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3:48:40

몽골-타타르의 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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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타타르의 멍에
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
Mongol-Tatar Y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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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1240 ~ 1480
위치 루스 지역
정치체제 킵차크 칸국의 속령
종주권자 킵차크 칸국의 대칸
1. 개요2. 주요 국가3. 역사4. 부정적 평가
4.1. 악영향
5. 긍정적 평가
5.1. 문화 분야5.2. 경제 분야
6. 영향력 및 계승성 논쟁7. 결론8.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몽골-타타르의 멍에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스 대부분[1] 킵차크 칸국에게 지배를 받던 기간 혹은 그 지배 자체를 말한다. 줄여서 몽골의 멍에, 혹은 타타르의 멍에라고도 부른다.

루스 지역을 정복하고 착취했던 주체는 바로 몽골이었는데 타타르까지 묶어서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타타르라는 말이 기원이 지옥이란 의미의 라틴어 타르타로스에서 왔다는 유래와 튀르크에 대한 멸칭에서 왔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킵차크 칸국의 지배층인 왕족은 소수(수천여 명 규모)의 몽골인들이었고 그 밑의 더 인구가 많은 귀족 계급이 이들 타타르인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보기엔 극소수의 최상위 몽골인들보다는 실제로 자기들이 더 직접 많이 만나야 하는 타타르인이 더 무서운 존재였다.[2] 더구나 이후 서쪽으로 퍼져나간 몽골인들도 문화적으로 이슬람화, 튀르크화되는 것은 물론 인종적으로도 이들과 완전히 뒤섞이면서 킵차크 칸국은 나중에는 사실상 튀르크-타타르 국가로 변모한다.

다만 ‘멍에(иго)’ 어휘를 몽골-타타르의 지배 행위에 접목한 표현은 이들 칸국에게 지배당할 당시의 러시아에서 직접 쓰였던 표현은 아니다. 본래 "멍에"라는 어휘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말이나 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뜻하며,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칸국의 지배를 '멍에'라는 표현으로 지칭한 최초 용례는 1479년 폴란드의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3]다. '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이보다 약 1세기 이후인 1575년 다니엘 프린츠(Даниел Принц)에 의해 사용되었고,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1817년 크루제(Х. Крузе)가 사용한 이후 러시아로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4]

다만 타타르의 멍에라는 단어 자체는 학술적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 과거에 몽골-타타르의 역할만을 강조하며 그것을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논쟁하고 평가했으나 현재로서는 각 루스 공국들의 역할[5]과 서방[6]이나 비잔티움 등 여러 세력들의 복잡한 정치, 사회적 상호영향을 강조하는 편이다.

지리적으로 폐쇄적이고 작은 한반도는 원 간섭기의 몽골(원)-고려 관계 같은 대륙세력-반도세력 간의 1:1 관계가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훨씬 개방적이고 큰 러시아는 해당 기간의 주요 루스 공국인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키예프에만 한정하더라도 몽골(킵차크 칸국)이 아니더라도 비잔티움부터 서방 국가들까지 모두 간섭or지배했고 반대로 루스 공국들이 이걸 역이용해서 역간섭을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2. 주요 국가

아이러니하게도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본 기관 중 하나는 정교회였다. 정교회는 대초원 통치자들에 의해 단순히 용인된 것뿐만 아니라 세금 면제 등의 특권을 받았다. 대부분의 타타르 지배 기간 동안 킵차크 칸국과 루스 관구장주교구 간에는 거의 동맹에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의 밑바탕 중 하나는 비잔티움 황제와 킵차크 칸 간의 실제 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13세기 후반부터 1453년 오스만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여러 차례의 결혼을 통해 강화되었다. 루스의 그리스 관구장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방침을 따르고 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Serhii Plokhy, The Origins of the Slavic Nations: Premodern Identities in Russia, Ukraine, and Belarus 中
동로마는 루스의 킵차크 칸국에 대한 종속 관계가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다. 키예프 루스의 분열과 몽골 침공 이후 교회를 전체 루스를 아우르는 유일하다시피한 행정적, 종교적 기관이었다. 당시 동로마는 교회를 통해 외부적으로는 친타타르 노선을 펼쳤고 루스 공국들에 간섭하여 조공이나 선택을 강요하기도 했다.
형식적으로 킵차크 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실질적인 동맹 관계를 구축해, 모스크바를 비롯한 루스계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에게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귀신같이 서방에서 견제/압박했다. 이로 인해 옛 키예프 루스 강역의 서부 상당 부분을 뜯어먹기도 했다. 동로마와 비슷한 케이스. 다만 문화적으로는 상호교류가 활발해져서 동북부의 모스크바까지 서구 문물과 서적들이 퍼지게 하기도 했다. 비잔틴 교부들이나 그리스 철학자들 서적뿐이었던 모스크바에 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 등의 서적들이 들어온 것도 간접적으로는 관련이 있다.

3. 역사

호라즘 제국을 초토화시킨 칭기즈 칸 제베 수부타이를 시켜서 호라즘 제국의 샤 무함마드 2세를 추격한 뒤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조지아 왕국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킵차크족을 격퇴시킨 후 1223년 5월, 루스 공국 연합군[8] 칼가강에서 싸워서 궤멸시킨다.

이후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한 뒤 오고타이 칸이 칸에 올랐고, 1236년 바투, 수부타이를 필두로 본격적인 원정군이 파견된다.

라쟌 공국의 수도를 5일 만에 함락시킨 후[9] 콜롬나, 모스크바, 블라디미르를 갈아버린 뒤 노브고르드 인근의 토르조크를 함락시켰다.[10] 이후 1240년 다시 러시아로 가서 키예프 인근을 초토화시킨 후, 마침내 키예프마저 함락시킨다. 이후 서쪽으로 가서 나머지 공국들을 초토화시킨다. 이후 바투의 후손들이 러시아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킵차크 칸국의 대칸은 바스카크( 다루가치)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하여 루스 대공을 감독하게 하였다. 바스카크가 감독한 것은 대공과 대공이 징수하는 공물 등이었다. 이 공물은 교회의 성직자들을 제외한 모든 루스인들에게 인두세 성격으로 부과되어 징수되었다. 또한 대칸이 요구할 경우 대공은 적정 규모의 장정을 파견하여 대칸을 도울 의무가 있었다.

