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또는 귀족에 대한 경칭 (서열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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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용어 (서열순) | |||
마마(媽媽) | 마노라(抹樓下) | 자가(自家) | 대감(大監) |
영감(令監) | 원님(員님) | 나리(進賜) | 선생(先生) |
1. 개요
媽媽마마는 조선 왕실 경칭 중 최고위 경칭이다. 왕실에서 자가 윗급의 경칭으로, 불릴 수 있는 대상이 매우 한정적이었다.[1]
'마마'는 존칭으로서 왕통 직계에 해당하는 인물과 그들의 정실 배우자에게만 사용했다. 즉, 왕과 왕비, 상왕과 대비, 세자와 세자빈 등에게만 사용되었다. 대군, 공주, 군, 옹주 등에게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들에게는 '자가'를 사용했다.
조선 후기까지는 왕실 최고위 존칭으로 '마노라' 존칭이 주로, 더욱 빈번히 사용되었으며, 말기에 이르러 '마노라'의 자리를 '마마'가 대체했다.[2]
2. 유래
원래는 중국어의 백화로 '엄마'를 뜻하는 말이다.조선시대 후기에 들어 한국의 궁중용어로 자리잡은 왕실 내 구어체 호칭으로, 궁중 최고위 존칭인 '마노라(마누라)'가 후기~말기에 접어들며 '마마'로 대체되었다.
궁중에서만 쓰인 표현이므로, 《 조선왕조실록》 등 정식 기록에는 원래 남기지 않아야 하는 호칭이며, 실제 실록에서 '마마'라는 표현은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흔히 대중이 생각하는 '마마'라는 표현이 들어갈 만한 위치에는 '마노라(抹樓下)'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마마'의 유래와 도입시기와 관련해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있다. 아래는 동궁의 낙선당에 있는 덕성합에 영조가 들어 신하들과 한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이다.
錫憲曰, 以方言叶於正音, 故通用而無礙, 是以妙矣。英廟病方言之不適華語, 創爲諺文。國中行語, 皆以華語敎之, 民情多有不便, 故光廟登極, 卽命罷之。然行之亦且十數年, 至今謠俗之間, 尙有餘習, 或有循用華語者矣。上曰, 然矣。卽今宮中, 稱母爲媽媽者, 亦是華語也。
석헌이 아뢰기를, "말이 정음에 부합하여 막힘없이 통용되니, 이때문에 묘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지금 말이 화어(중국어)와 맞지 않는 것을 근심으로 여겨 언문(한글)을 창조하셨습니다. 나라 안에서 말을 가르칠 때 모두 중국어를 가르쳤는데, 백성의 사정과 형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세조께서 등극하신 후 이를 혁파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한 지 또한 십수 년이 되었으나, 오늘날 풍속 중에 버릇이 남아 간혹 중국어를 쓰는 자도 있습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한가. 지금 궁중(宮中)에서 어머니를 마마(媽媽)라고 하는 것도 역시 중국어(華語)이다.
- 《승정원일기》 998책 영조 22년(1746) 2월 18일 기사 #
당시 조선 궁중에서 어머니를 중국어 '마마(媽媽)'로 불렀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나타난 궁중의 '마마' 경칭이 중국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석헌이 아뢰기를, "말이 정음에 부합하여 막힘없이 통용되니, 이때문에 묘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지금 말이 화어(중국어)와 맞지 않는 것을 근심으로 여겨 언문(한글)을 창조하셨습니다. 나라 안에서 말을 가르칠 때 모두 중국어를 가르쳤는데, 백성의 사정과 형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세조께서 등극하신 후 이를 혁파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한 지 또한 십수 년이 되었으나, 오늘날 풍속 중에 버릇이 남아 간혹 중국어를 쓰는 자도 있습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한가. 지금 궁중(宮中)에서 어머니를 마마(媽媽)라고 하는 것도 역시 중국어(華語)이다.
