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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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5년경 | |||
사망 | 1766년 12월 2일 (향년 51세) | |||
왈라키아 공국 부쿠레슈티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57년 3월 2일 ~ 1758년 8월 7일 |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58년 8월 ~ 1761년 6월 5일 | |||
2차 | 1765년 8월 18일 ~ 1766년 12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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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그리고레 2세 기카 어머니: 조이 마나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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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마테이 기카 | |||
배우자 | 아나스타샤 라코비차 | |||
자녀 | 알렉산드루 스카를라트 기카, 엘레니 기카 | |||
가문 | 기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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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76대 보이보드, 왈라키아 공국 제76대 보이보드.2. 생애
1715년경 몰다비아 보이보드이자 왈라키아 공국 73대 보이보드 그리고레 2세 기카와 조이 마나이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테이 기카가 있었다. 1757년 3월 2일 콘스탄틴 라코비차의 뒤를 이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뒤 오스만 제국 궁정에 매해 금주머니 300개를 지불했고, 기카 가문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서민이 납부해야 하는 간접세를 대거 거둬들였다. 그러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활발하게 교역해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1758년 8월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를 대신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당시 왈라키아의 다뉴브 강 서쪽 지역에 튀르크인 상인들이 대거 이주한 뒤 현지 주민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우고 마을 전체를 그들의 손에 쥐고 억압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이에 스카를라트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절을 보내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공물을 정기적으로 마련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오스만 제국 측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뉴브 강 서쪽에 불법적으로 이주한 튀르크인들을 대거 퇴거시켰다. 다만 자신이 정당한 방식으로 이주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이는 예외적으로 그곳에 거주할 수 있게 했다. 이후 튀르크 상인들은 마을이 아닌 도시에만 머물러야 했으며, 일종의 거주 비자인 고정 기간 동안만 머물 수 있었다. 또한 다뉴브 강둑 방향의 영지를 소유한 귀족과 수도원은 무벨라-에펜디가 봉인한 문서를 통해 이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렇듯 다뉴브 강 서쪽의 왈라키아인들를 튀르크 상인들의 횡포로부터 지켜내는 데 공헌했지만, 1761년 6월 5일에 정적들의 모함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되어 한동안 림노스섬으로 추방되었다가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왔다. 1765년 8월 18일 슈테판 라코비차가 폐위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이 시기에 오스만 파디샤의 직할지이며 오스만 관리가 관리하는, 일명 "재상의 토지(Vizier's Chamber)"로 일컬어지는 지역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브라일라 지역 가장자리에 있는 이 넓은 평지는 오스만군이 영구적으로 주둔해 있었는데, 이웃 지역에서 보야르들의 억압과 무거운 과세에 시달리던 많은 농민들이 이곳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 지역을 총액 25,000 탈러를 분기별로 분할 납부하는 대가로 인수했다.
1766년 12월 2일에 사망했고, 부쿠레슈티에 있는 스판툴 스피리돈 누 교회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알렉산드루 스카를라트 기카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되었다. 그의 딸 엘레니 기카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칼리마치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