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0:08:07

김영삼/사상과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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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상과 신념
1.1. 세계화1.2.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1.3. 대북관
1.3.1.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1.3.2.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
1.4. 종교

1. 사상과 신념

김영삼은 오늘날 기준으로 굳이 따지자면 우파라고 볼 수도 있으나[1] 본인은 생전 보수 정치인이라는 식으로 표현한 적은 있어도[2] 좌우파로 크게 구분짓진 않았다. 이는 김영삼 자체가 생전 민주 vs 독재 구도 속에서 큰 정치인이며, 좌우파 구도는 한국사에서 민주화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거론된 주제라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민주주의 쟁취 과정 자체가 진보주의의 한 면모다 보니, 요즘 사람들도 김영삼이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고, 신민당이라는 민주당계 정당을 오래 이끌었기에 진보좌파 성향 정치인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김영삼 본인은 정치 인생 초기를 자유당에서 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3] 좌파(사민주의) 성향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진보 혹은 반권위주의 중도~중도우파라고 볼 수 있다.[4] 사실 이 당시만 해도 북한과 대립 중이라는 시대상의 한계로 민주화 이전까지는 운동권을 제외하면 좌파 정치 세력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시피한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5]

김영삼 본인은 신념을 딱히 바꾼 적 없이 나름 일관된 자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자유를 떠들던 이승만 정권이 현실은 사사오입 개헌 등 사실상 독재 정권으로 타락하자 이에 실망하여 자유당을 탈당, 경쟁당인 민주당으로 전당해 이후 군사정권이 깽판을 치자 여차저차해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들이 연합한 민주계 정당에서 1990년까지 투쟁했으나, 1990년 3당합당으로 오늘날 주류 보수정당의 직접적인 전신인 민주자유당 창설에 참여하면서 이른바 한국식 보수정당계 계보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6] 그 중에서도 거물급 원로로 남게 된다.

오늘날 김영삼의 사상이나 신념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는건, 구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이른바 극우 틀튜브에선 그들과 대항한 김영삼을 그들 기준 좌파 쁘락치라고 까고[7][8], 민주당계에선 김영삼의 민주화 시절 업적이나 군부 청산은 여전히 기리다보니[9] 스탠스가 애매해서, 즉 좌우에서 강성 팬덤이 적어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도 있다.

결론적으로, 유명한 "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같은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영삼은 강성 반독재, 반공 성향을 갖고 있어 정치 초년생 시절부터 독재정권에 지속적으로 반대해왔고[10], 군사정권의 종식 직후 설립된 문민정부의 수반이라는 상징성 탓에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영향력이 짙은 세대나 극우 진영의 골수 보수파들 사이에선 보수 진영 인사임에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한 경우 이들로부터 심심찮게 좌빨(...)이라고 공격 당했을 정도.[11][12] 그러다보니 좌파 인사라는 인식도 생긴 것으로 보이나, 이때 말하는 좌파는 정치적 수사로 봐야지 이념적 좌파랑은 거리가 있다. 즉, 안티들의 색깔론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1. 세계화

1994년 말, 문민정부가 내놓은 사실상의 정부 정책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세계화(Segyehwa)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방문 중 발표했다고 해서 '시드니 선언'으로도 불린다. 다들 Globalization(Globalisation)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고 발표하며, Segyehwa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당시 정부에서도 저 표현을 썼다.

그 해 11월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수행기자들에게 '세계화 구상'을 발표했는데,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개혁의 방향으로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겠다"는 의도였다고 한다. 당시 김영삼은 밖에 나와서 두루 살피다 보니 우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서 세계화를 해야 하며 곧 다음 세대를 위한 세계화 정책을 구체화 해서 장기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국정기조로 우루과이 라운드(UR), 세계무역기구(WTO)와 선진국 경제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을 추진하며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로 급속히 편입됐다고 평가받는다. 한승수 전 부총리는 "김 대통령 재임 중에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개방되었고 OECD에 가입한 것은 치적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대외환경에 대한 이해 부족과 취약했던 대응능력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촉발됐다는 점은 오점으로 지적되고 있다.[13] 이때 시도한 노동 유연화 기조 역시 이른바 노동법개정파문을 일으켜 당대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

