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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림(山林)이란 조선 후기에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자신의 제자나 유학자( 성리학자)들을 통해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두들을 부르는 말이다. 산림(山林)들은 학문적 성취와 정치적 식견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으며, 자신이 양성한 제자들과 지역의 유지(有志)로서 중앙 정치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림의 집권으로 등장했고, 붕당정치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숙종과 영조-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영향력이 줄어들다가 개화로 성리학이 쇠퇴하면서 사라졌다.2. 내용
산림(山林)이란 산곡임하(山谷林下)에 은거해 있으면서 학덕을 겸비해 국가로부터 징소(徵召)를 받은 인물이라는 뜻으로 조선 중기에 훈구를 대신에 조선을 장악한 기득권 사림과 구분되는 선비들을 가리킨다.사실 산림이란 단어가 처음 나왔을 때는 사림이라는 단어와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조선시대의 성종시기에 사림들에게 지배적인 존재들이 나타났을 때, 처음으로 산림과 사림을 구분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구분할 때에는 성리학계의 안에서 식견이 높은 대학자들을 의미했는데, 붕당정치가 시작된 후로 그들은 지방사족들의 여론을 대변함과 동시에, 조정에 출사한 자신의 제자 등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초기부터 산림들이 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산림들이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훈구파를 몰아낸 이후부터 였는데, 최초로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산림은 16세기, 선조시절의 성혼(成渾)과 정인홍(鄭仁弘)이었다. 이들 중에 정인홍은 조정의 대북 수장을 맡은 이이첨(李爾瞻)을 통해 자신의 뜻을 조정의 정책에 반영했다.[1]
정인홍의 사례는 인조반정으로 북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들 또한 답습하게 되며, 인조반정 이후 산림(山林)이 뒤에서 조정에 영향력을 끼치는 체제가 관례화된다. 특히 인조시기부터는 산림들에게 명목상이나 실제의 벼슬을 내려, 산림이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산림(山林)들을 우대받게 되고 제도 속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왕실과 서인의 이해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왕실로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인조반정과 새 조정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 강력한 지지자들이 필요했다.
환국시기에 각 당의 신료들이 사사당하면서도 당이 소멸하지 않고 계속 건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산림이 본격적으로 붕당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이를 부담스러워한 숙종 등은 기사환국에서 송시열을 사사함으로서 영향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영조 또한 마찬가지로 영향력을 거세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의미로 지방 여론이 중앙 정부에 전달되는 대변인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이미 가속화되고 있던 한성과 기호 중심의 관료풀이 더욱 심화되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는 도성을 중심으로 하는 유력가문의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산림의 존재 자체는 고종 초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세도정치기에도 산림[2]은 존재하였으나, 그 영향력은 이미 거세된지 오래였기에 현실정책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3]
산림이 마지막으로 조정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 고종시기에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킨 것이었는데, 최익현이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산림이었다.
3. 결론
산림은 사림들이 훈구를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으며, 조선을 성리학 국가로 만드는데 큰 공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맨 처음, 지방의 사족들의 여론을 중앙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에 정계에 직접적 영향력을 미치게 된 후로는 붕당정치의 자체적인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현종대부터 숙종, 영조에 거쳐 이들의 영향력을 거세하기 위한 조치를 계속 시행하였고 결국 영조 이후로 그 영향력은 소멸되지만, 이는 반대로 조정이 도성과 기호의 유력 가문 위주로 운영되는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결과를 맞이한다.
[1]
정인홍의 명성은 정말 대단했기에, 대북파의 실질적인 영수인 이이첨도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이이첨이 정인홍의 명성을 이용해 일을 추진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먼저 상소 올려놓고 정인홍과 뜻이 같다고 한다던가, 정인홍 이름으로 상소를 올렸다던가 한 사례가 있기 때문.
[2]
오희상, 홍직필 등이 그 예. 이들은 산림으로 대접받았으나 본인들 자체가 세도정국 자체에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정치 개혁 역량도 없으면서 정치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라 보아 정치 참여를 거부한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들 또한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다는 것. 오희상은 해주 오씨에 할아버지가 대제학을 지냈으며, 홍직필은 남양 홍씨에 아버지가 장관급 직책인 판서를 지낸 사람이다.
[3]
위에서 언급된 영조-정조 이후의 노론계 산림인 오희상, 홍직필은 실학자로 유명한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와 같은 인재가 출사하여 쓰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경세학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의리에 따른 정치를 다시금 일으키길 원했으나, 이미 붕당이 소멸하고 한성-기호의 유력가문 위주로 돌아가던 세도정치 내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