몽골-타타르의 지배 기간 동안 거의 모든 루스의 대공들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의무적으로 왕래해야 했고, 자신의 대공직을 인정해주는 대칸의 야를릭(몽골어: ᠵᠠᠷᠯᠢᠭ / зарлиг, 러시아어: ярлык)이라는 윤허장을 얻어내야만 했다. 이 블라디미르 대공의 직위를 얻기 위해 모스크바 공과 트베리 공이 서로 치졸하게 경쟁하기도 하였다.

대공직을 얻기 위한 루스 공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은 대칸에 대한 종속을 더욱 강화시켜주었고, 루스의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권력투쟁에 불신과 환멸을 느끼면서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높여주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치졸한 경쟁은 이반 1세 시기를 기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대공직을 두고 트베리 공국의 미하일은 모스크바 공국의 유리를 몰아내고 1304년 대칸으로부터 야를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313년, 우즈베크 칸의 취임식 때 유리가 사라이에 가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새로운 대칸으로부터 새로운 야를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유리는 우즈베크 칸의 누이인 콘차카와 결혼했다.

이로써 동시대에 두 명의 대공이 존재하게 되었고, 1317년 유리와 미하일은 이를 두고 전쟁을 벌였으나 모스크바 공국이 참패하게 되었다. 유리의 아내도 포로로 잡혀 트베리 공국에서 죽었다.

대칸은 두 대공을 사라이로 소환하였고, 미하일을 대칸에게 항거했다는 죄목으로 1319년 처형시켰다. 미하일의 처형으로 유리는 비로소 단독으로 대공 직위에 재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22년, 미하일의 아들 디미트리가 대칸에게 바칠 공물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유리를 고발하였다. 이 죄목으로 유리는 더이상 대공직을 유지할 수 없었다.

1326년, 디미트리와 유리는 사라이에서 만났고, 디미트리는 아버지 미하일의 복수를 하기 위해 유리와 결투를 하여 유리를 죽였다. 대칸은 디미트리가 사사롭게 형벌을 내렸다며 그를 처형했다.

1327년엔 트베리 공국에 몽골의 다루가치가 부하들과 내려와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여기에 몽골의 다루가치가 공작을 죽이고 자신이 공작이 되어 이슬람을 퍼트리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트베리 공작 알렉산드르는 주민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주민들이 합세해 그들을 모두 죽였으나 오히려 몽골의 보복을 불러왔고 1328년에 대공직을 유리의 동생 이반에게 주었다. 그후 알렉산드르는 여러 국가들로 도망다니다 1335년 러시아로 돌아와야했으며, 1339년에 자신의 아들과 함께 거열형으로 처형당한다.

1368년 트베리 공국의 미하일 2세(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가 리투아니아 대공국 알기르다스[11]와 동맹을 체결하고 난 뒤 마마이[12]로부터 블라디미르 대공직의 야르릭을 받아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그가 블라디미르에 입성하는 것을 불허하였다. 1375년 미하일은 대칸으로부터 다시 야르릭을 확인받았으나, 드미트리는 도리어 트베리 공국의 영토를 침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다수의 루스 공들은 드미트리에게 충성하였다.

결국 드미트리의 독단적인 행동을 보다 못한 킵차크 칸국 측이 1378년,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군대를 보내 그곳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어진 보즈하 강 전투에서는 칸국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마마이는 설욕을 갚고자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 랴잔 공 올레그와 동맹을 체결하고 20만 대군을 소집하였다. 드미트리도 일부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15만 대군을 소집했다.

1380년 9월 18일, 쿨리코프 언덕에서 마마이의 군대와 드미트리의 군대가 맞붙었다. 드미트리는 리투아니아군이 오기전에 결전을 서둘렀고, 결과는 드미트리 측의 승리였다. 쿨리코프 전투는 지금까지 무패신화를 자랑하던 몽골-타타르가 처음으로 패배한 역사적인 전투로써 루스가 몽골-타타르로부터 해방되는 첫걸음이 되었다.[13] 여담으로, 이때 마마이의 군대가 점거하고 있던 고지에 마마이 쿠르간, 즉 마마이 고지라는 이름이 붙는데, 훗날 이곳은 더 큰 전투의 격전지가 된다.

패전 직후 마마이는 토크타미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곧 사망하며, 토크타미쉬는 사라이에서 새로운 대칸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쉬에게 값진 공물을 보낸 것 외에는 종속의 표시도, 알현하지도 않았다. 토크타미쉬는 이를 문제삼고 1382년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불태우고 루스 전 지역에서 잔인한 복수를 자행했다.

드미트리는 킵차크 칸국의 종주권을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칸에게 자신의 무례를 사죄했고 대칸으로부터 대공의 야르릭을 받기 위해 온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는 몽골-타타르가 루스 지역에 입힌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드미트리 다음 대공인 바실리 1세(Василий I Дмитриевич) 때에는 티무르 제국의 초대 군주 티무르의 침공을 받았다.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Тёмный) 때인 1445년에는 킵차크 칸국이 분열하여 카잔 칸국이 출현하였다. 동년 7월 카잔 칸국의 군대에 의해 바실리 2세가 포로로 잡히고 10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바실리 2세 다음 대공인 이반 3세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루스 지역을 통합시키고 동시에 절대군주 체제를 확립한 군주였다. 이반 3세의 치세 때 모스크바 공국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였고, 이는 러시아가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반 3세 시기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궁중 문화와 예절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러시아는 전제군주국이 되었다. 이는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한편, 더이상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종속국이 아니라는 제스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480년 이반 3세는 스스로를 정교회의 수호자라고 칭하였고, 자신을 차르라고 선언했다. 이미 티무르 제국과의 충돌과 분열로 쇠퇴한 킵차크 칸국은 이러한 이반 3세의 독단적인 행동에 별다른 제재를 할 수 없었다. 이로써 몽골-타타르의 오랜 지배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4. 부정적 평가

정치적인 부분에서조차 몽골 제국에게 정복을 당한 후유증은 상당했다. 러시아가 동방( 시베리아)으로 확장한 이유 역시 이제 막 수습한 국력 따위로 서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제국을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고, 강력한 경쟁자가 없는 빈 땅을 향해서 확장한 것이다. 이전 시대까지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 루테니아 지역도 몽골의 정복 이후 자연스럽게 이탈했다.

몽골의 침략을 계기로 같은 키예프 루스의 동족이었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이 역사가 엇갈린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킵차크 칸국의 후신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한 것을 계기로 (다시 말해서 몽골-타타르 세력을 극복하고 승리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루스 차르국으로 거듭났다.

