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미의 로마 왕에 대한 내용은 로마 왕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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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 직위는 엄밀한 의미로는 '로마인의 왕'을 의미하는데, 중세 시대에는 제후들에 의한 황제선거 이후 로마에서 교황에 의한 대관식이 치러지기까지 황제의 지위를 의미하는 말이었다.[1] 이 말은 때에 따라 독일왕(Rex Teutonicum/Teutonicorum)이라는 말과 혼용되었다.한편으로 프리드리히 3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들은 가급적 생전에 후계자를 로마인의 왕/독일의 왕으로 선출하면서[2] 사실상 제위를 세습하기 시작했고, 근대 초기부터 로마인의 왕/독일의 왕 칭호는 사실상 제위 계승자를 의미하는 칭호가 되었다.
독일어권에서는 Römisch-Deutscher König(韓 : 로마-독일 왕/英 : Roman-German King)라고 표기했다.
2. 역사
기본적으로 962년 오토 1세의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라고만 불렸다. 또한 그와 함께 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 혹은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동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orientalium)과 같은 말도 계속 사용되었다.한편 11세기 초 오토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하인리히 2세의 시대에 이르러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과 독일인의 왕(Rex Teutonicorum) 및 독일 왕국(Regnum Teutonicum)이라는 말이 점차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자가 로마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면, 후자는 오토 왕조 시기 이탈리아 왕국 및 아를 왕국과 구별되는 독일 왕국 개념이 형성 중임을 보여주었다.
이후 잘리어 왕조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간의 서임권 투쟁 시기에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권위를 독일 내로 제한하려는 의미로 독일인의 왕(Rex Teutonicorum)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반면,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 의한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을 자신의 직위로 내세웠다. 이후 제후들에 의해 황제가 선출된 후[3] 황제가 카롤루스 대제의 도시 아헨에서 '로마인의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치르고, 나중에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정식으로 황제로 대관하는 절차가 관습적으로 정착되었고, 1356년 금인 칙서를 통해 명문화되었다.[4] 이로써 중세의 '로마인의 왕은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른 후 로마에서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황제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토 왕조 이후 제국의 황제들은 후계 세습을 확고히 하기 위해 황제 생전에 후계자를 미리 공동 통치자로 선출하기도 하였기에,[5] 하인리히 4세 이후 로마인의 왕이라는 칭호는 제국의 후계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하인리히 4세 시대에 아들인 콘라트와 하인리히 5세가 그러하였으며,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기에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시대의 하인리히 6세, 프리드리히 2세 시대의 하인리히 7세와 콘라트 4세가 그러했다. 또한 1198년 필리프와 오토 4세가 이중으로 로마인의 왕에 선출된 이래로, 1356년 금인 칙서를 제정하여 황제선거 규정을 명확히 하기 전까지 제국 내 권력 구도에 따라 대립왕(Gegenkönig)이 선출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한편으로 독일왕 개념 역시 로마인의 왕과 병행하여 발전하였다. 12세기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주교이자 중요한 역사가인 오토 폰 프라이징은 연대기에서 당대인들이 하인리히 1세를 기점으로 독일 왕국이 프랑크 왕국을 대체하였다고 여기고 있다고 기록했다. 13세기에 이르러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통치에 전념하고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7세를 '독일의 왕(Rex Alemanniae)'[6]으로 선포하여 독일의 통치를 위임하였고, 이로써 '독일의 왕' 역시 '로마인의 왕'과 병행하여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공위시대 이후 중세 후기의 제국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 등 대귀족 가문이 번갈아가며 제위에 선출되었고, 이 시기에는 카를 4세를 제외하고는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하여 제위 세습을 관철하지 못했으며, 카를 4세의 성공 역시 후계자인 벤첼의 무능함으로 인해 그 의의를 잃었다. 한편으로 황제선거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는 1314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미남왕[7]과 이중으로 선출된 이후 제위를 둘러싼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1328년 교황의 승인 없이 로마에서 셀프 대관식을 치렀다.[8] 1338년 렌스 선거인 협회(Kurverein von Rhense)는 황제 선출 과정에서 교황을 배제하고 대공위시대 이후 점차 관습화되어 가고 있던 7인의 선제후에 의한 황제 선출을 확인하였고,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 칙서를 반포하여 이를 명문화하였다.
