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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나치오

빗장수비에서 넘어옴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축구의 전술
높은 수비 블록 토탈 풋볼 / 사키이즘 / 티키타카 / 포지션 플레이 / 벵거볼 / 게겐프레싱 / 점유율 축구 / 라볼피아나
낮은 수비 블록 롱볼 축구(킥 앤 러시/ 뻥축구) / 카테나치오 / 늪 축구 / 버스 세우기 / 침대 축구 / 할리우드 액션 / 안티 풋볼 / 조나 미스타 / 두 줄 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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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12 당시 이탈 리아 vs 안드레스 이니에스타[1]

1. 개요2. 역사
2.1. 1960년대 이전2.2. 수페르가의 비극2.3. 1960년대2.4. 1970/80년대2.5. 1990년대2.6. 2000년대2.7. 2010년대2.8. 2020년대
3.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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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장 아름다운 축구는 0:0의 축구이다."
- 이탈리아 축구 명언
Catenaccio.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카테나초’다.

축구 전술 중 하나다. 대한민국에서는 빗장 수비라는 말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카테나치오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 빗장(door-bolt)'이다. 1960년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 AC 밀란의 감독 네레오 로코로부터 정립되기 시작한 전술이다. 이탈리아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전술이다.

한편으로는, 수페르가의 비극이 카테나치오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축구의 현재 색깔이 나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2. 역사

2.1. 1960년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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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토도
1934년 월드컵과 1938년 월드컵은 메토도 2323 전법을 사용했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2연패를 이끈 명장 비토리오 포초 감독이 다뉴브 학파에서 영감을 받아 하프라인 근처에 위치하는 3명의 하프백과 3명의 포워드들 사이에 2명의 인사이드 포워드를 배치하는 2-3-2-3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하프백은 좀 더 수비적인 역할에 집중할 수 있게됐고 중원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등 공수 밸런스가 잘 맞게 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방과 미드필드의 다양한 포지션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조반니 페라리, 탁월한 득점력과 테크닉,뛰어난 찬스메이킹 능력을 가진 원조 판타지스타 주세페 메아차가 뛰어난 대활약을 해줘서 크게 기여했다. 펩 과르디올라 FC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은 메토도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8~90년 전의 축구 룰과 지금의 축구 룰의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934년 월드컵, 1936년 올림픽, 1938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원래 공격을 퍼부었던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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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수페르가의 비극

그러나 수페르가의 비극이라는 비행기 사고 때문에 베스트 멤버를 모두 잃었다. 디펜딩 챔피언 자동 진출이라는 시스템 덕분에 간신히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에 갈 수는 있었으나 월드컵에서 대패를 당할게 뻔했고, 수비로 일관하여 대패는 막았다. 이렇게 수비를 강화시킨 게 빗장 수비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2.3. 1960년대

사실 최후방에 리베로를 두는 전술 자체는 1940년대 말 살레르니타나 주세페 비아니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는 카테나치오 전술의 시초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 카테나치오가 제대로 정립되기 시작한 때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펠레 가린샤라는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 두 명을 가지고 4-2-4 전술을 통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브라질같은 남미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개인기가 약한 유럽은 브라질에게 엄청나게 고전하였고, 그들을 막기 위해 수비적인 전술들이 고안되기 시작하였다.