물론 키예프 루스 시절에도 슬라브족과 발트어족 사이의 융화가 활발했던 벨라루스 지역, 우랄어족과 융화가 활발했던 러시아 지역과 키예프 루스 본진에 해당하는 우크라이나 일대의 차이가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 지역은 모두 같은 정교회권으로 묶여 있었고,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수즈달을 오가며 대공 역할을 맡았던 것에서도 보듯 이른바 "삼촌과 조카들"이라 불리는 계승권 문제를 공유하는 상황이었다.

4.1. 악영향

러시아의 후진성은 부분적으로 1230년경에서 15세기 중엽까지 몽골이 러시아를 점령했던 사실에 기인한다. 몽골은 보야르의 풍습과 습관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서구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3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러시아는 유럽 문명에서 단절되어 있었다. 몽골의 러시아 지배 기간에 출현한 국가 모스크바 대공국은 13세기 초까지 존속했던 키예프 공국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국가였다. 보야르들은 가부장적인 관습인 도모스트로이 - 러시아인 아버지들에게 성경과 자작나무 몽둥이로 가정을 통제하는 법을 교육했던 16세기 지침서 - 를 따라 상인과 농민들처럼 가족들을 지배했다.
나탸샤 댄스 : 러시아 문화사 / 올랜도 파이지스 저
" 대수학 아리스토텔레스를 갖고 오지 못한 아랍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러시아를 침략했던 몽골인들을 두고 중세 초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던 아랍 무슬림들이 이런저런 선진 과학기술을 가져와서 중세 스페인을 발전시켰던 것[14]과 다르게 중세 러시아 사회를 퇴보시키기만 했다는 것을 비판하는 표현.[15]

당시 인구가 4~5만에 달했으며 키예프-루시 계열 공국의 수도이자 비잔틴 제국의 문화의 영향으로 동슬라브 문화권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던 도시 키예프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울도록 열린 문은 어디에도 없었고, 200여 채의 집들만이 남았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무참히 학살당했으며, 건물들은 죄다 박살이 나고 키예프 루스의 보물들은 약탈당하는 등 그야말로 폐허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 전쟁의 영향으로 키예프 루스라는 공동체 구심점이 사라지게 되면서 루시 공동체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로 분열되고 킵차크 칸국의 지배야 말할 것 없고, 이후 크림 칸국,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폴란드 왕국의 간섭 등 온갖 외세의 침략에 치이는 샌드백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몽골인들은 러시아를 마치 원나라가 한족들을 지배한 것처럼 직접 눌러앉아서 지배하고 유전자 구성까지 바꿔버린 경우는 아니었다.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간접적인 지배에 그쳤다. 허나 간접 통치를 하는 대신 왕이 부마로서 n위 황족 대우 받고, 기근이나 침공을 당하면 물자나 군사를 지원 받고, 세금조차 안 내면서 쿠릴타이에 참석하고, 원나라 황자를 위시한 중요인사를 볼모로 데리고 있던 [16] 고려와 달리[17], 몽골의 러시아에 대한 압제의 악영향은 간접 지배라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18]

특히 240년에 이르는 몽골의 과도한 공납 요구는 루스 사회가 크게 낙후되는 원인이 된다. 칼가 강 전투로부터 수십여 년이 지난 1274년 몽골군은 스몰렌스크를 한 차례 약탈하였으며 1278년에는 랴잔을 약탈하였다. 1293년에는 몽골군이 다시 14개 공국을 침략하여 약탈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루스인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이렇게 노예로 잡혀간 것 외에도 임의로 루스 군인들을 징발하여 멀리 원나라로 파견하여 눌러살게 만드는 등등 인적 자원의 수탈도 만연하였다. 정작 처음부터 몽골에 항복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갈리치아-볼히니아의 경우 약탈 피해가 적었다. 다시 말해서 몽골-타타르인들은 이미 항복한 상황에 있던 공국들을 트집을 잡아서 침략하고 약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몽골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도시들에게는 잘 해준 편이다'라는 통념은 적어도 동유럽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14세기에는 그나마 비교적 인구가 많았던 트베리 공국과 랴잔 공국은 킵차크 칸국의 노예 셔틀로 전락하였다. 14~15세기 들어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일대에 흩어져 있던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팽창하자마자 킵차크 칸국에 대한 신종 맹세를 뒤집고, 별 다른 연고 관계도 없던 리투아니아 측에 투항한다.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은 특별히 군사력이 막강한 것도 아니었고 인구도 얼마 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이 루테니아 여러 공국에 무혈점령까지 하면서 영토를 급격히 확장했던 것은 이들이 타타르인들보다 공납을 적게 요구했기 때문에(다시 말해서 타타르인들이 공납을 과도하게 수취했기 때문에) 아니 적어도 이미 항복한 상황에서 또 쳐들어와서 집을 불지르고 사람을 납치하는 일은 안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근대 국가에서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퇴보하는 것은 문화에도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침입 이전에 러시아는 노르드 문화를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보다 못할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19] 비교하자면 푸시킨이 비교 언급한 알 안달루스의 아랍인들은 적어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지배하는 동안, 서로마 제국 말기 이래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있던 관개수로를 보수, 확충하고 신작물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경제도 부흥시키고 인구라도 늘려놓았는데, 몽골 제국의 경우 그 반대로 과도한 공납 요구로 경제도 계속 침체시키고 지속된 납치로 인구도 계속 줄여놓았다. 몽골 제국에 의해서 철저하게 갈려나간 이후 러시아가 격심한 퇴보를 겪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다. 본래 키예프 루스는 흑해 발트해를 잇는 수운 무역으로 번영하던 도시국가들의 집합체였으나,[20] 몽골-타타르 세력이 크림 반도의 카파 항구를 장악한 이후 흑해 무역의 이익이 러시아에서 킵차크 칸국, 크림 칸국으로 옮겨간 것이다. 루스 차르국이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하기 이전 모스크바 대공국의 상업이 당시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유달리 빈약했던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볼 수 있다.

5. 긍정적 평가

일단 몽골군이 작정하고 학살과 파괴를 했다고 하더라도 전근대 군대의 능력으로는 고작해야 주요 거점과 이동한 경로 위를 분쇄하는 것 뿐이지, 그 넓은 땅에 직접적으로 뭘 할 수 있는게 아다. 물론 몽골이 저지른 대학살과 초토화는 분명히 존재했고 당대인들에게 재앙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몽골 침공 이전에 12세기~13세기 초에 이미 키예프 루스는 내란을 벌이고 있었으며 키예프 등 주요 도시들은 내란, 흉년,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몽골의 침공은 이러한 암흑기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을 때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몽골 이전의 키예프 루스 때의 유목민인 페체네그, 폴로베츠나 이후의 루스 차르국 때의 크림 칸국의 대침공 역시 이미 여러 가지 요인들로 루스가 약화되었을 때 대대적인 침공을 가했지, 그들의 침공 자체가 국가 쇠퇴나 약화의 원인이 되진 않았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이들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로 볼 수 있는지, 얼마나 과장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 원론적으로 이 유목민들은 암흑기의 근본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 결국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기간은 여러 요인들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상황이며 몽골/타타르인의 직접적 행위들은 그러한 많은 요인 중 한 가지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진짜로 가혹한 지배를 받으며 암흑기가 찾아온 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우크라이나 지역 상당부분은 이후로도 크림 칸국-오스만의 속령이었다.

