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9 23:06:07

서강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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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약사(略史)1.2. 서강대학교 이름의 유래
2. 역사
2.1. 1950~60년대: 서강의 태동
2.1.1. 개교의 큰 뜻을 품다2.1.2. 졸업하기 어려운 '소수 정예' 서강대학
2.2. 1970년대: 서강의 성장2.3. 1980년대: 서강의 발전2.4. 1990년대 ~ 2000년대: 서강의 확립2.5. 2010년 ~: 서강의 미래
3. 연혁표
3.1. 개교기3.2. 1970년대3.3. 1980년대3.4. 1990년대3.5. 2000년대3.6. 2010년대3.7. 2020년대
4. 학과 구성 변천사
4.1. 1970년 이전4.2. 학부제 실시 이전(~1995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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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간결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의 대학교라면 흔히 갖고 있는 대학 인수/합병의 역사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개교 이래 교포와 교명도 사실상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1] 이는 미국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가 학교를 개교한 이래, 구성원들이 '소수정예'를 목표로 서강대학교만의 학풍을 유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덕분에 타 명문대에 비해 다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내실을 우선시한 성장을 통해 기업들 사이에선 내실 있는 학교로 통하며, 의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대를 가지고 있는 타 대학들과 함께 명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강대학교는 1960년 개교하자마자 명문대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예수회가 한국 땅에 세운 대학이라는 사실은 설립 준비단계에서부터 이승만 대통령 등 여러 국가 지도자국 인사들의 관심을 얻을 정도였던 데다가, 위스콘신 관구의 사제들을 통해 미국에서 건너온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교육 방식을 대거 적용한 덕택이었다. 애초에 교수진부터가 당시엔 흔치 않던 외국인이나 유학파들로 채워져 있었고, 덕분에 당시 한국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학생을 입학시킨 한국 최초의 대학이며[2],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현대식 기술들이 학교를 채웠다. 수세식 화장실부터 메인프레임 컴퓨터까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이지만, 이는 모두 서강대학교가 국내 대학으로선 처음으로 도입한 것들이다.

상술됐듯 서강대학교는 다양한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를 모델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대학이며,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의 지원 아래 국내 최초의 개가식 도서관(로욜라 도서관), 국내 대학 최초의 전용 공연장, 시청각 스튜디오 및 전자계산연구소를 갖추었다. 지금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생지도교수제도, 다전공 및 학생설계전공제도 역시 서강대가 국내 최초이다. 1981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새터를 시행한 대학이기도 하다. #

1.1. 약사(略史)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창립이 기획돼, 1960년 4월 18일 가톨릭 수도회 미국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에 의해 6개 학과 158명의 신입생으로 개교했다. 1960년 1월경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는 대학 설립계획을 완료했으나 준비 과정에서 교명을 결정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장안대학(長安大學)'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학교 소개 팜플렛 「장안대학일람(단기 4293년도)」을 발간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너무 뜻이 좁고 평범하다는 등의 이유로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학교 이름을 고치기 위해 2차례 모임이 열린 끝에 '서강'으로 결정됐다. 초대 이사장은 역시 예수회 계열인 일본 조치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던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였는데, 그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일본 유학시절 은사였다.[3]

개교 이후 서강대는 교수진 특유의 학문적 수월성과 커리큘럼, 엄격한 학사제도, 탄탄한 재정에 따른 첨단시설, 교수 대비 학생 수의 유지관리, 진보적 교육관 등에 힘입어 새로운 대학 이미지를 제시했다. 이는 1966년 경향교육상 수상을 통해 국내 최우수 모범대학으로 선정되는 영예로 이어졌다.

1960년 영문, 사학, 철학, 수학, 물리, 및 경제 6개 학과들을 설치하여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를 모델로 개교한 지 10년이 지난 1970년에 종합대학으로 전환하여 인가됐다. 서강대학교는 국내 최초 대학 공연장인 메리홀(Mary Hall), 완전 개가식체제의 로욜라 도서관(Loyola Library)을 개관했으며 지정좌석제, FA(Failure because of absence) 제도 등 학사관리와 자율전공제, 다전공제, 연계전공제도 등을 채택해 왔다.

