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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1년에서 1999년까지 대한축구협회에서 개최한 국제 축구 대회.2. 역사
대회 명칭이 자주 바뀌었는데, 변경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박스컵"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Box cup이 아니라 Park's cup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이름이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라서 이런 별명이 붙은 것.-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1971-1975
-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1976-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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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1979-1993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1980년 대회부터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대회에서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공식 대회명칭이 변경된 것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대한뉴스의 당시 경기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1979년 9월에 개최된 9회 대회부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명칭을 사용하였다. -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1995-1999
70년대에는 아시아 3대 국제 축구대회라고 불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에서만 부르던 이름이다. 다른 2개는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태국의 킹스컵이다. 일본은 코리아컵 대신 자국 주최 대회인 기린컵을 넣어 3대 대회라고 불렀다. 당연히 일본은 코리아컵을 개무시했고, 한국 역시 기린컵을 개무시했다. 한국은 1978년 제1회 기린컵에 딱 한 번 참가해 3위를 거둔 바 있다.
기린컵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브라질과 독일 클럽팀에겐 졌으나, 일본 대표팀은 3-0으로 뭉개버렸다. 일본도 정식 A대표팀은 1981년 코리아컵에 딱 한 번 출전했다. 74년과 75년에는 B팀으로 참가하긴 했다. 다만 실제로 메르데카컵이나 킹스컵 만큼의 이름값만큼은 아니더라도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아시아권에서 나름대로 위상이 있던 대회였기는 했다. 당시 한국이 메르데카컵과 킹스컵에서 우승을 많이 했던데다가 1978년 월드컵까지는 전세계 지역예선에서 본선 월드컵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리가 단 16자리로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에서 딱 우승팀만 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32자리 ~ 48자리 본선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보다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라서 본선 월드컵에 진출할 수 없던 다른 아시아팀들도 이러한 지역대회에 많이 참여했었고, 코리아컵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물론 당대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티켓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유럽이나 남미 국가들 사이에서는 위상이 높았던 대회는 아니었으며 즉 리그 선발 혹은 단일 프로팀은 해외 투어용으로 많이 참가했던 대회이다.
하지만 1982월드컵부터 전세계 지역예선에서 본선 월드컵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리가 24자리로 확대 되고 한국이 86월드컵 24개국 본선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위상이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1999년 대회를 끝으로 코리아컵은 사라졌다. 다른 대회들은 진행되고 있긴 하나, 정작 그 대회들도 새천년 이후로는 아시아 축구의 성장과 맞물려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메르데카컵도 오랫동안 열리지 않다가 가끔씩 열리고 있고, 그마저도 폐지 수순을 밟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킹스컵은 2년에 1번씩 꾸준히 열리지만, 이젠 정예 A대표팀이 아닌 청소년 대표팀이나 2진급이 나가는 대회가 되었다.
기린컵도 2013~2015년에는 열리지 않다가, 2016년에 열리게 되었지만 이마저도 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둔 정비작업 수준일 뿐 옛날 옛적 그 모습은 아니다.
홍콩에서 매년 음력 설날 쯤 열리는 홍콩 구정컵 또한 2010년대 들어 위상이 지속적으로 추락하면서 국가대표 친선대회가 아닌 사실상의 클럽 초청 대회로 격하된 상황이다.
중국이 그나마 2017년부터 돈을 쏟아부으며 차이나컵을 열었지만, 중국은 1승은커녕 3번 치러진 대회에서 딱 2골[1]을 넣고 모조리 패했으며, UEFA 네이션스 리그로 인하여 유럽도 참가하지 못하게 되어 북중미, 남미나 아시아, 아프리카 팀 위주로 참가하게 되어 대회 참가국의 퀄리티도 떨어진 편이다. 그래도 2019 대회에서 우루과이가 제법 1진으로 참가하여 우승했다. 정작 중국은 같은 아시아 나라들인 태국과 우즈베키스탄에게도 져버려 꼴지했지만 말이다.
