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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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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이전2. 근대3. 현대사

1. 근대 이전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는 9,000년 전에 이 지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버려졌는데, 아마도 그 지역의 따뜻해진 기후로 인해 최초의 정착민들의 식량원이었던 많은 대형 사냥감 종들이 지역적으로 멸종한 결과였을 것이다.

약 3,000년 전에 두 번째 인류 집단이 이 지역에 들어와 활과 화살과 같은 보다 발전된 사냥 도구를 남겼다. 약 8,000개의 초기 야영지 유적이 도시 전역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에 정착한 인류 집단은 아마도 그 이후로 지속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2. 근대

유럽인들이 도착할 무렵, 레나페족은 화전을 통해 식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재배된 밭의 생산 수명이 연장되었다. 그들은 또한 이 지역의 만에서 엄청난 양의 어패류를 수확했으며 뉴저지 남부에서는 일년 내내 조개를 수확했다. 이러한 방법의 성공으로 주민들은 다른 곳의 유목민 수렵 채집인이 지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유럽인 정착 당시 뉴욕시 주변의 약 80개 정착지에 레나페족 15,000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오늘날의 뉴욕으로 알려진 곳에 처음으로 도달한 유럽 국가는 프랑스였다. 16세기 초, 중엽 당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5세와 경쟁 중이었는데, 아즈텍 잉카를 정복하고 다량의 금은을 수탈하고 있던 카를에게 경쟁심을 느낀 프랑수아가 1524년에는 조반니 다 베라차노를 후원하여 오늘날의 뉴욕을 탐험하게 한 것. 이때 조반니는 프랑수아가 즉위 이전 프랑스 서남부의 앙굴렘 백작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하여 자신이 '발견' 한 땅을 '누벨 앙굴렘'. 즉 '새 앙굴렘' 이라 불렀으나 정착지를 세우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프랑수아와 그 뒤를 이은 앙리 2세는 '신대륙' 개척보다 합스부르크와의 싸움을 우선했으며 앙리 사후에 위그노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끝내 프랑스의 정착지는 세워지지 않았다.[1] 조반니는 이때 유럽인 최초로 레나페족과 접견하게 된다.

파일:1660 New Amsterdam.jpg [2]

1620년경에, 실제 역사보다 훨씬 빨리 영국의 식민지가 세워질 뻔 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메이플라워 호의 항해이다. 원래 메이플라워 호에 탑승한 청교도들은 허드슨 강이 위치해 주변에서 입지가 가장 좋은 이곳에 식민지를 세울 계획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들은 악천후로 인해 훨씬 북쪽인 보스턴 부근에 도착했고, 추가로 항해하기엔 너무 안 좋은 계절과 건강 때문에 항해를 포기하고 그곳에 정착지를 차렸다. 오늘날 이 두도시는 라이벌 도시가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결국 뉴욕에 정착지라 할만한 본거지를 차린 것은, 1624년 맨해튼 남쪽 지역에 도착한 네덜란드 선박의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의 지형이 암스테르담과 비슷하다 하여 처음 뉴암스테르담으로 칭했으며, 1626년에 네덜란드인들이 맨해튼 섬을 원주민들로부터 24 달러에 사들이면서 문서상에 '노바 암스테르담[3]'으로 표기했다.[4] 정확히는 네덜란드 돈으로 60길더 가치의 물품을 준 것으로 19세기의 미국 역사가들이 이 이야기를 조사하면서 미국 돈 24달러로 바꿔 써서 유명해졌다. 만약 현재 가치로 당시의 네덜란드 60길더를 바꾸면 1600달러가 된다. 흔히들 이를 두고 "그때 1달러 어치만 사뒀더라면." 하는 농담 식으로, 역사 속의 빅 딜 중 하나로 많이 언급된다. 하지만 맨해튼 부동산을 사들인 장본인인 네덜란드인들은 2차 영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뉴암스테르담을 별 가치 없는 땅으로 취급하여 영국에게 넘기고 대신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현 말루쿠우타라 주)의 룬(Run) 섬을 얻어냈다.

