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C0000> 노르망디-니에멘 비행연대 Régiment de Chasse Normandie-Niémen[1] Нормандия-Неман[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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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일 | 1942년 | |||||
소속 | 프랑스 항공우주군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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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몽 드 마르산 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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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프랑스는 모든 곳에서 싸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중반에 편성된 이 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소련 공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펼치며 여러 격전지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소속은 소련 공군이 아닌 자유 프랑스 공군의 전투 비행단이었으며, 후에 규모가 확충되었고 지휘 통제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소련 공군과 같은 편제인 전투비행연대로 재편성된다. 노르망디-니에멘은 영국 공군의 제151비행단( No.151 Wing)[3] 함께 2차 대전 동안 동부 전선에 참가한 서방 연합국 2개 부대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그러나 영국 공군과는 달리 이들은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군과 함께 싸운 유일한 항공부대였던 탓에 그 대접이 남다르다.영국에 더부살이하고 있던 어려운 상황에서 굳이 이런 지원 부대를 편성하여 소련으로 파견한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과를 쌓아서 전후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선 결국 전선에서 싸우는 것이 우선시되어야했다. 자유 프랑스군의 지도자가 된 샤를 드골 장군이 프랑스 군인이 모든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소련 원조를 위해 보내졌다. 자유 프랑스군은 1942년 3월에 나치 독일의 거센 공세를 힙겹게 막아내고 있던 소련 정부에 자유 프랑스군 소속 조종사와 정비병으로 구성된 비행부대를 파견하게 해줄 것을 제안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전황이 더욱 어려워져 비행기를 몰 수 있다고 한다면 조종사로 징집해서 최전선에 내보낼 지경이 되자, 파일럿들이라면 잡히는 대로 써야하던 소련은 드골의 요청을 떠올리고는 11월 25일에 협정을 조인하고 곧바로 부대 편성에 들어갔다.
2.2. 시리아 → 이란 → 러시아 전선
1차 파견 병력은 프랑스인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는 14명 뿐이었고 정비사가 52명이어서 그리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초대 지휘관 쟝 튤라느(Jean Tulasne : 1912~1943) 소령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공군의 제3전투비행단(Groupe de Chasse 3)으로 조직되어 1943년 3월 22일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소련 공군 소속으로 강력한 독일 공군을 비롯한 추축군 조종사들과 싸웠다.이들은 추축군의 점령지를 피해서 머나먼 소련까지 가기 위해 시리아와 이란을 거쳐 11월 28일에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이바노프 비행장에 도착했고 12월 4일에 부대 편성이 완료되었으나 소련이 제공한 야크 전투기 등의 숙달과 훈련을 위해 바로 전투에 나설 수는 없었다. 부대의 명칭은 노르망디 출신 부대원들이 많았던 탓에 승무원들의 뜻에 따라 ‘노르망디’ 부대로 명명되었다. 노르망디 부대는 43년 봄 소련의 반격에 맞추어 첫 실전을 치르는데 소련 제1항공군 제303전투기사단 소속으로 편입되어 전투를 치르게 된다.
노르망디 부대 초대 조종사 14명 | ||||
<colbgcolor=#fff,#191919> | 이름 | 출생 및 사망 연도 | 비고 | |
1 | 쟝 튤라느 | 1912.11.27 - 1943.7.17. |
지휘관 실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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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브 비지엥 | 1920.11.30 - 1943.4.13 | 실종 | |
3 | 레몽 데르빌 | 1914.2.27 - 1943.4.13 | 실종 | |
4 | 앙드레 포즈난스키 | 1921.6.30 - 1943.4.13 | 전사 | |
5 | 노엘 카스텔렌 | 1917. 5.30 - 1943.7.16 | 실종 | |
6 | 알베르 리톨프 | 1911.10.31 - 1943.7.16 | 전사 | |
7 | 알베르 프레시오제 | 1915.7.25 - 1943.7.28 | 실종 | |
8 | 알베르 듀란 | 1918.9.16 - 1943.9.1 | 실종 | |
