에 관해서는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성을 전쟁 여부와 목적을 결정하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영역, 폭력을 전쟁의 원동력이 되는 국민 대중의 영역으로 구별하고, 우연성을 군의 영역으로 구별한다고 할 때, 이 맥락에서 우연성이라는 표현은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전력의 우열을 뒤집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군 지휘관의 기술적, 전문적 역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감독인 베르트랑 보넬로 손에 영화화가 되기도 했다. ...물론 전기 영화나 그런 일반적인 영화는 절대 아니고 상당히 실험적인 스타일의 영화니 그냥 내용과 구성을 빌려왔다고 생각해고 보는 게 좋다. 애시당초 영화의 배경이 현대다.

마오쩌둥도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여기에 손자병법 등 중국의 전통의 병법을 결합하여 특유의 게릴라 이론을 만들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1) 전쟁의 3요소 가운데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인민전쟁', 2) 적의 유형병력 격파가 지역 점령보다 우선이라는 섬멸전, 3) 전략적으로 방어를 추구하되 반격 능력을 강조하는 '적극적 방어' 등이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힌트를 얻은 결과물이었다.[19]

6. 초판본

한국 국내에서는 대전대학교 지산도서관이 1830년대에 출간된 초판본 전3권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일하다. 한국어 완역판의 저자인 김만수 교수 역시 이 판본을 기초로 번역하였다.

7. 번역 문제

전쟁론의 번역은 매 번역마다 아예 서로 다른 '편집'이 된 전혀 다른 책으로 취급하는 것이 지적 건강에 이롭다. 중국의 고서들을 두고 서로 다른 번역과 강해, 주석들 찾아 전전하는 것 마냥 온갖 판본들을 전전하는 게 강제되는 골치아픈 문제가 존재하며, 이런 난해한 저서의 번역을 기대할 게 못되는 한국에선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도 꾸준히 번역판이 나왔지만 그 신뢰성은 가히 바닥을 기는 상항이었다. 특히, 90년대 이전은 불쏘시개 수준으로 독자의 경추 건강을 해치는 수준이니 아예 읽어보지도 않는게 좋다. 일본판 중역이거나 영어판 중역, 둘의 짬뽕 공식저자도 아닌 대학원생들의 번역기식 Ctrl+C,V 그리고도 그 수준에서의 서로 베끼기 스킬로 전문가가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를 지경이다.[20]

1970년대 출판된 모 정치학자의 번역판도 나와 있지만 역시 보지 않는게 좋다. 원래 내용도 어렵지만 번역이 잘 되지 않아서 읽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번역자의 독일어 실력이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국어 실력을 키워야 할 정도라고 생각이 들 정도. 보통 전문 번역자가 아닌 사람이 번역하는 전문 서적에서 이런 일이 흔히 발생한다. 해당 분야 전공 지식은 있지만 국어 실력이 엉망이라, 제대로 표현을 못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무엇보다도 자국어 실력이 제일 중요하다.

게다가 책이 오래된 만큼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의 유럽 언어 번역판도 시대마다 다른 번역이 존재한다. 이것도 번역마다 서로 그냥 다른 책으로 봐야하므로 이 번역 저 번역 전전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한국 대학 도서관에 있는 것들은 대체로 19세기 번역된 것으로, 구글에서 구할 수 있는 PDF 영어판도 대체로 1900년 이전의 판들이다.[21] 이러한 번역본은 기존의 한국어 판만큼 신뢰하기 어렵다.

특히 어느 언어의 번역본이든, 70년대 이전 번역은 손에 소금 한 줌 쥐고 읽어야할 정도로 신뢰성이 영 아니올시다이다.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언어들의 번역본이라도 번역이 잘 되었다는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고, 그나마 자신의 언어로 잘 번역했다더라는 영어권 학자들도 기존의 오역과 중역으로 인한 폐해덕에 오히려 전쟁론의 가치가 묻히는 것에 대해서 개탄하고, 1970년대 이후 번역이 거의 갈아엎기 수준으로 새로 이루어졌다. 70년대부터 수정작업이 90년대까지 수정되었다. 현대영역판은 이것을 의미한다.