5.1. 문화 분야

타타르의 침입은 민족적 재난이자 국가적 파국이었다. 동시대인의 표현대로 타타르의 침입은 '러시아 땅의 파멸'이었다. '이방인의 징벌.'“잔인한 민족이 우리를 덮쳐 하느님을 모욕하고 우리의 땅을 황폐화했다.”이러한 괴멸과 파괴를 묘사하는 데 표현을 부드럽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의 역사에서 타타르의 멍에는 시대의 경계를 이루지는 않는다. 노동이 중단되거나 창조적인 기분 또는 열정이 꺾이는 일은 관찰되지 않는다. 문화가 북쪽으로 이동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중심지들이 발전했고 옛 중심지들이 쇠퇴했다. 그러나 이미 이전에 형성된 것들이 성장한 것이지, 얼마 전까지도 역사학자들이 말하기 좋아했던 대로 남쪽의 키예프 문화가 절반은 야만적인 북동쪽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북부는 오래전부터 이미 야만적인 처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즈달 땅은 결코 벽지가 아니었다. 반대로 수즈달 땅은 교차로에 놓여 있었다. 어쨌든 13세기 러시아 문화의 역사에서 쇠퇴의 시기는 없었다(이스트린을 참조하라). 13세기야말로 연대기의 발달은 물론 키예프 동굴 수도원 '파테리크', 주석이 달린 '팔레야', 그리고 반유대적인 논쟁을 담은 일련의 총서들을 비롯한 의미심장한 사상적·문화적 성과가 있었던 시기였다. 13세기의 기념비적 문헌들에는 남쪽의 슬라브 문화, 달마티아 연안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감지된다. 14세기에 이런 관계들은 더 강화되고 증가한다. 이런 현상을 새로운 남슬라브 영향의 유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팔라이올로고스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비잔틴의 새로운 문화 운동을 직접 계승한 것이었다.
게오르기 플로롭스키, 러시아 신학의 길

키예프 루스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높은 문화적 수준이 몽골의 침공으로 단절되었다는 것은 편견에 가깝다. 오히려 키예프 루스의 문화 수준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비해 떨어졌고 그마저도 일부 지배계층에 국한되었고 국가 자체는 슬라브 다신교적 성향이 훨씬 강했다. 동로마로부터 전수된 기독교 문화라는 측면에서 볼때, 이후의 모스크바 대공국, 노브고로드 공국은 키예프 루스보다 문화적, 예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였다. 단순히 동로마를 모방한 것을 넘어 그것들을 토양으로 러시아만의 독자적인 예술 사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표적인 예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물론 몽골 침공의 충격이 일시적으로 문화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긴 했다. 그러나 이후 충격에서 회복하면서 대대적인 재부흥을 맞는다. 교회는 몽골로부터 면세특권을 인정받았고 일반민들은 몽골에게 약탈당하거나 세금으로 내지 않기 위해서 재산을 교회에 바치거나 스스로 교회 소작민이 되었다. 교회의 성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를 통해 동로마의 러시아에 대한 영향 강화로 이어졌다. 그리스인 테오파네스 같은 동로마 예술가, 학자들이 러시아에 대거 유입되었으며 이는 안드레이 루블료프 같은 러시아인들이 비잔틴 예술에 접목하여 러시아만의 독창적인 새로운 예술 사조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불가리아 총대주교 터르노보의 에피미의 제자이자 그리스 아토스 산에서 공부했던 키예프 대주교 키프리안은 세계총대주교의 명을 받아 루스 공후들과 주교들 간의 분쟁을 중재했고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의 헤시카즘과 예루살렘 교회 법령, 음악 표기법을 규정하고 전파했다. 바실레이오스 카이사레이아스(Βασίλειος Καισαρείας), 시리아인 이삭(ܡܪܝ ܐܝܣܚܩ ܕܢܝܢܘܐ),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Ησύχιος, πρεσβύτερος), 고백자 막시무스(Μάξιμος ὁ Ὁμολογητής), 수도자 필립(Φίλιππος ο Μονότροπος) 등 그리스어 신학, 철학 서적들의 슬라브어 번역본이 만들어졌고 유입되었다. 훗날 루스 차르국 시대의 고위성직자나 귀족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아가페토스 철학을 논하고 공부했는데 이 시기의 영향이다.

일반 사람들의 관습이나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올랜도 파이지스는 도모스트로이를 '보야르의 가부장적 관습'의 증거로 든다. 자식들한테는 매를 들고 엄하게 키우라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전체적으로 가장에게 폭력을 마지막까지 쓰지 말라는 당대 기준으로 굉장히 진보적인 내용이다.
죄인인 나(이름)는 외아들(이름), 며느리(이름), 손자들, 같이 사는 사람들[21]을 축복하고 가르치고 훈계한다. 기독교 법칙에 따라 깨끗한 양심과 의로운 생활에 힘쓰며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계명을 이행하고 하느님을 부려워하며 올바르게 살고, 아내를 훈육하고 같이 사는 이들에게 강압적으로 굴거나 때리지 말고 힘든 일을 시켜서는 안된다. 오직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이 평온하게 잘 입고 잘 먹게 하고 집을 따뜻하게 하고 항상 질서를 지켜라.
도모스트로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가르침' 中
어떠한 일이든 주의깊게 행하고 간교함 없이 성실케 하여 웃음거리를 만들지 않으며 도둑질 하지 않고 어디서든 먹을 것과 마실것들 모드를 필요하다면 덮어서 썩게 하지 않고 곰팡이 피게 하지 않고 시게 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쓸고 닦고 물에 젖게 하지 않고 물을 붙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지 말고 접시를 깨끗히 씻고 잘 정리하고 남은 음식은 주인과 손님을 위한 것으로 구분하고 이미 시작한 것은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각 사람의 위치에 따라 식탁에 올려야 한다.

