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3:08:56

세르비아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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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2E2F2F> 세르비아 대공국
Великожупанска Србија
Velikožupanska Srbija
파일:세르비아 대공국 국장.png
국장
파일:Serbia-1135y.png
1091년 ~ 1217년
<colbgcolor=#EAEAEA> 위치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수도 라스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대공
주요 대공 부칸 1세(1091~1112)
우로시 1세(1112~1145)
스테판 네마냐(1168~1196)
스테판 네마니치(1194~1202, 1204~1217)
언어 중세 세르비아어
종교 세르비아 정교회
종족 세르비아인

1. 개요2. 역사3. 역대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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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초까지 세르비아에 존재했던 대공국.

2. 역사

1083년, 두클랴 2대 국왕 콘스탄틴 보딘 동로마 제국 로베르 기스카르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라쉬카와 보스니아를 공략했다. 이후 조카인 부칸과 마르코를 라쉬카의 주판(župan)으로 선임했고, 친척인 스테판을 보스니아의 크냐지로 선임했다. 이후 마르코는 기록상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부칸은 보딘의 세르비아 평정을 도왔다.

1090년,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두클랴를 침공해 보딘을 격파하고 생포한 뒤 디라히온 테마의 모든 영토를 동로마 제국으로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어 두클랴 및 아드리아 해 연안만 직접 통제할 수 있었다. 반면 보딘에 의해 라쉬카 주판에 선임되었던 부칸 1세는 1091년 두클랴로부터 독립한 뒤 세르비아 대공(Veliki Župan)을 칭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족과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동로마 제국의 국경지대를 꾸준히 침공했다.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군을 섬멸한 뒤,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부칸을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1092년, 황제의 명령을 받은 디라히온의 스트라테고스가 군대를 이끌고 부칸의 영역을 침공했지만 기습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1093년, 부칸은 동로마 제국을 침공해 코소보 일부를 약탈하고 리플란 시를 함락한 뒤 파괴했다. 이에 진노한 알렉시오스 1세는 대군을 일으켜 코소보로 진군했다. 부칸은 코소보에서 즈베찬(Zvečan)으로 후퇴한 뒤, 스코페에 있던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 의사를 밝혔다. 그는 현지 동로마 총독들이 세르비아를 여러 번 침공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에 부득이 보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인질을 넘겨주고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며, 배상금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그의 약속을 믿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고, 현지 총독들에게 국경의 파괴 된 건물을 수리하고 세르비아 인질을 인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부칸은 알렉시오스 1세의 독촉 편지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인질을 보내는 걸 계속 연기했다. 이에 황제는 사촌 요안니스 콤니노스에게 군대를 맡겨 부칸을 응징하게 했다. 동로마군은 리플란 시 인근에서 시트니차 강을 건너 즈베찬 맞은 편에 방어벽으로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했다. 이에 부칸은 요안니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원하고 인질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요안니스는 이를 믿고 방심했다. 현지 수도사가 그런 그에게 부칸이 비밀리에 군대를 모으고 있다고 고발했지만, 요안니스는 이를 믿지 않고 그 수도사를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얼마 후, 부칸은 야습을 감행해 동로마군 진영을 파괴했다. 대다수 병력이 잠자는 도중에 살해되거나 전투 도중 적의 칼에 찔러 죽거나 시트니차 강에 빠져 죽었고, 요안니스는 얼마 안 되는 병력만 챙겨 리플란으로 도망친 뒤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다. 부칸은 여세를 이어가 코소보와 메토히자를 경유해 마케도니아 북부를 휩쓸며 스코페, 고르니, 폴고르카 분지 일대를 약탈한 후 브란예 시 주변을 황폐화한 뒤 라쉬카로 귀환했다. 1094년, 알렉시오스 1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세르비아 국경으로 진군해 폐허로 변한 리플란에 입성했다. 이에 부칸은 사절을 보내 이번에는 진짜로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하면서, 약속된 인질을 제공하기로 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부칸의 조카인 우로시 1세와 스테판 부칸을 포함한 인질 20명을 받고 돌아갔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선전하자, 세르비아인들이 대거 그에게 가담하면서 세르비아 내륙 지대의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1099년, 두클랴 국왕 콘스탄틴 보딘이 사망했다. 그 후 장남 미하일로 2세가 즉위했지만 얼마 안가 숙부 도브로슬라프가 두클랴 귀족들의 후원에 힘입어 찬탈했다. 1102년, 부칸은 또다른 두클랴 왕위 주장자 코차파르를 앞세워 두클랴를 침공했다. 브로슬라프는 모라차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라쉬카로 이송되었고, 달마티아 대부분이 약탈되었다. 이후 부칸 1세는 코차파르를 두클랴의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코차파르는 부칸 1세의 간섭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통치하려 했고, 이로 인해 둘의 동맹은 끊어졌다. 1103년, 부칸 1세는 재차 군대를 파견해 코차파르를 몰아내고 그의 친족인 블라디미르를 두클랴의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 후 블라디미르는 부칸 1세의 딸과 결혼해 입지를 강화했고, 부칸이 다시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 지원군을 보냈다.