현대 영역판에서 번역이 새로 이뤄진 부분은 대표적으로 프랑스군 항목에서 정신승리(?)의 영향[22]으로 지적되는 '의지'드립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 또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지성'(intelligence)등 으로 번역하고 있다. 현대판에서 표준으로 쓰이는 영역본은 1976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출간된 피터 파렛(Peter Paret), 마이클 하워드(Michael Eliot Howard)의 공동 번역본 #[23]이지만, 번역의 정확성은 마티아스 졸스(O.J. Matthijs Jolles)가 1943년에 독일어 초판본에 기초해 번역한 판본[24]이 신뢰성이 더 높다고 평가받는다.[25]

국내판으로는 2005년에야 처음으로 김만수 교수가 번역한 완역본이 나왔는데 그걸 보면 된다. 1권이 2006년에 먼저 나오고 나머지 2,3권은 2009년에 같이 출판되었다. 당연히 이 책을 봐도 이해가 한 번에 가지 않는 것은 있지만, 이것은 전문학자가 아닌 이상 당연한 것이며 최초판이 나온 이래로 번역한 일반인은 전문군사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으로 지금까지 계속 되어온 시행착오일 뿐이다. 해당 한국어 완역판은 적어도 번역가인 김만수 교수가 국어교육과 전공에 독일에서 강의도 했으며, 군사학도 가르치는 전문가라서 번역의 질이 다른 한국어 번역판보다 월등하게 높다. 이전판과 달리 1830년대 초판과 1840년 추가 발행판과 현대 독어판과 영역판을 모두 참고하여 번역했다고 하고 본문에서도 해설과 주석이 상세한 편이다. 이 완역판은 2016년 전면개정판으로 새로 출간 되었다. 차이점으론 해설이 따로 분리되어 해설만 엮은 책이 나왔다. 기존 분권 + 양장에서 1~3권이 모두 합쳐진 떡제본으로 바뀌어 무겁고 불편해졌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전자책도 판매되고 있다. 분량이 엄청나서 무거우니 가볍게 전자책으로 소장할 사람은 자기가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에서 전자책을 구매하면 된다.

현역군인들이 번역한 경우 잃어버린 승리처럼 관공서 내의 참고책자로 나와 비매품이라서 일반인들이 찾기 쉽지가 않았다. 이 외에는 1998년 독일에서 사학 박사를 받은 육군 중장인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번역해 밀리터리 클래식 시리즈로 출간한 축약판도 있다.