한편 이 빅딜에 대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미국 동해안 원주민 부족들과의 거래 관계는 현대인들이 저런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 현대적인 부동산 거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맨해튼 섬의 원주민들은 거래 이후에도 계속 인근에 남아서 살았으며, 네덜란드 인들도 굳이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지 않고 같이 살았다. 즉 60길더 어치의 물품은 네덜란드 인들이 맨해튼의 원주민들 사이에 살면서 무역할 권리를 산 것이고, 또한 이웃 라이벌 원주민들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이기도 했다는 것. 이런 식의 거래는 아메리카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에 진출한 곳에서 흔히 있던 유형의 거래였다. 현지의 유력자 중 무력이 필요한 이들과 접촉하여 군사적 동맹을 맺고 안전을 보장 받아 정착한 다음 요새와 도시를 짓고 동맹인 부족과는 거래를, 동맹과 적대하는 부족은 정복하는 식으로 확장하는 것. 그 외에도 원래 살던 부족과 적대하던 부족이 위장한 다음 거래했다는 썰도 있으나 이쪽은 별 근거는 없는 주장이다.

월 스트리트의 전설적 투자자 존 템플턴은 이 유명한 예화를 거꾸로 이용해서 복리의 힘을 설파한 적이 있다. 만약 그 24달러를 가지고 지금까지 연 8%의 복리 수익을 얻었다면 오늘날엔 수치상 100조 달러(한화 약 11경 원)가 넘는 돈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미국 국부는 한국 돈으로 9경쯤 된다. 물론 연 8%의 이익을 4백 년간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며(실제 역사상 불황을 보아도) 템플턴의 방식은 금융 자체가 축재 수단이 된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말은 다른 시각에서 (꾸준한) 재테크의 위력을 전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후 1664년, 제2차 영란 전쟁에서 영국이 이 지역을 네덜란드로부터 얻으면서 암스테르담 대신 영국 지명인 요크가 대신 붙어[5] 오늘날의 명칭이 되었다. 정착촌은 거듭해서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영국인의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1664년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영국은 섬의 이름을 뉴욕으로 바꿨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식민지를 원주민과 영국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벽(wall)의 잔해 위에 깐 포장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즉 월 스트리트(Wall Street)가 되었다.

사실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향료 무역에서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인데, 향료 무역의 주요 거점인 룬 섬 지역[6]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667년에 브레다 조약으로 룬을 영국이 포기하는 대신 뉴암스테르담의 영유권을 차지하게 된 것. 그러다 1673년 제3차 영란 전쟁에서 다시 네덜란드가 점령했을 때 네덜란드 총독이 자국의 자유 수호자인 오라녜(Oranje, 영어로 Orange란 뜻)공 빌렘1세의 명칭을 붙여 뉴오렌지로 개칭했으나, 바로 다음 해인 167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수리남은 네덜란드에, 영국인들이 재차 명명한 뉴욕은 영국에 귀속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1746년 이웃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교가 설립되는 것을 보고 자극 받아 1754년에 13개 식민지 5번째 대학 컬럼비아 대학교가 세워진다. 1789년 미국 독립 이후에는 1790년까지 미국의 공식 수도였다. 현재 뉴욕 시는 5개의 자치구를 가진 미국 내 유일한 도시인데 이는 19세기 말 주변 지역 편입을 통한 대규모 확장의 결과물이다. 원래 브루클린, 퀸스,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 전부 뉴욕과는 별개의 지역이었는데[7] 1874년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웨스트 브롱스 지역이 편입된 것을 시작으로 1895년 웨스트체스터 키운티의 이스트 브롱스 지역, 1898년 킹스 카운티, 퀸스 카운티 서부[8], 리치먼드 카운티가 주민투표로 뉴욕에 편입되었다. 킹스 카운티와 퀸스 카운티, 리치먼드 카운티는 각각 자치구 브루클린, 퀸스, 스태튼 아일랜드가 되었고 먼저 뉴욕에 편입되었던 웨스트 브롱스와 이스트 브롱스가 자치구 브롱스가 되면서[9] 현재의 5개 자치구로 이루어진 뉴욕이 완성되었다.