3. 의의
요즘에야 세계 대회에서도 괜찮은 성과를 올리고 있지만, 1978년 월드컵까지는 전세계 지역예선에서 본선 월드컵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리가 단 16자리로 아시아+오세아니아 합동예선에서 딱 우승팀만 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32자리 ~ 48자리 본선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보다 월드컵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로 월드컵 16개국 본선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 진출 시절로[2] 아시아 + 오세아니아 합동예선 우승팀만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정도로 현재 월드컵 16강전 진출 만큼 치열한 시절이었는데 대한민국은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대회는 대한민국이 나갈 수 있는 몇 안되는 국제 축구대회 가운데 하나였다. 자국에서 주최하는 대회이니 당연하지만.물론 이렇게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은 다른 아시아팀들도 마찬가지였거나 월드컵에 진출한다해도 1966년 월드컵에 진출한 북한[3]과 1978년 월드컵에 진출한 이란[4]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 진출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인지라 이런 지역대회에 많이 참여했었다. 그래서 1970년대는 물론이고 1980년대까지도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권에서 이름값은 있던 대회였지만, 월드컵에서 아시아팀에게 쥐어쥐는 티켓이 늘어난데다가 한국이 월드컵을 지속적으로 통과하면서 대회위상이 크게 하락하며 무용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홀수해에 개최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월드컵 최종예선과 일정이 겹치게 되는데, 1997년에는 아예 최종예선이 홈&어웨이 방식으로 바뀌면서 아예 일정을 내는 게 불가능해졌고, 결국 1999년 대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이제는 대회 기록조차 찾기 어려울만큼 잊힌 상태.
미래에도 이 대회가 부활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고 보이는데, FIFA의 정책과 각 대륙별 축구협회의 경향상 이 같은 소규모 국제축구대회는 사장되는 추세에 놓여 있다. 일단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본선 월드컵에 들어 갈 자리가 48자리로 확대되면서 '월드컵 지역예선'의 위상도 그만큼 강해졌고, 각 대륙별 축구대회와 그에 연계되는 컨페더레이션스컵의 체계가 정비되면서 대륙별 축구대회의 위상도 상승했다. 하지만, 저 컨페더레이션스컵도 흥행 부진에 시달려 2017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아무튼 이에 따라서 1개 나라 축구협회에서 진행하는 소규모의 국제대회는 점차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며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2003년 동아시아 축구 연맹의 창설과 함께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가 2년 간격으로 개최되어, 한국과 일본으로서도 축구 변방 시절에 동네 잔치 수준으로 치르던 대회까지 굳이 존속시켜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현재로선 각국 축구협회는 더 이상 이런 '집안 잔치' 대회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회를 개최하는 비용에 비해 이득이 너무 안 나온다. 즉,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동네 잔치를 해봤자 어차피 대륙별 대회, 공인된 국제대회만큼 권위가 없다는걸 FIFA에서도 확인사살[5]을 해버리니 축구팬들로부터 '쓸데없는 짓'이라는 비판만 받을 뿐이다.
일단 메르데카컵이나 킹스컵, 기린컵은 명맥은 유지하고 있으나 앞서 설명된 듯 당장 언제 없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수 년만에 개최된 기린컵 역시 다음 개최는 또 언제가 될 지 아무도 모른다. 메르데카컵이나 킹스컵은 문서만 봐도 알겠지만 참가팀들이 대학팀이나 각나라 올림픽팀, 2진들이 주로 참가하기에 A매치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간혹 A대표팀이 참가해도 축구 변방들이나 주로 나오는 수준이다. 결국 왕년의 아시아 3대 국제축구대회가 이제는 존속조차 불투명한 셈이다. 그나마 월드컵에 못 나오는 중국이 위에 서술한 대로 차이나컵을 열고 있지만. 이마저도 2020년 코로나 여파로 위에 기린컵이나 킹스컵과 같이 취소되었다.
4. 방식
해외의 팀들을 초청해와서 열렸는데, 출전팀의 숫자는 매회마다 바뀌어서 일정하지 않다. 최저 4에서 최대 16까지 오락가락. 개최도 1985년까지는 1년 주기였으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본선 진출(24강) 확정 이후인 1987년부터 1999년까지는 1988년 대회를 제외하면[6] 홀수 해에만 개최, 즉 2년 주기로 변경됐다.짝수 해에는 FIFA 월드컵, AFC 아시안컵[7], 올림픽[8], 아시안 게임[9]이 있었고 1986년부터 코리아컵이 폐지된 1999년까지 1992 AFC 아시안컵 일본 외에는 모든 대회 본선 진출에 성공했으니 큰 대회가 없는 해에만 개최한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국가대표팀과 클럽팀 간의 경기가 빈번했었다.[10] 따라서 국가대표팀만이 아니라 클럽팀이나 선발팀도 참가했다. 참가팀 가운데는 " 브라질 상파울루 주 프로리그 21세이하 선발팀"도 있었다. 그리고 이 팀이 76년, 77년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 외에 한국 선수가 활약하던 PSV 아인트호벤이나 바이어 04 레버쿠젠, 심지어 1988년에 퀸즈 파크 레인저스가 초청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클럽팀이 출전한 것은 1995년 ( 스코틀랜드 킬마녹 등 3개 클럽팀과 1개 올스타팀이 출전) 대회였고 1997년 대회와 마지막 대회가 된 1999년 대회는 4개국 대표팀 초청경기로 열렸다. 개최국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1997년 대회 출전국은 유고슬라비아, 이집트, 가나였고, 1999년 대회 출전국은 크로아티아, 이집트, 멕시코였다.