9 | 마르셀 르페브르 | 1918.3.17 - 1944.6.5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
10 | 디디에 베긴 | 1918.12.14 - 1944.11.26 | ||
11 | 이브 마에 | 1919.11.21 - 1962.3.29 | 격추되어 포로로 잡힘 | |
12 | 조제프 리소 | 1920.1.23 - 2005.11.24 | ||
13 | 마르셀 알베르 | 1917.11.25 - 2010.8.23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
14 | 롤랑 드 라 팝 | 1920.7.28 - 2012.10.23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2.3. 이국 땅에서의 실전
프랑스인들은 3월 23일의 첫 출격을 시작으로 4월 5일에는 첫 격추를 기록하고 7월 말까지 30대에 달하는 독일 공군기를 격추하는 등 빠른 속도로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점차 증원되면서 부대의 규모도 커져 1개 중대 규모에서 4개 중대 규모로 커진 비행단은 각각 루앙, 캉, 르 하브르, 셸부르 비행대로 재편성되었다. 첫 지휘관이었던 튤라느 소령은 7월 17일에 전사하고 43년 9월에 이르러서는 처음 활동하던 파일럿들은 거의 모두 전사해버렸다.이오시프 스탈린은 골치아프던 루프트바페를 상대로 괄목할 만한 무공을 세우고 있던 이 부대의 전과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며, 특히 이 부대가 1944년 네만(Neman) 강 도하 작전에서 [4] 큰 전과를 올리자 이를 기념해, 이 강을 지칭하는 네만(Неман)이란 명칭을 부대 이름 뒤에 붙이도록 했다. 이 강의 프랑스어 이름이 니에멘(멩) (Niémen) 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노르망디-니에멘 에스까드릴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프랑스 파일럿들이 소련군에 편입되어 동부전선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이들이 포로로 잡히면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말고 즉시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4. 영광의 개선
독소전쟁동안 총 96명의 프랑스 조종사들이 노르망디 연대에 소속됐고 이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42명이 전사했다.러시아땅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프랑스 파일럿들에게 스탈린은 감사의 표시로 이들이 전쟁내내 몰았던 소련제 전투기로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들은 러시아를 출발해 돌아가서 그대로 편제를 유지한 채 프랑스 공군으로 다시 편입되어 계속 부대의 전통을 이어갔다.
3. 상징
3.1. 도색
도색 전 Yak-3. 타고 있는 파일럿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자크 앙드레. |
도색 후 Yak-3. |
1945년 로제 마르퀴스와 소련 정비사들. Yak-3. |
1945년 6월 프랑스로 돌아와 르부르제 공항에 주차된 Yak-3들. |
1943년 롤랑 드 라 팝의 Yak-1b 도색. |
3.2. 유니폼
Yak-1b와 노르망디 조종사들. 1943년 6월 |
Yak-3와 루앙 중대. 1944년 |
Yak-3와 노르망디 조종사들. 동프로이센 1945년 |
영화
유럽의 해방에 묘사된 노르망디 니에멘. 왼쪽은 혼합 군복을, 오른쪽 피에르 푸야드 사령관은 온전한 프랑스 군복을 입고있다. |
4. 전후
4.1. 프랑스
70주년 기념 도장을 한 라팔 전투기
귀국 후 노르망디-니에멘 연대는 그대로 유지하여 1949년에 베트남으로 이동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2005년부터 이 부대는 다쏘 미라주 F1 전투기를 장비한 1/30 비행단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행대는 2010년 6월에 일단 해체되었다가, 2011년 초에 재정비 되었다. 미라주 F1의 퇴역 이후에는 운용 기종을 라팔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른다.
4.2. 소련/러시아
부대 상징이었던 꺾인 화살표 데칼을 사용한다.
종전 후 소련군에도 노르망디-니에멘 전투비행연대가 유지되었다. 전후 자유 프랑스군 파일럿들이 귀국하면서 해당 부대에서 더 이상 프랑스인이 복무하지는 않았지만,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해 부대 명칭과 편제가 유지된 것이다.
이후 제18 근위 비텝스크 적기 수훈 항공연대 "노르망디-니에멘"[5]으로 바뀌면서 해당 부대는 극동 군구 예하 제11 항공군에 소속되어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 인근 갈룐키 기지에 주둔하게 되었고 제트 전투기를 운용하는 현대적 전투비행단으로 개편된다. 개편 후 부대는 1951년에서 1953년까지 중국으로 잠시 주둔지를 옮겨 6.25 전쟁에 참전하여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기도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간다.
냉전 후반기에 해당 부대는 Su-25 공격기 위주로 편제가 변경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공군으로 전속돼 타지키스탄 내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2009년 11월, 아나톨리 세르듀코프 당시 국방장관의 군제개편의 일환으로 부대가 해산하였다. 해체되기 전까지 부대는 프랑스의 노르망디-니에멘 비행단과 교류를 유지하였다.