한때 환경미화원들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임금 인상과 근로 시간 조정을 조건으로 파업을 했는데 단 하루 만에 미화원들의 조건을 들어줘야 할 정도로 쓰레기가 엄청나게 쌓였다고 한다. 그래서 미화원들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뉴욕시 위생국 경찰대라고 위생국 전담 경찰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3. 현대사

1920년대 뉴욕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도시로 거듭나면서 뉴욕은 발전을 멈추지 않게 되었다. 이미 100년 전부터 월 스트리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 시장이었으며, 1929년 대공황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각지에서 발명된 전기, 전차, 자동차 등이 뉴욕 시내를 가득 채우면서, 20세기 초반 뉴욕은 사시사철 전기가 건물을 밝혀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해 잠들지 않는 도시(The city that never sleeps)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도박, 매춘 등의 불법도 성행했고, 세계 전역에서 몰려든 이민자와 소수인종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급증했다. 이때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고, 붉은 여름의 영향으로 흑인이 브롱스, 브루클린 등으로 집중적으로 밀집되면서 흑인 슬럼가가 형성되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특히 많이 이주를 왔고, 이들은 태머니 홀(Tammany Hall)이라는 조직을 통해 배후에서 뉴욕시의 정치를 조종하며 악명을 떨쳤다. 태머니 홀의 위세가 정점에 달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는 뉴욕시의원 90%가 태머니 홀 소속이고, 태머니 홀에 반대하는 뉴욕시장은 재선 엄두도 못냈을 정도였다. 1920년대 뉴욕주지사를 지냈으며 1928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앨 스미스가 대표적인 태머니 홀 소속 정치가였다. 비록 앨 스미스는 개인적으로 부패한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태머니 홀 조직은 이탈리아 마피아와 유착하는 등 부패한 계파 정치로 뉴욕시를 타락시켰다.

1920년대 금주법 시대에 밀주 유통으로 마피아의 영향력은 뉴욕시에서 최고점을 찍게 되었다. 하지만 뉴욕시민들이 이것을 좋아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1920년대 말부터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1929년 뉴욕주지사로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앨 스미스의 정치적 제자였지만 정작 주지사로 재직하면서는 앨 스미스의 통수를 치고 스미스가 추천한 태머니 홀 인사들을 모두 공직에서 배제하며 부정부패를 적극적으로 때려잡는 행보를 보였다.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인물로는 피오렐로 라과디아 뉴욕시장이 있다. 라과디아 시장은 1934년부터 1946년까지 3선 시장을 지냈는데,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마피아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여러 효과적인 행정 조치를 펼쳤다. 토머스 E. 듀이라는 맨해튼 지방 검사도 이때 마피아를 적극적으로 기소, 구속시켜 명성을 얻었고 이후 2번이나 대선에 출마하게 된다. 한편, 루스벨트와 라과디아는 뉴딜 정책이라 불리는 복지 정책을 펼쳐 뉴욕시의 만성적인 문제였던 빈부격차도 크게 줄이는데 성공하였고, 라과디아는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뉴욕시장으로 불린다.[10]

파일:피오렐로!.jpg
피오렐로 라과디아 뉴욕시장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태머니 홀은 다시 기지개를 펴고 영향력 확대에 나섰지만, 엘리너 루스벨트가 남편의 유훈을 이어 태머니홀 견제에 나섰다. 라과디아 퇴임 후 시장이 된 윌리엄 오드와이어가 부정부패 혐의로 물러나자, 뉴욕시민들은 무소속 반부패 후보로 출마한 빈센트 임펠리테리를 선출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뉴욕시를 물들인 계파 정치는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다. 임펠리테리가 퇴임 한 후, 진보 정치가인 로버트 F. 와그너 주니어가 3선 시장을 지내며 195~60년대 뉴욕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70년대 들어 뉴욕시의 분위기는 또다시 바뀌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으로는 68혁명을 들 수 있다. 1965년, 와그너의 퇴임 이후 존 린지라는 공화당 정치가가 시장에 당선되었는데, 린지는 비록 공화당원이었지만 라과디아와 마찬가지로 좌파 성향이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복지, 뉴딜 진보파였던 라과디아와는 달리 린지는 흑인이나 베트남 전쟁 반대 대학생 등 신좌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고, 이에 맞춰 어퍼머티브 액션의 일환으로 "오픈 입학제"[11] 전형을 추진하고, 경찰의 과잉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 예산을 삭감하며, 도시 예술가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고 닉슨의 베트남 전쟁 수행을 반대하는 등 전형적인 68혁명식 좌파 정치가의 모습을 보였다. 린지는 공화당 내에서도 왕따에 가까웠고, 1971년 공화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또 진보좌파 성향이었지만 귀족적인 성격과 배경 때문에 "리무진을 타고 다니는 좌파"라는 빈정을 받았고 여기서 강남좌파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12]

파일:john lindsay.jpg
1965년 뉴욕시장 선거 토론회에서 에이브러햄 빔 시장(왼쪽)과 존 린지 시장(중간). 맨 오른쪽은 언론인 윌리엄 F. 버클리.