1106년 봄, 부칸은 동로마 제국을 재차 침공해 요안니스 콤니노스를 격파하고 국경 지대를 약탈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 국경으로 진군하자, 그는 그해 11월 인질을 재차 알렉시오스 1세에게 넘기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아예 밟아버리고 싶었겠지만, 워낙 험준한 지형에 숨어서 유격전을 벌이는 그들을 단시일에 토벌하기 힘든 데다가, 투르크, 쿠만, 프랑크 등 다른 적들도 신경써야 했던 터라 부칸에게 집중하기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부칸과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 부칸 1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학자들은 1112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사건은 명확하지 않으나, 부카노비치 가문 사이에 권력 투쟁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부카노비치 가문의 일원인 자비다[1]는 1113년 제타로 피신했다. 이후 세르비아 대공이 된 우로시 1세는 두클랴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 1118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칼로얀 쿠만에게 군대를 맡겨 고지슬라프와 함께 두클랴를 침공하게 했다. 세르비아 대공 도르제 보디노비치는 이들과 맞서싸웠으나 패배하여 대다수 병력을 잃은 뒤, 일부 측근만 데리고 우로시 1세가 군림하던 라쉬카로 피신해 그의 보호를 받았다.

1126년, 도르제는 우로시 1세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로 진군해 바르 전투에서 그루베샤를 전사시키고 두클랴 국왕에 복위했다. 이후 그루베샤의 두 형제 드라기나, 드라길로와 화해했고, 제타 일부 지역을 영지로 수여했다. 그러나 그루베샤의 또다른 형제인 그라디냐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라쉬카로 피신했다. 그 후 우로시 1세가 실각하여 지하 감옥에 갇히자, 도르제는 드라길로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복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우로시 1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라쉬카로 진군해 우로시 1세를 성공적으로 구출하고 복위했다. 그라디냐는 자후믈례로 탈출한 뒤 디라히온으로 이동했다. 누가 우로시 1세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지하 감옥에 가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126년,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2세가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서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한 뒤 소피아를 거쳐 플로브디프까지 진격했다. 우로시 1세는 이에 호응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세르비아-동로마 제국 국경의 요새를 정복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헝가리군을 물리친 뒤 세르비아군을 공격해 격파한 뒤, 생포한 세르비아 포로들을 아나톨리아 니코메디아 인근에 정착했다. 우로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침략을 두려워해 평화 협약을 맺고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 이후 제국이 헝가리 왕국과 전쟁을 벌일 때 이를 돕기 위해 보조병 2,000명을 파견했다.

