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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레오 맥캐리 Leo McCar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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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토머스 리오 맥캐리 Thomas Leo McCarey |
출생 | 1898년 10월 3일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사망 | 1969년 7월 5일 (향년 70세) |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
직업 | 각본가, 감독, 프로듀서 |
영화 데뷔 | 1928년, 'The Tonic'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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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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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의 길을 가련다>, <이혼 소동>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감독.2. 생애
189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맥캐리 또한 가톨릭 신자로 자라났다. 학교를 졸업한 후 맥캐리는 복싱 선수, 변호사, 광산 사업가, 작곡가 등 여러 직업에 손댔지만, 딱히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19년 토드 브라우닝[2]의 조감독으로서 파라마운트 글로벌에서 영화계 일을 시작하게 된다.초기에는 로렐과 하디나 해롤드 로이드 등을 주연으로 한 코미디 영화들을 주로 감독했으며, 이 시기 그가 만든 영화들은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유성 영화의 시대가 온 이후로 그의 작품의 다양성은 더욱 커져갔다. 그러던 중 1937년 그는 <내일을 위한 길>을 감독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전의 맥캐리 영화들에 비하면 몹시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였고, 흥행에도 실패한다. 심지어 파라마운트 글로벌은 흥행 참패를 이유로 그를 해고하기까지 한다.
다행히도, 그가 다음으로 찍은 스크루볼 코미디 영화인 <이혼 소동>은 흥행 성적에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맥캐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기까지 한다. 이후로도 <나의 길을 가련다>나 <러브 어페어> 등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을 거두어 맥캐리는 일류 감독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이후 맥캐리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으며, 그의 작품 세계도 이전에 비해 살짝 냉소적으로 변한다. 실제로 그는 1945년 이후 고작 5편의 작품밖에 발표하지 못한다. 1962년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맥캐리는 1969년 세상을 떠난다.
3. 기타
세련된 패션, 말투, 매너를 지니고 있었다. 케리 그랜트가 교본으로 삼고 따라했다고 한다.맥캐리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자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으며, 이러한 그의 정체성은 그의 영화 이곳저곳에서 드러난다. 특히나 가톨릭 교회는 그의 많은 영화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현장에선 상당히 즉흥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피아노를 치면서 즉석에서 장면들을 구상해냈다고... 맥캐리와 <나의 길을 가련다>와 <성 메리 성당의 종>에서 함께 작업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빙 크로스비는 약 75%의 장면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가톨릭적 정체성 때문인지 반공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나의 아들 존>이나 유작인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가 대표적.
자신의 영화 가운데서는 <내일을 위한 길>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이혼 소동>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훗날 "<내일을 위한 길>에 주어졌어야 할 상이 잘못된 작품에 주어졌다"라고 했을 정도.
프랭크 카프라,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장 르누아르 등과 같은 감독들이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그의 <내일을 위한 길>을 몹시 좋아하였다고 한다.[3]
다만 사후 한국 인지도는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 앨프리드 히치콕보다 확실히 떨어진다. 직접 리메이크한 어페어 투 리멤버가 한국 개봉 이후 추억의 영화로 사랑받았지만 반대로 이혼 소동이나 내일을 위한 길 같은 이전 대표작은 잘 언급되지 않아 전반적으로 감독보다는 한 편으로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비슷한 상황.
4. 작품
- <식은 죽 먹기> (1933)
- <레드 갭의 러글스> (1935)
- <내일을 위한 길> (1937)
- <이혼 소동> (1937)
- < 러브 어페어> (1939)
- < 나의 길을 가련다> (1944)[4]
- <성 메리 성당의 종> (1945)[5]
- <굿 샘> (1948)
- <나의 아들 존> (1952)
- < 어페어 투 리멤버> (1957)[6]
- <사탄은 잠들지 않는다>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