오늘날 8개 학부와 11개 대학원의 총 14,800여 명 학생이 재적하고 있다. 현재까지 6만여 동문을 배출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한국서비스품질지수 종합대학교 1위,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 조사에서 전국 4년제 종합대학 정규직 취업률 1위 등 빛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1.2. 서강대학교 이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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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 설립의 주역들. 좌측 하단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 헙스트 신부, 진성만 베드로 신부, 프라이스 신부, 데슬렙스 수사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길로련) 신부님께서 완강히 '서강'을 고집하셨다. 학교 이름을 지을 때는 그 학교 주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였다.
"옥스퍼드란 '[牛] 우리'를 뜻하는 겁니다. 오늘날 옥스퍼드 대학교는 전 세계적으로 학구적인 명망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1960년 1월, 모교 이름이 '장안(長安) 대학교'로 잠정적으로 결정돼 대외적으로 쓰이고 있던 당시의 일이다. 학교 이름이 너무 평범하다는 지적에 학교 이름을 새로 정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장안(長安), 광화(光化), 성지(聖志), 성지(誠志), 명덕(明德), 명도(明道), 상지(上智), 진단(震旦), 진성(珍聖), 대건(大建), 명진(明珍), 경서(京西), 한성(漢城) 등 여러 후보 가운데 '서강(西江)'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당시 학교 이름을 정하는 데 관여했던 이들은 이해남 교수를 비롯한 예비 교직원들과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테오도르 게페르트, 김태관, 헙스트, 프라이스 신부 및 신학생 도일 등이었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은 ' 한강의 서쪽 줄기'라는 뜻을 가진 '서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강'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면, 그 시절 학교 근처에서 팔던 지독한 새우젓 냄새가 연상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로련 신부님께서 완강히 '서강'을 고집하셨다. 학교 이름을 지을 때는 그 학교 주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였다. “ 옥스퍼드 대학교를 보세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옥스퍼드란 '소 우리'를 뜻하는 겁니다. 오늘날 옥스퍼드는 전 세계적으로 학구적인 명망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한참 동안 계속된 학교 명칭에 대한 토론은 '서강'으로 결론났다. 새우젓 냄새도 날려버린 '서강'이었다.
- 370호 서강옛집 '김인자 명예교수가 이우진(60 사학) 동문에게 들려준 이야기' 中

2. 역사

서강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영상

아래 내용은 서강대학교 및 서강대학교 총동문회에서 발간한 여러 홍보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2.1. 1950~60년대: 서강의 태동

2.1.1. 개교의 큰 뜻을 품다

1948년 9월, 한국 가톨릭 교회가 한국 땅에 가톨릭 대학 설립을 요청한 것이 서강대학교의 시작이었다. 교황 비오 12세가 이를 윤허하면서 설립이 본격화되나 싶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대학 설립 움직임이 재개되었다. 1954년 노기남 대주교가 예수회 로마 본부에 가톨릭 대학 설립을 요청했으며, 예수회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한국 땅에 예수회 대학교를 설립하는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예수회는 대학 설립을 위해 훗날 서강대의 설립자가 될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를 한국에 파견했는데, 이것이 1954년 10월의 일이었다. 당시 게페르트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일본 조치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이 덕에 아시아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4]

이듬해인 1955년 2월에는 대학 설립의 주체가 예수회 일본 관구에서 미국 위스콘신 관구로 이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위스콘신 관구장 레오번즈 신부가 직접 한국에 넘어와 대학 설립 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서강대학교 설립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게페르트 신부가 노기남 주교, 레오번즈 관구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대학 설립 인가 등을 논의했다. 예수회가 한국에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에 대해 국내에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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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있는 대학 설립 관계자들[5]

대학 설립 작업이 본격화된 이후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대학을 위한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서울에는 워낙 산과 암반지대가 많다보니 마땅한 부지를 찾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사제들이 부동산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고.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서강대 부지를 매입한 예수회 사제들은 문교부에 대학 설립 인가를 신청함과 동시에 교사 건설에 착수했다. 신촌로터리에서 교문까지의 진흙탕길에 도로를 깔고,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밑에서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했던 김중업에게 캠퍼스의 설계를 맡겼다. 다만 이때 문교부는 학교 건물도 없는 데 설립 인가를 내줄 수는 없다고 밝혔다.