비아니 감독이 고안한 카테나치오 전술을 바탕으로 트리에스티나의 감독을 맡은 네레오 로코는 트리에스티나를 세리에 A 2위까지 끌어올리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2]
네레오 로코 감독의 카테나치오 전술은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를 두는 전술과는 달랐다. 비아니의 전술과 같은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 전술은 리베로 앞에 3명의 수비수를 두는 형태였지만, 로코 감독은 이에 멈추지 않고 아예 팀의 미드필더 조반니 트라파토니[3]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배치하여 수비 상황시 실질적으로 리베로 앞에 4명의 수비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협력 수비력과 커버링 실력을 가진 베테랑 수비수 체사레 말디니[4]에게 리베로 역할을 맡겼다. 또한 중원 역시 당시 세계 축구를 호령하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 디노 사니에게 볼란테 역할을 맡겼다. 하지만 이 밀란의 전술이 무작정 수비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AC 밀란의 레전드 잔니 리베라가 전방의 3톱[5]을 보조하면서 공격하는 시스템이라 무시무시한 역습이 이어지게 되었고,[6] 이로서 1962/63 시즌, 1968/69 시즌 유러피언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들어올리는 밀란의 최초의 전성기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AC 밀란의 지역 라이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 역시 자신의 팀에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키기 시작하였다.[7] 하지만, 에레라의 카테나치오는 밀란의 그것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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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의 카테나치오는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 전술처럼 리베로 앞에 3명의 수비수를 놓되, 2명의 선수를 전술의 핵심으로 이용했다. 자친토 파케티[8] 자이르이다. 자친토 파케티는 수비뿐 아니라 공격에도 재능이 있어, 오버래핑을 시도해 엄청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였고[9] 따라서 인테르는 공수의 유연성을 맞출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가린샤, 펠레 등의 괴물들에게 밀렸지만, 그래도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오른쪽 윙어 자이르에게 윙어로써 공격을 하되, 수비가담을 중요시하였다. 많은 활동량과 좋은 수비력을 필요로 하였지만 자이르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로서 인테르는 수비시에 빠르게 5백으로 전환이 가능하였다. 또한 파케티의 오버래핑이 이어지면, 왼쪽 윙어 자리에 서던 마리오 코르소가 바르셀로나에서 온 루이스 수아레스[10]의 플레이메이킹을 도와주었고, 거기에 산드로 마촐라 판타지스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 결과 인테르 역시 AC 밀란과 더불어 전성기를 가지게 되고[11], 세리에 A와 유러피언컵을 우승하였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의 라이벌 팀이 비슷한 전술을 가지고 똑같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런 카테나치오 전술은 유럽에서 엄청난 효과를 몰게 되고, 이 카테나치오 전술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카테나치오 전술은 네덜란드 어느 한 천재가 이끄는 토탈 풋볼에 의해 1970년대 사장되기 시작하였다.

2.4. 1970/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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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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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AC 밀란의 감독이었던 아리고 사키는 미드필더 진에 4명을 배치하는 플랫 4-4-2 포메이션의 압박 전술을 고안해냈다. 이는 축구 전술사에 있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 영향으로 아리고 사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사키는 자신의 제자들이었던 밀란의 포백[12]을 그대로 국가대표팀에 끌어 모았고[13], 이들은 당대 세계 최강팀으로 이름을 날리던 AC 밀란[14]의 주전 4백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큰 기대를 모았으나, 정작 이 4백이 실제 월드컵 무대에서 가동된 것은 1차전인 아일랜드전뿐이었고 심지어 결과는 1:0 패배. 그리고 타소티는 2차전부턴 선발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어지는 2차전 노르웨이전에선 바레시가 부상으로 아웃되고 주전 골키퍼였던 삼프도리아의 수문장 잔루카 팔리우카가 퇴장당하는 요지경 속에 간신히 1:0 승리. 이후 타소티가 8강 스페인전때 잠깐 선발로 복귀했다가 루이스 엔리케를 팔꿈치로 가격한게 경기 후 적발되어 사후징계로 나가 떨어지고, 결승전인 브라질 전엔 바레시가 부상에서 돌아왔나 했더니 이번엔 코스타쿠르타가 준결승전이었던 불가리아전에서의 경고 누적으로 출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즉, 밀란 4백 중 월드컵 내내 자리를 지킨 것은 파올로 말디니 뿐. 그래도 바레시의 경우 결승전에서 그야말로 혼신을 다한 멋진 활약을 보여주었고, 코스타쿠르타의 경우 결승전을 제외하면 전 경기에서 자리를 지키며 평소 듣기도 했던 '바레시의 마리오네트' '바레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선수'라는 비아냥을 헛소리로 만드는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전 경기에 출장한 말디니는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 타소티를 제외하면 다들 명성이 허명이 아닌 활약을 해주긴 했다.[15] 바레시와 타소티의 빈자리는 안토니오 베나리보, 로베르토 무씨, 루이지 아폴로니가 멋지게 메웠고[16] 주전 골키퍼 팔리우카의 퇴장(조별 리그 2차전) 및 출장정지(조별 리그 3차전 및 16강전)라는 비상사태도 라치오의 수문장이었던 루카 마르케자니가 멋지게 수습해내서 결과적으론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7경기 5실점이라는 준수한 수비력을 보여주었지만, 조별리그 동안 3경기 2득점이라는 빈약한 공격력으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올랐다.[17]

