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8 14:46:53

사씨 정권


존속기간 187년 ~ 227년
위치 광둥성, 광서성, 베트남 북부
수도 용편(龍編)[1]
주요 군주 초대 사섭
말대 사휘
언어 상고 중국어, 고대 베트남어
종족 한족, 월족
성립 이전 후한 교주자사부
멸망 이후 오(삼국시대) 교주, 광주
현재 국가 중국
베트남

1. 개요2. 역사
2.1. 성립 이전2.2. 사섭의 집권2.3. 멸망2.4. 멸망 이후
3. 대외관계4. 역대 군주5. 사씨 일족6. 기타
6.1. 대중매체에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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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기 ~ 삼국시대(중국) 초반 중국 남부 교주[2] 일대에 존속했던 세력.

요동 공손씨 정권과는 달리 따로 칭왕하거나 국가를 세우지는 않았으며, 손권에게 신속했으나 사실상 독자 세력에 가까웠다.

집권 시기에 별다른 반란없이 교주 일대를 안정적으로 통치했으며, 베트남 북부 인프라 구축에도 기여해서 베트남에서 평가가 좋은 편이다. 쩐 왕조는 사섭을 선감가응령무대왕(善感嘉應靈武大王)으로 추존했으며, 베트남인들은 사섭을 사왕(士王)으로 부르는등 높이 평가했다.

2. 역사

2.1. 성립 이전

본래 사섭의 가문은 예주(豫州) 노국(魯國) 문양현(汶陽縣)을 본관으로 삼고 있었다. 왕망이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세우면서 사섭의 6대조가 교주로 이주했다.[3]사섭의 아버지인 사사(士賜)는 일남태수[4]를 역임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사섭의 통치 배경에 영향을 줬다고 추측되고 있다.

2.2. 사섭의 집권

사섭은 아버지 사사의 장례를 치르고 187년에 교지태수로 임명되었다. 9년 후인 196년, 교주자사 주부[5]가 이민족에게 살해당하면서 주군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교지태수 사섭이 중앙에 자신의 형제들(사일, 사유, 사무)을 태수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일, 사유, 사무는 각각 합포태수, 구진태수, 남해태수로 임명되었고 이 사건으로 사씨 일가는 교주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주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장진(삼국지)은 부장 구경(區景)에게 피살당한 후, 후한 조정은 사섭을 수남중랑장에 임명하고 교주의 7군을 거느리도록 했다.

2.3. 멸망

226년 사섭이 항년 90세로 사망하면서 시섭의 3남 사휘가 뒤를 이었고, 오나라는 사휘를 구진태수로 삼았다.

그런데 교지태수에 교위 진시를 임명하고 기존의 교주에서 광주를 분리해 사씨 가문이 아닌 대량과 여대를 교주자사와 광주자사로 임명하는 등 대놓고 사섭 가문의 영역을 삼키려고 들었다.
사씨 일족이 몇 대에 걸쳐 교주에 재훈 은혜를 믿은 [6] 사휘는 스스로 교지태수를 자처해 해구의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과거 사섭이 추천했던 환린은 사휘를 말리면서 신임 교주자사인 대량을 따르자고 청했다가 분노한 사섭에게 맞아죽으면서 교지의 환씨 가문(환치, 환발)과도 몇 달이나 내전을 벌였다가 협정을 맺고 중지하는 일이 일어났다.

환씨 가문과의 내전이 끝나자마자 여대의 동오군이 생각지도 못한 신속한 진군으로 도착하자 사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여대는 먼저 편지를 보내 사휘를 타이른 다음 사촌 사광을 보내 지금 항복하면 군수 자리는 잃게 되겠지만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하자 사휘는 형 사지, 동생 사간, 사송 등 형제 여섯 명과 함께 웃옷을 벗어 맨살을 드러내고 항복의 뜻을 나타내면서 영접하니 여대는 사절한 다음에 옷을 입게 했다.

다음날 아침에 여대는 장막을 설치하고, 사휘의 형제 여섯 명에게 들어오게 했는데,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여대는 조서를 들고 사휘의 죄과를 차례로 진술하고, 그 말에 따라 주위에 있던 자들이 여섯 형제를 모두 끌고 나가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통해 사휘의 머리를 무창에 보내졌다. 후대의 인물은 물론 당대의 인물까지도 여대가 사씨 가문을 몰살한 행위를 비난했다.[7]

2.4. 멸망 이후

사휘 일가가 처형당한 후 환린의 형 환치는 사섭 휘하에서 대장을 지낸 감례와 함께 여대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교주 토착세력들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은 여대는 반우후로 임명되었으며, 설종과 함께 구진군을 토벌해 수천명을 죽였다. 남쪽에서 세력을 크게 떨쳐서 부남(크메르), 당명(라오스 남부), 임읍(참파)는 손권에게 공물을 보냈다.