1.2.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는 자유의 유보가 아니라 자유의 신장이며 인권의 탄압이 아니라 인권의 보장이고 언론의 통제가 아니라 자유언론의 창달이며 민주체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김영삼은 독재 추종 세력이 보수 세력에 다수 계승되어오고 있는 기형적인 한국 정치 현실 속에서, 보수 진영에 속하지만 동시에 격렬하게 독재, 권위주의에 저항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보수 세력에 편입된 이후에도 군부독재 세력을 혐오해 그를 따르던 민주계를 이끌고 초기 신한국당에서 군부 기반의 민정계들을 견제하고, 이후 하나회와 두 전직 대통령까지 숙청해 한국 보수 세력의 DNA 자체를 바꾸고자 노력하였다.[14]

김영삼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15] 경제면에 있어서도 군사정권과의 결별을 시행했다. 대통령 취임 후 과거 박정희 정권부터 이어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종식하고[16], 관 주도 경제정책을 이끈 '경제기획원'을 해체했다. 대신 관이 기업가들을 뜯고 통제했던 군사정권 시절과는 다르게 진짜 경제적 자유주의에 좀 더 근접한 규제완화, 경제정의 실현 등을 골자로 한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

김영삼은 냉전 시절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체제라고 비판적으로 보아, 자유가 없는 세계가 잘못하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운동권 출신들을 영입하는 등[17] 인재 확보를 겸한 포용 행보를 보이면서도 극단적인 운동권과는 선을 그었는데, 예를 들어 극좌 성향 대학생 단체인 한총련에 대해 임기 당시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3. 대북관

김영삼 정권 시절 정부는 군부정권 시절 닥치고 반공식의 색깔론은 지양하면서도, 김영삼 개인의 직설적인 성격과 겹쳐져 북한에 정신 좀 차리라는 식의 할 말은 하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한편, 정책적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 4대 원칙을 제시하고 심지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뻔도 했는 등 실용주의 기조 역시 이어갔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사실상 대한민국의 불문헌법인 한미동맹도 중요한 한편 북한도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며 반공구호를 조금 약하게 만들었다. 실제 군부정권 시절식의 반공기조는 약해져, 90년대 초반까지 공공장소에 비일비재하던 반공구호는 1991년을 전후하여 국제사회의 탈냉전 시기와 더불어 죄다 없어지고, 반공교육도 공교육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던 게 이 시기이다. 대북 경수로 사업(KEDO)[18] 비전향 장기수의 첫 송환이 이루어진 시기도 이때이다. # 1994년 대북 선제 타격 위기 당시 이를 만류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었고 실제 일정까지 잡혀있는 상황이었으나, 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무산된 바 있었다. 이 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도 매우 아쉬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96년 신년연설에선 "북한 경제난( 고난의 행군)의 근본원인은 과다한 군사비와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비능률에 있다. 북한이 동족을 위협하는 군사력 유지에 모든 국력을 쏟아넣으면서 구호를 바라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죄악이다. 북한이 화해와 협력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직시하고 대남(對南) 자세를 바꿀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한편, 한국 보수세력의 주요 대북 담론 중 하나였던 북한 붕괴론이 등장한 건 김영삼 정부 시기라고들 한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 붕괴를 기정사실화 했다고 한다. 당시 정종욱 안보보좌관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앤서니 레이크)에게 "북한이 6개월 내지 2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두 개의 한국』의 저자 오버도프가 전했으며, 갈루치·위트·폰먼의 공동 저서 『북핵 위기의 전말』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은 ‘김정일의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도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였던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YS는 김일성의 건강이 나쁘다는 정보부의 보고를 워낙 많이 들어서 사실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은 무너진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8월 “남북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언제 갑자기 통일이 눈앞에 닥쳐올지 모른다”고 말해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 # # #