하지만 토너먼트가 시작하면서 로베르토 바조가 각성하였다. 바조가 그야말로 대활약, 토너먼트에서 위기 때마다 바조의 득점으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18], 결승전에서 호마리우를 위세로 한 엄청난 공격진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이끌어냈다. 그러나 승부차기에서 주장 바레시와 공격수 마싸로, 그리고 에이스 바조가 실축, 90년 월드컵에 이어 또다시 승부차기 때문에 울고 만다. 사실 마싸로가 실축한 시점에서 사실 이탈리아의 승부차기 승리는 어렵긴 했지만 그동안 팀을 하드캐리해왔던 에이스인 바조의 실축은 그야말로 온 이탈리아 축구팬들의 경악과 절망을 불러왔으며, 월드컵 후 모든 비난의 화살이 영웅 바조에게 집중되었다. 그외에 전술가로 기대를 모았으나 정작 월드컵 동안엔 기대에 못미쳤던 감독 아리고 사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대회에서 상기 이미지대로 선발멤버가 나온 적은 없다. 말디니, 알베르티니, 바조 셋을 제외하면 멤버도 경기마다 한두 명씩 바뀌었고, 조별예선 2~3차전과 16강전에선 4-3-1-2에 더 가까운 포메이션으로 나오는 등 위 이미지는 그와중 가장 많이 선발멤버로 선택을 받은 선수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저중에서 코스타쿠르타를 바레시로 바꾸면 결승전 멤버[19] 가 되지만, 결승전을 제외하면 이 대회에선 코스타쿠르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더 높았기에...

2.6.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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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0까지만 해도 비록 준우승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에서 보여준 역대급 경기력의 수비진 때문에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2002년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내내 보인 거칠고 수준낮은 경기력으로 일관한 끝에 16강 탈락.[20][21] 그리고 UEFA 유로 2004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결과에 그 많던 기대는 우려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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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칼초폴리가 터지고 나서,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불살러 버리겠다는 작정으로 치열하게 뛰었고, 그 결과 잔루이지 부폰 파비오 칸나바로가 지키는 이탈리아 수비진은 7경기에서 단 2실점[22] 만을 거두며 2006년 월드컵을 우승하며 카테나치오의 위력을 계속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때도 네스타는 조별 리그 초반에 부상으로 실려 나갔다. 그 자리를 마르코 마테라치가 메꿨고, 수비적인 측면에서나 공격 세트피스 측면에서나 잘 해주었다.

2.7. 2010년대

하지만 2010년대에는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나쁜 성적을 내어서 카테나치오의 명성도 떨어졌다. 정확히는 2006년 월드컵 우승 당시 퍼진 칼초폴리 사태 때문이다.

2010년 월드컵에서는 남미의 다크호스 파라과이, 그나마 약팀인 슬로바키아&뉴질랜드와 함께 F조에 속했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2006년 우승을 이끈 노장들을 데려왔고, 그 결과 파라과이와 뉴질랜드와는 무승부를 하고, 슬로바키아에는 2:3으로 지면서 44년 만에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014년 대회에서는 잉글랜드를 2:1로 이겨 승승장구하는가 싶더니, 2014년 최고의 이변을 일으킨 코스타리카에 0:1로 지고, 우루과이에도 0:1로 져서 결국 두 대회 연속으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2018년에는... 예선전 스페인에 밀려 플레이오프로 떨어지고 스웨덴에게 0:1로 지는 바람에 60년 만에 월드컵 본선조차 오르지 못했다.

2.8. 2020년대

유로 2020까지의 경기를 분석해보면 공격적인 축구를 뒷받침하는 조르지오 키엘리니 레오나르도 보누치의 역대급 센터백 콤비의 무서움을 보여주며 유로 2020에서 2실점 이상의 경기 없었을 정도였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함에 따라 2020년대의 카테나치오의 무서움 역시 제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카타르 월드컵 지역예선 플레이오프 북마케도니아와의 경기에서 0:1로 지면서 두 대회 연속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수비진이 대거 이탈한 것은 물론 공격진의 공백도 큰 탓이었다. 뒤이어 피날리시마에서 아르헨티나에게 3골을 얻어먹고, UEFA 네이션스 리그/2022-23 시즌에서 독일한테 5골이나 뜯기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23]

