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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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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정보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자연과학캠퍼스
대학 정보
성균관 역사 학부
대학원 연구 학사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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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약사(成大略史)
<colbgcolor=#2e4e3f><colcolor=#f5f5f5,#191919> 1398 서울 동북방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成均館) 설립
1895 칙령에 의하여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
1911 경술국치 이후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
1930 명륜학원(明倫學院) 부설
1939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
1942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설립
1944 명륜연성소(明倫鍊成所)로 개편
1945. 9.
해방과 함께 명륜전문학교로 환원, 재개교
1945. 11.
전국 유림 대회에서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의 설립을 결의
1946. 9.
학린사(學隣舍)와 명륜전문학교가 병합되어 성균관대학 설립
1953. 2.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인가를 얻어 문리과 대학, 법정대학, 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 및 대학원을 신설
1963. 10.
사립학교법 공포·시행에 따라 재단법인 성균관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

1. 기원2. 연혁3.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3.1. 왜곡
4. 역대 임원
4.1. 이사장4.2. 총장
5. 관련 링크

[clearfix]

1. 기원

파일:성균관_명륜당.jpg
성균관 명륜당
고려의 개성 성균관을 이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계승한 성균관대학교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성균관대는 한양 천도 이후 새롭게 성균관이 설립된 1398년을 건학 원년으로 여긴다. 이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 위치를 고려한 것이다.

구한말 성균관은 고전 대학으로부터 근대 대학으로의 전환[1]에 착수했으나 나라가 일제 치하에 놓이며 일개 전문학교 수준으로 격하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광복 이후 유림들의 노력으로 하여금 성균관대로 거듭남으로써 개화기에 시작된 근대적 개혁을 완수하였다.

2. 연혁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 개혁이 단행된 개화기를 즈음하여 성균관 또한 근대적 대학 교육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895년 고종의 칙령에 의해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가 설치되었고 역사학, 지리학, 수학 등을 가르치는 각종 강좌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학기제, 교수 임명제, 입학시험제와 졸업시험제가 실시되었으며 연간 수업 일수와 주당 강의 시간 수를 책정하는 등의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성균관은 최고 국립대학으로서의 교육 기능을 잃고 1911년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격하되어 제례를 비롯한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주로 일제의 교화기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성균관의 관직명만을 차용했을 뿐 그 인적 구성은 전혀 달랐다.[2] 이후 일본 쪽에서 유학 열풍이 불자 경학원을 명륜학원으로 바꾸어 일부 교육기능이 회복되었으나, 그 내용은 일본식 유학이었다. 명륜학원은 1939년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거듭나 유학, 법률, 경제의 학과로 구성되어 경성제대 교수가 강의를 맡았다. 그러나 곧이어 태평양 전쟁이 격화, 1944년 명륜연성소로 개칭되어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연성소 중 한 곳으로 전락했다. 때문에 명륜전문학교는 한 번도 졸업생을 내지 못했다. 식민지기 유교 고등교육과 명륜전문학교

해방 이후 군정법령 제6호에 의해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 군정법령 제15호 제2조에 의해 '성균관' 명칭이 회복되었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玆)에 차(此)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3]에 효력을 생함

1945년 10월 16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같은 해 11월 30일부터 6일간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전국 유림 대회를 통해 전국의 유림 천여 명은 성균관대학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으며, 고문에 이승만 김구, 위원장에 김창숙 뽑혔다. 이후 일제가 박탈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성균관대학 기성회[4]가 조직되었으며, 이석구[5]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53만여 평에 이르는 토지재산을 기부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6]이 설립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지방 각지의 향교들 재산과 유림의 기부금이 모였다. 이로써 명륜전문학교와 학린사 등이 통합되어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1946년 9월 25일 문교부에 의해 2개 학부[7]로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어 김창숙이 초대 학장으로 취임[8]하였다.

1953년에 성균관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사립학교법 시행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의 분리가 이뤄졌다.