이렇듯 야심찬 진보 정책을 펼친 존 린지였지만 그의 시정은 실패작으로 평가받는다. 과도한 복지 예산으로 시 재정에 부담이 가해지며 무려 4억 달러에 달하는 적자가 발생했다. 정작 필요한데에 예산을 투입할 수 없게 되며 경찰 병력은 축소되고, 공원과 공공주택 시설은 방치되면서 범죄와 빈곤이 급등했다. 또한 196~70년대는 진정한 마피아의 전성기라고도 불린다. 뉴욕시의 악화된 치안을 틈타 불법적인 마약 거래가 성행했고, 이탈리아 마피아들이 이를 노리고 부패한 노동조합, 지역 정치가와 손을 잡고 큰 수익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린지는 이런 문제들에 굉장히 무능하게 대처하며 쫓겨나듯 퇴임했고, 현재도 뉴욕시 역사상 최악의 시장으로 평가받는다. 존 린지의 재임 기간 동안 세계무역센터가 완공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많은 뉴욕 시민들이 옛날 쌍둥이 빌딩을 "뉴욕 침체기"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973년 린지 퇴임 이후 민주당의 에이브러햄 빔이 시장으로 당선되었지만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빔 시장은 불행히도 린지의 무능한 업적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치안 공백의 진정한 악영향이 이 시기 드러났다. 브로드웨이와 타임스퀘어 뒷골목은 매춘과 포르노 가게의 대명사가 되었고 경찰은 마피아를 배후로 둔 불법 매춘업자들을 단속할 수 없었다. 1975년, 뉴욕시는 마침내 파산을 선언하고 구제금융을 신청했으나 포드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면서 도시 재정은 막장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1977년 뉴욕 대정전 사태는 뉴욕시 몰락의 정점이었다. 25시간 동안 뉴욕시가 정전되자 수만의 폭도들이 뛰쳐나와 강도, 약탈을 벌였고 세계 최대의 도시라는 뉴욕시는 폐허로 변했다. 지역 정치인에 대한 뉴욕시민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그해의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해 재선을 노린 에이브러햄 빔 시장은 고작 17%밖에 되지 않는 초라한 득표율로 낙선하게 된다.

1977년 시장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에드 카치라는 하원의원이었다. 카치는 쓸모 없는 부서를 통폐합해 10%의 공무원을 해임하고, 지역 공립 병원을 폐쇄하고, 노동조합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등 좌우를 넘나드는 실용적인 긴축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서 린지 시장이 추구했던 좌파적인 정책도 상당수 계승하고 이를 효율화해, 지역 독립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이를 바탕으로 뉴욕시를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로 만드는 정책을 추진했을 뿐 아니라 비어버린 슬럼가를 재생하는데에도 51억 달러의 예산을 책정해 1만채가 넘던 빈집을 800채로 줄이는데도 성공했다. 카치는 1981년 74%, 1985년 78%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뉴욕시장 중 최고 득표율로 당선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으니 당시 카치가 얼마나 뉴욕시민들에게 인기 있었는지 알만하다.

