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0:15:47

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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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년기)권하자 사진.jpg
본명 권하자(權夏子)
출생 1940년 8월 13일
경기도 경성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 2013년 7월 12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졸업)
종교 무종교
직업 공무원 또는 공무직 (퇴직)
가족 아버지, 어머니, 8남매[1]
묘소 미 매장[2]

1. 개요2. 과거3. 노숙 생활4. 방송에 알려지다5. 반응6. 사망7. 논란
7.1. 권하자는 왜 그랬을까
8. 그 외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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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또는 공무직. 말년에 서울특별시 정동 등의 맥도날드 매장에서 매일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2. 과거[3]

서울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바로 위의 형제인 여섯째 자녀(성별은 불명)가 일찍 죽은 후에 어렵게 다시 얻게 된 자식이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가족들 중에서 부모의 편애를 제일 많이 받았다고 한다.[4] 막내 여동생은 자신이 돈을 주고 산 것도 언니가 탐을 내면 부모가 뺏어서 줄 정도였다고 하는데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권하자는 다른 형제자매들의 소유물도 자신의 것인양 썼고 자연히 이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1959년, 한국외국어대학 불어과(현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양어대학 프랑스어학부)에 입학하여 4년동안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였다.[5]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는데, 입학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워서 셋방살이를 하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까지 져가며 등록금을 내주었다고 한다.[6]

이후 주 일본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3년간 근무했고[7][8], 1976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민국 외무부 유엔 담당 부서에서 15년을 근무했다.[9] 따지고 보면 도합 18년을 근속한 셈이다. 다만 정식 공무원이었는지 여부나 근무 당시 직급, 직책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10]. 또 대학 졸업 이후 십여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외무부 시절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어묵을 사먹거나 사탕을 사도 꼭 백화점에서만 샀다고 할 정도로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11]

젊은 시절 결혼을 생각한 적은 여러번 있었으나, 권하자의 눈이 워낙 높아서 생전에 계속 부모에게 "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면서 매번 혼담을 걷어차며 다음 기회를 기다리다 혼기를 놓쳐버렸고 결국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이다. 죽기 얼마 전까지도 권하자는 자신과 결혼할 사람은 국가의 지도자급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는 치매가 진행 중이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치매에 걸리기 이전 시절에도 똑같은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그녀를 다른 형제들과 차별대우 해가며 공주대접한 것이 권하자를 유아독존형의 오만방자한 성격으로 만들어버렸고 오히려 딸의 인생을 망쳐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 주변에서 아무리 도움을 주려고 해도 권하자는 '나를 데려갈 백마탄 왕자님' 운운하면서 끝내 스스로 거부하였고,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영원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3. 노숙 생활

아무튼 한때는 분명 번듯한 직장이 있었던 그녀는 어째서인지 몰락하여 일정한 거주지조차도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퇴직 후 퇴직금을 탕진하고 그렇게 된 게 아니냐는 추측과[12], 외무부 시절부터 씀씀이가 헤펐던 점이나, 몰락 이후 도움의 손길이 오면 고급만을 고집하며 요구하는 점을 봤을때 퇴직 후에도 씀씀이가 그대로라서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 결국 살 집마저 잃어버려 글자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고 만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실제로 그나마 도와주려던 사람들도 그녀가 매번 고급만을 요구하며 자신을 상류층 인사인 양 행동하고 상대를 하급자 부리듯 하니 분노해서 지원을 때려치우는 일이 다반사였다니 말이다.