1965년부터는 삼성문화재단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였다. 자연과학 계열 단과대들이 수원의 자연과학캠퍼스로 이전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허나 당시 삼성이 서울에 있던 학교 부지 일부를 매각하면서 이익을 챙겼다는 이유와 학내의 극렬한 반대 등으로 결국 1977년 삼성문화재단이 퇴진하였다.

이후 민관식 이사장 체제를 거쳐 1979년부터 도투락, 아세아시멘트 등을 거느린 봉명그룹 계열 '봉명재단'이 성균관대학의 경영권을 인수하였다.[9] 인수 후 이동녕 창업주가 성균관대학 이사장직에 앉았다. 자연과학캠퍼스 이전이 완료되고 10여 년간 운영에 참여했으나, 건학 600주년을 7년 앞둔 1991년에 봉명재단이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였다. 교수, 졸업생 할 것 없이 성균관대의 최대 암흑기라고 말하는 시절이 이 때다.[10] 같은 해 장을병이 새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백남억 이사장 체제로 5년간 모기업도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되다가 다시 1996년부터 삼성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였다. 삼성은 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공급할 의사가 필요하였기에, 자체적으로 의대를 갖고자 하였지만 수년간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성균관대 역시 의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 상태가 열악하여 새로운 재단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과학캠퍼스는 경기도에 위치했기 때문에 덕분에 의대 신설이 가능한 상태였다. 의대를 간접적으로라도 소유하고자 하는 삼성의료원의 의지, 의대 신설 및 기업 재단의 지원을 모두 바라는 성균관대의 의지 그리고 경기도의 의대 정원 증원이 가능했던 현실 등이 어우러져 성균관대 의과대학이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던 것이다.[11]

삼성 인수 후 재단은 권이혁 전 문교부 장관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고, 처음에는 의대 위주로 지원하였으나 점점 지원 범위 및 운영 참여를 확대하였다. 반도체시스템공학과와 같은 특성화 학과나 의대는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글로벌경영학과, 글로벌경제학과, 소프트웨어학과와 같은 특성화 학과를 계속 신설하고 있다. 나아가 기업이 재단을 쥐고 있다 보니, 연구 수주나 PR 등에서 기업가적인 면모를 보인다. 연구 수주 시즌에는 몇 개의 관련된 과들을 임시로 통폐합해서 연구 지표 관리를 해주기도 하며, PT도 기업가식으로 만든다. 그 밖에도 재단 쪽에서 적극적으로 학교 홍보 및 대외 관계 유지 등을 매우 치밀하게 하고 있다.

3.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균관대는 성균관의 정신적 계승과 법률적 인계를 둘 다 했으며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균관은 친일적 황도유학(皇道儒學)의 산실로서 전통적인 유교의 가르침을 이어나가지 못했을 뿐더러 근대적 대학 교육 기능을 상실한 채 그 장소만을 이용당했다. 또한 상술했듯이 성균관대의 설립은 전국 유림 대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등, 일제의 명륜전문학교와는 행정상으로만 연관될 뿐 명목적/실질적으로 모두 계승하지 않았기에, 성균관대의 홈페이지에는 명륜전문학교 시절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설명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고등학교기관은 과거 최고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이는 말 그대로 정통, 즉 바른 계통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의 이념을 기반으로 다스려졌다. 일국으로서의 독자성마저 희석되어 완전히 소멸될 위기에 놓였으나,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하여금 여태 명맥이나마 간신히 이어온 과거 조선왕조 시절의 풍습과 문화를 회복하여 한민족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정신이 바로 섰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명륜전문학교를, 조선왕조에 성균관을, 대한민국에 성균관대를 대입해서 생각하면 학교 측에서 어떤 말을 하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앞선 위 문장에 이어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게재되어 있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이 조선왕조로부터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듯, 성균관대가 성균관으로부터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은 자명하다.