원어판으로는 초판 텍스트 그대로의 판본(Ullstein사 판본 등)들도 있지만 하알백(Dr. Werner Hahlweg) 교수가 편집한 뒤밀러(Ferdinand Dümmler. 초판 출판사)사에서 발간한 19판이 학술적으로 인정받는다.[26] 김만수도 초판본을 텍스트로 삼고 19판 2쇄를 참고했다고 밝혔으며, 류제승도 1편 1장과 8편을 20판을 텍스트로 삼아 완역했다고 밝혔으나 연도를 보아 19판 2쇄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1쇄가 1980년, 2쇄가 1991년 나온 이후로 새 판본이 나오지 않아서 지금 구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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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죽음 [2] 이에 대해 직접 서술하진 않는다. 클라우제비츠는 독자가 결투란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글을 작성한 것이다. 실제 당대 독자라면 바로 알아들을 이야기다. [3] = 둘 중 하나는 패배해서 죽는다. [4] 평화주의자나 반전주의자들이 항상 무기를 내려놓자고 얘기를 하지만 정작 그들도 모두를 수용하는게 아닌, 적대하는 세력이 있는 상황처럼, 이러한 적개심은 사람이라면 가질 수 밖에 없는 감정이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 할 것이므로 전쟁은 결국 일어나게 돼있다는 뜻이다. [5] 이것이 일반적인 정반합 모델과 같은 지속적 변화 모델과 클라우제비츠의 모델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6] 일반적으로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인 대표적 조직인 군부가 해당되지만 군부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7] 중국과 인접 국가들에 전파된 점술 용어인 편관이 공교롭게도 이와 완벽하게 대응된다. [8] 이 개연성은 제복을 입은 사람이 적당껏 구실을 붙여 우연을 개연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9] 두 사람이 동 시대에 살은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꽤나 흥미로운 관점 차이다. [10] 아래쪽 모델은 본질이라 할 수 있겠고, 위쪽은 실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클라우제비츠가 원한 설명은 아니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음에도 신기하게 설명되니까 클라우제비츠가 자신의 모델을 두고 "신비롭고도 역설적인 삼각형"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을 정도이다. [11] 당장 저놈의 "개신기한데 말은 안됨 ㅋㅋ 근데 또 말이 되네 ?" 식으로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평한 "역설의 삼각형" 조차 근세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은 있어야 왜 클라우제비츠가 하필 저런 모델을 제시한건지 "뇌피셜"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다. [12] 맹자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조차 어느정도 맞는 해석을 도출할 수 있게 되어있으면서 맹자의 진심을 알아갈 수록 더 깊숙한 곳엔 어떤 의미를 말하고 있는지를 양파 까듯 뜯어볼 수 있어, 문리를 트는데 가장 먼저 거론되는 책으로 평해지며, 손자병법은 상식으로 시작해서 쉬이 생각 못할 대국적 변칙을 비유로써 담고 있어 대충 읽든 더 파보든 항상 정론을 알게 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13] 당장 클라우제비츠가 논한 전쟁 수행의 의지? 지성? 뭐라 번역할지 모를 말은 독일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읽어도 대충 그런갑다 하지 구체적으론 뭐라 이해할지 모른다. 요컨데, 비유적이고 모호한 표현으로 한자 단어를 체용한 것이 많은 중국 고서들과 비슷하다. 제자백가에게 찾아가서 어떤 한자가 쓰인 저명한 책에 대해 해당 글자를 어떻게 풀지 여쭙는다하면, 그 해석이 제자백가 스승들 중에서조차 갈리지 않을까 싶을 판인데, 전쟁론의 서술이 딱 그런 꼴이다. [14] 나치 독일의 명장 에르빈 롬멜이 그나마 제대로 이해 한 편이다. 참고로 롬멜은 손자병법도 애독한 사람이다. [15] 종심(縱深, Depth)은 전선에서 떨어진 적이나 아군의 깊숙한 지역을 의미한다. 러시아(소련)가 종심을 목표로 규정함으로써 타격 교리를 완성도 있게 만든 바 있다. [16] 이는 현대의 베트남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과 현지의 친미정부의 패배로 증명 되었다. 현지 정부의 부패와 무능, 의지 상실로 인해 국력이 엉뚱한 곳으로 줄줄 세어나간 것이다. [17] 니체의 저술에 등장하는 고유 명사들 마냥, 아주 많은 주화입마(?)를 일으킨 독일어 고유 명사이다. [18] 현재 한국에서 제일 추천되는 번역본이 김만수 번역본이다. 김만수 번역가도 그동안 번역되었던 전쟁론을 읽으면서 번역가도 이해못할 내용이 많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정말 유용하게 써먹을수 있지만, 반대로 이야기 하면 쓸모없다라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오독이 심하다는 것이다. [19] 마오쩌둥 본인도 상당한 다독가 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전술을 연구 할 때 전쟁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20] 2005년도 완역자 김만수의 평 [21] 저작자 사후 50년이 지나서 저작권 소멸된 것들만이 풀리니 당연히 그렇다. [22] 휴스트레이천은 애초에 20세기 초반 당시 프랑스어 번역판은 독일어나 철학적 사유방식의 이해부족으로 오역이라고 평가한다. [23] 베트남 전쟁 무렵 마케팅과 저작권 문제로 나올 수 있었던 번역판이다. [24] 현재 Modern Library 출판사에서 『손자병법』 영역본과 함께 묶어서 출판하고 있다. # [25] 옥스퍼드 대학 사학과(전쟁사) 석좌교수 -휴 스트레이천(Hew Strachan, 저서의 한국어 역본에서는 스트레이천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 이 사람 이름은 '스트론'이라고 발음한다)- 의 저서 '전쟁론 이펙트'에서의 평가. 영어권 클라우제비츠 사이트에서는 "표준이 아니지만, 가장 정확한 번역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26] 클라우제비츠 사이트에서도 권하는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