십수년 넘게 공직 생활을 하다가 중도에 퇴직하게 된 사유는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말년에 친하게 지냈던 캐나다인 스테파니 세자리오의 여성조선 인터뷰에 따르면 권하자 본인은 자신의 직무에 애착이 컸고 계속 일을 하고 싶어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직장을 그만뒀다고 하는데, 그녀의 실제 퇴직 시기(1991년)나 외국인 여성과 80년대 한국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것을 종합해보면 권하자 개인의 정치성향과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이 퇴직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여성조선 인터뷰 전문

2005년 무렵부터 몇 년 동안이나 24시간 영업을 하는 맥도날드 롯데리아 등 패스트푸드점에 심야시간에 방문해 잠을 자고 새벽에 교회를 오가면서 기도를 드렸으며 낮에는 일본문화원에서 무료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다시 맥도날드로 가는 일정을 반복했다고 하며 3일에 한번 스타벅스에서 고급 커피를 주문하여 마셨다고 한다.[13] 생활비 전액은 다니던 교회의 교인이 후원해주는 돈으로 생활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늘 가지고 다니는 쇼핑백에는 영어 신문이 가득 차있었는데, 할머니는 이 신문을 막힘없이 술술 읽을 정도로 영어 실력 수준이 전문가 수준이었으며 프랑스어도 상당히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2020년대 기준으로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막힘 없이 구사할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당시 시대상으로는 그야말로 엘리트. 또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보그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0년 12월 12일 가수 겸 생명운동가 이광필이 이 할머니의 사연을 널리 알리고 돕기 위해 인터뷰 영상을 작성하여 유튜브에 올리고 신문기사가 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씨는 2005년에 자신이 운영하던 커피숍에서 맥도날드 할머니를 5개월 가량 쉬어가게 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맥도날드 할머니가 가게에 오지 않게 되어 도와주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아쉬웠던 차에 11월에 우연히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에 할머니의 사연을 알리고자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4]

사실 이 할머니는 그쪽에서는 나름 명물이자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매점 직원들과 심지어 다른 손님들에게도 갑자기 이유없이 소리지르며 시비를 거는 등 자주 행패를 부려서 패스트푸드점 점주들과 커피 전문점 주인들이 합의하고 가게 내에서 못 자게 했었다. 잘 하면 긴급출동 SOS 24에 출연할 했는데…

4. 방송에 알려지다

2010년 12월 24일에 같은 방송국의 휴먼다큐인 SBS '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에서 사연이 방송되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2011년 1월 14일에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좀 더 자세한 취재를 하였다.

1차 방송에서 본명과 학력, 과거 직업이 밝혀졌다. 또 대학시절 미모가 출중해 당시 메이퀸으로 뽑힐 정도였다고 한다.[15]

2차 방송에서 공개하기를 외무부에서 퇴직한 뒤에 어떻게 지내왔는지 상세한 것은 불명이나, 동사무소의 기록에 의하면 2005년 1월 24일에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고, 국내에 남아있는 사람[16] 가운데서는 여동생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사실 긴급출동 SOS 24와 달리 이 방송에서는 훈훈한 휴먼다큐로 제작하려고 했으나, 당사자가 워낙 황당한 태도를 취한 것 때문에 결국 그 주제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할머니의 추악한 실체만 까발리게 되었다. 권하자는 노숙자로 사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금전적 지원을 해주자마자 택시를 타고 호텔 사우나에 가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소갈비 등 값비싼 음식을 당연하다는 듯이 주문하는 등 사치를 부리며 순식간에 그 돈들을 탕진했다. 또 설날을 맞아 제작진이 떡국 한 그릇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대뜸 자신이 아는 종로의 한식집을 가자고 했으며, 찾으러 가는 길에서도 제작진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한식점이 이전해서 찾기 어렵자 신경질을 내다가 마침내 찾아간 한식집이 지하로 이전한 것을 알고는 '시시한 곳에서 먹고싶지 않다'며 역정을 내는 등 안하무인의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더불어 버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기관을 20년 이상 이용한 적 없다는 발언 등을 하였다. 실제로 버스, 지하철의 요금 체계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추가로 기자와 대화할 때의 태도도 대단히 일방적이고, 자기 생각에 안 맞는 말 같으면 기자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리는 등, 기본적인 소통에도 문제가 있는 모습을 보였다. 핵심적인 내용에 가려지긴 했지만 기자가 할머니의 짐에서 뭔가를 꺼내려 하면서 물어보자, 기자의 손을 확 뿌리치면서 "이건 내 비밀"이라고 못 건드리게 하는 통에 기자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보여주기 싫은 것일 수도 있지만 완곡하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을 대번에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을 본다면 기본적으로 대화하는 데 있어서 고집스러운 성격일 가능성이 많다. 거기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모습도 있었다.