3. 비판

이런 수비 위주의 전략 탓에 이탈리아 축구는 공격수를 키우지 못했다. 공격수만 봐도 다른 나라의 공격수보다 국가대표 경력이 짧고 득점 수도 떨어진다.[24]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자인 루이지 리바는 웬만한 유럽 최약체의 최다 득점자 수준인 35골밖에 안 넣었다. 월드컵에서도 5점 이상 득점한 경기는 카테나치오가 정착하기 훨씬 이전인 1934년 미국전(7:1)뿐이고, 4점 득점 경기 역시 1970년 멕시코전(4:1) 및 독일전(4:3) 이후에는 없다. 월드컵 득점 수도 128골로, 다른 본선 진출 횟수 상위 3위 팀인 브라질(227골)과 독일(226골)에 훨씬 못 미친다.[25]

이때문에 현재 이탈리아 축구는 이에 대한 댓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이 징조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대회에서였는데 , 여기서 이탈리아는 조별리그 전경기에서 처음으로 선취점을 내주는 기록을 세웠다.[26] 결국 이탈리아는 남아공 대회에서 16강에 들지 못하고 조기 탈락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 대회였던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역시 1승 2패인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는데 이 대회에서도 득점 2점에 실점 3점이란 기록을 올렸다. 다시 말해 2010년 남아공 대회부터 카테나치오의 실종이 드러났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로 2024에서 카테나치오의 실종이 절정에 달했다.