1959년 11월, 서강대 본관(A관)이 완공되었다. 본관은 김중업이 세심하게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국내 대학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구비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건물이었다. 당시로선 생소한 건물 설계여서 당국에 도면을 제출했을 당시엔 일부분[6]의 승인을 거부당하기도 했다고.[7] 그 시절엔 찾아보기 힘들던 난방 시설에 수세식 화장실[8]이나 화장지(...)까지 갖춰져 있어, 재학생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9] 참고로 서강대 본관은 현재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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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직후의 서강대 본관과 주변 전경

1960년 1월, 교명이 '서강'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서강대학교 설립에 관여한 천주교 인사 15명이 긴 논의와 투표를 거친 결과다. 본래는 '장안대학'이 유력한 후보였으나, "명문학교는 근처의 지명을 따 짓는 것이 오랜 전통"이라는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의 설득이 먹혀들은 것. 같은 해 2월에는 안교부로부터 대학의 설립을 최종 인가받았으며, 이에 따라 1960년 3월 입학시험을 진행했다. 모집 정원은 160명이었으나 600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개교 당시 이미 56개의 대학이 인가되어 있었고, 대학의 설립 허가가 난 지 불과 1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상당한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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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10일 서강대학 설립 인가증

1960년 4월 18일, 드디어 서강대학이 정식으로 문을 열고 수업을 시작했다. 6개의 학과, 13명의 교수 및 강사진, 158명의 학생이 서강대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4.19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개교 바로 다음 날 임시 휴강이 시작됐다. 학교는 4월 29일이 돼서야 다시 문을 열었다.

2.1.2. 졸업하기 어려운 '소수 정예' 서강대학

서강대학은 출범 당시부터 선진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재학생들을 가르쳤다. 미국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의 전폭적인 도움 아래, 국내에선 찾아보기 힘들던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 대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앞서나갔던 서강에 대한 당시 재학생과 교수들의 자부심은 상당했다.

개교 이래 서강대학에는 다양한 물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국내 대학 최초로 텔레비전 강의(1967)를 실시하고 슈퍼컴퓨터[10]를 도입(1968)했는데, 이 내용들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경제·경영문제연구소, 산업문제연구소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소도 설치되었다. 이중 전자계산연구소는 국내 대학 최초로 설치된 것이다.

건물도 계속해서 확충해서 1963년에는 학생회관(C관)이, 1967년에는 마테오 리치 과학관(R관)이 준공되었다. C관의 경우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김정수 선생이 설계한 건물으로, 국내 대학 최초로 각종 전자 기기들이 갖춰진 어학 실습실(일명 랭귀지 랩)과 시청각 교실을 갖춘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R관 역시 당시로선 매우 앞선 최신식 건물이었다. 독일인 기사가 미국산 자재로 지어 그렇게 튼튼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리모델링에도 곤란을 겪었을 정도. 70년대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수험생이 처음 본 R관 수세식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물을 어떻게 내리는지 몰라 당황해 하다가 서강대 입시에서 떨어졌다는 소문마저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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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로 TV을 사용해 강의가 이뤄졌음을 알리는 기사[11]

물적 지원뿐 아니라 '선진 교육 DNA'를 이식하는 작업도 진행됐다. 개교 당시부터 한 명이 여러 개의 전공을 취득할 수 있는 개방적 학사제도로 국내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고, 한국 최초로 교수 안식년 제도(1966)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교수들이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엄격한 학사 관리였다. 얼마나 엄격하게 학사 관리를 했는지, 1961년 당시 1학년의 40% 가까이가 학사 경고를 먹었다고 하며, 덕분에 개교 첫해부터 '서강 고등학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교수님들은 매우 엄격하게 성적을 매겼으며, 시간을 매우 중시 여겨 결석 처리도 칼같이 진행했다고 전해진다. 졸업생 인터뷰에 의하면 교수님들이 교탁에 시계를 올려놓고는 수업 시작 10분이 지나면 뒤늦게 들어와도 무조건 결석 처리를 했다고.[12] 지금도 잔존하고 있는 지정좌석제나 FA제도 역시 모두 개교 당시부터 있었다. 이 때문에 서강대학은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졸업하기는 더 어려운 대학'으로 알려졌다. 이는 '대학교만 들어가면 놀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던 한국의 학생들과, 한 학기에 몇 차례만 강의해도 문제가 없었던 한국의 교수 사회 모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설립 초기의 서강대 교수는 "학교 운영도 원칙에 따라서 어떠한 수준으로 운영이 돼야 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국내 대학들에) 모델을 제시"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2.2. 1970년대: 서강의 성장