1130년 동로마 제국과 헝가리가 평화 협약을 맺은 후, 우로시 1세는 장녀 옐레니를 헝가리 왕자 벨러와 결혼시켰다. 1131년 3월 1일 이슈트반 2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 국왕은 2달이 지나도록 정해지지 않다가 1131년 4월 28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펠리키안의 주도로 벨러 왕자가 벨러 2세로서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헝가리 정계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다. 과거에 그를 추종했던 이들은 지위를 얻었지만, 칼만과 이슈트반 2세를 지지했던 영주들은 권력에서 쫓겨났다. 특히 그를 실명시키는 데 관여한 자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엘레니 왕비가 모든 재판과 집행을 주관했고 68명에 달하는 귀족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1131년 동로마 제국이 두클랴를 침공했을 때, 우로시 1세는 제국의 가신으로서 이에 가세했다. 도르제 보디노비치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뒤, 동로마 제국은 그라디냐를 두클랴 국왕으로 세우고 제국에 철저히 복종하도록 했다. 이후 두클랴는 쇠락했고, 우로시 1세는 1143년 또는 1144년에 차남 데사를 두클랴의 영토였던 트라부니야와 제타의 통치자로 세웠다. 우로시 1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학자들은 1146년 우로시 2세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동방 원정을 돕기 위해 보조병 300명을 보냈다는 기록을 볼 때 1144년 또는 1145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우로시 1세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대공이 된 우로시 2세의 형제 데사는 1143년에서 1149년 사이에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두클랴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 크냐지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와 의 형제들을 밀어내고 두클랴 시를 점거했고, 라도슬라프와 두 형제는 코토르 주변으로 이동한 뒤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가 통합되면 제국에 우환이 될 것을 우려해 그전에 응징하기로 했다. 1149년, 마누일 1세는 아드리아 해안의 발로나에서 펠라고니아와 코소보 평원을 거쳐 우로시 2세가 통치하는 지역을 침공했다.

먼저 세르비아 대공국의 수도인 라스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뒤이어 이바르 강 상류의 니카바로 진군해 그곳을 문제 없이 공략했다. 다만 이바르 강 오른쪽 강둑에 있는 갈리치는 3일간의 포위 공격 후에야 함락되었다. 세르비아 포로들은 세르디카 인근에 정착하기 위해 보내졌다. 그 사이, 우로시 2세는 라스 인근에 주둔하던 동로마군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이에 마누일 1세가 방향을 틀어 쫓아오자, 우로시2세는 산악 지대에 몸을 숨겼다. 마누일 1세는 그를 잡지 못하자 여러 거주지를 불태운 뒤 철수했다.

1150년 여름, 마누일 1세는 재차 세르비아 원정을 개시해 니시에 이르렀다. 그는 헝가리 파견군이 루고미르 강 하류에 있는 롱고미르에 주둔해 세르비아인들을 도우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모라바 계곡을 통해 사바로 이동한 뒤 드리나 강을 따라 이동해, 헝가리군이 우로시 2세와 합류하는 경로를 차단했다. 그 후 드리나 강변에서 헝가리군을 상대로 소규모 접전을 치러 승리한 뒤, 동로마 군은 타라 강둑에 진을 쳤다. 다음날 새벽, 스렘 출신의 우가르족, 페네체그존, 하자르족으로 구성된 용병 기병대로 강화된 세르비아군이 강둑에 진영을 친 로마군을 급습했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몸소 전선에 나아가 분전하자, 사기가 오른 동로마군이 세르비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험난한 지형과 눈더미로 인해 동로마군의 행군이 막히자, 황제는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그 대신, 우로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당장 항복하라고 권고했다.

우로시 2세는 제국군의 압도적인 규모와 연이은 패전에 더 이상 저항할 엄두를 못 냈다. 그는 몸소 황제를 알현해 그 앞에 엎드려 영원히 로마인의 노예로 남겠다고 서약했다. 또한 미래에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황제에게 전사 2,000명을 보내고, 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전처럼 300명이 아닌 500명의 전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데사가 자신의 뜻에 반하여 제국을 적대했으니,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요청했다. 마누일 1세는 우로시 2세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줬고, 데사가 두클랴에서 물러나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달마티아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걸 허용했다. 그 후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화려한 옷을 입은 세르비아 포로들을 전리품으로 내세운 개선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를 도운 헝가리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1151년부터 1155년까지 일련의 원정을 벌였고, 우로시 2세는 그런 황제를 도왔다. 그러나 세르비아 귀족들은 우로시 2세가 동로마 제국에 납작 엎드린 것에 반감을 품었다. 특히 그의 형제 데사는 동로마 제국의 압력으로 기껏 얻었던 두클랴를 내준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누이 옐레니가 헝가리 왕비였고 형제 벨로시가 헝가리 궁정백으로 활동하는 만큼, 헝가리 왕국이 동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는 걸 도와야 한다고 여겼다. 1153년, 데사는 반 동로마 성향의 귀족들의 후원에 힘입어 우로시 2세를 축출하고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다.