결국 권하자가 주장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메이퀸으로 뽑혔었다'는 미모 화제만 언론에서 실어주는 형편. 말하자면 방송 컨셉을 처음부터 잘못 잡은 대표적인 경우. '다큐가 아닌 솔루션 형식으로 갔어야 했다'는 말이 많았다. 그 뒤에 방송된 화장실 3남매[17]의 아버지가 보이는 모습과도 꽤 유사한 상황이다. 역시 나름 잘 살던 가장이었지만 사업이 망한 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꽤 유사하다.

5. 반응

권하자의 사연이 세간에 알려진 뒤 넷상에서 나온 목격담들에 의하면 이미 90년대 중후반~후반에도 커피숍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보였었다는데, 이로 보아 퇴직한 지 몇 년도 채 안 된 90년대에 이미 몰락했거나 몰락이 시작됐던 듯 하다. 게다가 그 당시에도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혼잣말을 하거나 혹은 가만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 갑자기 이유없이 소리를 지르며 시비를 거는 등 정신이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며, 사망 당시 치매가 상당한 상태였다고 알려졌기에 이미 한참 전부터 치매를 앓았으며 그때문에 근속 20년을 2년 남긴 상태에서 퇴직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방송사에서 흥미 위주로 개인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캐는 것이 불쾌하다'는 반응도 있었는데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나 긴급출동 SOS 24,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도 마찬가지이니 뭐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상황이 저렇게 되면 이미 '개인의 사생활'이라기보다는 '사회문제'에 더 가깝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노숙하면서 사는 것을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방송을 보고 그녀를 알아본 외무부 시절 동료와 지인, 고등학교 동창들이 나타났다. 권하자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거처와 함께 일자리를 제공하고 나섰다. 그런데 그녀는 이 모든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다. 자신은 자기의 방식대로 남은 생을 이어가겠다고 했다.[18] 생계가 될 수 있는, 약간의 월급이나 봉사료 등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스스로 거절해버렸다.

찾아온 사람 중 후배 한 명은 자신과 같이 살자면서 거주지를 마련해주려 하는 등 큰맘 먹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도 했다. 후배가 어디 외딴 시골도 아니고 서초구 양재동에 산다고 하는데도 동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그 집으로 가지 않고 용돈만 받았다고. 본인이 사대문 안에 있는 것에 상당히 많은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이는데, 권하자 본인이 가장 자부심 높고 화려했던 시절을 광화문 일대 등 사대문 안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자신의 옛 직장 외교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노숙을 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가 상당히 유력하다. 사실 이것은 권하자뿐만이 아니라 한때 화려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2011년 2월 이후 한동안 언론보도가 나오지 않았지만, 각종 커뮤니티에서 맥도날드 할머니를 봤다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전히 기존의 자기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19] 이 정도면 일반인이 아니라 전문가가 필요한 수준. 아울러 후속 방송이 필요하긴 한데 이 할머니의 비정상적인 생활과 행동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다른 자잘한 개인 문제 이런 거 떠나서 고령인 데다 저 생활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경우 갑자기 건강 악화가 올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방송을 탄 2011년 1월 이후로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에 일베 유저들이 할머니를 쫓아다니며 인증사진을 찍고 커뮤니티에 조롱글을 여러차례 올려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6. 사망

권하자는 방송을 탄 이후로도 변함없이 살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캐나다 여성 스테파니 세자리오와 만나게 된다. 우연히 할머니와 대화하게 되면서 서로 절친해졌고, 만남을 지속하며 풍부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긴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다고. 할머니를 설득해서 요양병원에 가도록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할머니가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이제 당신이 제 유일한 가족이군요."라고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며, 그녀가 과거에 안주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단순히 정신이상자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그녀 또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소중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인터뷰).