15세기 프리드리히 3세와 막시밀리안 1세 시대에 제국은 구조적으로 결정적인 변화를 겪었고, 로마인의 왕 직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1486년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생전에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를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한 제위 세습의 길을 열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1508년 교황 없이 황제 대관식을 치렀고, 황제의 공식 명칭을 선출된 로마 황제(Electus Romanorum Imperator)[9]로 바꾸었다. 이 칭호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카를 5세를 제외하고는 교황의 대관을 받은 황제는 없었다. 또한 막시밀리안 1세 시대부터 황제의 직위에 Germaniae Rex, Rex in Germania, König in Germanien과 같은 형태로 '독일의 왕'의 지위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이후 황제 생전에 미리 선거를 실시해 후계자, 즉 황태자를 결정하던 제국 초기의 세습 방식은 카를 5세 시대를 거치며 부활하였다. 친가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외가로부터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 및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을 물려받아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코무네로스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반도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쟁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종교 개혁으로 촉발된 독일 문제를 이해할 의지도, 관심도 없었다. 따라서 독일 문제는 동생에게 위임하여 동생이 독일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여러 작위 중 제위의 바탕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넘겼고,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종교 개혁문제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전적으로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도맡았다. 이어 1530년 미리 차기 황제선거를 치러 단독후보로 출마한 동생을 선출시켜 권한을 나누었다. 카를 5세는 말년에 제위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려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을 회수하려 시도했으나, 이미 독일에서 확고한 권력 기반을 다진 페르디난트 1세에게 밀린데다 선제후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결국 카를 5세는 제위는 동생에게 양위하는 한편, 스페인과 밀라노 공국 등 이탈리아 영 토 및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스페인의 유스테 수도원(Monasterio de Yuste)으로 은퇴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형인 카를 5세의 대리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1531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카를 5세가 퇴위하고 2년이 지난 1558년, 정식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페르디난트 1세 이후에는 대체로 황제 생전에 차기 황제선거를 치러 그 아들이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선출된 로마인의 왕은 선황이 승하하면 곧바로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가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고 마티아스나 레오폴트 1세, 카를 6세처럼 선황 사후 선출되었다면 황제선거 후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바로 대관식을 치렀다.
3. 명단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은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해 중요한 자리의 임명을 결정하던 고대
게르만족의 관습에서 기원한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세워진
프랑크 왕국 등 여러 게르만 국가에서는 형식적으로라도 선출을 거쳐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카롤루스 대제 역시 부분적으로 선출 형식을 거쳐 왕이 되었다. 10세기 동프랑크 왕국 말기 왕권이 약화되고 각
부족 공국들의 자치권이 강화된 상황에서
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5대 부족 공국 공작들의 선출에 의해
콘라트 1세가 차기 왕으로 결정된 이래로, 중세 독일에서는 유력 제후들의 선거로 왕을 결정하는 관습이 유지되었다.
[2]
모든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들이 생전에 후계자를 독일왕으로 당선시킨 것은 아니었다.
마티아스는 형
루돌프 2세 사후
황제선거를 치러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으며,
레오폴트 1세 역시
페르디난트 3세가 죽고 1년 넘게 지나서야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3]
황제선거는 일반적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치러졌다.
[4]
중세 동안 아헨에서의 대관식은 쾰른 대주교가 주재하였으나, 16세기 무렵부터 최선임 선제후인 마인츠 대주교의 이의 제기로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선거가 끝나면 쾰른 대주교가 아니라 마인츠 대주교가 바로 대관식을 주관했다.
[5]
오토 2세는
961년 6세의 나이로 공동 왕(Mitkönig)으로 선출된 후
967년에는 제국 역사상 유일한 공동 황제로 선출되기도 하였고,
오토 3세 역시
983년 공동 왕으로 선출되었다.
잘리어 왕조 역시
1028년에 하인리히 3세가,
1054년에는 하인리히 4세가 불과 4세의 나이로 아버지인 전임 황제 생전에 공동 왕으로 선출되었다.
[6]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권력 기반이
슈바벤(알레마니아)였기에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는 독일을 일컫는 명칭이 Teutonicum 대신 Alemannia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7]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이었던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
[8]
여기에는 독일 내에서 대공위시대를 거치며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대관식을 치러 주지 않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된 것이 한 이유였다.
[9]
독일어로는 Erwählter Römischer Kai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