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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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종현 方鍾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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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호 | 일사(一簑) |
본관 | 온양 방씨[1] |
출생 | 1905년 6월 3일 |
평안북도 정주군 (現 정주시) | |
사망 | 1952년 11월 18일 (향년 47세) |
경상남도 부산시 동대신동 자택 | |
학력 |
오산고등보통학교 (
졸업) 경성제국대학 ( 예과 문과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조선어문학 / 학사) |
묘소 |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
상훈 | 금관문화훈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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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한 국어학자.「훈몽자회고」, 「계림유사연구」, 『훈민정음통사』 등을 저술했다.
고어, 방언 연구에 천착했으며 독도의 어원 연구로도 유명하다.
2. 생애
1905년 6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現 정주시)에서 아버지 방자규(方子奎, 1883. 9. 26 ~ 1946)와 어머니 수원 백씨(1884. 6. 6 ~ 1947)[2]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오산학교를 거쳐 192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5회(문과)로 입학했다. 1930년 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로 진학하면서 조선어문학전공으로 진입하여 오구라 신페이, 다카하시 토오루 교수에게 사사했다.
학부생으로 있었던 1931년에는 법문학부 동창인 조윤제(제1회), 이희승(제2회), 김태준, 김재철(이상 제3회), 이숭녕(제5회)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해 동년 7월, 최초의 조선어문 전공학술지인 조선어문학회보를 펴냈다.
1934년 법문학부 졸업과 동시에 경성제대 대학원에 입학해 1938년 9월까지 국어학을 연구하면서 그 사이인 1936년 11월부터 1937년 7월까지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에 유학하여 언어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29촌 지간의 족숙(族叔) 방응모의 권유로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하는 잡지 《조광》의 발행을 주관하기도 했고, 1942년에는 주식회사 조광사(朝光社)의 전무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945년 10월, 광복 후 모교인 경성대학의 예과 교수를 거쳐 1946년 10월에 국대안에 따라 통합된 국립 서울대학교의 문리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1년 12월에는 문리과대학의 학장에 취임하였다. 이 밖에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시절부터 활동해왔던 한글학회 이사, 진단학회 위원, 서지학회 회장, 우리어문학회 위원, 한국산악회 학술조사위원, 조선일보사 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2년 5월 건강상의 문제로 문리과대학장 직임을 사임했고, 그해 8월부터 숙환으로 인해 투병 생활을 이어 나갔다. 결국 1952년 11월 18일 오후 9시 경상남도 부산시 동대신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1999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연구
그의 학문은 국어사관계자료의 정리와 해석, 국어학사연구, 방언조사, 속담집 간행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훈몽자회고(訓蒙字會攷)〉(동방학지 1, 1954)와 〈계림유사연구〉(동방학지 2, 1955)는 유고로서 발표된 것이었으나, 그의 성실하고도 정교하고 치밀한 실증적인 학문연구방법을 보인 논문이었다.〈훈몽자회고〉는 국어사연구상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훈몽자회에 관하여 최초로 상세한 해제를 꾀한 업적으로서, 특히 저자 최세진의 생애와 업적을 자세하게 밝혔으며, 〈계림유사연구〉는 서지 해제와 더불어 중국자음을 이용한 계림유사 어석(語釋)의 방법을 제시한 선구적 업적이었다.이 밖에 훈민정음 연구, 고어와 방언 연구, 도서 해제, 속담과 민속의 연구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는 1935년과 1940년, 그리고 1946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해제를 비롯하여, 〈훈민정음사략(訓民正音史略)〉(1946), 〈훈민정음과 훈몽자회와의 비교〉(1947) 등과 같은 연구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과 훈민정음의 보급 및 변천 등을 고찰하고, 1948년에 이들 연구를 종합하여 〈훈민정음통사(訓民正音通史)〉를 발간하였다. 고어에 관한 연구는 〈고서에서 보는 언어변천고〉, 〈조선관역어(朝鮮館譯語) 해독〉(유고), 〈향약명연구〉(유고), 〈용비어천가강의〉, 〈순경음연구〉(유고) 등이 있고, 방언 연구로는 〈제주도의 방언〉, 〈방위의 이름〉 등이 있는데, 고어 연구로 가장 힘들인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어재료사전(古語材料辭典)〉(전집 1946, 후집 1947)을 발간한 일이었다.
도서해제로는 〈한글연구도서해제〉, 〈유합(類合)의 해제〉,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이문집람(吏文輯覽)〉,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대하여〉 등 여러 연구가 있는데, 〈사성통해(四聲通解) 연구〉(유고)는 사성통해의 편찬 경위 및 각종 운서와의 관계, 사성통고(四聲通攷)와의 관계 등을 자세하게 밝혀놓은 훌륭한 연구 업적이었다. 속담과 민속 연구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세시풍속집〉이 있으며, 이밖에 〈조선의 속담〉, 〈농촌의 풍속〉 등이 있다.
4. 기타
-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같은 동향 출신(평안북도 정주군)이자 같은 온양 방씨 집안 출신[3]으로,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 경기도 경성부 관철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에 있던 방응모의 집 사랑채에 거주했으며, 조선일보사의 잡지 《조광》 발행을 주관하기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 한국산악회의 1947년 울릉도 학술조사에 참가하여 독도 조사에도 동행한 후 1947년 경성대학 예과신문에 '독도의 하루'라는 기행문을 게재했다. 방종현은 독도의 어원이 독섬이고, 이는 돌섬 그러니까 석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독도가 돌섬에서 비롯된 명칭이라는 것을 최초로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