또한 옛 성균관이 성균관대 인사캠의 부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여 성균관대가 성균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성이 부정될 수는 없다. 성균관과 분리되어 있다고는 하나, 1963년 사립학교법이 시행된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옛 성균관이 성균관대의 캠퍼스 부지로부터 제외된 것일 뿐이다. 성균관과 성균관대의 역사적 연관성은 그보다 전에 이미 정립된 상태이므로 오늘날 그 관리상의 주체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써 그 역사성을 부정할 수 없다. 나아가 설사 성균관대가 설립 당시부터 옛 성균관과 전혀 다른 위치에 세워졌더라도 성균관을 계승하였음이 법률적으로 명백한 이상 성균관대의 역사성은 반박될 수 없다.

아울러 개교 당시 지방 각지의 향교들 재산과 유림의 기부금으로 근대 성균관대학이 설립된 것은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군정법령 제194호

제6조 향교 재단의 재산으로부터 생하는 수입은 좌의 목적 이외에는 사용함을 부득함.

1. 성균관 급 성균관 대학의 유지
2. 도내 각 문묘의 유지
3. 교육 기타 교화 사업의 경영

그리하여 비록 오늘날 법적으로 캠퍼스 면적에 옛 성균관이 포함되는지의 여부는 성균관대의 정통성을 따지는 일과는 연관성이 적으나, 부연하자면 여전히 옛 성균관과 성균관대는 여러 면에서 서로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다. 옛 성균관은 과거의, 오늘날의 인사캠은 현재의 대학 캠퍼스인 셈으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법적으로만 분리되어 있을 뿐, 지리적으로 서로 붙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성균관대 정문의 안쪽 오른 편에 옛 성균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성균관대 국제관에서 옛 성균관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잘 정비되어 있어서 명륜당 앞마당을 거쳐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 성균관대 인사캠의 캠퍼스 지도에는 옛 성균관의 건물[12]이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학교 홍보물이나 굿즈에도 명륜당의 이미지가 사용되며 인사캠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아가 재단 분리 이후에도 성균관대와 성균관은 활발한 인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성균관대 총장이 성균관의 당연직(當然職) 이사를 맡고, 성균관장은 성균관대의 당연직 이사를 맡으면서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재단 분리 이전에는 성균관장과 성균관대 총장을 한 사람이 겸임하였다. 이후에도 성균관장에는 성균관대 총장이나 성균관대 교수 출신이 취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성균관의 중요 행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문화적 가치가 높은 석전(釋奠)에는 성균관대 총장이 매번 빠짐없이 참석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성균관대 총장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성균관이 유교만 배우던 학교라 애초에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1088년에 설립되었음을 널리 인정받는  볼로냐 대학교 역시 중세에는 당시 가장 지배적인 가치관이자 패러다임이었던 기독교를 연구하며 사제를 배출하던 곳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사실상 교회법과 민법이 교육과정의 전부였다. 서양에서 교회법과 민법을 연구하며 사제를 배출했듯이 조선에서는 유학을 연구하며 유학자를 배출한 것이다. 따라서 성균관은 세계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일제와의 단절을 이유로 경성제국대학 시절을 지우고 1946년 개교를 말하는 서울대학교조차 건학년도는 법관양성소가 설립된 1895년으로 잡고 있는 등 타 대학도 건학년도에 있어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2016년 타임스지는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학 25곳을 발표하면서 성균관대를 19위에 선정한 바 있다. 나아가 1998년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 행사에는 옥스퍼드대, 도쿄대 등 세계 명문대 총장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등이 자리해 축하 연설을 하였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는 성균관대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홍보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조선일보 기고하였다.

