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석기 전투(采石之戰/采石磯之役) | ||
시기 | 1161년 11월 26~27일 | |
장소 | 채석기 | |
원인 | 금(金), 해릉양왕의 무리한 남송 원정. | |
교전국 | 남송 | 금 |
지휘관 |
우윤문 시준 성신 장진 왕기 대고 |
해릉양왕 아린 야율원의 도단소 |
병력 | 18,000 명 | 150,000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약 4,000 명 |
결과 | 남송의 승리 | |
영향 | 금(金), 해릉양왕 주살 및 금세종의 즉위. |
[clearfix]
1. 개요
채석기 전투는 장강 유역 채석기에서 남송군과 금나라의 대군이 맞서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남송군이 승리하면서 금군은 이 이상의 진공이 불가능해졌고, 해릉왕 역시 마지막 지지기반을 잃고 살해당하였다.2. 배경
해릉왕은 일찍이 즉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목표를 세상의 모든 여인을 자신의 품에 안는 것과 중원의 통일이라고 자부하였다. 물론 초기까지만 해도 신하들 사이에서는 설마 해릉왕이 진짜로 남송을 치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도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은 계속해서 군사력을 키우는데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였던데다 장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을 두르고 있었던 탓에 금나라의 모든 국력을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남송을 멸망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감스럽게도 해릉왕의 남송 침공은 허풍이 아니라 진심이었다.3. 양측의 준비
3.1. 금의 전쟁 준비
결국 1160년 해릉왕은 공식적으로 남송을 침공하여 중원을 통일할 것을 선포한다. 아주 당연하게도 조정의 주요 중신들 대부분이 남송 침공의 어려움을 들면서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참고로 반대하는 인물 중에는 자신의 적모인 황태후까지 있었으나 전쟁을 반대한 대신들을 모두 처형하고 황태후마저 죽였다.[1] 그리고 전쟁 준비를 위해서 금나라 경제의 근간을 무너뜨렸는데, 장정 50만명을 강제로 징집하여 배를 건조하고 병사로 훈련시키는 데 동원하였다. 결국 금나라 전역의 경제가 파탄에 빠지는 등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해릉왕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준비를 마치자마자 바로 대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했다.3.2. 남송의 전쟁 준비
상황적으로 보면 남송군은 금군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당장 금나라 내부에서부터 해릉왕에 이를 가는 인물들이 한 두명이 아니었던데다 금에서 남송의 수도 임안에 이르려면 회하와 장강 두 방어선을 돌파해야 했다.그러나 송 고종은 금군의 침공에 대해 방비가 없었고 낙관적인 상태였다. 이전에 우윤문이 금에 사신으로 갔을 때 금 정권이 배를 통해 변량 지역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것을 보고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남송 조정에 의해 기각당하고 만다.
어찌되었든 금군의 대규모 침공에 남송 조정은 서둘러 방어군을 급파하였는데, 회하 북안의 수비 책임자였던 유기(劉錡)가 하필 병중이었던 탓에 부원수였던 왕권(王權)이 군을 이끌고 회서 수춘에서 금군을 맞아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남송군 최대의 문제점이 드러났는데, 하필이면 왕권이라는 인물이 천하의 졸장이었다. 잔뜩 겁에 질렸던 왕권은 금군과 조우도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이끌고 적전도주를 감행, 회하는 물론이거니와 단숨에 장강 남쪽으로 도망치는 추태를 보여주면서 회하 방어선이 어이없이 뚫려버리고 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송고종은 격노하여 왕권을 사령관직에서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 이현충(李顯忠)[2]을 임명함과 동시에 엽의문(葉義問)을 파견하여 강회 지역의 방어상태를 시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진강에 배를 띄웠는데 만약에 장강마저 뚫린다면 그 즉시 남쪽으로 도망치겠다는 의도였다.
문제는 송고종이 임명한 위의 두 명도 만만찮은 졸장이었다는 것. 둘 모두 전선에는 코빼기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당장 이현충은 부임지에 오지도 않았고 전선 시찰하라고 보낸 엽의문은 전투에 휘말릴까 겁에 질려서 휘하의 중서사인 직책을 맡고 있던 우윤문이라는 인물을 보내어 대신 전선시찰 임무를 맡긴다.