그러다 2013년 5월 29일, 서울역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국립중앙의료원으로 후송되어 검사한 결과 복막암 말기로 밝혀졌다. 이후 서울 송파구 소재 새희망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요양병원에서도 자신을 상류층처럼 대접하길 요구했다.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자 적응하지 못해 요양병원을 빠져나왔다. 물론 이는 죽음을 자초하는 짓으로, 노구에 암까지 걸린 몸으로 길거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2013년 7월 12일 병원 인근 공원 벤치에서 생을 마감한 채 환경미화원에게 발견되었다. 당시 149cm에 33kg으로 영양실조 상태였다. 시신은 무연고 변사자로서 화장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네티즌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던 권하자였지만, 사망 소식에는 안타까움을 표하는 반응들이 많았다. 평생 백마 탄 왕자를 원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에 도움을 준 것은 가족도 지인도 아닌 생면부지의 외국인 한명이었기 때문에 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착잡하거나 비참한 심정이 들 수도 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요양병원을 무단으로 나간 뒤 사망했다. 다만 어차피 권하자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있으면 불편해 하거나 스스로 사람들을 경계하며 거리를 두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인간 혐오증' 적인 면도 있었던 만큼, 그래도 말년에 백마 탄 왕자는 아닐지언정 자신에게 요양병원을 연결해준 스테파니라는 인연을 하나라도 얻은 것만으로 다행. 어쨌거나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가 되었기에 편히 영원한 안식을 취하라며 영면하기를 비는 추모 댓글들도 많았다.

7. 논란

2011년 7월 31일에 이광필의 부상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어 비판적인 여론이 늘어났다. 당시 이광필이 여름용 의류 등을 전달하려다 우산으로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광필에 의하면 우산에 눈을 찔렸다고 한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이광필이 권하자에게 와서 뭔가를 계속 권하자 굉장한 거부반응을 보였는데도 물건을 계속 주려고 하고, 권하자는 이광필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 피해다녔는데 자꾸 쫓아오자 우산을 휘둘러댔다고 한다. 다만 크게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권하자나 이광필 모두 한 성격 하는 스타일인지라 이광필은 기껏 자신이 준비해 간 후원물품이 거부당하자 집요하게 전달하려고 했고(그냥 조용히 물러날 성격이 아니다) 권하자 역시 상대의 호의를 배려해 일단 받고서 정 싫으면 나중에 버리든지 해도 되는데 둘 다 노빠꾸라 '우산 신공'까지 발휘하며 결사코 거부하고 또 우산 맞고 눈 찔렸다고 드러눕는(...) 이광필 등 뭔가 총체적 난국처럼 보인데다가(사실 충돌이 날 만한 사안도 아니었는데 파국으로 끝났다), 할머니가 도움 받기를 싫어하는데 굳이 도와줘야 하냐는 부정적인 여론이 생겨났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인터넷상에서 과연 그 할머니를 도와주는 게 옳은가라는 의문과 더불어 언론의 보도 태도 등지에서 논쟁이 일었고, 설상가상으로 이광필이 하리수의 트랜스젠더 사진전 참가에 대해 음란하다며 하리수를 음란물 유포죄로 고소한 것 때문에 네티즌들의 비난 여론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광필과 권하자 모두에게 등을 돌리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권하자를 이슈화시키며 돕자고 나섰던게 바로 이광필이었기 때문이다. 이광필이 없었으면 권하자가 위키에까지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얻지 못했을 수 있는데, 정작 그런 이광필조차 우산으로 얻어맞을 정도로 권하자는 도움을 원하지 않으며 그리 착한 성격도 아니고, 이광필 역시 하리수 고소건으로 구설수에 오르며 부정적인 여론이 증가했다.

