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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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사망 | 1352년 (향년 ?세) | ||
왈라키아 공국 큼플룽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330년 ~ 135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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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토코메리우스 어머니: 이름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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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르기타 | ||
자녀 |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테오도라 | ||
가문 | 바사라브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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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초대 보이보드. 별칭은 인테메이에토룰(Întemeietorul, 창건자). 헝가리 왕국의 봉신이었지만 1325년 독립을 선포하고 1330년 포사다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했다.2. 생애
1332년 헝가리 왕국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바사라브 1세와 관련해서 반포한 법령에 따르면, 그는 토코메리우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토코메리우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는 토코메리우스가 13세기 중반에 출현한 블라흐 영주 세네슬라우[1]의 후손이라는 설을 제기하며, 루마니아 역사가 블라드 조르제스쿠(Vlad Georgescu, 1937 ~ 1988)[2]는 토코메리우스가 13세기 후반 올테니아의 통치자였던 바르바트[3]의 후손이라고 추정했다. 바사라브(Basarab)는 튀르크어족의 동사 bas- ("압박하다, 통치하다, 통치하다")와 존칭 aba("아버지, 연장자 친척")의 합성어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바사라브 1세가 튀르크 계열인 쿠만 또는 페체네그 조상을 두었다고 추정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카로이 로베르트는 1332년 법령에서 그를 "우리의 불충실한 블라흐, 바사라브"라고 거론하면서, 그를 블라흐인으로 지명했다.바사라브 1세가 언제부터 통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7세기 루마니아 연대기는 전설상의 통치자 라두 네그루가 1290년 또는 1292년에 피기라스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이주한 뒤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바사라브 1세는 라두 네그루로 지칭된 인물의 아들이었으며, 1304년에서 1324년 사이에 라두 네그루의 뒤를 이었다고 추정하나, 라두 네그루 자체가 왈라키아에 등장한 여러 통치자의 활약상이 뒤섞인 전설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부족하다. 그가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324년이다. 그 해 7월 26일,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발행한 왕실 문서에서, 바사라브 1세는 "우리의 왈라키아 총독"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당시 카로이가 바사라브 1세를 충성스러운 가신으로 여겼음을 암시한다.
1325년 6월 18일자 헝가리 왕실 문서에서는,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의 신성한 왕관에 불충실하다"고 기술되었다. 바사라브 1세는 이때부터 헝가리 왕국에 공물을 보내기를 거부하고 충성 서약을 깬 것으로 여겨진다. 1329년 헝가리 왕실 문서에서, 바사라브 1세가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타타르인과 함께 메하디아 주변을 습격한 적으로 언급되었다. 여기에 1324년에서 1330년 사이에 세베린[4]을 점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30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가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1331년 세르비아 국왕이 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발행한 왕실 문서에 따르면, 바사라브 1세는 미하일 아센 3세를 돕기 위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를 위협했다. 그러나 미하일 아센 3세는 1330년 7월 28일 벨버즈드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1330년 9월, 카로이 로베르트는 헝가리군을 파견해 올테니아를 침공하여 세베린 요새를 탈환하고 세베린의 반(Ban)으로 데니스 제시를 임명했다. 이에 바사라브 1세가 은화 7,000개를 즉시 바치고 연간 공물을 보낼 것이며, 아들 한 명을 비셰그라드로 보낼 테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카로이는 단호히 거부하고, 바사라브 1세가 숨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ș)로 진군했다. 그러나 적군이 청야 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바사라브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철수길에 올랐다. 1330년 11월 9일 카르파티아 산맥 남부를 가로지르는 좁은 통로를 행진하던 헝가리 왕실군은 포사다에서 왈라키아인의 습격을 받았다. 카로이는 데시데리우스 헤데르바리(Desiderius Hédervári)라는 이름의 기사와 옷을 바꿔 입은 후 전장에서 탈출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카로이로 자처하며 적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카로이는 왈라키아 침공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고, 왈라키아는 헝가리로부터 독립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바사라브 1세는 헝가리와의 전쟁으로 수도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가 파괴되자, 수도를 큼플룽으로 옮긴 후 대대적인 개발을 단행했다. 이후 세베린 요새를 탈환했고, 사위인 이반 알렉산더르가 불가리아 왕위를 차지하는 걸 도왔으며, 이반이 1331년과 1332년에 동로마 제국에 맞서 싸우는 걸 지원했다. 1340년 이후 파괴되었던 쿠르테다 데 아르게슈에 새로운 요새와 궁전을 건설했으며, 산 니코아라 교회 건축도 개시했지만 사후에야 완공되었다. 1344년 헝가리 왕국의 새 국왕 러요시 1세가 아버지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왈라키아로 쳐들어가려 하자, 바사라브 1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니콜라에 알렉산드루를 그에게 보내 봉신을 자처했고, 그는 이에 만족하여 수도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종주권은 명목상이나마 복원되었다.
바사라브 1세의 손자인 블라디슬라프기 발행힌 왕실 문서에 따르면, 바사라브 1세는 우주력 6860년(서기 1352년)에 큼플룽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니콜라에 알렉산드루가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했다.
3. 가족
- 마르기타: 프란체스코 연대기는 라두 네글루의 아내인 마르게리타라는 가톨릭 공주가 콤플롱에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건설했다고 기술했는데, 학자들은 그녀가 바사라브 1세의 아내라고 추정한다.
-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 1364): 왈라키아 2대 공.
- 테오도라: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첫번째 황후.
[1]
1247년 7월 2일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발행한
구호기사단 영지 수여 칙령에서 "보이보드 세네슬라우의 영토를 제외한 올트 강 동쪽의 영토를 구호기사단에게 수여한다"라고 기술되었다.
[2]
1979년 해외로 망명한 뒤 <라디오 자유 유럽>에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3]
1277년에서 1280년 사이에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헝가리군에게 전사한 리토보이의 형제로, 헝가리군에 붙잡혀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더로 이송된 뒤 헝가리의 통치를 인정하고 몸값을 지불하는 대가로 올테니아의 통치를 인정받았다.
[4]
Severin. 현재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