'소수 정예'를 향한 서강인들의 노력

한편 서강대학교는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1970년 빛을 볼 수 있었다. 서강대학은 개교 10주년을 맞은 1970년, 3개 단과대학에 1,200명의 재학생을 가진 종합대학으로 발전했다. 교명도 '서강대학'에서 '서강대학교'로 고쳐 달았다.

그러나 서강은 종합대학교가 됐음에도 '소수정예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대학들이 양적 팽창을 추구하던 이 시기였지만, 질 높은 교육을 향한 학교 측의 노력은 단호했다.
서강대학교는 우수한 교수진과 시설을 갖추고 학생들의 질적 수준을 보다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여 왔습니다. … 우리 학교는 앞으로도 정원 2,000명을 초과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작은 대학교로 머물 것이나 질적인 면과 장학방침에는 계속하여 향상시키고 개선하려 합니다.
- 데일리 총장의 개교 10주년 기념사 中
서강대학교는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을 타 대학과 비교하여 매우 높은 수준인 1 대 20 정도로 유지했으며, 우수 교수진들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속 유치했다.

이러한 노력이 빛을 본 대표적인 사례가 서강학파이다. 서강학파는 서강대 교수진들이 경제 관료로서 1970년대 한국의 고도 성장을 주도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강대 교수진들이 한국의 경제 정책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서강대에서 좋은 조건으로 미국 유학파 출신 교수들을 선점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1971년 당시 미국 경제학 박사 학위를 소유한 교수는 10명이었는데, 그중 무려 5명이 서강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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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학파의 출발을 알린 남덕우 교수의 총리 임명

우수한 대학을 위한 서강인들의 노력으로 로욜라 도서관 완공 역시 빼놓을 수 없다. 1973년 완공된 로욜라 도서관은 서강인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 곳이자, 서강인들의 자부심이었다.

서강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변모하면서 독립된 도서관이 필요해졌다. 이에 1971년 8월, 존 P. 데일리 총장이 도서관 신축 계획을 밝히면서 건립이 가시화됐다. 설계는 외국에 위탁했으며, 1년여의 공사를 거쳐 1973년 완공했다. 국내 최고의 도서관을 짓겠다는 목표에 어울리게, 도서관 개관식은 P. 데일리 총장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과 자블럭 미국 하원의원, 주한 독일 및 필리핀 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로욜라 도서관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 최초의 완전 개가식 도서관이었다는 점이다. 완전 개가식 도서관은 서고와 열람실의 구분이 없기에 도서관 내에서 손쉽게 책을 찾아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책이 고가였던 데다가, 분실 방지 시스템도 마땅치 않아 찾아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서강대에서도 책 훼손이나 분실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책을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공유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서강대 신부님들의 철학 덕분에 개가식 도서관 운영이 가능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후에 책 훼손이나 분실이 여럿 발생했으나, 도서관 관계자들은 "비록 책 도둑이라 할지라도 '그대 서강의 자랑'이기에 훗날 훔친 책 가격 100배 이상의 기여를 도서관에 해주길 기대한다"라고 반응했다. 다른 대학들처럼 폐가식으로 바꾸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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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 도서관의 준공 직후 모습

2.3. 1980년대: 서강의 발전

서강, 한국에 뿌리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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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강대학교 전경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상향 평준화된 지금에 와서는 다소 옅어진 인식이지만, 과거 서강대학교 재학생들은 타 대학교 학생보다 영어를 훨씬 잘한다는 인식이 강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는 개교 이후의 서강대를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서 관할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강은 개교했을 때부터 예수회 신부 및 유학파 교수들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국내 최초로 외국인 영어 강의를 시작했다. 또한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학교 당국의 공문서 작성이나 교수 회의 진행은 모두 영어로 이루어졌다. 학교의 중요 보직 역시 대부분 미국인이 맡았다. 사실상 서강의 공식 언어는 영어였던 셈이다.

