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외교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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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트해에 위치한 국가인 라트비아는 스웨덴을 위시한 북유럽과 독일, 폴란드를 위시한 중유럽,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를 위시한 동유럽 세력의 각축장으로서, 독립 이전부터 유럽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소련 해체 과정에서 재독립한 라트비아는 이웃한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유럽연합,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고 친EU, 친서방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2. 아시아
2.1. 대한민국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한국-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2.2. 북한과의 관계
소련 해체 이후에 에스토니아와는 달리 리투아니아처럼 한국보다도 1개월 먼저 북한과 수교했다. 다만 에스토니아가 워낙 이례적으로 북한을 적대하는 거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도 북한을 좋게 보는 건 아니다.2.3. 중화권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중화권-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2.4. 이스라엘과의 관계
공식적 국가 대 국가의 외교는 1992년부터 수립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베냐민 네타냐후가 라트비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만 라트비아도 제정 러시아 시절 부터 유대인 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고 역사적인 문제로 인하여(예를 들면 제정 러시아 시기부터 라트비아인들의 반유대주의 감정이 있었거나 일부 라트비아 작가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유대인을 폄하하는 등) 갈등이 있는 편이다.3. 유럽
3.1. 러시아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라트비아는 오랫동안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반러감정이 상당한 편이다. 다만,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라트비아내의 러시아인들이 상당한 편이며 푸틴의 독재를 피하기 위해 라트비아에 정착하는 러시아인들이 늘고 있다.
3.2. 우크라이나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폴란드-우크라이나-발트 3국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우크라이나와는 소련 해체이후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양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라트비아내에도 소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3.3. 벨라루스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벨라루스-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3.4. 리투아니아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리투아니아-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리투아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은 같은 발트어파 언어를 쓰며 고대사와 중세사를 공유한다. 중세 이후 리투아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민이 된 반면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 지주들의 지배를 받으며 서로간의 문화와 종교가 상이해졌다. 다만 라트비아 동남부 내 라트갈레인의 경우는 리투아니아인처럼 가톨릭을 믿으며 방언도 리투아니아어와 흡사한데 이는 해당 지역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당시 라트비아의 독일인 지주들은 폴란드 리투아니아에 신종하는 대가로 라트비아인 농노들을 계속 부려먹었다 한다.[1] 17세기부터 1918년까지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양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 속해있었으며, 1991년 10월 5년 같은 날짜에 소련으로부터 재독립한 역사를 공유한다.
오늘날에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양국 모두 나토, EU 회원국이다.
3.5. 에스토니아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모두 역사의 상당부분을 공유한다. 라트비아의 기원이 되는 민족 중 하나인 리보니아인은 에스토니아인과 관계가 밀접한 민족이었으며, 중세에는 독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리보니아 공국 등의 지배를 받고 근현대에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공유한다.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모두 반러감정을 공유하며, 외교 정책에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모두 나토, EU에 가입하였다.
3.6. 스웨덴과의 관계
소련 해체 이후 스웨덴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한 편이다. 상당수의 라트비아인들이 스웨덴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스웨덴 역시 90년대 당시 라트비아 측에 많은 경제 원조를 해주었으며, 이는 라트비아가 다른 구소련 국가들에 비해 경제가 빨리 정상화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17세기 초부터 18세기 초까지 스웨덴령 리보니아라 해서 라트갈레와 쿠를란트-젬갈렌을 제외한 라트비아 전 지역이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있다.
3.7. 폴란드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폴란드-우크라이나-발트 3국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라트갈레 지역에는 일부 폴란드계 라트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3.8. 독일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독일-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중세 독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지금의 라트비아를 지배했던 이래 독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독일문화가 라트비아 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트갈레는 한때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소속이 되기도 한 적이 있지만, 라트비아인들은 19세기 말까지 자신의 조국에서 8%도 채 안 되는 발트독일인들의 밑에서
농노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발전을 거듭했던 리가에서 라트비아인들이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발트지역에 정착해 살던 발트독일인이 아니면 제약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트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특혜 또한 아주 많아서.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때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도 발트독일인들은 라트비아인들과 차별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면 살았다.