- 《승정원일기》 998책 영조 22년(1746) 2월 18일 기사 #
위의 사료에 나온 상황 이전에 영조가 신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임금이 "근래 한가할 적에 언문(한글)을 상세히 보니, 이른바 반절(反切-다른 두 음을 따서 합치는 것, 한글)이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전에도 언문과 같은 것이 있었는가?" 하자 임석헌은 "세종대왕께서 성인의 지혜로서 창조하셨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이 요동에서 귀양살이하여 성삼문으로 하여금 열 두번을 오가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문맥으로 볼 때, 임석헌이 '
세종대왕님께서 성인의 지혜로 한글을 창제하셨는데도 아직까지 습관처럼
중국글자를 쓰는 자들이 있다.' 라는 말에 영조가 '맞아. 궁중에서 말하는 '마마'도
중국어잖아.' 라고 답한 것이다.영조를 비롯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마마'가 중국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인식하고있다. 조선의 임금인 영조 뿐 아니라 임금과 대화를 나눈 신하라면 학식이 매우 풍부할 것인데, 이처럼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마마'를 중국어에서 수입된 표현으로 인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후기 왕실에서 쓰인 경칭 '마마'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마마(媽媽)'라는 단어는 중국어에서는 어머니 외에도 나이 든 부녀를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조선 후기 나이든 부녀에 대한 존칭으로 수입되었다. 조선 후기 혜경궁 홍씨의 여동생이 혜경궁을 '형님 마마'로 부르고,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마마'라고 부른 예가 《 한중록》에 나타나며, 또한 조선시대 문집에서 전부 중년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로만 쓰이고 있다. 어느 시점부터 남성에게도 쓰이는 존칭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3] 첫 기록은 1693년( 숙종 19) 경순군주 언문단자에 적힌 '주상 마마 전'이라는 기록이다. 이후 경종~영·정조 대엔 '마노라' 기록만 나타나는데, 임금이 마마를 부녀자 경칭으로 인식한 것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후 순조대를 거쳐 조선 말기 헌종 13년(1846) 《뎡미가례시일기》에 '상감마마'라는 표현이 등장한 뒤 고종, 대한제국 시기까지 빈번히 쓰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영·정조대까진 주로 여성을 이르는 존칭이었다가 순조대를 거치며 헌종대에 남성 왕족에게도 바치는 존칭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마마' 경칭이 '마노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마마'의 유래를 밝힌 내용이 기록된 《승정원일기》가 디지털화되며 해당 주장은 반박되었다. 또한 '마마'가 웃어른 여성에 대한 경칭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영·정조시기의 학자 황윤석이 《 이재난고》에서 '마노라'가 ' 마립간'에서 비롯된 표현임을 설명하면서도 '마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종합하면 경칭 '마노라(말루하)'와 마마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조선 후기까지 남성 왕족을 주로 '마노라'라고 부르다가 말기~대한제국 시기 '마마' 존칭이 남성 존칭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3. 기록
조선 왕실의 궁중 경칭으로 '마마'가 쓰인 기록은 조선 말기에 집중되어 있다. 남성 왕족을 '마마'라고 부른 기록은 조선 숙종 대에 처음 발견된 이후 한동안 없다가 헌종 말기에 다시 등장한다. 여성 왕족을 '마마'라고 부른 기록은 조선 후기 대사편년에 인원왕후 김씨를 '마마'라고 부른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두루 발견된다.[4]3.1. 왕과 왕비
보통 임금은 '상감 마마', 왕비는 '중전 마마' 라고 불렸다. 왕과 왕비를 함께 '양전 마마' 라고도 했다. 물론, 임금에게는 '주상 전하'를 더 많이 쓰긴 했다.쥬상 마마 젼
주상(主上) 마마(媽媽) 앞에(前)
-숙종 19년(1693) 경순군주 언문단자
소현세자의 삼녀
경순군주가 가문 사폐지 유지 관련 문제를 청하며 올린 언문 단자에서 임금을 '주상 마마'라고 부르고있다.주상(主上) 마마(媽媽) 앞에(前)
-숙종 19년(1693) 경순군주 언문단자
〈상감마마 의대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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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동지 억만세 상감마마 의대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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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마마가례시 차비관나인양전마마상격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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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상감마마의 '상감(上監)'은 '윗 상(上)', '살펴볼 감(監)'의 한자어가 아니라 우리말에 '감'이라는 말을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빌린 것으로, 신라 군주의 칭호인 ' 이사금(泥師今)'의 '今'과 동계이다. 심지어는 단군왕검의 '검'이 '이사금', '상감'의 '금', '감'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 [5] 자세한 것은 이사금 문서 참조
3.2. 대비와 왕대비
대비는 '대비 마마', '자전 마마'라 불렀고, 왕대비는 '왕대비 마마'라고 불렀다.1882년 〈동궁마마가례시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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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미지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양전마마(임금과 중전) - 자전마마(慈殿媽媽 - 대왕대비) - 왕대비마마(王大妃媽媽) - 순화자가(
경빈 김씨) - 대감(
흥선대원군) - 본궁마마(
여흥부대부인 민씨) 이다.[6]예는 마마 문안 침슈 진어 졔졀 안녕하아오시옵고 큰뎐 문안 각뎐 문안 만안하아오시오니 하졍 축슈하와 하오며..