이러한 점들 덕분에 서강에는 기존 국내 대학에선 상상치도 못했던 선진적인 학사 운영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다니는 대학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정체성 면에서 다소 어색한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 예수회가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한국 예수회 내에서는 미국 위스콘신 관구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런 인식이 무르익게 된 배경에는 한국의 교회와 대학은 한국인이 운영해야 한다는 바람이 스며있었다. 한국 예수회의 독립 문제는 서강에도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5년, 예수회 한국지부가 예수회 한국지구로 승격되며 결실을 맺었다. 한국 예수회가 미국 위스콘신 예수회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서강의 운영은 한국인 신부들이 도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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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를 방문한 테레사 수녀(1981)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4)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강은 한국에 새로운 대학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앞장섰다. 1980년에는 국내 대학 중 최대 규모의 체육관을 준공했고, 1981년에는 국내 대학에 '새터'라는 새로운 문화를 선보였다. 또 1985년에는 정부의 '학도호국령 설치령'으로 인해 위축됐던 학생 활동을 활성화시키고자 총학생회를 부활시켰는데, 교수와 학생이 함께 참여한 특별 위원회를 주축으로 타 학교와 달리 큰 마찰 없이 학생 자치 활동 부활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편 1986년에는 도서관에 컴퓨터를 이용한 업무 전산화를 시작했다.

2.4. 1990년대 ~ 2000년대: 서강의 확립

서강, 국제화/정보화 시대의 주역이 되다.
파일:90년대 서강대 전경_revised.jpg
1990년대 초반 서강대학교 전경[13]

1990년대에 이르러 서강은 국제화, 정보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쳤다.

1992년에는 성당, 강당 및 해외 초빙교수 숙소 등으로 사용되는 이냐시오관을 개관했으며, 1993년에는 동시통역실 및 각종 세미나룸을 갖춘 다산관을 준공했다. 공학부를 위한 아담샬관(1995)과 언론인 육성을 위한 삼성 가브리엘관(1997)도 준공되었다. 한편 1997년에는 국제대학원과 정보통신대학원의 석사학위과정을, 1999년에는 영상대학원 석·박사학위과정을 개설하며 국제화 및 정보화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힘썼다.

서강이 개교 당시부터 강조해오던 창의적이며 유연한 인재를 기르기 위한 노력도 계속됐다. 특히 1999년에는 연계전공 및 학생설계전공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국내 대학 최초의 일이다. 이런 융합형 전공 제도는 2010년대 들어 다른 대학에도 유행처럼 번졌다. 서강이 미래형 대학교의 롤모델로서 융합 교육의 확립에 앞장선 것이다.