요약하자면 성균관대는 성균관을 정신적, 대승적, 상징적인 차원에서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공식 서류를 비롯한 여러 근거들로 명백히 입증 가능한 법적 승계를 이뤘다.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성균관이 완전히 사라지고 성균관대가 나타나 그 역사를 이어나갔다는 세간의 인식과도 달리 조선의 성균관이 대한민국의 성균관대로 거듭난 것이다. 고로 성균관대를 조선의 성균관을 계승한 후신이라고 보기보다는, 조선의 최고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그 자체가 일제강점기와 현대 한국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3.1. 왜곡

성균관대의 역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인터넷상에 글이 종종 올라온다. 예를 들어 1959년이나 1966년이 새겨진 교표[13]를 가져와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식이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어 질문하는 경우 있다. 1959년은 성균관대에 독어독문학과가 신설된 해다. 교표 가운데 '獨文(독문)'이라는 한자가 박혀 있으므로 이 교표는 독문과가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66년이라 표시된 교표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확실히 알기는 어려우나, 정상적인 성균관대 교표가 아니다. 1398이라 표시된 것만이 성균관대의 정식 교표다.

나아가 인터넷상에서 성균관대의 역사가 화두에 오를 때마다 "나도 경주에 ' 화랑대학교' 만들면 1500년 역사냐?" ?라는 식의 비아냥대는 댓글이 달리곤 하는데, 이는 성균관대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균관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 그 명칭만 임의적으로 학교명에 가져다 붙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의 성균관대는 국립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선 왕실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운영주체가 바뀔 때마다 조직은 완전히 소멸된 뒤 전혀 다른 조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데다가, 애초에 성균관대의 정통성은 국립대 여부와 상관이 없다.[14]

4. 역대 임원

4.1. 이사장

  • 초대 조동식 (1946~1954/1958~1960)
  • 2대 이명세 (1954~1957/1960~1962)
  • 3대 이명구 (1957~1958)
  • 4대 이관구 (1960~1963)
  • 5대 이원혁 (1963~1965)
  • 6대 이병철 (1965~1977)
  • 7대 민관식 (1977~1979)
  • 8대 이동녕 (1979~1991)
  • 9대 백남억 (1991~1996)
  • 10대 권이혁 (1996~2007)
  • 11대 임관 (2007~2011)
  • 12대 서정돈 (2011~2019)
  • 13대 김준영 (2019~)

4.2. 총장


5. 관련 링크


[1] 1895년을 성균관 근대교육의 시발점으로 인식해 온 성균관대는 1975년 9월 성균관 근대교육 80주년을 맞아 국내외 학자를 초빙하여 국제동양학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2] 예를 들면 이인직이라는 자가 대사성 직을 받아 친일 순회강연을 다녔는데, 이 자는 기존의 성균관과는 일말의 관련도 없는 친일파 인사이다. [3] 야반은 본래 삼경(三更), 즉 자시(子時)로 밤 11시~1시를 가리키며 그 가운데가 자정(子正)이다. 여기서는 10월 16일 24시, 즉 10월 17일 0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4] 대표는 김창숙이 되었다. [5] 李錫九, 1880~1956. 호는 학봉(學峯). [6] 초대 학장 김창숙, 초대 이사장 춘강 조동식 박사 [7] 문학부(동양철학과, 문학과, 사학과) 및 정경학부(법률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 [8] 또한 당시에는 성균관대 총장이 성균관장을 겸임했다. [9] 그 전에 전두환 정부에 의해 사라진 대기업이었던 부산 동명목재에 인수를 제의 하기도 했으나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이 자신의 고향인 부산에서 대학을 설립하겠다고 인수를 거절했다고 한다. # [10] 봉명재단의 경영이 어려워질 때마다 학교 땅을 팔아 적자를 메웠다는 소문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11] 또 호암 이병철 회장의 유언과 관련이 있다고도 한다. 서정돈 재단 이사장이 바로 이병철 회장 주치의 출신이었다. [12] 대성전, 명륜당, 비천당 등 [13] 파일:성균관_역사에_대한_악의적인_왜곡_예시.jpg [14]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공기업인 포항제철이 민영화로 포스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자의 조직과 후자의 조직은 연속성을 가지며 같은 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