1155년 9월 헝가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은 마누일 1세는 1155년 또는 1156년 헝가리 귀족들을 압박해 데사를 축출하고 우로시 2세를 복위하도록 했다. 그 대신, 데사에게 니스 인근의 덴드라 일대를 영지로 수여했다. 1160년, 우로시 2세는 룸 술탄국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는 황제를 돕고자 보조군 500명을 파견했다. 1162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우로시 2세를 폐위하고 벨로시를 새 대공으로 세웠다. 하지만 벨로시는 얼마 안가서 형제 데사에게 대공위를 넘긴 뒤 헝가리로 돌아갔다. 마누일 1세는 이를 승인했지만, 덴드라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데사는 덴드라를 넘기길 거부했고,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의 지원을 토대로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1165년 여름, 마누일 1세는 데사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데사는 이에 제대로 맞서보지 못하고 라스 인근에서 생포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이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분할하기로 했다. 자비다의 장남 티호미르를 세르비아 대공으로 삼고, 차남 스트라치미르를 서모라바 공작, 삼남 미로슬라프를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아의 공작으로 삼았으며, 사남 스테판 네마냐를 토플리차, 이바르, 라시나, 레케의 영주로 삼았다.

티호미르는 곧 스테판 네마냐와 갈등을 벌였다. 네마냐는 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쿠르슈믈리야의 성 니콜라오 수도원과 코사니카의 성모 수도원을 건설했다. 이에 자기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긴 티호미르는 형제들을 시켜 네마냐를 유인해 체포한 뒤 영지를 몰수하고 라스 인근 동굴에 감금했다. 네마냐는 동굴 안에서 며칠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네마냐의 지지자들은 티호미르가 교회 건축을 반대하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성직자들이 이를 믿고 티호미르를 비난했다.

그러다 동굴을 탈출한 스테판 네마냐는 1166년 또는 1167년에 반란을 일으켜 티호미르를 폐위시키고 미로슬라프, 스트라치미르와 함께 추방했다. 마누일 1세는 라쉬카의 통합을 원하지 않았기에 티호미르에게 병력을 빌려줬고, 티호미르는 이에 힘입어 네마냐를 공격했지만 즈베찬 남쪽의 판티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시트니카 강에서 익사했다. 다른 형제들은 네마냐에게 항복하여 이전의 영지를 돌려받았다. 마누일 1세는 어쩔 수 없이 네마냐를 세르비아 대공으로 인정했다.

네마냐는 1171년 주르셰비 스투포비(Đurđevi Stupovi) 교회를 라스에 세웠다. 그는 자신이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성 게오르기의 은총 덕분이었다고 선전하였다. 그해 아드리아 해안 일대를 장악한 동로마 제국에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이 접근하자, 그는 이들과 모의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반기를 들기로 하였다. 또한 일전의 패배에 이를 갈고 있던 헝가리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1172년, 네마냐는 모라바 계곡에 군대를 파견하여 니시와 베오그라드 사이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작센의 지배를 받는 라브노의 세르비아인들을 선동했다. 그 결과, 라브노 시민들은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지배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1세까지 끌여들어 반 동로마 전선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가 전염병에 시달리다 작센 함대에 의해 라구사에서 축출되었고, 헝가리에서 친 동로마 성향의 벨러 3세가 즉위하는 바람에 동맹이 무너졌다. 마누일 1세는 이 틈을 타 세르비아로 진격하여 네마냐의 군대를 격파하고 니슈를 포위했다. 네마냐는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찾아가 그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검을 바치며 항복했다. 마누일 1세는 그를 수레에 실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하였다. 네마냐가 다시는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마누일은 그를 용서하고 세르비아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한 뒤 돌려보냈다. 제국의 위력을 실감한 네마냐는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 탄압에 몰두했다. 그는 보고밀 지도자들의 혀를 자르고 추방해 다시는 "해로운 가르침"을 퍼트리지 못하도록 했고, 재산을 몰수하고 교리서를 소각하였다. 하지만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고, 몰수한 재산은 나병 환자와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이리하여 보고밀파는 세르비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180년 9월 24일 마누일 1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헝가리의 벨러 3세는 친 동로마 정책을 접고 1181년 아드리아 해 연안의 북동쪽 도시인 스렘과 제문을 탈환했다. 뒤이어 118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포를 공격했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안드로니코스 람파르다스는 이에 맞섰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를 교살하고 알렉시오스 2세를 실명시킨 뒤 단독 황제로 집권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향후 거취를 놓고 의견 대립이 심해지는 바람에 헝가리군을 상대로 더 이상 통합된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트라야누스 성문으로 후퇴했고, 헝가리군은 약탈을 자행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네마냐는 지금이야말로 독립을 쟁취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1183년 벨러 3세와 동맹을 맺은 뒤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별 어려움 없이 동로마군을 모라바 계곡에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라브노, 니시, 소피아를 연이어 공략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이 곧 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불가리아 서부 일대를 가로질러 돌아가야 했다. 1184년, 미로슬라프는 네마냐의 지시에 따라 코룰라와 비스 섬을 공략하러 함대를 출격했다. 그러나 그해 8월 18일 콜레셰프 인근의 폴지체에서 라구사 해군에게 격파당했고, 라구사 공화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한편 스트라치미르 대공 역시 미로슬라프를 돕기 위해 출격했지만, 미로슬라프가 이미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야 했다.