모든 일을 잘, 주의 깊게, 간교함 없이 행하고 모든 지시를 수행하는 이는 대접하고 친절한 말로 기쁘게 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줘라. 실수로, 잘 몰라서, 우둔해서 일을 망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조심하도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오직 말로만 그를 가르치고 그 죄를 용서해라. 두번째나 세번째로 일을 망치거나 게을러서 하지 않는다면 잘못과 일을 보고 때려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선한 이에게는 명예가, 악한 이에게는 처벌을 내린다면 그들 모두에게 배움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집의 여주인은 집안의 여자들을 돌보며 여기 기록된 대로 주의를 주거나 강요하거나 호의를 배풀거나 처벌해야 한다.
도모스트로이의 '주인은 어떻게 하인에게 그의 공적에 보상하고 나쁜 것에 처벌하는가' 中

5.2. 경제 분야

타타르의 멍에 기간이 길어서 이 기간 내에서도 경제적 성장기와 쇠퇴기가 따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기간에 영향을 주는게 몽골-킵차크 칸국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

러시아 내 역사기록에 따르면 몽골 이전 13세기 초 노브고로드와 키예프 등에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수천명이 죽어나갔고 식인이 자행되었고 거리에서 행인을 공격했으며 귀족들은 땅과 재산을 버리고 도망쳤다. 결국 키예프 루스의 암흑기는 몽골 침공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몽골의 침공은 여기에 치명타를 가했다. 대부분의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공예기술들이 실전되었으며 오랜 시간 동안 개간하면서 확장시켜왔던 경작지는 수세기 전으로 후퇴했다. 당시의 교황 특사는 타타르인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도시와 요새를 파괴하고 대학살을 자행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소규모의 산발적인 약탈이 아닌 대규모 침공과 파괴는 일시적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한게 몽골인들도 무분별한 파괴를 자행하기 보다는 교류하거나 착취하면서 이득을 얻는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22]

이후 루스는 대대적인 회복기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모스크바 지방에서 침공 기간 동안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농촌 정착마을의 수는 129에서 43개로 이전에 비해 1/3 수준으로 감소했지만 14세기에는 185개의 새 정착촌이 세워지는 것으로 침공 이전에 있었던 정착촌의 수를 넘어선다. 심지어 우글리치 지방에는 볼가 강을 따라 9-10킬로미터에 걸쳐 뻗어있는 몽골 이전에도 유례가 없었던 마을이 존재했다. 루스 북부지방에서 신축된 건물이 1188-1212년 시기에는 26개, 1238-1262년에는 1개라면 1288-1312년에는 18개, 1338-1362년은 31개, 1388-1412년에는 73개로 이전을 능가했다. 또한 몽골로 인해 중국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거대한 유라시아 상권과 연결되면서 해당 지역은 경제적 번영기를 누리기 시작한다. 정리하면 루스의 쇠퇴기와 몽골의 침공으로 인한 피해는 직후 빠르게 복구되었으며 농민과 평민들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은 향상되었다. 이는 서유럽에서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회복이 빨랐고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과 동일하다.

수공업과 상업도 빠르게 발달하는데,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에서는 제철 부문이 크게 발전했다. 도검류와 방어구류 생산에서 교회의 종이나 대포를 만드는 주조 공장들이 출현했다. 또한 금세공사, 은세공사, 동세공사 등 당시 기준으로 고도의 기술을 지닌 귀금속 장인들이 출현한다. 도시의 장인들은 주문 생산에서 벗어나 지방 시장에 교환하기 위해 제품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데 이는 단순한 농산물이나 간단한 수공예품을 화폐나 물물교환으로 구입하기 위해 도시나 수도원 주위에 형성된 단순 시장인 토르그(Торг)에 상인, 장인들이 정주하기 시작했고 랴드키(Рядки)라는 상업주거지로 발전했으며 사회적 노동분업이 심화되고 수공업은 농업과 더 분리되었는데 이는 도시민과 농민들 사이의 활발한 상거래와 국내시장의 생성과 화폐유통을 야기했다.

물론 부흥기 이후에 다시 쇠퇴기가 찾아오긴 한다. 예를 들자면 15세기 초에 타타르인들이 다시 한번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고 거기에다 흑사병까지 퍼진다. 이 두 가지 위기를 맞은 러시아는 13세기 초의 몽골 침공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 사실 당대 기록들에서는 오히려 15세기 타타르의 침공을 더 끔찍하게 묘사했고[23] 일반적으로 알려진 암흑기로서의 타타르의 멍에에 대한 인식은 13세기가 아니라 15세기의 묘사에 더 비슷하다.

6. 영향력 및 계승성 논쟁

중세 루스가 몽골-킵차크 칸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제는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논쟁 중 하나이다. 이 논쟁은 여러 분야에서 몽골 지배의 영향을 어디까지로 볼 수 있는지, 그것이 러시아의 정체성과 정치 체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초래했다. 게다가 더 나아가는 당대 중세 혹은 초기 근대 러시아인들이 몽골-킵차크 칸국에 대한 의식적인 국가적 계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으로 번지기도 한다.[24]

다만 중요한 점은 이러한 차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대인들 역시 인지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직접적인 사료적 증거가 없는 이상 가설이나 이념의 영역이다. 초기 근대 러시아의 동로마, 폴란드, 스웨덴의 등의 제도 차용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1차 사료상으로도 명백하게 입증되기 때문이다. 중세에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 동로마의 정치 제도에 대한 대강의 설명들과 나름대르의 평가는 문헌으로 남아 있었다. 종교적 이유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기에는 16-17세기에는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같은 가톨릭 국가들이 이슬람교인 오스만에 대사관을 두는 등 정식으로 교류해서 정치 및 군사제도에 대해 분석하고 자국과 비교하는 기록을 남겼다. 동시대의 폴란드-러시아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최소한 초기 근대 시대에 이웃국들끼리는 서로 정치 및 사회 제도에 대해 의도적으로 분석하고 자국과 비교하는건 드물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몽골-킵차크 칸국에 대해서는 사료상으로 입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게 몽골의 직접적인 차용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대 러시아인들이 민족적, 종교적 이유로 몽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꺼렸다는 것을 이유로 들지만 달리 말하자면 증거가 없다는게 맞다. 게다가 이런 학자들의 주장은 몽골-킵차크 칸국의 단순히 일시적이고 선택적인 것이 아닌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이나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결정지은 모델이었다는 것으로 확장되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된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확장되는데 예를 들어 제정 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사유재산권에 의미를 크게 두어 차르가 봉건영주들을 타도하고 국가를 자신의 소유물로 둔 전제군주가 되는데 몽골의 지배가 결정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 역사에서 몽골 이전의 키예프 루스 시대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후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 등은 옛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유로워졌으나 몽골을 지배를 받으면서 노예적 제도 뿐만 아니라 예속 정신이 형성되었다고 했다.[25] 반대로 레프 구밀료프, 조지 베르나츠키를 비롯한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서 러시아는 원래 유라시아적인 국가였으나 차르들이 강제적으로 서구화를 해버린 탓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이를 이어 받아 냉전기에 러시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26]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소련 학자들은 러시아에는 생산수단(토지)를 통제하는 전제정이 있었기에 봉건제가 없었다(혹은 '서구적'인 봉건제가 없었다)는 논리로써 서구와 러시아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전개했다. 이에 기반해서 리처드 파이프스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공산주의적 체제가 동로마와 몽골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의 역사적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사관 등에서도 주로 다뤄졌다. 이 외에 대표적인 학자로는 도널드 오스트로우스키, 야로스와프 페웬스키가 있다. 이들은 대개 미국으로 망명한 베르나츠키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라시아주의자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이들은 러시아가 몽골(더 정확히는 킵차크 칸국)에 대한 국가적 계승의식이 존재했다는 주장까지 번진다.