76년에서 86년까지 대한민국은 A팀을 화랑, B팀을 충무로 나눠서 2개 팀이 출전했다. 85년 대회에서는 국가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이 따로 출전했다.
5. 대회 목록
- 특별히 표시되지 않는 한 국가명은 성인국가대표 (한국대표 A/B팀 분할 참가 시 A팀인 '화랑').
회차 | 연도 | 우승 | 준우승 | 비고 |
1 | 1971 | 한국, 미얀마 공동 우승 | ||
2 | 1972 | 미얀마 | 인도네시아 | 한국 3위 |
3 | 1973 | 미얀마, 크메르 공동 우승 | 한국 3위 | |
4 | 1974 | 한국 | PSMS 메단 (인도네시아) | |
5 | 1975 | 한국 | 미얀마 | |
6 | 1976 | 한국, 브라질 상파울루주 U-21 선발 공동 우승 | 충무 3위 | |
7 | 1977 | 상파울루주 U-21 선발 | 한국 | 충무 조별리그 탈락 |
8 | 1978 | 한국 | 워싱턴 디플로매츠 (미국 NASL) | 충무 3위 |
9 | 1979 | 비토리아FC (브라질) | 한국 | 충무 4위 |
10 | 1980 | 한국 | 인도네시아 | 충무 3위 |
11 | 1981 | 한국, 라싱 코르도바 (아르헨티나) 공동 우승 | ||
12 | 1982 | 한국, 오페라리우FC (브라질) 공동 우승 |
한국 클럽 첫 참가 (할렐루야, 3위) |
|
13 | 1983 | PSV 아인트호벤 (네덜란드) | 한국 | |
14 | 1984 | 방구AC (브라질) | 할렐루야 | 한국 3위 |
15 | 1985 | 한국 | 한국 88 올림픽팀[11] | |
16 | 1987 | 한국 | 오스트레일리아 |
충무 마지막 대회 (공동 3위) |
17 | 1988 | 체코슬로바키아[12] | 소련 B 대표 | 한국 3위 |
18 | 1989 | 체코슬로바키아 | 브뢴비IF (덴마크) | 한국 3위 |
19 | 1991 | 한국 | 이집트 | |
20 | 1993 | 이집트 | 한국 | |
21 | 1995 | 에콰도르 | 잠비아 | 한국 3위 |
22 | 1997 | 한국 | 유고슬라비아[13] | 4개국 그룹리그 방식 |
23 | 1999 | 크로아티아 | 멕시코 | 한국 3위 |
6. 참가했던 유명 구단
- 뉴질랜드 - 1976년 대회에 출전해 4위를 기록했다. 이 대회에 나온 첫 비아시아 국가대표팀이다. 이후 1978년과 1983년 대회에도 참가했지만 두번 다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 워싱턴 디플로매츠 - 1978년 대회에 참가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NASL에서 요한 크루이프, 빔 얀선 등의 네덜란드 커넥션을 구축했던 구단으로, 당시 대회 참가 때는 거스 히딩크가 선수로써 막 입단했을 때였다.
- PSV 아인트호벤 - 1982년과 1983년 대회에 전원 1군으로 출전했었다. 당시 팀의 주전 미드필더였던 허정무도 선수단에 동행해 참가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조별리그부터 대한민국을 상대해 졸지에 조국을 등진(?) 선수가 되기도 했다. 조별리그에선 3승 1무로 쾌속 질주했다가 준결승에서 브라질의 오페라리우 FC에게 3-4로 지면서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게 마음에 걸렸는지 1983년 대회에서는 조별리그에서 가나, 뉴질랜드, 수단 등 국대 팀을 다 누르고 준결승에서 미국, 결승에선 개최국 대한민국을 다 잡으며 6전 전승으로 깔끔한 우승을 기록한다.