2.5. 2010년 ~: 서강의 미래

3. 연혁표

3.1. 개교기

<colbgcolor=#b60005><colcolor=#fff> 서강대학교 개교기 연혁표
일자 내용
1948. 09 한국 가톨릭 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됨
1954. 10 예수회원 Theodor Geppert, S.J.( 독일인)가 서울에서 창립준비에 착수함
1955. 02 예수회 총장 신부 Jean-Baptiste Janssens, S.J.(벨기에인)께서 예수회 위스컨신 관구로 창립 사업을 이관하였으며, 미국 위스컨신 관구장 신부 Leo Burns, S.J.께서 한국에 와서 한국가톨릭교회와 함께 대학 설립과정을 시작함.
1955. 03 예수회 미국 위스컨신관구로 창립 사업을 이관
1955. 04 미국 위스컨신관구장 레오번즈 신부와 노기남 바오로 주교, 게페르트 신부가 대학 설립과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
1955. 10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미국 위스컨신 관구로부터 예수회원인 Kenneth Killoren, S.J.와 Arthur Dethlefs, S.J.가 한국에 도착
1955. 11 김태관, S.J.가 인천에 도착.
1956. 11 - 재단법인 한국예수회 인가를 얻음.
- Clarence Herbst, S.J.가 한국에 도착.
1957. 01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 토지 67,075평을 교지(校地)로 구입함.
1957. 11 Basil Price, S.J.가 한국에 도착.
1959. 08 문교부에 대학 설립 인가 신청
1959. 11 본관(A관) 건립
1960. 02 - 서강대학 설립 인가
- 서강대학 초대 학장에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 취임
1960. 04 - 서강대학 개교
- 영어영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경제학과개설
1962. 05 서강대학 재건학생회 출범
1962. 12 예수회 사제관 건립
1963. 03 생물학과, 경영학과, 독어독문학과 신설
1963. 07 - 제2대 학장 : John P. Daly, S.J. 취임
- 제2교사(전 학생회관, C관)건립
1964. 03 국어국문학과, 화학과 신설, 경제·경영문제연구소 설치
1964. 04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 개편
1966. 03 - 국제통상학과 신설
- 국내 최초로 교수안식년 제도를 도입
1966. 06 산업문제연구소 설립
1967. 03 자연과학연구소 설치
1967. 04 국내 최초로 텔레비전 강의를 실시함
1967. 09 인문과학연구소 설치
1967. 10 마테오 리치 과학관(R관) 건립
1967. 12 대학원 설립 인가
1968. 03 - 신문방송학과 신설
- 대학원 석사학위과정 신설
- 국제통상학과를 무역학과로 명칭 변경
1968. 12 국내 대학 최초 전자계산연구소 설치
1969. 03 전자공학과 신설
1969. 12 - 국내 최초의 대학 공연장(Mary Hall) 건립
- 종합대학교 서강대학교 인가
파일:서강대학교 좌우조합형 국영문 white.svg

3.2. 1970년대

<colbgcolor=#b60005><colcolor=#fff> 서강대학교 1970년대 연혁표
일자 내용
1970. 03 - 사회문제연구소 설치
- 종합대학 서강대학교 승격
- 서강대학교 초대 총장 존 P. 데일리 신부 취임
1972. 04 국내 최초 과학관 우주선관측소 건립
1973. 03 - 실험대학 운영 개시
- 대학원 박사학위과정 개설
- 외교학과 신설
1973. 12 국내최초 완전 개가식체제와 참고질문제도를 갖춘 로욜라 도서관 건립
1974. 02 박물관 개관
1974. 02 대학박물관 설치
1975. 03 신학연구소 설치
1975. 06 대학신문사 설치
1975. 07 제3대 총장 M. 델마 스킬링스태드 신부 취임
1976. 03 - 화학공학과, 회계학과 신설
-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설치
1976. 09 하비에르 인문사회관(X관) 건립
1978. 09 출판부 발족
1979. 03 학생생활상담실 설치
파일:서강대학교 좌우조합형 국영문 white.svg

3.3. 1980년대

<colbgcolor=#b60005><colcolor=#fff> 서강대학교 1980년대 연혁표
일자 내용
1980. 03 체육관 건립
1981. 03 - 서강학보 복간
- 경영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 불어불문학과, 종교학과, 사회학과, 전자계산학과 신설
- 외교학과를 정치외교학과로 명칭 변경
- 경영학과, 무역학과, 회계학과를 경영학과로 통합
1981. 05 노벨평화상 수상자 마더 테레사 수녀 본교 방문
1983. 07 존 D.메이스 신부가 제 5대 총장으로 취임
1984. 05 제263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본교 방문
1984. 08 김대건관(K관) 건립
1985. 02 한국인 최초로 서인석 신부가 제6대 총장에 취임
1986. 03 도서관 대출 업무 전산화 시행
1988. 03 - 공공정책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 법학과 신설
1989. 02 제7대 총장에 박홍 루카 신부 취임
1989. 03 사회과학연구소 설립
1989. 04 대학언론사 설치
1989. 09 국제평생교육원 개원
파일:서강대학교 좌우조합형 국영문 white.svg