한편 살아남은 사위, 사일, 사광은 용서를 받았으나 사위와 사광은 몇 년 후 법을 어겼다는 이후로 주살당했고 사흠도 후사없이 병사하면서 사씨 가문은 대가 끝겨버렸다.

사섭의 일곱 아들 중 오나라에 볼모로 갔던 장남 사흠은 사섭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나, 관직에서 면직되어 평민으로 살다가 사망했다.

오나라는 사씨 세력을 멸족하고 교주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며 당시 활발하게 개척이 이루어지고 있던 오나라 다른곳에서 처럼 군현을 늘리고 본격적으로 오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치를 시행하려고 들었다. 이탓에 교주 지역에선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손호가 이 지역에 호구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세금을 매기는데 반발하여 들고 일어난 곽마의 난은 오멸망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3. 대외관계

3.1. 후한

교주자사 주부, 장진이 연달아 피살당하면서 교주 지역에 권력 공백이 생긴데다 중앙정부의 권위와 세력이 약화된 상태였기에, 후한은 사씨 가문의 통치를 인정해 주었다.

3.2. 유표

직접적인 충돌 기록은 없으나, 유표는 교주자사 장진의 사망을 틈타 교주에도 영향력을 끼치려고 시도했다.

유표 뇌공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교주를 차지하게 했는데, 뇌공은 유표를 후원해 창오태수가 된 오거(삼국지)에게 쫓겨났다.

오거는 211년 교주자사 보즐이 부임하자 겉으로는 그에게 복종했으나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보즐이 오고가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오거를 죽이기로 결심했고, 자신을 낮추면서 회유해 오거가 초대를 받아들이자 기회를 틈타 살해했다.

3.3. 오나라

사섭이 오나라에 신속했고, 오나라도 사섭이 생존한 시기까지는 사씨 가문의 교주 통치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섭이 사망한 후 대놓고 교주를 직접 지배하려고 들면서 사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여대에게 진압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3.4. 촉한

유비 사후 익주 남부에서 일어난 남만 반란(223-225)의 배후가 사섭과 오나라였다.

익주의 호족 옹개, 수족 수령 고정, 장가 태수 주포 등이 일으킨 남만 반란은 제갈량에게 진압되었다. 반란을 부추긴 것과 별개로 사섭이나 오나라는 옹개, 고정, 주포가 토벌당할 때 이들을 돕지는 않았다. 당시 오나라는 이릉대전 직후 조비의 남정을 막고 있던터라 이들까지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4. 역대 군주

대수 이름 재위기간 시호 왕호
초대 사섭(士燮)
시 니엡(Sĩ Nhiếp)
187년 ~ 226년 선감가응령무대왕(善感嘉應靈武大王)[8] 창오왕(蒼梧王)(?)[9]
사왕(士王, 시브엉/Sĩ Vương)[10]
2대 사휘(士徽)
시 후이(Sĩ Huy)
226년~ 227년 없음 없음

5. 사씨 일족

  • 사사(士賜 / Sĩ Tứ, 시 트)
    • 사섭(士燮), 사일(士壹), 사유(士䵋), 사무(士武)의 아버지.
    • 그의 조상은 왕망의 난을 피해 교주로 내려와서 살았다. 사사는 환제(후한) 시기 일남태수를 역임하였다.
    • 생년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장남 사섭이 137년에 태어난 점을 보아 사사의 출생시기는 110년대 전후로 추정된다. 사망시기는 187년 이전으로, 사섭은 아버지의 상을 치른 후 무재로 천거되어 무양령을 지내다가 교지태수로 임명되었다.