인접한 리투아니아에는 로마 카톨릭이 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독일에서 기원한 루터교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정행사가 전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라트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 신심이 깊은 민족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에는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도시나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반면, 라트비아는 (리가를 빼고) 도시나 마을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라트비아에서 교회란 그 '독일 지주 나으리님'들의 종교였으므로 농노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교회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도시형태는 많이 변화하고 새로이 많이 지어지고 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런 현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민속연구상 기록에 보면 그런 현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 '라트비아 사람들도 고등교육을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던 만큼 교육의 기회도 독일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20세기까지 라트비아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없어 농민들이 공부를 위해 러시아나 폴란드, 독일 등으로 가는 것을 지원할 만한 상황이 안되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근대 이후 '라트비아인'이라는 말은 무조건 교육을 받지 못한 '농노와 소작인'을 일컫는 것이었다고 한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도 그 교육받은 '독일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라트비아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이 점령했던 프러시아 영토내(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의 경우, 일부러 리투아니아인이 아닌 독일인들처럼 보이기 위해 독일어로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부모들조차 그것을 독일인들의 밑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해하여 묵인하곤 했다고 한다.
19세기 중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라트비아 학생 '크리샤니스 발데마르스(Krisjanis Valdemars)'는 그런 선입견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자기 방문 앞에 '나는 라트비아인이다'라는 '노골적인(?)' 구절을 붙여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발데마르스는 라트비아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라트비아 민족개혁운동의 선각자로 성장하였다.
서진석의 <발트3국 이야기> 고등교육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
발전을 거듭했던 리가에서 라트비아인들이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발트지역에 정착해 살던 발트독일인이 아니면 제약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트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특혜 또한 아주 많아서.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때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도 발트독일인들은 라트비아인들과 차별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면 살았다.
인접한 리투아니아에는 로마 카톨릭이 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독일에서 기원한 루터교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정행사가 전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라트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 신심이 깊은 민족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에는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도시나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반면, 라트비아는 (리가를 빼고) 도시나 마을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라트비아에서 교회란 그 '독일 지주 나으리님'들의 종교였으므로 농노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교회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도시형태는 많이 변화하고 새로이 많이 지어지고 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런 현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민속연구상 기록에 보면 그런 현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 '라트비아 사람들도 고등교육을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던 만큼 교육의 기회도 독일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20세기까지 라트비아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없어 농민들이 공부를 위해 러시아나 폴란드, 독일 등으로 가는 것을 지원할 만한 상황이 안되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근대 이후 '라트비아인'이라는 말은 무조건 교육을 받지 못한 '농노와 소작인'을 일컫는 것이었다고 한다.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도 그 교육받은 '독일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라트비아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이 점령했던 프러시아 영토내(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의 경우, 일부러 리투아니아인이 아닌 독일인들처럼 보이기 위해 독일어로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부모들조차 그것을 독일인들의 밑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해하여 묵인하곤 했다고 한다.
19세기 중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라트비아 학생 '크리샤니스 발데마르스(Krisjanis Valdemars)'는 그런 선입견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자기 방문 앞에 '나는 라트비아인이다'라는 '노골적인(?)' 구절을 붙여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발데마르스는 라트비아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라트비아 민족개혁운동의 선각자로 성장하였다.
서진석의 <발트3국 이야기> 고등교육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
3.9. 영국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영국-라트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4. 아메리카
4.1. 미국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미국-발트 3국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미국과는 소련 해체 이후에 수교하면서 우호적이다. 미국내에는 라트비아계 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라트비아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고 있다.
5. 오세아니아
5.1. 호주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주-발트 3국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6. 지역별 관계
- 한국-라트비아 관계
- 러시아-라트비아 관계
- 우크라이나-라트비아 관계
- 벨라루스-라트비아 관계
- 독일-라트비아 관계
- 리투아니아-라트비아 관계
- 폴란드-라트비아 관계
- 에스토니아-라트비아 관계
- 영국-라트비아 관계
- 미국-발트 3국 관계
- 호주-발트 3국 관계
7. 관련 문서
[1]
다만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자리잡던 초창기에는 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 라트비아 내 여러 부족들이 힘을 합쳐 독일인들에게 대항했던 역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