1185년, 이사키오스 2세 황제는 세르비아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파견했지만, 도중에 페터르 4세 이반 아센 1세 불가리아 제1제국의 부활을 이루기 위해 봉기하는 바람에 회군해야 했다. 네마냐는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반란에 정신없는 틈을 타 스브르히, 라브노, 코첼지를 약탈하고 니시를 정복했다. 이후 1186년 두클랴의 마지막 통치자 미하일로 3세를 축출하고, 장남 부칸을 두클랴를 포함한 제타 공국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제타의 가톨릭 포교를 중단하고 정교회를 도입했으며, 이 지역의 그리스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이후 1186년 9월 27일 라구사와 영구적인 평화 협약을 체결해, 라구사 상인들이 세르비아 영토를 자유롭게 통행하면서 물건을 팔 수 있게 해줬다. 그 대신 라구사 공화국은 라쉬카에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전해지자, 그는 십자군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1188년 뉘른베르크에 사절을 보내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1189년 7월 27일 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니시에 도착했고, 네마냐는 형제 스트라치미르와 함께 황제를 맞이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하려 애썼지만, 황제는 얼른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기에 거부했다. 한달 후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통행로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십자군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자, 네마냐는 이 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스코페 프리즈렌을 공격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 2월 헬레스폰트 해협 대신 다느다네스 해협을 건너는 것으로 이사키오스 2세와 합의를 맺고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1191년, 이사키오스 2세는 군대를 일으켜 세르비아로 쳐들어갔다. 네마냐는 남모라바 전투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하였고, 제국군은 쿠르둠리야에 있는 스테판 궁전을 불태웠다. 하지만 네마냐가 동로마군의 보급선을 유격전을 통해 유린하면서 협상을 요구하자, 동로마 제국 역시 불가리아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협상을 받아들였다. 양국은 네마냐의 차남인 스테판 네마니치와 이사키오스 2세의 조카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또한 빼앗아갔던 영토 대부분은 세르비아에게 돌려줬지만,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분리하고 싶었던 이사키오스 2세의 의향 때문에 니시와 라브노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1193년 헝가리의 벨러 3세가 세르비아를 침략하자, 네마냐는 즉시 출격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1196년 3월 25일 둘째 아들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세르비아 대공 직을 물려주고 아내 아나와 함께 성 베드로 교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으며, '시메온'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스테판 네마냐가 장남 부칸 2세 네마니치가 아닌 차남 스테판 네마니치를 선택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칸이 가톨릭 신자였던 점이 걸림돌로 작용했고, 네마니치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딸과 결혼한 게 중요하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제타 공작이었던 부칸은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했고, 자신을 두클라의 왕으로 자칭했다.

1199년 네마냐가 사망하자, 부칸은 동생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헝가리 국왕 임레와 연합하였고, 교황에게 세르비아를 가톨릭에 봉헌하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두클라에 사절 2명을 보냈지만, 네마니치에게도 사절을 보냈다. 네마니치는 형과 교황의 동맹을 두려워해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세르비아에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201년 아내 에우도키아가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버림으로써, 동로마 제국을 이단으로 여기던 교황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다.