그런데 엽의문은 겁이 나서 그저 아랫사람을 보낸 것 뿐이지만 이게 바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4. 전투 경과
4.1. 우윤문의 사령관 부임
우윤문이 전선을 시찰하러 왔을 때 남송군의 진영은 한마디로 와해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왕권은 파직당하고 그를 대체하기로 되어있던 이현충(李顯忠)은 부임지에 도착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데다 금군의 대규모 병력이 장강 북안에 진을 치고 있는 광경 등이 병사들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뜨리고 있었다. 우윤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전선시찰 및 장졸들의 사기를 북돋고 위로하는 것이었기에 다시 귀환해도 무방하였지만, 이전부터 대금 항전파였던 우윤문은[3] 즉시 병사들을 소집하여 연설에 들어갔다."만약에 금군이 강을 건너는데 성공한다면, 그대들이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지금 아군이 강을 통제하고 있으니. 만약에 장강이야말로 천험의 요새라면, 어찌 우리가 죽음 가운데서 활로를 찾지 못하겠는가. 더군다나 조정에서 병사를 양성한지 30년인데, 어찌하여 국가를 위해 적과 혈전을 벌여 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4]
우윤문의 이 연설 한 번에 남송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올라가고, 우윤문은 일개 참모에서 일군의 사령관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이전까지 우윤문은 단 한 번도 병력을 이끌어 본 적이 없는 완벽한 문관이었다는 점이었다.
4.2. 격돌
우윤문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군을 재편성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군이 대규모로 도하를 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남송군이 장강을 끼고 수비한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18,000명의 병력만으로 그 열배에 달하는 금군을 정면에서 받아치는 것은 무리였기에 이들은 일단 진을 뒤로 물려 금군이 상륙하는 것을 허용하였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술적인 후퇴였을 뿐, 금군이 강변에 막 도달하기가 무섭게 우윤문은 사전에 배치한 화약무기를 금군에게 쏟아부었다. 이에 금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대자 부장 시준이 돌격대를 이끌고 금군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수천의 금군이 순식간에 도륙이 나버리고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금군들은 대부분 장강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우윤문이 대승을 거두고 난 뒤, 이현충이 그제서야 채석기에 도착하였다. 그는 우윤문의 대승을 보고받고는 크게 탄복하고 지휘권을 계속 우윤문에게 일임하였다.
해릉왕 역시 패전을 보고받고는 격분하였다. 다음날 해릉왕은 진로를 바꿔 경구에서 도강을 시도하였으나, 우윤문은 이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며, 해릉왕이 직접 통솔하는 전선 300여척은 남송군의 매복에 제대로 걸려 대부분의 배가 화공에 휩쓸려버렸다.
이쯤 되면 장강 도강은 일찌감치 물 건너간 상황이었고, 정상적인 대응이라면 이 시점에서 군을 물려야 했다. 무엇보다 거란의 대규모 반란과 함께 완안옹의 중도대흥부 입성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닥쳐온 이상 당장 반란부터 진압을 해야했건만, 해릉왕은 도리어 장수들에게 장강을 건너지 못하면 전원 참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물론 장강 도강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앞서 말한 바였고, 그렇다고 도강을 거부하면 목이 달아나는 판국. 갈 곳이 없어진 부장들은 마지막 수를 썼으니, 그들은 해릉왕에게 반기를 들어 그의 목을 베어버린 뒤, 군대를 돌려 철군한다.
5. 결과
해릉왕의 남송 침공은 처절하게 실패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이 원정이 성공하였다면 금세종을 위시한 반란세력은 위세를 잃고 소멸하였을 것이었지만, 채석기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도강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 이상 금군이 해릉왕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때 해릉왕의 막사에 화살 한 개가 날아와 해릉왕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간 자리에 꽂혔는데 이게 놀랍게도 송나라 화살이 아닌 금나라 화살이었다. 결국 해릉왕은 이걸 보고 본인 이외에는 모두 적이라 생각하고 진중에서 도망치려고 했다가 잡혀서 아군의 손에 죽어버렸으며,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황제는 금나라 최고의 성군 금세종이었다.6. 후일담
이 전투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우윤문은 대승 이후 출세에 출세를 거듭하게 되면서 좌승상 추밀사까지 임명되었으며, 이후 송효종 시기에도 중신으로 활약하였고 또 오린과 함께 북벌을 계획한다.그리고 이전까지 군대를 이끌어 본 적도 없는 일개 문관으로 대병을 격파하였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는지 이후에도 주요 사례로 자주 언급되었다. 다만 그게 "우윤문은 했는데 왜 너는 못하니" 수준이었지만.
그후 정확히 45년 뒤인 1206년 이 채석기 전투의 데자뷔가 남송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그 사건이 바로 남송의 재상이자 권신이었던 한탁주가 무리하게 금나라를 침공하던 개희북벌이다. 그러나 당시 금나라 황제였던 장종은 과거 해릉양왕에 비해 정상적인 황제였기에 한탁주가 막무가내로 시행하던 이 북벌을 가볍게 막아내고 45년 전의 실수를 만회하는데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