'왜 쉼터에 안 가냐'는 댓글들도 많았는데 이건 무책임한 소리일 수 있다. 실제로, 모 신문과 인터뷰에서 쉼터 입소 얘기 나오자마자 권하자는 질색을 하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다'라고 못을 박았는데 이건 권하자를 비난만 할 것은 아니다. 제법 노숙 생활 산전수전 겪었다는 일명 왕고 노숙자들도 쉼터를 기피하며 질색하기 때문이다. 쉼터는 워낙 통제가 심한 데다가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거칠다는 소리를 듣는 남자 노숙자들조차 기피하며 들어간다 해도 얼마 못 가 제 발로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거기에 권하자의 경우 70살이 넘은 고령인데 쉼터로 가게 했을 경우 적응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듯하다. 이런저런 사정 제껴두고 노숙자들 기준으로 보면 엄연히 권하자는 약자이다. 남성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나이는 별 소용 없고 주먹 잘 쓰는 순서대로 서열 정해지는 거 보면, '왜 쉼터에 안 들어가냐'고 하는 소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과 같다. 젊은 노숙자들이 고령의 노숙자들을 상습 폭행과 구타에 갈취까지 하는 일이 많다. 다만 행실을 보면 그냥 본인이 생각하기에 쉼터는 엘리트인 자신이 머물 곳이 아니라서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저렇게 살면서도 자기 자신은 고급스럽게 산다고 인식을 하는 듯한데,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분수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실제로 권하자의 코트는 시커멓게 때가 탔으며, 머리를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 하염없이 자라기만 한 머리카락이 종아리까지 닿을 정도로 길어져 코트 밑으로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집에 같이 살자는 후배의 호의를 동네가 가난한 동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20], 방송사에서 인터뷰 대가로, 또는 후배들이 모아서 준 돈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고 고급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거나 호텔에 머무르는 데 써서 상당한 액수이던 돈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탕진했으며 한 호텔 종사자는 권하자가 짐을 들어주자 호텔 숙박비에 준하는 돈을 팁으로 주기도 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후배의 권유대로 그 집에 살았다면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한편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PD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기사

그러나 권하자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사망할 당시에는 앓고 있던 복막암 외에도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은 어설픈 동정심만 가지고는 대단히 어렵다. 지인이나 가족이라도 오래 못 가 질려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설득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맞아야 하는데, 아무데나 몸을 누일 수도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지요.[21]"
그의 여동생은 “언니는 하도 눈이 높고, 완전히 공주 같아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줄 알고 그렇게 기다리다가 결혼도 못했다”고 밝혔다. 언론의 취재 결과 맥도날드 할머니는 한사코 제작진과 주변의 도움을 외면한 채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대신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22] 한 정신과 전문의는 “현실에서는 더이상 돌봐주거나 전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식은 하지만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어머니를 대신할 더 멋진 남편, 훌륭한 남편이 나타나서 ‘나의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구축해 나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23]

상술했듯 그의 여동생은 부모로부터 손을 벌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자수성가하여 결혼까지 해냈고 그 대가로 안정적인 인생을 얻은 사람이다. 성격 차이가 아닌 인간적인 시각에서도 본인의 언니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권하자는 스스로 생활고를 선택했다. 그래도 그 결과를 스스로 감당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자신이 감당한다면 타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못 된다. 누구도 그를 비판, 조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도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가 온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겠다'는 의존적인 면모만을 내비쳤다. 이러니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좋은 소리를 거의 못 들었다.

게다가 "호텔도 그냥 호텔은 안된다. 고급 호텔이어야 된다"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그 호텔에 들어갈 수 있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일을 해서 소득을 얻고 돈을 모았어야 했다.[24] 혹자의 추측대로 퇴직 후 퇴직금을 사기당한 것이라면 적어도 노력을 하긴 했다고 볼 수는 있다. 흔한 프리터 사회부적응자들과는 달리 권하자는 적어도 50대까지는 외무공무원으로서 일해서 돈을 벌어왔기 때문이다. 다만 사치가 심했다는 것을 보면 사기를 당했을 것이라는 혹자의 추측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 공무원 월급으로 백화점에서만 쇼핑을 했다는 것은 월급을 모아서 훗날을 대비하는 노력은 하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분별없이 돈을 쓰다 죄다 탕진해 몰락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자신이 돈을 벌어서 고급호텔에 들어간다면 그 누구도 그 할머니를 비판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고급호텔은 커녕 일반 호텔에 들어갈 비용도 스스로 마련하지도 않았다.