2004년에는 "북한은 인권이 없는 나라다. 김정일을 제거하지 않으면 북한에 자유를 가져올 수 없다. 북한 정권과 대화를 통해서 뭔가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일 멸망 이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 평화는 없다. 북한에선 56년 동안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이 정권을 잡아오지 않았느냐. 그런 독재정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2006년에는 "다 죽어가는 김정일 독재정권을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지금까지 연명시킨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저지른 역사적 죄악이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2009년에는 "북한의 로켓 발사는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이뤄진 천문학적인 대북 지원 때문이다."고 비판했으며, 대북송금 특검 때는 "이적행위로 국민을 핵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김대중씨는 마땅히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사법처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 #

1.3.1.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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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 연설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통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 원칙으로 무력포기와 상호존중, 신뢰구축 그리고 상호 협력을 제시했다. 또 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위해 북한에 경제 전반을 회생시킬 수 있는 민족개발 공동계획을 남북대화를 통해 추진하자고 말했다. 이어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이 변화의 길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 당국의 호응을 촉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1.3.2.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

1996년 6월 24일 전방부대를 시찰한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북한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동족인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여 당시 여야간 극한 언쟁이 오가기도 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전 대변인은 해당 발언에 대해 국가안보를 해치고 4자회담[19] 성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면서 "국가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고 본다"는 논평을 냈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측에서는 "대통령 자신이 북을 자극하여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논평을 냈다.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김철 전 대변인은 "어느 쪽의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는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정치국민회의는 북한에 대해 그렇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운지 묻고 싶다"는 논평을 냈다.[20]

당시 공방의 발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난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발언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심각한 북한 상황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주장했던 만주폭격이 가능했더라면 이미 통일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철저한 안보태세를 당부했다. 그러자 새정치국민회의 측은 어제와 오늘 잇따라 비난 공세에 나섰고 신한국당 측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양쪽 공방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언이 과연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전 대변인은 만주 북폭 지지 발언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고 규정을 했다. 그러자 신한국당 김철 전 대변인은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 통일의 기회를 아쉬워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같은 회상을 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논평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호했다. 또 이번 발언이 한중 수교 이후 관계가 개선되어가던 당시 한중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논란이 됐다. 정동영 전 대변인은 한중 우호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간접적으로 외환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고 논평했고,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반세기전의 전쟁 상황을 기준한 대통령의 발언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한중 한러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국민한테 이 발언을 해명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신한국당은 당시 공산당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그대로 했다면 통일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새정치국민회의가 6.25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어느쪽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반박했다.[21][22][23]

1.4. 종교

김영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일찍이 할아버지 김동옥의 대에 장로회를 받아들이고 대대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75년 손세일과의 접견에서 국민이면 누구나 모든 문제에 참여해야 된다며, 종교인의 현실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런데 그 방법을 어디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한정하였다. 2015년 그의 사후에도 종교적 예식에 맞추어 장례가 진행되었다.

