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428년 | ||
사망 | 1447년 (향년 19/20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442년 3월 ~ 1442년 6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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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블라드 2세 어머니: Cneaj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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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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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13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12대 보이보드 블라드 2세의 아들이다. 형제로 블라드 3세, 라두 3세, 블라드 수도공, 알렉산드라[1]가 있었다. 바르나 십자군에 참여한 브린의 왈레랑에 따르면, 미르체아 2세는 1443년경 약 15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미르체아 2세는 1428년경에 출생했을 것이다. 1437년 1월 20일에 발행된 왈라키아 헌장에서, 블라드 2세는 미르체아 2세와 블라드 3세를 첫째 아들들이라고 지목했다. 정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 알렉산드루 1세의 딸인 'Cneajna'라고 한다. Cneajna는 ' 공작부인'을 의미하는 경칭이다. 루마니아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Radu Florescu, 1925 ~ 2014)에 따르면, 이 여인의 본명은 유프락시아라고 한다. 반면 또다른 루마니아 역사가 마테이 카자쿠는 아나스타시야는 블라드 2세의 두번째 부인이며, Cneajna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부인이라고 주장했다.1442년 3월, 오스만 술탄국 술탄 무라트 2세는 블라드 2세에게 에디르네로 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블라드 2세는 장남 미르체아 2세를 왈라키아 통치자로 세운 뒤 공물을 가지고 에디르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라트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 1442년 6월, 트란실바니아 총독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한 뒤 단 2세의 아들 중 한 명인 바사라브 2세를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앉히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미르체아 2세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산악지대로 피신한 뒤 오스만 술탄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후 블라드 2세는 어린 아들 블라드 3세, 라두 3세가 인질로 넘겨지고, 매년 공물을 바치고, 매년 왈라키아의 소년들을 보내 오스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훈련하는 조건을 수락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 1443년,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토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1444년, 블라드 2세는 대오스만 동맹에 4,000 ~ 7,000명의 기병을 보내주기로 하고, 지휘관으로 장남 미르체아 2세를 선임했다. 왈라키아군은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 참전했다. 미르체아 2세는 패배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해 다뉴브 강변 왈라키아의 영토로 돌아갔다.
1445년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에 힘입어 지우르지우 요새를 탈환했다. 그러나 블라드 2세는 1446년 또는 1447년에 오스만 술탄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인질이 된 두 아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다시 지우르지우 요새를 통제하도록 허용했다. 1447년 11월, 후녀디 야노시는 단 2세의 또다른 아들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앞세워 왈라키아를 기습 침공했다. 미르체아 2세는 체포된 뒤 색슨 귀족들에 의해 빨갛게 달군 꼬챙이로 실명된 뒤 산채로 매장되었다. 블라드 2세는 페리슈로 피신했지만 곧 암살당했다.
[1]
왈라키아 보야르 빈틸러 플로레스쿠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