- 바이어 04 레버쿠젠 - 1984년 대회에 1군으로 참가했다. 이전 1978년 대회 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참가한 바 있으나 어디까지나 리저브 팀이었고, 레버쿠젠도 이전 1982년 대회때는 2군 팀으로 출전했었다가 전패를 당하는 망신을 당한 뒤[14] 이 대회에선 각잡고 1군으로 참가했다. 조별리그에서 대한민국에게 2-3으로 지긴 했지만 어찌저찌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준결승에서 브라질의 방구 아틀레치쿠에게 승부차기로 지며 아쉽게 우승은 기록하지 못한다. 준결승전에서 차범근이 선제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 제노아 CFC - 1983년 대회에 참가했었다. 당시에도 세계 최고 리그 중 하나였던 세리에 A 팀이 참가해서 기대를 모았으나, 대한민국에게 1-3으로 개막전에서 완패를 당하고, 미국에게도 0-3으로 지고 태국을 3-2로 겨우 잡는 등 부진한 모습으로 조별리그 광탈.
- 이집트 - 1987년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몰수무 상대였다. 그 해 6월 10일,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6월 항쟁이 시작되던 그날, 아무것도 모르고 마산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다가 경기장에 날아들어온 경찰의 최루탄 가스에 고통을 받아야 했다.[15] 그래도 이 경기 이후에도 멘탈이 털리진 않아서 대회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성적을 올렸다. 이후 1991년 대회에도 나와 준우승, 1993년 대회에선 우승을 차지한 대회의 단골 출전팀이었다.
-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 - 1988년 대회에 출전해 결승에 올라 우승을 거뒀다. 이 대회에 출전한 팀들 중 역사상 가장 최강 전력인 팀이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대회는 기존 대회보다도 더 공을 들인 대회인데, 바로 1988 서울 올림픽 본선 대회를 대비한 일종의 예행연습격 대회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대회 규모도 16강으로 확대하고, 출전팀도 최대한 올림픽 참가국과 비슷하게 다양한 대륙의 팀을 섭외하려 노력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이래서 참가하게 된 것. 체코슬로바키아는 조별리그에선 부진했지만 8강에서 멕시코 프로팀을 잡고 준결승에선 대한민국 대표팀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끝에 결승전에 진출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대회에도 참가해 이번에도 무패로 깔끔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 소련 리그 선발/ 소련 올림픽 대표팀 - 역시 1988년 대회에서 리그 선발팀이 출전해 준우승을 거뒀다. 역시나 1988년 대회에서 최고 강팀 중 하나로, 결승전까지 5연승으로 쾌속질주했다. 3년 뒤 1991년 대회에도 출전해 4강까지 진출했으나 이집트 대표팀에게 지면서 대회를 마감했다.
- 퀸즈 파크 레인저스 - 1988년 대회에 초청되어 참가했다. 오프시즌 중 유럽 쿼터로 나간 사실이 있었다. 당시 소련과 유고, 체코, 헝가리, 나이지리아 등 만만치 않은 대표팀을 대거 초청한 조직위원회는 당시로써는 많은 금액인 7천 4백만원을 주고 QPR을 데려오며 다가올 올림픽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QPR은 4개 조로 이루어진 조별 리그에서 미국, 소련, 그리고 나이지리아 올림픽 대표팀과 같은 조에 속했다. 이때 미국과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둘 다 동점을 이루었지만 소련에게 3-0으로 패배해 2무 1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 SL 벤피카 - 1989년 대회에 나와 4위에 올랐다. 앞서 언급된 클럽들 처럼 프리시즌 준비 차원으로 나왔으며 2군이 아닌 1군 선수단으로 진지하게 나왔다. 조별리그에서 헝가리 U-21, 미국 U-21 대표팀을 잡았으나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지고, 결선 리그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에게 2-5로 대패했었다.
- 에콰도르, 잠비아 - 1995년 대회에 나와 에콰도르가 우승, 잠비아가 준우승을 거뒀다. 에콰도르는 정말 강력한 모습으로 무패 우승을 거두면서 남미의 위엄을 뽐냈고, 잠비아는 대한민국을 준결승에서 3-2로 잡는 이변을 연출하며 준우승을 했다. 당시만 해도 잠비아는 월드컵 연속진출에 성공했던 대한민국에겐 약체로 보일만한 팀이었기에 대한민국 입장에선 충격패였다.
