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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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사망 | 1420년 8월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418년 ~ 142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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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르체아 1세 어머니: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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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미하이, 라두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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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8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6대 보이보드 미르체아 1세와 마라의 유일한 적출자이다. 이복형제로 라두 2세, 블라드 2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안나[1], 아리나[2]가 있었다. 1415년부터 미르체아 1세의 공동 통치자로 일컬어졌으며, 1418년 1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왈라키아 공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헝가리 왕국과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부친의 우호 정책을 유지했으며,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색슨 상인과의 협력을 이어갔다.1419년 봄 오스만 제국이 이웃한 기독교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왈라키아를 2차례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왈라키아군은 헝가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는 왈라키아에 속한 보디차와 티스마나 수도원에 헌장을 내림으로써 그곳들의 관리권을 획득했고,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막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왈라키아가 소유하던 세베린 요새에 군대를 주둔하는 등 왈라키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 해 가을, 미하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 지기스문트를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왈라키아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미하이 1세는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다뉴브 강변의 지우르지우 및 요러 요새를 오스만 제국에 양도하고, 지난 3년간 보내지 않았던 공물을 바치기로 했으며, 두 아들 미하이와 라두를 오스만 제국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1420년, 왈라키아 공국 제5대 보이보드 단 1세의 아들이자 미하이 1세의 사촌인 단 2세가 알불(Albul)과 우트메스(Utmeș) 등 왈라키아 보야르들의 추대를 받고 보이보드 직위에 도전했다. 미하이 1세는 처음엔 단 2세를 격퇴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1419년 가을에 맺었던 계약을 당장 이행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단 2세를 지원하자 전세가 불리해졌다. 미하이 1세는 헝가리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냈지만, 1420년 8월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했고 전장에서 사망했다. 이후 왈라키아는 미하이 1세의 이복형제인 라두 2세와 단 2세간의 내전으로 혼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