거의 대동소이하게 키예프 루스 시절의 슬루즈니예 젬리나 모스크바 대공국의 포메스티예 제도 같은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토지제도 등을 근거로 러시아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동방적 전제주의 국가이며 이것이 기원이 동로마, 몽골로부터 있다는 주장도 있다.[27] 예를 들어 리처드 파이프스 소련 공산주의 체제는 제정 러시아의 전제정에서 나왔으며, 그 기원은 동로마와 몽골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고 여겼다. 베르나츠키, 오스트로우스키, 페웬스키도 이것이 킵차크 칸국의 이크타, 소유르갈이나 오스만의 티마르나 동로마의 프로니아의 직접적인 차용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건 항상 생산수단(토지)을 시대나 체제의 한 단계의 기준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의 영향을 짙게 받은 관점이라는 것이다.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특정 사관의 학자들이 대범주로 퉁쳐서 그렇지 결국 서방의 봉건정도 봉건정 나름이었다. 유럽 봉건정에서도 원칙적으로는 봉건영주들이 영지와 농노를 사유재산으로 둔 게 아니었고, 지역적 시기적으로 상이했다. 반대로 러시아에서 국가의 토지 통제가 실질적으로 잘 이행되었으며 오랜 시간 주된 형태로서 남았냐면 그것도 아니다. 특히 잉글랜드는 11세기에 이미 전국적인 토지대장과 인구조사가 실시되어 문서화되었고, 프랑스는 막스 베버가 근대적인 관료제의 원조라고 여긴 국가다. 이 서유럽 국가들의 토지제도는 그 실체조차 의심 받는 킵차크 칸국의 이크타는 물론이고 동로마 프로니아, 오스만의 티마르 보다도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며 관료적이라고 볼 수 도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하긴 불가능하다. 따라서 만약 러시아에 킵차크 칸국의 해당 제도를 이식한게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이것 자체로는 비슷한 시기 유럽과 러시아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다른' 혹은 '몽골적인' 체제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28]

또한 현재로는 저런 차용론자들도 정적인 차용론과 고정된 정치 및 사회체제를 주장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예를 들어서 중세 루스 기병대가 타타르 기병대와 유사했으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는 거의 없지만 키예프 루스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러시아 국가의 기병대는 항상 주변 강국의 영향을 받아 의식적으로 변화했다. 타타르의 멍에 시기 이전에는 비잔티움 기병대가 이후에는 폴란드 기병대로 변모했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증거가 미비한 몽골이 비잔티움이나 폴란드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고 그게 근본적인 국가성이나 정치체제의 주요 요인이었는지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비슷하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한때 칸에게 조공을 바치는 (형식적으로나마) 타타르의 지배 하에 있었고, 예니체리를 운용했으며 편입된 타타르인들은 반항적인 기존 폴란드 마그나트들을 견제하고 왕에게 봉직하는 근왕세력으로서 종교와 전통을 보존한 채 엘리트 계층으로서 수 세기 동안 유지되었던 판이다. 또한 당대 폴란드 지식인들이 킵차크 칸국, 크림 칸국, 오스만 등의 이슬람권/튀르크계 국가들의 정치 및 사회 체제까지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고 평가하지고 했다. 그런데 폴란드를 몽골의 계승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없다.

이는 러시아 역사 연구에서 굳이 몽골-타타르가 아니더라도 흔히 보이는 해석이기는 하다. 디테일한 부분은 같은 노선의 학자들조차도 크게 다르겠지만 비잔틴주의자들은 비잔티움의 영향을[29], 서구주의자들은 서구화의 영향을 강조하면서[30] 그게 단순히 일시적이고 선택적인 모방이 아닌 민족 및 국가 정체성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정치 체제의 본질에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을 짓는다. 때문에 단순한 차용론의 범위를 넘어서 있으며 증명하는 것이든 부정하는 것이든 의미가 없다. 어찌보면 러시아사 연구에서 이데올로기에 따른 프레임화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7. 결론

"타타르의 멍에"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중세 러시아의 태도를 논하는 것은 왜곡을 초래할 뿐이다.
Charles J. Halperin., The Tatar Yoke: The Image Of The Mongols In Medieval Russia.
1237년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의 군대가 동슬라브인들의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관례적으로 이 사건은 오래되고 쇠락했지만 한 때 번영했던 '키예프 루스'의 최종적인 멸망, '타타르의 멍에' 아래의 억압적인 암흑기의 시작으로서 두 시대를 가르는 대한 상징적 구분으로 쓰인다. 물론 이 관습이 완전히 부적절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지나치게 조잡한 것도 사실이다. (...) 대안에 따르면 몽골의 침공은 표면적으로는 충격적이었지만, 피상적이었으며 근본적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연속성을 모호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13세기 루스의 변화는 몽골에 의해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이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Simon Franklin, “Eastern Europe (c) Rus',” in David Abulafia, ed.,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 5