여기는 마마 문안과 침수와 진어 모두가 안녕하고 큰 전 문안, 각 전 문안 모두 편안하오니 제 마음에 빕니다..
- 궁녀 서기 이씨가 윤용구 집안 사람에게 보낸 편지(3) 이미지 및 판독문
여기서 마마는
신정왕후를 가리킨다. 1888~1890년 추정 자료로 조선 말기 고종대의 자료이다.여기는 마마 문안과 침수와 진어 모두가 안녕하고 큰 전 문안, 각 전 문안 모두 편안하오니 제 마음에 빕니다..
- 궁녀 서기 이씨가 윤용구 집안 사람에게 보낸 편지(3) 이미지 및 판독문
3.3. 세자와 세자빈
세자는 '동궁 마마', 세자빈은 '빈궁 마마'라고 불렀다.〈동궁마마금말의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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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궁마마 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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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디지털장서각에 검색하면, 조선 말기~대한제국 시기 '동궁 마마', '빈궁'마마' 자료가 많이 나온다. 주로 당시 궁중의 행사를 맡아서 처리하던 실무자들이 남긴 한문이나 언문(한글) 기록들이다.
4. 다른 호칭과의 관계
본래 최고위 존칭은 '마노라'였다. 마마는 조선 중기 중국어에서 수입되어 주로 '왕실 웃어른 여성'에게 쓰였다.[7]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본래 부녀자에게 바치던 '마마' 호칭이 남성왕족으로 확대된다. 마노라가 후기로 갈수록 여성 존칭으로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조선 말기 중전과 세자에게 '마누라'라고 칭한 기록이 있는 것, 동 시기 세자빈을 '빈궁마마'라고 부른 것 등 '마누라'와 '마마' 호칭간 뚜렷한 상하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마마'와 '마누라'라는 표현이 하나의 문서에 동시에 기록으로 남은 예로는 1882년 〈빈궁마누라 의대발긔〉 # 문서가 있다. 당시 세자인 순종을 '동궁 마마', 세자빈을 '빈궁 마누라'라고 칭하고 있다.
반면, 같은 1882년 〈빈궁마마 의대발기〉 문서에서 세자빈을 '빈궁마마' 라 칭하고 있으며, # 세자를 '동궁 마누라'라고 칭한 문서 또한 다수 발견된다. 앞선 문서가 '마누라'와 '마마'를 '동급 표현'으로 인식하고 혼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8] 이는 오히려 '마마'라는 표현이 세자빈에게도 쓰였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자료가 되었다.
위와 같은 해인 1882년 흥선대원군이 중전인 명성황후에게 보낸 편지 역시 중전을 '뎐(즁뎐) 마누라'라고 칭하고 있으며, # 위 문헌 예시 항목에 중전을 '마마'로 칭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아 조선 말기에도 '마마'와 '마누라' 호칭 간 명확한 상하관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에 퍼진 ''마노라'는 '마마'보다 아랫급 호칭이며 빈궁에게만 바쳤다.'라는 글은 문헌 근거로 보나, 당시의 법도로 보나 잘못된 것이다. 정확히는 수십 년 전 연구에서 잘못 주장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왕세손은 뚜렷한 호칭이 없다가 인조 때 '각하'로 정하기로 한 기사가 실록에서 확인되며, 영조 대에 다시 한번 재확인된다. 영조 시절의 세손( 정조)은 사도세자가 살아있을 땐 '각하'로 불리었고,[A] 사도세자 사후 사실상 후계자의 위치를 인정받아 세자가 받는 '저하' 호칭을 받아 '세손 저하'라고 불렸다. 《승정원일기》에 정조가 세손 시절 영조가 '마마는 궁중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기에, 마마라고는 불리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세손 마노라'라고 불린 기록이 있다.[A] 따라서 세손은 일반적으로 '세손 각하' 또는 '세손 마노라'라고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후궁은 상궁과 마찬가지로 'ㅇㅇ당 마마님'이라는 경칭이 통용되었고, 가장 높은 후궁인 정1품 빈에게는 왕자, 왕녀, 왕세자녀와 마찬가지로 '자가'라는 경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마'는 일개 왕자나 왕녀에게는 절대 붙이면 안 되는 존칭이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황자와 황자비에게 '마마'라는 칭호를 붙였다. 정확하게는 대한제국에서 ' 친왕'과 ' 친왕비' 작호를 받은 이들이 '마마'로 불렸다. 의친왕의 딸 이해경과 의친왕의 장손 이준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 가문에서는 의친왕비를 일컬어 '지밀 마마'로 불렀다고 한다.[11] 그리고 운현궁에 살던 흥친왕비를 부를 때도 '운현궁 앞 지밀 마마'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황제국으로 격상하면서, 조선 시절의 왕자들이 황자, 즉, 왕과 같은 반열이 되었기 때문인 듯 하다.(물론, 같은 '왕'의 칭호를 쓰더라도, 한 나라의 군주 칭호인 왕과 작위로서의 왕의 개념을 1:1로 대응할 수는 없지만.)