그러다 2013년, 러시아 연방군의 확대와 해당 부대의 상징성 등의 이유로 극동의 체르니홉카 기지에서 부대가 재창설되었고 이후 시리아 내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운용 기종
- 야코블레프 Yak-7V : 1942년 12월부터 1943년 1월 25일까지 전투비행과 사격 훈련 용도로 운용.
- 야코블레프 Yak-1b : 1943년 1월 19일부터 3월 22일까지 고등 훈련과 공중전 훈련에 사용되다가 그 후로는 전투기로 운용. 노르망디-니에멘은 처음에 6대의 Yak-1을 인수했고 1943년 3월에는 8대, 그리고 4대가 4월 말경에 추가되었다. 6월부터는 새로 전입온 신참 조종사 훈련에 사용된 이 기체는 부대가 소련을 떠나기 전까지 남아있었다.
- 야코블레프 Yak-9D : 1944년 6월부터 7월 말까지 툴라 기지에서 훈련에 사용된 전투기. 동시에 수령한 공격기 형식인 Yak-9T와 함께 2대의 Yak-9D가 9월 10일까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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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블레프
Yak-3 : 1944년 7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사용된 노르망디-니에멘의 주력 전투기이자 상징이다. 37대의 Yak-3가 부대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우정의 증표로 프랑스 공군에 인도되고 이 기체들은 1945년 6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일선기로 이용되었다.
- 야코블레프 Yak-6 : 노르망디-니멘 부대의 전선 수송기.
6. 각종 기록
프랑스인 마르셀 알베르(Marcel Albert : 1917~2010 / 23대 격추)와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èvre : 1918~1944 / 14대 격추), 자크 앙드레(Jacques André : 1919~1988 / 17대 격추), 롤랑 드 라 팝(Roland de la Poype : 1920~2012 / 18대 격추) 4명의 에이스 파일럿들은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과 혁혁한 무공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이 부대는 브랸스크, 오룔, 엘리니야, 스몰렌스크, 쾨니히스베르크와 같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에서 종군하면서 전투 명예훈장과 적기 훈장이 여럿 수여되었다. 프랑스로부터는 레종 도뇌르 훈장, 끌로드 라 리베라시옹 훈장을 비롯한 6개의 훈장을 서훈받았다.노르망디-니에멘은 종전을 맞이할 때까지 확인 격추 273대 / 미확인 격추 37대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에 반하여 87대의 기체를 잃고 42명의 조종사가 전사했었다. 합계 출격 횟수는 5,240 소티로 그중에서 869회의 공중전을 치르었으며 30명이 에이스 칭호를 얻었으나 그중에서도 전사자는 있었다. 이들은 공중전에서 거둔 전과 외에도 27량의 열차, 22량의 기관차, 2척의 고속정, 132대의 트럭, 24대의 장갑 차량을 격파했다.
이들이 본국에 돌아올 때 우정의 증표로 주어진 Yak-3 전투기는 프랑스 공군에서 10개월간 더 현역으로 쓰이다가 모두 퇴역했다. 그중에 오직 1대가 현재 르부르제 항공우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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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감동 실화가 있다. 노르망디 니에멘은 프랑스 조종사들과 소련 정비사들로 구성되었는데,[6] 쾌활한 파리 출신 귀족 모리스 드 세인의 정비사로 과묵한 우크라이나 시골 출신 블라디미르 벨로줍이 배정되었다. 상극같아 보이는 둘은 함께 전쟁을 겪으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44년 7월 15일 연대는 비행장을 이사하게 됐고 조종사들은 각자의 정비사를 같이 태우고 날아가게 됐다. 전투 임무가 아니었기에 교전을 피하려 저고도로 이동했지만 운나쁘게도 모리스와 블라디미르가 탄 전투기가 적의 공격을 받아 연료탱크와 엔진이 손상되었다. 모리스에겐 낙하산이 있었지만 같이 탄 블라디미르에게는 낙하산이 없었고, 탈출하라는 명령에도 모리스는 끝까지 전투기를 착륙시키려 노력하다 결국 블라디미르와 함께 추락하여 사망했다. 둘은 함께 묻혔고 이들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우정의 미담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돌아가면 제 프랑스 친구 모리스 드 세인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그는 파시스트를 아주 용맹하게 물리쳐요. 여가시간에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줘요. 그는 저에게 프랑스어를 알려주고, 저는 그에게 러시아어를 알려줘요⋯
블라디미르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中
엄마, 전 그를 철학자라고 불러요. 그도 엄마만큼이나 항상 내가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다려요. 심지어 꿈에서도 엄마보다 그를 향해 귀환하곤 한다니까요. 제가 꿈속에서 엄마와 클로드를 만나고 있을 때 그는 잠도 안자고 제가 안전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 일해요. 엄마, 그는 정말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에요! 엄마도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모리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中
- 모리스와 블라디미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프랑스 조종사와 소련 정비사들이 깊은 우정을 맺었다. 자신의 조종사가 출격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남은 정비사들은 홀로 남아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러시아 요리에 불만이 많았다. 특히 러시아식 메밀죽을 '새 모이'라고 부르며 극혐했지만 소련 정비사들과 공군기지 직원들의 식사를 보고는 자신들의 식사가 잘 나오는 편이라는 걸 깨닫고 더이상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 봄이 되면 민들레를 채집하고 먹었는데 흔한 들꽃을 뜯어먹는 프랑스인들을 본 러시아인들은 그들이 미친줄알고 서둘러 의사를 불러냈다. 의사는 웃으면서 "프랑스에선 민들레를 식용으로 먹는다."라며 오해를 바로잡았다.