- 유고슬라비아 - 1997년 코리아컵에 출전했다.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포항 스틸러스에서 리그를 평정했던 공격수 라데 보그다노비치의 유고 대표팀 데뷔전이 바로 이 코리아컵이었기 때문이다. 라데는 1년만에 밟은 한국땅에서 가나와의 경기, 2골을 넣으며 존재감을 어필했다.
- 멕시코, 크로아티아 - 1999년 코리아컵에 출전했다. 멕시코와는 1년 전 월드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동기부여도 있었고, 나름 치열하게 싸워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크로아티아 또한 월드컵 3위의 위업을 달성한 멤버들을 대거 제외하고 신예들 위주로 나왔으나 이 멤버도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멕시코를 이기는 등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여담으로 이 때 훗날 인천 유나이티드의 주전 멤버로 활약하는 야스민 아기치가 크로아티아 대표팀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7. 여담
차범근의 전설적인 6분 해트트릭이 1976년 대회에서 나왔다.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후반 종료 7분전까지 1-4로 탈탈 털리고 있었으나, 차범근이 후반 38분, 42분, 44분에 한 골씩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다. 차범근은 이후로도 조별리그 전경기 득점을 기록하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고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스타임을 입증했다.한국 대표팀의 역대 최단시간 득점 기록도 이 대회에서 나왔었다. 후일 20세 이하 대표팀 감독 및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지낸 박성화가 1979년 9월 14일 바레인전에서 20초만에 기록한 득점이 바로 그것이다.[16]
수단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다 점수차 패배 기록이 1979년 대회에서 나왔다. 9월 8일 치러진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0:8로 패배한 것. 그리고 수단은 2승 2패, 조 3위를 거두면서 4강 진출에 실패했다. 한편, 이 대회에서 세운 수단의 점수차 패배 기록은 아직도 수단 국대 역사상 A매치 최다 실점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대회에서는 특이하게도 몰수무(!!!) 경기가 있었다. 몰수패, 몰수승이 아니다. 정확히는 주최측에 의한 경기중단 및 무승부 처리. 해당 경기는 1987년 6월 10일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이집트전이다. 경기 날짜를 보면 잘 알겠지만,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날이다. 당시 마산은 3.15 부정선거, 부마민주항쟁 등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6월 항쟁 와중에 시위대가 거리를 점령할 지경에 이르자, 시위를 진압해야 할 경찰은 미친듯이 최루탄을 쐈고, 이 최루가스가 바람에 날리면서 바로 축구대회가 열렸던 마산종합운동장 주경기장[17]까지 덮치는 바람에 경기가 중단된 것이다. #
더군다나 이 장면이 KBS 1TV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생중계되기까지 했으니 시위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보여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경기중단으로 입장권 환불을 요구하던 관중들은 이게 관철되지 않았는데 더 열받는 사실은 이때 표가 안 팔려서 대부분의 관중들이 표를 강매당한 상황이었다. 결국 문자 그대로 전두환 따까리들에게 삥을 뜯긴 마산 관중들은 분노해 반 전두환 시위대에 합류하여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경기를 하던 1988년 대회 준결승전에선 체코슬로바키아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대표팀 내 사조직 열 하나회(...)의 존재가 알려진 계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95년 대회에서 잠비아를 상대로 무기력하게 패한 후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 전날 숙소를 무단이탈해서 음주행각을 벌였다고 폭로했고 그 중심에 열하나회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큰 홍역을 겪은 열하나회는 현재 열린 단체로 전환하고 자선, 봉사 활동에 힘쓰고 있다.
그러자 열하나회에선 이를 두고 박종환에게 앙심을 품어, 1996년 AFC 아시안컵 이란전에서 고의로 2:6 대패를 벌여 박종환 감독이 비난을 받게했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실제로 한국 대표팀이 전반까지 앞서다가, 후반들어 이유없이 와장창 무너져내렸기 때문이다.
이영표 선수가 젊은 시절 마지막 대회로 기록된 1999년 대회 멕시코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대표팀 감독은 허정무였다. 그리고 안정환이 같은 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한국은 단 두 골만 넣고 3전 3무로 대회 3위를 기록했다. 나머지 한 골을 넣은 선수는 크로아티아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노정윤.
