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704년 (향년 미상)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693년 4월 ~ 1695년 12월 8일 | |||
2차: 1700년 9월 12일 ~ 1703년 7월 2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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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게오르게 두카 어머니: 아나스타샤 다비자 |
|
배우자 | 마리아 브랑코비아누 | ||
가문 | 두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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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67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를 역임한 게오르게 두카와 몰다비아 공국 제59대 보이보드 유스트라티에 다비자의 양녀인 아나스타샤 다비자의 외아들이다. 1693년 3월,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등극한 디미트리에 칸테미르가 전임 왈라키아 보이보드 셰르반 칸타쿠지노의 미망인 마리아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노리는 음모를 꾸밀 기미가 감지되었다. 이에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자기 딸 마리아를 전 몰다비아 보이보드 게오르게 두카의 아들인 콘스탄틴 두카와 약혼시켰다. 그해 4월, 콘스탄틴 두카는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지원에 힘입어 디미트리에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즉위했다.그러나 콘스탄틴 두카는 집권 이래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가해 민심을 잃었고, 통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담배세, 옥수수세, 소 10마리 중 한 마리를 몰수하는 바카리트(văcărit) 세를 도입했다. 오스만 제국 총독이 그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하자,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총독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재정을 털어서 뇌물을 줘야 했다.
그러던 1695년, 콘스탄틴 두카가 공물 납부를 제때에 하지 않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공물 납부를 독촉하기 위해 카푸쿠(Kapucu: 오스만 제국의 공식 사절)를 파견했다. 그런데 카푸쿠는 몰다비아에 도착한 지 얼마 안가서 피살되었다. 이에 오스만 제국 궁정은 그가 카푸쿠 살인을 사주했다고 간주하고, 그 해 12월 8일에 전격 해임하고 디미트리에 칸테미르의 형인 안티오 칸테미르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이후 제국에서 추방하여 수년 간 유랑생활을 하던 그는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지원에 힘입어 제국 궁정의 용서를 받고 코스탄티니예에 돌아왔고, 1700년 9월 12일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가 오스만 관리들에게 뇌물을 건넨 덕분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는 집권한 이래 칸테미르 가문 지지자들을 박해했다. 그러나 아내 마리아가 사망한 후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와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그의 이익에 어긋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1703년,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콘스탄틴 두카를 몰아내기 위해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설득했다. 오스만 관리들이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겸임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자기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는 복심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채고 거절했다. 이후 그 해 7월 26일 콘스탄틴 두카가 폐위되었고, 미하이 라코비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 후 콘스탄틴 두카는 코스탄티니예에서 조용히 지내다 1704년경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