단순히 암흑기라는 인식이 있는데 러시아라는 거대한 영역과 2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하나로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수 세기 전에 쓰여진 중세시대 루스 연대기에도 일관적인 암흑기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당장 한국사의 여요관계나 원 간섭기도 복잡한 데 훨씬 더 큰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소위 '타타르의 멍에'라는 기간은 여러 요인들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폭발을 하고 거기에 맞춰 적응해나가는 시기였고 몽골-킵차크 칸국이 미친 영향이 크든 적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국 그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몽골의 침공과 지배가 낳은 결과가 긍정적이었냐, 부정적이었냐 이전에 딱히 본질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한국의 경우 원 간섭기라는 거의 비슷한 시기가 있기에 비교가 쉬운 편이다. 고려의 경우 지리적으로 폐쇄적인 반도국가이고 훨씬 영토가 작기에 원-고려 관계나 영향이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주된 요인이 될 수 있지만 러시아는 더 개방적이고 거대했기에 몽골 요인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 단독으로 주된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러시아는 유럽과 단절되어 낙후되었고 퇴보되었으며 러시아는 몽골적인 국가가 되었다'와 같은 단순한 인식은 이미 학계에서 사장된 지 오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몽골 침공 직전 루스는 단순히 점진적인 쇠퇴기에 있었던게 아니라 이미 사회 붕괴 수준에 이르렀다.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 이전 13세기 초 노브고로드와 키예프 등지에서는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수천명이 죽어나갔고 식인이 자행되었고 거리에서 행인을 공격했으며 귀족들은 땅과 재산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것은 타타르의 멍에라는 암흑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몽골이 아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물론 몽골 침공과 지배는 여기에 치명타를 가했고 파멸적이었으며 당대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전근대 국가인 몽골 군대가 거대한 루스 전체를 후퇴시키거나 유럽과 단절시키는건 불가능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이 암흑기에는 대흉년, 전염병, 중앙정부 붕괴, 내란, 외적의 침입 등 여러 요인들이 모두 작용했다.

초창기가 '암흑기'라 할 만한 시기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몽골이 주요원인은 아니었을 뿐더러 몽골을 비롯한 이민족 침공을 아예 겪지 않은 지역도 많았고 직격탄을 맞은 도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복했다. 또한 기존 체제가 붕괴되고 재편성되면서 이전에 붕괴된 스칸디나비아-동로마 교역망을 대신하여 유라시아 교역망에 연결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해졌으며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해 동로마인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탈리아, 스웨덴, 폴란드, 오스만 등 주변국가들의 다방면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영향은 일부 근접 지방만이 아닌 루스 전체로 퍼져나갔다.

예를 들자면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 피에르타 솔라리오 등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러시아에서 크렘린과 성당을 건설하면서 건축술에 영향을 주었고 이 영향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외교관 지그문트 폰 헤르베르슈타인은 모스크바를 두고 '이탈리아 같다'고 썼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러시아에 대한 책과 글들을 남겼는데 이는 결국 당대 서유럽인들이 러시아를 서구적이라고 인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헤르슈타인 이후 몇십년 뒤에 그리스 출신 수도자이자 학자인 막심 트리볼리스는 러시아 교회와 정부에서 지지세력을 만들고 '슬라브의 후진성'을 지적하고 비잔틴 문화의 우월성과 러시아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라틴적', '유대교적' 요소들을 비판하였고 또한 당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오스만 풍습과 의복양식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개탄하는 기록을 남겼다.

오히려 러시아의 튀르크적, 아시아적 특성들을 강조하는 학자들조차 그 원인은 타타르의 멍에가 아니라 그 이전의 하자르 칸국이나 이후의 러시아에게 정복당한 칸국들, 오스만 제국에 더 초점을 맞춘다.[31]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의외로 러시아의 튀르크적 영향 혹은 요소들은 바로 그 키예프 루스가 형성되면서부터 존재했던 것이고 설령 몽골이 그 중에서 큰 지분을 차지한다 한들 새로운 기준점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몽골사-이슬람-중앙아시아 계열 전문가들이라서 그런지 동로마,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32],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 몰도바 등 러시아에 더 거대한 유산을 남기거나 아예 후대 학자들이 아닌 당대 러시아인들이 직접 저쪽에서 모방했다고 언급하는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엄연히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인 요가일라조차도 칸에게 조공을 바치고 야를릭을 받았으며[33], 이는 훗날 킵차크 칸국이 멸망한 후에 16세기 초에 크림 칸국까지 이어진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자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러시아보다 더 오랫동안 타타르의 멍에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편입된 타타르인들은 반항적인 토착 귀족들을 견제하는 왕의 친위세력으로 오랫 동안 신앙과 종교를 유지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폐쇄적인 정교회 국가이면서 단지 실용적 차원에서 무슬림 타타르인들의 존재를 묵인했던 러시아보다 법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명시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러시아보다 더 몽골적인 국가였다.

즉 정리하자면 소위 타타르의 멍에라는 기간 동안 각 루스 대공들은 단순히 타타르 지배에 대한 굴복자or순응자로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게 아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고 때때로는 타타르 칸을 이용하던 교활한 기회주의자들이었고, 또한 비잔티움[34]이나 폴란드, 튜튼 기사단, 베네치아, 제노바, 신성로마제국 등 여러 '서방' 세력들 역시 루스에 영향을 주고받고 때때로는 칸과 같거나 그 이상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등 모두가 적극적인 플레이어였다는데 있다. 때문에 타타르의 멍에를 단순히 킵차크 칸국-루스 종속관계로 보거나 암흑기로 치부하는 것은 의미없는 지나친 일반화라는 것이다.

8. 참고 문헌

  • 오원교 (2011). 13세기 중반 ~ 15세기 러시아 문학 속의 ‘따따르 신화’. 노어노문학, 23(4), 315345.
  • 전지용, <러시아의 역사>, 새문사, 2016