주막, 엽전, 포졸복 등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잘 지키지 않는다. 고려시대부터 쓰임새가 확인되는 말을 부여부터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남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자, 왕녀, 심지어 후궁조차 '마마'로 불린다.[12] 주막, 엽전이야 연출의 편의를 위해서라지만, 이 '마마'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성의 부족이다. 21세기 들어서도 해당 오류가 없는 작품이 손에 꼽을 정도로 개선이 지지부진하다.
2004년작 무인시대의 공예태후와 2012년 작 〈 대왕의 꿈〉의 사도태후 등에게는 '마마' 대신 ' 폐하'로 호칭했다. ' 전하'가 아니고 '폐하'라 한국 사극의 고질병 황제병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지만, 신라와 고려에서는 '폐하'라고 불렀던 것이 사서에 나온다.[13] 역시 2012년 작인 퓨전사극 〈 해를 품은 달〉에선 등장인물 민화공주를 ' 자가'라고 올바르게 칭했다.
상궁을 부를 때 쓰는 '마마님'과는 다른 호칭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랫사람이 상궁을 부를 때 지밀상궁인 박씨라면, '지밀 박씨 마마님'이라고 불렀다. 출처. 위의 '마마'와는 아무 관련 없는 '마마님'은 상궁에게 쓰이는 존칭어다. '상궁 보고 마마라고 하다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마마'라고 하면 심각한 오류이고, '마마님'이라고 하면 정확한 것이다. 하지만, '마마'는 애초부터 높은 사람들에게 두루 쓰는 말이 아니라, 우리말의 아주머니처럼 나이 든 여자에게만 쓰는 말이었기에 '마마'와 '마마님'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마마님' 자체가 '마마'에서 파생된 호칭인 만큼 조선시대 이전이 배경인 사극에서 상궁이 '마마님'으로 불리는 것은 오류다.
[1]
참고로 궁중에서 사용할 때 그렇다는 뜻. 민간에서도 널리 쓰인 말이다.
[2]
사극 드라마와 소설에서 툭하면 '마마!'를 남발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마노라'라 부른 기록이 훨씬 많다.
마누라 항목 참고.
[3]
정병설(2010)
[4]
'마마'가 궁중존칭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진 남녀 공통으로 '마노라' 경칭이 두루 쓰였다.
[5]
더하여, 높은 관리들을 부르는 말인 '대감(大監)', 나이 든 남자 어른을 높여 부르는 말인 '영감(令監)' 등에 있는 '볼 감(監)'자도 같은 맥락의 단어라 볼 수 있다.
[6]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을 '본궁 마마'라 칭하고 있다.
[7]
《승정원일기》, 《한중록》을 비롯한 당대 기록 및 서울대학교 정병설 교수의 견해 참고.
[8]
'마마'와 '마노라' 사이에 격의 차이가 존재했다고 해석한 사람은 이 기록의 '마노라'라는 표현만을 보고 세자빈궁만을 '마노라'라고 떼어 부른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이지만, 여전히 '마마'라는 표현도 쓰고 있으며, 같은 해 중전을 '마누라'라 칭한 기록까지 있다. 틀린 주장이다.
[A]
《일성록》.
[A]
[11]
출처:
의친왕기념사업회 블로그;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38쪽.
[12]
그 영향인지 국내에서
중화권 사극을 수입할 때도 중국 황제의 후궁에 대한 호칭을 마마로 번역한다.
[13]
〈
무인시대〉와 〈
대왕의 꿈〉은 모두 유동윤 작가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