1202년, 부칸 2세 네마니치는 임레 왕의 지원에 힘입어 정변을 일으켰다. 네마니치는 불가리아로 도주하였고, 부칸이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다. 부칸은 헝가리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임레는 모라바 동쪽 지역을 헝가리 영토로 삼고, 칭호에 "세르비아의 왕"을 추가했다. 그러나 1203년 불가리아 군주 칼로얀의 사주를 받은 쿠만족이 세르비아를 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칼로얀은 이틈을 타 그해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1204년 네마니치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라쉬카에서 부칸을 축출하고 세르비아 대공으로 복위하였고, 부칸은 제타로 밀려났다.

1205-06년 겨울 또는 1206-07년 겨울, 네마냐의 셋째 아들이며 이 당시엔 수도자가 되어 '사바' 주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라스트코가 아토스 산에서 포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서 두 형을 중재해 화해시키고, 아버지의 유해를 스투데니카 수도원으로 옮겼다. 네마니치는 라스트코에게 세르비아에 남아서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라스트코는 이에 따라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목회 활동을 수행하였다. 부칸은 1208년 기록에 제타의 왕으로 언급되었지만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다.

1207년 10월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이 테살로니카 공성전을 벌이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보릴이 새 차르가 되었다. 보릴의 친동생 스테츠는 이에 불복하여 세르비아로 피신했다. 보릴은 스테츠를 불가리아로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네마니치는 거부하고 스테츠에게 프로세크 요새 수비를 맡겼다. 1208년 7월 8일 보릴이 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라틴 제국 황제 앙리에게 참패하자,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서 수트루마와 바르다르 강 사이의 땅을 점령한 뒤 스테츠에게 점령지를 다스릴 권한을 넘겨주면서도, 세르비아군을 그곳에 남겨뒀다.

이 무렵, 스테판 네마냐의 셋째 형이자 훔의 영주였던 미로슬라프가 사망했다. 안드레아 마로사블예비치가 뒤이어 통치자가 되었지만, 훔 귀족들은 그의 형제 페타르를 훔의 공작으로 추대하여 안드레아를 추방하였다. 안드레아는 네마니치의 궁정에서 숨어지냈고, 네마니치는 전쟁을 일으켜 페터르를 격파하고 훔과 포포브를 공략했다. 페터르는 헝가리로 달아난 뒤, 안드라시 2세가 점령한 네레트바의 서북부를 통치했다. 네마니치는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를 훔 공작으로 삼았고, 안드레아에게는 스토네를 포함한 훔의 해안지대와 포포보 지역을 줬다.

1208년, 부칸의 아들 도르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그들의 힘을 빌러 네마니치를 물리치려 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또 다른 봉신인 디미트리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베네치아에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네마니치는 이에 대항하고자 딸 콤네나를 디미트리와 결혼하였다. 1214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초대 데스포티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크루자를 공략하고 디미트리가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콤네나는 미하일을 대신하여 크루자를 다스린 그레고리오스 카모나스와 결혼했다. 1216년 조르제가 사망하면서 제타는 다시 네마니치의 수중에 들어갔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제타를 공략하려 시도했지만 격파되었고, 네마니치는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에게 제타를 영지로 넘겨줬다.

1214년 말 또는 1215년 초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암살당했고,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피로스의 새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네마니치는 아들 라도슬라프와 테오도로스의 딸 안나 두케나 앙겔리나의 결혼을 성사시켜서, 세르비아와 이피로스의 전쟁을 종식했다. 1217년, 스테판 네마니치는 로마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왕관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3. 역대 대공

군주 재위 기간(년) 비고
부칸 1세 1091~1112
우로시 1세 1112~1145
우로시 2세 1145~1153
데사 1153~1155
우로시 2세 1155~1162
벨로시 1162
데사 1162~1165
티호미르 1165~1168
스테판 네마냐 1168~1196
스테판 네마니치 1196~1202
부칸 2세 네마니치 1202~1204
스테판 네마니치 1204~1217

[1] 부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고 부칸의 조카 우로시 1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