[1] 당시 이니에스타의 위엄과 이탈리아의 선전을 한 번에 보여주는 사진,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파일 제목이 "세상에서 제일 몸값 비싼 백댄서"다. [2] 이미지에 오타가 있는데, 조제 알타피니는 알파티니로,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트리파토니로 적혀있다. [3] 훗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감독직을 맡는다. [4]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이다. [5] 그 3톱의 한 명인 조세 알타피니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 중 한 명이었다. [6] 참고로 이 전술의 경우 수비하는 선수의 수가 많아서 공격하는 선수의 숫자가 적어 상대적으로 리베라의 역할이 막중하였는데, 리베라는 그 임무를 완수해냈다. 말 그대로 판타지스타. [7] 스페인 출신의 그는 스페인의 공격 축구 전술을 밀었지만, 카테나치오한데 밀려버리고 결국 AC 밀란처럼 카테나치오를 사용하였다. [8] 당시 인테르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 [9] 1955/56 시즌에는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자친토 파케티는 현대 풀백 오버래핑의 시초이자 현대 풀백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10] 스페인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자로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와는 동명이인. [11] 당시 라 그랑데 인테르(la grande inter)라 불리며 la grande 호칭을 받은 유이한 팀이다. (나머지 하나는 토리노) [12] 파올로 말디니, 프랑코 바레시,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13] 말디니와 바레시는 사키가 이탈리아 감독이 되기 전부터 이미 대표팀에 뽑혀왔으나, 코스타쿠르타와 타소티는 이전에는 쟁쟁한 다른 팀 선수들( 주세페 베르고미, 리카르도 페리 등등)때문에 선발되지 못했었다. [14] 더구나 월드컵 바로 직전 시즌인 93-94 시즌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팀이자 세리에 A 우승팀이기도 했다. 해당 시즌 세리에 A에서 밀란은 34경기 36득점이라는 엽기적인 저득점축구를 했으나, 그와 동시에 실점은 15점밖에 하지 않는 짠물축구를 하여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15] 사실 타소티의 경우, 1960년생으로 당시 이미 만 34세의 노장이었으므로 온전한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긴 했다. 이미 직전 시즌 리그에서도 상당시간의 출장시간을 크리스티안 파누치와 분담했던 상황. 더구나 당시 미국 월드컵은 무더위가 극심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대회였다.(같은 대표팀 선수이자 밀란의 후배였던 당시 24세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도 더위로 인한 컨디션 저하로 고생했을 정도) 그래도 스페인 전에서의 그 엘보우는 쉴드가 안되긴 하지만(...) [16] 2차전에선 타소티 대신 베나리보가 라이트백으로 선발 출장, 바레시마저 아웃된 3차전부턴 말디니가 센터백으로 이동하고 베나리보가 레프트백, 아폴로니/무씨가 라이트백으로 뛰었다.(아폴로니는 3차전, 무씨는 16강/4강/결승전에 선발출장) 특히 베나리보는 다른 역대 이탈리아 수비수들에 뒤지지않는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무씨가 16강전의 활약 이외엔 불안하긴 했지만 결승전에서 무씨 대신 교체된 아폴로니 역시 좋은 활약을 펼쳐주었다. [17] 심지어 조별 리그 3위였다(...). 32강 제도하에선 여지없이 탈락이었겠지만 당시는 24강 6개조 중 1,2위 팀 총 12팀이 16강 진출에 남은 4자리를 각조 3위 팀 중 상위 4팀이 차지하는 방식이었기에 그야말로 간신히 턱걸이로 16강 진출... 그것도 턱걸이 중의 턱걸이었다. [18] 물론 앞에서 언급한 수비진의 힘도 있었고, 로베르토 도나도니, 디노 바조,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니콜라 베르티 등의 미드필더진의 활약도 있었다. 다만 바조 파트너였던 여러 공격수들은 다른 선수들만큼의 존재감을 못냈다(...) [19] 그리고 도나도니와 베르티의 위치가 바뀌어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4-4-2 플랫 포메이션의 경우 대체적으로 상기 이미지와 같이 도나도니가 왼쪽, 베르티가 오른쪽에 섰으나 결승전때만은 왠지 베르티가 왼쪽, 도나도니가 오른쪽에 섰다. 뭐 이 둘의 경우 위치에 크게 구애받지않는 선수들이었긴 하지만. 도나도니는 좌우, 중앙 가리지 않고 다 뛸 수 있던 선수고, 베르티는 이 대회에선 다른 선수들이 만족스럽지 못해 상대적으로 제일 많이 선택되긴 했지만 원래는 측면보다는 중앙지향적인 선수였다. [20] 우리가 흔히 아는 안정환 골든 골이 터졌던 그 경기였다. [21] 당시 이탈리아가 팔꿈치 공격을 비롯한 거친 플레이를 어찌나 심하게 자행했는지 2006년 월드컵부터는 아예 팔꿈치로 상대를 스치기만 해도 곧바로 레드카드를 적용하는 규칙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22] 그것도 1골은 자책골이고 1골은 PK다. 상대팀 선수에 의한 필드골은 단 한 번도 안 먹혔다고 보면 된다. [23] 어느 정도냐 하면 이 경기로 독일에게 졌다는 사실보다 5실점이나 했다는 것이 더 중점적으로 다뤄질 정도였다. 자신들의 상징이기도 했던 카테나치오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었으니... [24] 그렇다고 당대 이탈리아 국적 공격수들의 개인 기량마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워낙에 축구사 역대급의 명 수비수들이 쏟아지다시피 나오고 수비축구를 표방해서 상대적으로 수비수들이 더 주목받았을 뿐이다. 2006년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공격수인 루카 토니는 대기만성형의 선수였던 탓에 선배 세대 공격수들과 비교했을 때 명성이 떨어졌을 뿐 ACF 피오렌티나에서 세리에 A 카포칸노니에레를 차지했고 월드컵 이후 독일의 거함 바이에른 뮌헨으로 적을 옮겨 주전과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에는 또다른 전설인 델 피에로도 있었고 엔리코 키에사, 빈첸조 이아퀸타와 디 나탈레 역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이렇다할 공격수가 떠오르지 않는건 오히려 최근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콸리아렐라와 질라르디노는 월드클래스는 아니었지만 리그 상위권 수준의 훌륭한 선수들이었고, 임모빌레는 독일에서 실패했지만 자국으로 돌아와서 세리에 A 최고의 공격수로 활약하는 중이며 앞서 언급한 엔리코 키에사의 아들인 페데리코 키에사는 아버지를 뛰어넘는 명성의 젊은 신예로 주목받고 있다. [25] 이러한 저조한 득점 수는 선취점을 올리면 일단 잠그고 보는 이탈리아 축구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격수들의 득점력이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세계 축구계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 선수들이다. [26] 거기에 사상 초유로 무승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치욕까지 기록했다. 그 전에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더라도 1승은 꼭 챙겼었는데, 여기서는 단 1승도 못챙기고 탈락했으니 그 치욕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