[1] 사실 민주당계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민주당계 우파의 거물이 되었을 것이고, 반대급부로 김대중은 민주당계 좌파 비슷한 거물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보수당에선 김영삼은 보수좌파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엔 온건/개혁보수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계보도적으로 딱 이어지진 않는다. [2] 당연히 김영삼 기준에선 군부 정권은 보수도 뭣도 아닌 사이비 정권이었다. [3] 다만 사사오입 개헌에 빡쳐서 몇개월 안가 탈당한다. [4] 김영삼보다 더 리버럴하다고 평가받는 김대중조차[24] 현 관점에서는 중도 내지 그냥 리버럴 정도로 평가되는 것이 한 단면이다. 물론 김대중은 대중경제론 등을 설파할 땐 사민주의적 면모를 비출 때도 있어서 애매한 부분은 있지만, 대통령 시절엔 경제적으로 상당히 우클릭했다. 참고로 민주당계 정당이 확실히 세계적 관점에서 좌경화된 것은 사회자유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노무현 정권 시기쯤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조차도 확실히 좌경화된건 아니라 유럽보단 북미식 리버럴에 가까운 중도~중도좌파 정도 스탠스다. [5] 그래서 김영삼 본인도 신한민주당 활동 당시 국내에 진보 정당이 없으니 우리 당이 진보 세력까지 수용해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6] 민주자유당은 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으로 이어진다. [7] 정작 당에선 기일마다 현수막도 걸면서 기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때문에 김영삼의 친손자인 김인규 역시 22대 총선 출마 선언을 하며[25] "거산(巨山)의 뜻을 계승한 국민의힘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본류를 잇는 정당"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민주화 스탠스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는 보수정당 지도부에 답답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 이는 김인규의 부친인 김현철도 비슷하게 토로한 바 있는데, 그래서인지 김현철은 2010년대 한동안은 민주당에 몸 담은 적도 있었다. 사실 김인규도 민주당 문희상 국회의장실 정무비서로 일한 바 있다. [8] 더 암담한건, 이러한 YS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오늘날 신(新)극우로 분류되는 일간 베스트 저장소 같은 웹 기반의 극우 및 대안 우파 진영에게도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민주당계 커뮤니티에서 YS 업적이 칭송받는 것과는 대조적. [9] 민주당에서도 민주당계 대표 시절 업적은 기리긴 한다. 다만 3당야합이나 IMF 등의 실정에 대해선 깐다. 쉽게 말해 좌우 모두 본인들에게 필요한 의제만 선택적으로 쓰고 있는 것. 이건 김영삼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는게 본인부터가 유언으로 통합, 화합을 얘기했음에도 생전 독재 세력을 포함해 본인이 아니라고 본 상대는 줄기차게 까서 이게 민주계 통합을 말하는건지 보수계 통합을 말하는건지 헷갈리는 스탠스를 보여줬다. [10]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이 정적들을 용서한 것과 달리 독재자를 용서할 순 없다며 죽을 때까지 깠다. 김대중과는 화해해도 박정희는 평생 용서할 수 없다고 한 발언이 대표적. [11] 이는 오늘날에도 극우 세력들이 지들 맘에 안들면 보수 진영 인사라도 걸핏하면 좌파, 종북이라고 욕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 # [12]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오늘날 신(新)극우로 분류되는 일간 베스트 저장소 같은 웹 기반의 극우 및 대안 우파 진영에게도 이어진다. 영원히 고통받는 YS. [13]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경제분야 성과와 과오. [14] 이런 점은 이후 독재자들을 용서하고 정적들도 포용한 김대중과 오히려 비교되는 지점이다. 실제 90년대 김대중이 구 독재 세력을 품으려 하자, 이들을 미화한다며 시국선언까지 낭독했을 정도였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정도로 독재자를 싫어하고 평생 립서비스조차 안한 대통령이 현 보수정당의 시초라는게 어찌보면 현대사의 아이러니. [15] 그래서 제2의 건국, 신한국을 내세우며 당명도 신한국당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IMF라는 신한국으로 이끌긴 했다. [16] 물론 엄밀히 따지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장면 내각 시절부터 준비하던 것이긴 했다. [17] 이재오가 대표적이다. [18] KEDO는 소위 통미봉남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통미봉남 문서 참조. [19] 기존의 북미간 핵협상(예: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중국 대한민국을 포함시킨 4(2+2)자간의 회담을 말한다. 미 국무장관 키신저가 제안했으며, 해당 발언 2개월전인 1996년 4월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미국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한․미 공동발표문’을 통해 4자회담 개최를 공식 제의했다. 4자회담 [20] 여야, 김 대통령의 6.25 만주 폭격 발언 놓고 치열한 성명전 [21] 김영삼 전 대통령의 6.25 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논쟁 가열 1996.6.26 kbs뉴스. [22] 김영삼 전 대통령 만주폭격 발언 일파만파. [23] 여야 만주폭격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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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대중은 회고록 읽어보면 진보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고 있다. [25] 경선에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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