8. 기타
2년 간격으로 열리는 이 대회는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이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면서 사실상 폐지되었다. 월드컵 이후에는 어영부영 사라졌는데 국가대표가 아닌 클럽팀 대회 개념으로 피스컵이 대타로 출범하게 되었다.[19] 하지만 이 피스컵도 통일교 재단의 재정 악화로 취소되었고, 이제 코리아컵의 명맥을 잇는 대회는 없다. 다만 전남지사컵 유소년 국제대회(유소년 팀 대회로 동티모르 유소년 팀도 참가했다.)라든지 수원컵같은 지역 유소년 국제 대회가 열리긴 한다. 수원컵은 2003년부터 2011년까지 2년 주기로 20세 이하 대표팀이 참가하여 한국이 3번 우승했다. 이후 사라졌다가 2015년부터 박지성이 투자하여 수원 JS컵이란 이름으로 부활하여 2018년까지 3번 열렸으나 코로나 여파로 2020년은 취소.
[1]
그마저도 2018 체코 대회는 어거지 오프사이드를 골로 밀어붙여 넣었다라고 주장. 결국 지대로 열터진 체코에게 두들겨 맞으며 4-1로 역전패.
[2]
1978년 월드컵까지 16자리로 16개국 본선 진출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였고 이후 1982년 월드컵부터 24자리로 확대되어 24개국 본선 진출 1라운드 24강 조별리그로 확대 된다.
[3]
2라운드 8강 진출(8위)
[4]
1978년 월드컵까지는 아시아+오세아니아에 주어진 16개국 본선 월드컵 티켓이 딱 1장(우승) 뿐이어서 생존게임을 벌여 단 한팀만 살아서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의 권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그리고 이란은 1978년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여 16강 조별리그에서 유럽팀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첫 데뷔골과 무승부로 승점 1점을 얻으며 월드컵 최종순위에서 무려 헝가리와 멕시코를 넘고 이란은 78월드컵 14위를 기록했다.
[5]
피파랭킹 정비와 함께 기린컵은 물론이고, 동아시안컵조차 대회명 기재없이 그저 친선경기로 기록된다. 친선경기로 취급되기에 랭킹 가산 포인트는 당연히 없다.
[6]
1988 서울 올림픽 대비를 위해 1년 만에 개최했다.
[7]
2004 AFC 아시안컵 중국까지는 짝수 해에 개최했다.
[8]
1988년까지는 A매치 대회였다.
[9]
1998년까지는 A매치 대회였다.
[10]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를 몇 해 앞두고, AC밀란이나 유벤투스 같은 해외 유수팀이 한국에서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다.
[11]
현재와 달리 1984/88 올림픽의 축구는 23세 이하 규정이 없이 국가대표가 출장했다. (유럽/남미는 2진 선수로 제한) 단 본선 전까지의 88팀은 사실상 국가대표 2진. 해당 경기 출전 선수는 A팀이
오연교(GK), 정용환, 정종수, 유병옥, 김평석, 강신우,
조광래,
박창선,
최순호,
변병주,
이태호 (백종철), 88팀은 이문영(GK), 김판근, 강태식,
최윤겸, 남기영,
구상범, 정동복, 김삼수,
김주성,
조민국,
김종부였다.
[12]
88년 참가한 체코슬로바키아는 KFA의 경기 기록에는 대표팀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감독을 보면 선발팀으로 추정된다. 단 89년 참가팀은 엄연한 A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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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동일.
[14]
조별리그에선 심지어
할렐루야 독수리에게 0-4로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아무리 유럽 클럽에겐 프리시즌의 성격이었다지만 망신이라 할 만 하다.
[15]
한국 선수들은 그나마 최루탄 가스를 조우한 경험이 있어서 옷으로 호흡기를 막는 선에 그쳤으나, 이집트 선수들은 경기 도중 쓰러지거나 눈물까지 흘리기도 했다.
[16]
이후
황희찬이
2020년 11월 17일에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카타르와의 친선 경기에서 불과 16초만에 득점하며 갱신되었다.
[17]
현재는 이 자리에 구조변경 형태로 건설된
창원 NC 파크가 들어서 있으며, 당시 주경기장의 존치시설에는 외야 매표소와 야구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18]
취소선을 긋긴 했지만, 이 당시 마산은 부마항쟁은 물론이고 4.19 혁명을 겪은 사람들이 한창 사회생활을 했을때였다.
[19]
물론 명확하게 코리아컵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현재 동아시안컵을 보며 옛 다이너스티컵의 계승을 연상했지만, 동아시아축구연맹 측에선 다이너스티컵의 계승에는 분명히 선을 그은 것과 일맥상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