- 고향 요리가 그리워진 프랑스 정비사들은 어느날 숲속에서 토끼를 잡아 뵈프 부르기뇽을 만들었다. 그리고 소련 동료들에게도 나눠주면서 사실 이 요리는 주방에 자주 드나들던 고양이 '괴벨스'로 만든 것이라며 구라를 쳤다. 충격받은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인들에게 주먹질을 해댔고 프랑스 정비사들은 끝까지 "나치 장관의 가죽을 벗긴것뿐이야!"라며 농담을 해댔다. 난장판 속에서 고양이 괴벨스는 평소와 같이 주방에 나타나 짬 처리를 하고 갔다.
- 누군가가 전사하거나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하면 남은 전우들이 유족들에게 전해주지 않아도 될법한 사소한 유품(면도기, 양말 등등)들을 나눠가지는 전통이 있었다. 가끔씩 실종됐던 조종사가 살아돌아와 전우들에게 강탈당한 물건들을 다시 되찾아오기도 했다.
- 노르망디의 명성이 높아지자 바실리 스탈린이 높은 급여를 제시하며 자신의 휘하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지만 바로 거절당했다.
- 자신들이 소속한 제303전투기사단의 사령관 게오르기 자하로프를 "형님"이나 "아버지"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8. 대중매체
1960년에 소련 프랑스 합작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실제 노르망디 니에멘이자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수훈받은 롤랑 드 라 팝은 이 영화를 보고 인물의 성격이 과장된 것 빼면 생활상과 전투임무들을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호평했다.유럽의 해방 바그라티온 작전편에서 소련의 공세에 참가한다.
스틸 디비전 2의 소련군에 야크 노르망디 부대로 등장한다.
워 썬더 프랑스 공군 프리미엄 기체에 노르망디-니에멘 부대 소속 Yak-3과 Yak-9T가 등장한다.
비행고등학교에서 라팔이 한번 언급한다.
[1]
레지멍 드 샤스 노흐멍디-니에멍
[2]
나르만디야 녜만
[3]
허리케인을 장비한 부대. 이 부대도 소련 파견 부대이며, 노르망디 니에멘처럼 파견 기간 동안 이 병력들의 소속은 소련군으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영국 공군의 'Wing'은 당시 미 육군 항공대의 Group(비행단)에 해당한다.
[4]
독일어로는
메멜(Memel)이라고 한다.
[5]
18-й гвардейский Витебский дважды Краснознаменный ордена Суворова второй степени истребительный полк ВВС России "Нормандия – Неман"
[6]
처음엔 같이 파견된 프랑스 정비사들이 정비를 담당했으나 혹독한 러시아 환경과 프랑스어 매뉴얼 부족, 조종사들과의 배급 차별에 지쳐 1943년 8월에 대부분이 중동으로 떠나 소련 정비사들로 대체됐다. 조종사들은 거의 최고급의 대접과 배급을 받았지만 정비사들은 최악에 가까운 배급을 받아 굶주림에 길고양이를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프랑스에선 조종사와 정비사의 대우가 비슷했기 때문에 심적으로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7]
지휘관이었던 쟝 튤라느가 엄청나게 화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