  • 사섭(士燮 / Sĩ Nhiếp, 시 니엡)
    • 사씨 가문의 초대 군주.
    • 137년 후한 교주 창오군 광신현(廣信縣)에서 출생했다.
    • 젊어서 낙양으로 유학을 떠나 좌씨춘추를 익혔다.
    • 부친이 죽고 무재로 천거되어 무양령(巫陽令)을 지내다가 187년 교지태수로 임명되었다.
    • 196년, 교주자사 주부가 살해당하자 후한 조정에 요청해 형제들을 교주 군현의 태수들로 임명하도록 요청했고, 후한 조정은 사섭의 형제들(사일, 사유, 사무)를 각각 합포태수, 구진태수, 남해태수로 임명하면서 사섭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 196년 ~ 208년 사이, 교주자사 주부의 후임으로 임명된 교주자사 장진이 부하 구경에게 피상당했다. 유표 뇌공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그를 교주로 보냈으나, 유표가 임명한 창오태수 오거와의 불화 끝에 뇌공은 교주에서 쫓겨나 영릉으로 도망쳤다. 후한 조정은 유표를 견제하기 위해 사섭에게 교지태수에 수남중랑장을 겸하게 하면서 교주 7군을 통솔하도록 했다.
    • 201년, 사섭은 손권에게 신속했으며 매년 보물을 받쳤다. 위의 유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던 걸로 추정되고 있다.
    • 210년 손권은 파양태수 보즐을 교주자사, 입무중랑장으로 전임하게 했으며 곧 지절, 정남중랑장이 더해졌다. 이듬해 211년, 보즐은 창오태수로 있던 오거를 제거했다.
    • 건알 말기에 장남 사흠을 손권에게 볼모로 보냈다. 손권을 사슴을 무창태수로 임명했고, 사흠의 형제들과 사광을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 223년, 익주 호족 옹개를 회유시켜 익주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 226년,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후계자는 3남 사휘가 물려받았다.
    • 사흠, 사지, 사휘, 사간, 사홍의 아버지다. 이외에도 두 아들이 더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은 알려자지 않았다.
  • 사휘(士徽 / Sĩ Huy, 시 휘)
    • 사씨 가문의 2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 226년 아버지 사섭이 사망하면서 집권했다. 손권은 사휘를 안원장군, 구진태수로 임명했다.
    • 손권은 교위 장시에게 사섭의 임무를 대행하게 하고 교지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거 교주 7군을 분할해 교주, 광주로 나누고 여대, 대량을 각각 교주, 광주자사로 임명했다.
    • 손권이 교주를 직접지배하려들자, 사휘는 교주태수를 자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섭에 의해 관리로 등용된 환린이 사휘를 말리다가 사망하면서 사씨 가문은 환씨 가문과 몇 달 동안 내전을 벌였으나 서로 이기지 못하고 휴전했다.
    • 227년, 이때 여대의 오나라군이 교지로 도착했다. 여대는 사휘에게 서신을 보내 타이르면서 지금 투항하면 군수 자리는 잃겠지만 목숨은 건질 것이라면서 설득했다. 사휘 6형제가 투항하자, 여대는 사휘 6형제를 모조리 처형했다.
  • 사일(士壹 / Sĩ Nhất, 시 녓)
    • 사사의 차남으로, 사섭의 동생. 본래 중앙조정의 관리로 있었으나 동탁에게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 196년 사섭의 천거를 받아 합포태수에 임명되었다.
    • 220년, 손권으로부터 편장군, 도향후에 임명되었다.
    • 227년, 사휘의 난을 이유로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몇 년 후,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 사유(士䵋/ )
    • 사사의 3남으로, 사섭의 둘째 동생.
    • 196년, 서문현 현령으로 있었다가 사섭의 천거로 구진태수에 임명되었다.
    • 227년, 사휘의 난을 이유로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몇 년 후,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 사무(士武 / Sĩ Vũ, 시 부)
    • 사사의 4남. 사섭의 셋째 동생.
    • 196년 사섭의 천거로 남해태수에 겸임되었다. 다른 관직을 재직중이었던걸로 보이지만 알려진 바는 없다.
    • 남해태수에 임명된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나, 227년 사씨 가문이 숙청당할 때 언급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227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사광(士匡 / Sĩ Khuông, 시 쿠옹)
    • 동생 사일의 아들로, 사섭의 조카. 사휘와는 사촌 지간이다.
    • 건안 연간(196-220) 말년, 사섭의 장남 사흠이 손권에게 인질로 보내졌을 때 조카 사광 또한 다른 형제들과 같이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 227년, 사촌 사휘의 난 당시 가담하지 않은데다 사휘 형제를 설득시켜 투항한 공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몇 년 후 아버지 사일, 작은아버지 사유가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 사광은 연루되지 않았는데, 사휘의 난 이후 얼마안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6. 기타

중앙 정부의 혼란을 틈타 자립한 점,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를 중심으로 할거한 점은 남월과도 비슷하다. 다만 오늘날 광저우 일대로 추정되는 번우를 중심으로 한 남월과 달리 사씨 정권은 교주 교지를 중심으로 했고, 조타와 달리 사섭은 칭왕하지 못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6.1. 대중매체에서 등장

보통 사섭이 리더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1] 후한 교지군 용편현으로, 용편현은 교지군의 치소였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비정된다. [2] 오늘날 중국 광둥성, 광시좡족자치구, 베트남 북부에 이른다. [3] 사섭, 사휘 부자의 출생지가 교주 창오군 광신현인 점으로 보아 사섭의 조상들은 창오군 지역에 자리잡은것 같다. [4] 교주의 최남단 군현. [5] 황건적의 난에서 활약한 주준의 아들. [6] 사섭의 6대조가 교주에서 살았다. [7] 다만 삼국지의 진수, 대월사기전서의 오사련은 사휘도 스스로 처신을 잘못했다 사망했다는 평도 내렸다. [8] 쩐 왕조 추증 [9] 남조시대 유경숙이 쓴 지괴소설 이원(異苑)에서 등장한다. 사섭의 고향이자 교주자사의 치소가 창오군(蒼梧郡) 광신현(廣信縣)이었는데 이것과 연관됐는지는 불명. # [10] 대월사기 및 대월사기의 내용을 보강한 대월사기전서에서 등장한 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