[1] 현재의 러시아의 일부 지역과 우크라이나는 몽골의 직할령이 됐지만 북동부는 몽골의 조공국이 되었고, 벨라루스처럼 몽골의 지배를 거의 안 받은 지역도 있었다. [2] 당시 중세인들 관점에서 타타르인, 몽골인 등 유목민족들을 구분 안하고 그냥 타타르인이라고 싸잡아 부른 면이 더 컸다. [3] 폴란드 최초의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4] 오원교 (2011). 316-317. [5] 단순히 킵차크 칸국의 수동적인 종속자가 아니라 칸국, 서방국가들, 비잔티움 등 여러 세력과 공국들 간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플레이어로서의 역할 [6] 주로 스웨덴, 폴란드 등 [7] 모스크바 대공국을 포함한 루스계 공국들. 편의상 한 카테고리로 묶지만 이들도 상황과 조건이 천차만별이었다. [8] 일부 튀르크계 부족들도 있었다. [9] 라쟌 공국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자조차 없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전한다. [10] 이때 총사령관인 바투가 무려 2주나 허비했고, 결국 노브고르드 공국은 공격을 받지 않았다. [11] 요가일라의 부친 [12] 킵차크 칸국의 권신 [13] 러시아에서는 1240년(혹은 1238년)부터 쿨리코프 전투(1380년) 때까지를 따로 타타르의 압제(насилие татарского)라고도 구별한다. - 오원교 (2011). 329p [14] 후우마이야 왕조 시절 코르도바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던 도시였다. [15] 여담으로 러시아가 유럽이 아닌 아시아라고 놀림받는다면, 같은 맥락에서 스페인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라고 놀림받는다. 문장 하나에 정말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었다 볼 수 있다. [16] 주로 고려의 대청도라는 유배지에서 [17] 고려에서 나간 것만 세고 원나라 측에서 준 물질적 그리고 정치적 혜택을 전부 누락시키는 편향된 사관이 흔한데, 이건 마치 오늘날에도 타국과 정상적인 거래를 "불공정한 일방적 뜯기기와 그걸 용인한 한심한 정치인들"이라고 조바심을 유발하는 정치적 선동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처음부터 세계최강 제국의 황족과 혼인하는 것 자체가 권리이며 그걸 요청한 것도 원종이고 쿠빌라이가 오히려 처음에 거절한 거지만 무슨 원나라가 강제로 혼인시키고 어쩔 수 없다느니 역사왜곡이 자주 보인다. 멸절당한 민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족이나 러시아인이 불평하는 걸 보면 기가 찰 것이다. 해외 서적에서도 고려는 세금도 안 걷는 특수 울루스라고 하고, 원나라 말기 迺賢 내현이 쓴 자식을 노비로 팔던 한족에 대한 시를 보면 당대 생각은 한족이 "고려인으로 태어나지 못해 한이로다"라고 할 정도였다. [18] 몽골 제국 군대가 잠깐 약탈하고 지나간 헝가리만 해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한 피난민 범람과 뒤이은 전염병의 창궐로 인구가 대폭 감소하고, 헝가리의 극심한 침체기를 유발했던 바 있었다. [19] 특히, 8세기를 이후로 해서 수백 년 후의 소빙하기까지 유럽은 꽤나 온난한 기후였기에, 모스크바가 위치한 북부 루스와는 달리 키예프 등이 위치한 남부 루스는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했다. 9세기에 들어 야로슬라프 1세 치세의 키예프 루스는 정교회 문화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아 매우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다. [20] 오늘날 스웨덴에서는 중앙아시아 사만 왕조의 은화는 물론 간다라 불상 유적까지 발견된다. 이러한 물자들은 당시 같은 노르드 계열이던 루스인들의 중계 무역을 통해 수입한 것이다. [21] 원문은 Домочадцы. 당시는 집안에서 가장의 권한이 컸으므로 같이 사는 이들이 친구든, 노예든, 손님이든 가장은 그들에게 접대하고 보호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지시할 권리도 있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하인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22] 이러한 경향은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이 원나라에 대한 자립을 추진하면서 루스를 비롯한 이웃국가들과 정상적인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3] 물론 13세기는 기록의 양 자체가 적고 아무래도 개인의 주관이나 기독교적 이데올로기가 들어갈 수 밖에 없던 러시아 기록들이 주인데 반해, 15세기는 기록의 양이 많고 러시아 기록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에 있던 외국인들의 기록 등 다양해서 당연한 것이긴 하다. [24] 다만 이 계승의식과 계승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는 다 다르다. 정말로 국가적 민족적 계승의식이 있었다는 쪽, 그런거 없었고 단지 이후 정복한 칸국들을 지배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서의 정치적 레토릭이었다는 것, 계승의식은 없었는데 어쨌든 당사자들이 어떻게 인지했던 간에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다는 것, 계승의식과는 별개로 그냥 정치 제도나 문화를 물려 받았다는 것 등등 [25] 이는 코스토마로프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인 것과 관련이 있다. 때문에 그는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적이고 예속적인 러시아인'과 '유럽적이고 자유로운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도식을 만들어냈다. [26] 예를 들어 토지에 대한 지주귀족층의 제한된 소유권 제도 등. 다만 이 관점에서는 동유럽, 동아시아, 서아시아, 발칸은 물론이고 일부 서유럽 및 중부유럽 국가들조차 한 카테고리로 묶는다. [27] 다만 후술한 학자들 정도를 제외하면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의 소련 학자들조차 이러한 제도 혹은 현상이 안정적으로 지속되지 못했으며 '봉건화'되면서 전형적인 동유럽적 재판 농노제-봉건정이 수립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러시아의 '동유럽적' 체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당대인들이 대놓고 기록을 남겼으므로 반론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와 똑같이 동방적 전제주의 취급 받았던 고려의 전시과를 비롯하여 한국사의 제도들이 사료의 부족으로 실제 어떻게 운용됐는지는 추측의 영역이며, 저런 중앙 통제적인 토지제도 하에서도 실질적으로든 명목상으로든 봉직자나 지방유력자가 토지를 사유화하거나 봉건적인 구조가 나오는게 충분히 가능했던 것과 같다. [28] 게다가 조선과 비잔티움조차도 몽골적인 체제라는 결론이 나오므로 다른 관점에서 의미가 없어진다. 애시당초 비잔티움부터 조선까지 하나로 묶는게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개념이긴 하다. [29] 이쪽 계열 학자들에게 있어서 '비잔티움 연방'이라는 역사학적 개념의 일환으로 설명된다. [30] 물론 이 서구가 정확히 어느 국가 및 세력이냐에 따라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31] 엄밀히 말하자면 그 오스만 제국도 튀르크계 유목민들로부터 세워진 나라고, 이들 역시 몽골의 영향력과 관련 없는 이들이 아니므로 러시아가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는게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웃의 이웃의 이웃(...)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떻게든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능성을 찾는건 진위여부와 별개로 의미없고 지나친 비약이다. 사실 굳이 저렇게 오스만의 영향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도 러시아뿐만 아니라 근동-발칸-동유럽의 권역의 모든 국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결국 이마저도 타타르의 멍에 이후의 일이니 진위여부가 어찌되는 상관없는 내용이다. [32] 오스만은 튀르크-이슬람계라서 그나마 킵차크 칸국이랑 연계(?)해서 주장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33] 물론 이는 폴란드 본토나 리투아니아 서부가 아닌 대게 리투아니아 동부나 정복한 땅(대게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땅)에 한해서였다. [34] 애시당초 여기는 루스 정교회의 지배자였다. 고로 직접적인 영향력은 킵차크 칸과 같거나 그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