3.4. 1990년대

<colbgcolor=#b60005><colcolor=#fff> 서강대학교 1990년대 연혁표
일자 내용
1990. 03 교육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1990. 05 유기반응연구센터 개원
1991. 03 경제정책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1992. 03 기계공학과 신설
1992. 05 언론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1994. 10 경제정책대학원을 경제대학원으로 명칭 변경
1994. 12 수도자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1996. 02 - 단과대학을 학부로 명칭 변경
- 생물학과를 생명과학과로 명칭 변경
1997. 01 제9대 총장 이상일 신부 취임
1997. 03 - 국제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 정보통신·첨단기술대학원 석사학위과정 개설
1997. 10 법학연구소 설립
1998. 05 - 영미문화전공, 중국문화전공 신설
- 전자계산학과를 컴퓨터학과로 명칭 변경
- 불어불문학전공을 프랑스문화전공으로 명칭 변경
1998. 09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 본교 방문
1999. 03 학생설계 전공제도 시행
1999. 04 - 제10대 총장 이한택 요셉 신부 취임
- 정보통신연구소 설치
1999. 08 벤처산업의 요람인 서강창업보육센터 설립
1999. 09 영상대학원 석·박사학위과정 개설
파일:서강대학교 좌우조합형 국영문 white.svg

3.5. 2000년대

<colbgcolor=#b60005><colcolor=#fff> 서강대학교 2000년대 연혁표
일자 내용
2000. 03 수도자대학원, 국제대학원 박사학위과정 개설
2001. 08 마태오관 건립
2002. 03 제11대 류장선 신부 총장 취임
2003. 02 벨라르미노 학사 건립
2003. 03 화학공학전공을 화공생명공학전공으로 명칭 변경
2003. 04 예비대학 신설
2003. 11 서강비전선포식 개최
2004. 03 교양과정부를 교양학부로 개편
2005. 06 제12대 손병두 총장 취임
2006. 03 커뮤니케이션학부 신설, 심리학전공 신설
2006. 07 행정부서 과단위를 팀단위로 명칭 변경하여 개편
2006. 09 경영대학원 폐지, 경영전문대학원 설립
2007. 02 리치과학관 건립
2007. 04 사회과학부에서 법학부 독립
2007. 10 대학평의회 구성
2008. 08 곤자가국제학사 건립
2009. 05 법학전문대학원 신설
2009. 06 제13대 이종욱 총장 취임
파일:서강대학교 좌우조합형 국영문 white.svg

3.6. 2010년대

<colbgcolor=#b60005><colcolor=#fff> 서강대학교 2010년대 연혁표
일자 내용
2010. 04 - 개교 50주년
-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신설
2010. 05 - 제1회 서강미라클연극축제
- 국가품질경영대회 교육부문 대통령표창
2010. 11 SOFEX 2010(제1회 서강대학교- 조치대학 한·일 정기전) 개최
2011. 05 - 제1회 서강대- 서울대 스포츠교류전 개최
- 제2회 서강미라클연극축제
2011. 09 정하상관 및 떼이야르관 건립
2011. 10 SOFEX 2011(제2회 서강대-죠치대 한·일 정기전) 개최
2012. 03 - 지식융합학부 신설
- 토마스모어관 건립
2012. 10 - SOFEX 2012(제3회 서강대-죠치대 한·일 정기전) 개최
- 제3회 서강미라클연극축제
2013. 01 포스코 프란치스코관 건립
2013. 03 제14대 유기풍 총장 취임
2013. 11 - SOFEX 2013(제4회 서강대-죠치대 한·일 정기전) 개최
- 제4회 서강미라클연극축제
2013. 12 서강대학교 비전선포식 '서강 재창조의 밤' 개최
2014. 08 베르크만스 우정원 건립
2014. 11 SOFEX 2014(제5회 서강대-죠치대 한·일 정기전) 개최
2015. 06 한국표준협회 한국서비스품질지수(KS-SQI) 종합대학교 1위
2015. 07 학부교육선도대학(ACE) 재선정
2015. 11 SOFEX 2015(제6회 서강대-죠치대 한·일 정기전) 개최
2016. 03 - 국제협력선도대학 육성지원사업 선정
- 대학 인문역량 강화사업(CORE) 선정
2017. 03 제15대 박종구 총장 취임
2017. 05 - 중소기업청 창업보육센터 평가 최우수(2012~2017, 6년 연속)
- 게페르트 남덕우 경제관(GN관) 준공
2018. 03 지식융합미디어학부 신설
2018. 05 서강공연축제 '제1회 총장배 공연경연대회' '서강미라클4-Passion'
2018. 11 장애학생 진로·취업 지원 사업 거점대학 선정
2019. 05 '제2회 총장배 공연경연대회
2019. 10 한국표준협회 한국서비스품질지수(KS-SQI) 종합대학교 1위(2014~2019, 6년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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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2020년대