파일:koch.jpg
에드 카치 뉴욕시장

하지만 카치 역시 범죄율을 잡는 데에는 실패함에 따라, 1993년 당선된 루디 줄리아니 시장이 나서게 된다. 줄리아니 시장은 뉴욕시 지방 검사 출신인데, RICO법이라는 형사법을 통해 마피아 일당을 구속, 일망타진해 1970년대 뉴욕의 속을 썩이던 마피아의 세를 축소시킨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줄리아니는 시장 취임과 동시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깨진 유리창 이론에 따라 그동안 예술로 인정받았던 그라피티를 금지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줄리아니 시장이 재임하면서 뉴욕시의 범죄율은 뚝 떨어졌고, 2020년대에 들어서는 전미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치안이 개선되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줄리아니의 엄벌주의 정책이 아니라 카치와 린지가 이전에 도입한 여러 복지 정책의 효과가 뒤늦게 발현된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2001년 9.11 테러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뉴욕시는 극복했다. 줄리아니 시장은 무너진 쌍둥이 빌딩 잔해 위에서 눈물을 머금고 "비록 쌍둥이 빌딩은 무너져 내렸지만 내일도 뉴욕과 뉴욕시민들은 용감하게 우뚝 서있을 것"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해 대권주자로도 언급되었고 2008년에는 진짜로 대선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본선에 진출하지도 못하고 탈락하긴 했다.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줄리아니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고 퇴임 이후에는 트럼프의 측근으로서의 행적 때문에 뉴욕시장 시절의 업적을 묻어버리는 각종 막장 행보로 인해 현재 구속 위기에 처해 있다.

줄리아니의 퇴임 후에는 마이클 블룸버그라는 언론사 사장 겸 기업가가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무난한 시정을 펼쳤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는 좌파 성향의 빌 더블라지오가, 2022년부터는 민주당원이지만 보수 성향인 에릭 애덤스가 시장으로 재직중인데, 블룸버그와 더블라지오는 평가가 다소 엇갈리고 애덤스는 사상 최악의 뉴욕시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허나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은 어느 나라에든 있기에 애덤스의 제대로 된 평가는 애덤스가 임기를 마치고 나서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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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오늘날 뉴욕에 세워진 현수교 가운데 하나는 조반니 다 베라차노를 기념하여 '베라차노 다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2] 1660년의 뉴암스테르담은 맨해튼 섬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 이 정착지의 방어벽 자리로는 월 스트리트의 도로가 지나간다. [3] 그래서인지 현재 맨해튼에는 "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길이 있다. [4] 여담으로 네덜란드는 노바 + (자국의 지명)식으로 식민지의 이름을 지었는데 비슷한 사례가 바로 뉴질랜드. 과거에는 노바 제일란트로 불렸다. [5] 요크가 붙은 이유는 당시 영국 왕 찰스 2세의 동생이자 훗날 제임스 2세가 되는 요크 공작 제임스의 작위명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6] 대항해시대 온라인 유저에겐 익숙할 지역인데, 바로 '육메'( 육두구- 메이스)를 퍼오는 그 지역이다. [7] 특히 킹스 카운티를 통째로 차지한 브루클린은 뉴욕, 시카고에 이어 당시 미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래서 브루클린에서는 뉴욕 편입에 대해 격렬한 반대운동이 펼쳐졌고 그 결과 주민투표에서 간발의 차로 편입 찬성(50.11%:49.89%) 여론이 승리를 거두었다. [8] 뉴욕에 편입되지 않는 퀸스 카운티 동부 지역은 나소 카운티로 분리돼 떨어져 나갔다. [9] 이때 브롱스는 뉴욕의 자치구이기는 했지만 하나의 카운티를 이루는 나머지 자치구들과 달리 뉴욕 카운티의 일부였는데 1914년 별개의 카운티인 브롱스 카운티로 독립했다. [10] 재밌게도 라과디아는 공화당원이었다. 하지만 태머니 홀의 영향으로 부패에 찌든 뉴욕시 민주당을 피해 공화당에 입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공화당 주류는 물론 공화당 내 온건파보다도 훨씬 좌파적이었고 사회주의에도 긍정적이었다. 어느정도였냐면 하원의원을 재직하던 때에는 잠깐 공화당을 탈당해 미국 사회당(!)에 입당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11] 흑인과 라티노의 입학을 크게 늘린 제도인데, 배움의 기회를 받지 못한 저소득 유색인종의 교육 수준을 개선했다는 호평도 있지만 대학교 교육 질을 떨어트렸다는 비판도 제기되면서 줄리아니 시장 때 폐지되었다. [12] 1969년 시장 선거 때 린지는 다른 모든 자치구에서는 40%대 초반~30%대에 불과한 지지를 받았지만 맨해튼에서 무려 70%에 가까운 몰표를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이때 민주당 후보로 나온 마리오 프로카치노는 린지가 위선적인 좌파라며 "리무진 리버럴"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이것이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강남좌파로 번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