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오의 황족 손헌(孫憲)에 대한 내용은 손려(손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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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대제 손권의 아들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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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慮
손려 |
|
성씨 | <colbgcolor=#FFFFFF,#191919>손(孫) |
휘 | 려(慮) |
자 | 자지(子智) |
증조부 | 효의왕 손종(孝懿王 孫鍾) |
조부 | 시조 무열황제 손견(始祖 武烈皇帝 孫堅) |
아버지 | 태조 대황제 손권(太祖 大皇帝 孫權) |
형 | 선태자 손등(宣太子 孫登) |
생몰연도 | 213년 ~ 2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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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인 대제 손권의 둘째 아들이며 자는 자지(子智)로 아내는 반준의 딸.2. 생애
228년 손권이 오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등극하자 건창후(建昌侯)로 봉해졌는데 이때 전당 앞에 투압란[1]을 만들었다가 육손에게 야단맞고 철거한다.230년 고옹 등 많은 신료들이 손려의 총명함을 칭송하며 왕으로 높여 봉해야 함을 손권에게 간하였으나, 수차례 끝에 허락되었다. 또한 상서 복야 존모가 고옹과 함께 의논하여 손려를 진군대장군에 임명해서 출진시킬 것을 제안하자 손권은 손려에게 부절(假節)을 주고 관소를 열게 했으며 손려는 반주(半州)를 다스렸다.
231년 설종을 소환하여 장사에 임명하게 했다고 하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손권의 총애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232년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때 손권은 너무 슬퍼서 펑펑 울며 신하들의 식사 반찬을 줄이게 했는데, 손등이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이는 예절이 아니라 요구일 뿐입니다'라고 말렸고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3. 평가
진수가 손화와 묶어 맨 마지막에 기록하길 "모두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고 엄격하게 자신을 연마했지만, 어떤 사람은 단명하여 일찍 죽었고, 어떤 사람은 부득이 죽게 되었으니, 애석하구나!"라고 평하였다.차남 손려의 요절은 태자 손등의 요절과 더불어 오나라의 후계자 쟁탈전 이궁지쟁을 초래하여 손오를 쇠퇴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