<colbgcolor=#b60005><colcolor=#fff> 서강대학교 2020년대 연혁표
일자 내용
2020. 04 개교 60주년
2020. 05 중소벤처기업부 창업보육센터 경영평가 최우수
2020. 06 -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K-MOOC) 2단계 선도대학 선정
- 교육부 대학중점연구소 지원사업 및 기초과학 연구역량 강화사업 선정
2020. 07 본관 엘리베이터 완공
2020. 11 - 한국표준협회 한국서비스품질지수(KS-SQI) 종합대학교 1위(2014~2020, 7년 연속)
- 4단계 BK 21사업 3개 연구단 4개 연구팀 선정
- 서강 Honors Wall 설치(본관 1층)
2021. 02 제16대 심종혁 총장 취임
2021. 06 서강대학교 『VISION 2030』 선포
2021. 07 - 2021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해외우수연구기관 협력허브 구축사업 선정
- 2021 한국경제신문 이공계 대학평가 유지취업률 3년 연속 1위
2021. 08 2021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글로벌 핵심인재 양성지원 사업 선정
2021. 09 - 대학원 인공지능학과 신설
- 메타버스전문대학원 신설
2021. 11 한국표준협회 한국서비스품질지수(KS-SQI) 종합대학교 1위(2014~2021, 8년 연속)
2022. 01 로욜라도서관 1관 리모델링
2022. 03 첨단학과 '인공지능학과'(학부) 신설
2022. 04 - SK하이닉스 채용연계형 계약학과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신설
- 2022 과학기술정보통신부, IITP 프로젝트형 글로벌 역량강화 사업 선정
- 교육부 3단계 산학연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LINC 3.0) 선정
2022. 05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메타버스 융합대학원 지원사업' 선정
2022. 09 경영학부·경영전문대학원, 2022 BGS(Beta Gamma Sigma) 최우수 지부 선정
2022. 10 서강 '스마일게이트 AI센터' 개소
2022. 11 한국표준협회 한국서비스품질지수(KS-SQI) 종합대학교 1위(2014~2022, 9년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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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과 구성 변천사

4.1. 1970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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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학부제 실시 이전(~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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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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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과
경상대학 경제학과
경영대학 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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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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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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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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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명은 '서강대학'에서 '서강대학교'로 한 차례 변경된 바 있다. '서강'이라는 이름은 변경된 적 없다. [2] 장영희 교수 문서 참고. [3]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2002년 사망했고, 이듬해 서강대 본관 근처에 동상이 세워졌다. [4] 조치대학 역시 서강대와 마찬가지로 예수회에서 설립한 대학교이다. [5] 사진 왼쪽부터 레오번즈 관구장, 이승만 대통령, 노기남 주교, 게페르트 신부. [6] 정확히는 캔틸레버 구조. [7] 그러나 설계도의 혁신성을 알아본 예수회 신부들이 이 부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건설을 진행했다. 다행히도 완공된 본관을 본 당국 관계자들이 본관을 크게 마음에 들어 하면서 무사히 사용 허가가 났다. [8] 당시 국내에 있는 대학 중 수세식 화장실을 완비한 대학은 서강대학이 유일했다. [9] 화장지가 신기했던 나머지 많은 학생들이 화장지를 뜯어서 모셔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학교 당국은 휴지를 가져가지 말라고 선도하는 대신 화장지를 무한리필했고, 언제나 화장실에 휴지가 있는 것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휴지를 가져가지 않게 되었다. [10] 당시 도입된 컴퓨터는 유니박(UNIVAC) [11] 1967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 [12] 이는 지금까지도 서강대에 내려와, 수업 시작 15분이 지나면 무조건 결석처리된다. 그나마도 10분에서 15분으로 시간을 늘려준지 오래되지 않았다. [13] 90년 또는 91년 봄 축제 시기 즈음으로 추정된다. 1992년 11월에 완공된 성이냐시오관 건물이 보이지 않고 공사중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잔디들이 푸르지 않고 나무들이 단풍이나 낙엽이 없으므로 가을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