그는 스스로 "어렸을 때 곱게 자랐다. 아버지가 성공한 목재 사업가라 시집도 안 가고 부모님 품에서 어려움 없이 살았다"라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몰라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한 끝에 필사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 일단 고민을 하긴 한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문제점이다. 그나마 손윗형제들은 자신들이 차별대우를 받았음에도 동생을 아껴주었는데[25] 그녀를 맹목적으로 아껴준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 이들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후 더 이상 도와줄 사람 없이 혼자 남겨지고 나니[26] 시궁창으로 빠진 셈이다.

사실 권하자가 인생을 망친 건 전적으로 본인 탓이다. 인생 말년에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의 영업에 민폐를 끼치고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리는데다 후원을 해주는 이들을 하급자 취급하며 고급만을 요구하며 본인 왈 자신은 남들에게 잘못을 한 것이 없고, 그저 완벽한 삶을 꿈꿨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인지부조화로 인해 현실부정을 하며 현실도피에 빠져 비참하게 살다 죽은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몰락한 사실을 안 사람들이 내가 돕겠다고 나타난 것을 보면 인망 내지 인복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치매 환자였음도 감안하면 원래부터 저렇게 망가진 사람은 아니었던 듯한데, 전술했듯 다 스스로 걷어차거나 고마워하기는커녕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분수에 넘치는 것을 요구했으니 문제다. 한번은 어느 언론 취재진이 "연초라서 떡국을 대접하고 싶다" 하니 시시한데 가서 먹고 싶지 않다고 하며 지하 1층 같은데 가서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음식이라면 괜찮다고 사양할 수도 있고, 다른 음식은 없느냐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언론인이 할머니에게 무조건 대접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님에도 생면부지인 남에게 멋대로 고급 음식, 값비싼 음식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 언론인이 수용했으니 다행이지만, 타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나마 언론인이 수용한 것도 취재를 하기 위해서가 컸을 것이다.

정신 못 차린다고 비판하는 댓글들도 있으나, 후술할 외국인 친구의 말처럼 동정 받고 싶진 않았을테니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수는 있다.

7.1. 권하자는 왜 그랬을까

권하자를 요양병원에 연결해 준 것이 한국인도 아니고 젊은 캐나다인 강사였었다는 사실 때문에 "같은 한국인은 권하자 할머니를 비난하면서 놀려대고, 정작 그녀를 끝까지 도와준 건 외국인이냐?"며 반성이 필요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여러 한국인들이 권하자 할머니를 도우려고 상당히 여러 번 손을 내밀었고, 권하자 본인이 다 거부했다. 누가 협박을 했거나 무슨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거나 한 특수한 상황이 아닌, 순전히 본인 의지로 모든 도움을 직접 걷어찼다. 그러더니 오직 그 외국인이 내밀어준 손만을 잡았다.

권하자가 외국인의 도움만을 받은 것은 오히려 도와주려던 사람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었기에 권하자의 성격상 자신의 이국에 대한 호감을 충족시켜줄 '영어로 말을 거는 외국인'의 도움만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그 교육 잘 받은 상류층 느낌이 나는 스테파니 세자리오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권하자였다고 한다. 처음에 맥도날드에서 눈이 마주쳐서 백인 여성이 어색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더니, 조금 있다가 권하자가 찾아와 영어로 말을 걸며 친해졌다고 한다. 지상파 방송국 기자가 말을 걸었을 때는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고 말투 등도 하인 대하듯 낮춰보는 느낌이 강했던 것과 대조됐다. 지상파 방송국 기자라면 한국에서 무시당할 레벨이 아님에도 이럴진대, 하물며 평범한 한국인들이 권하자의 눈엔 어떻게 비치겠는가.

권하자가 잘나가던 시절엔 한국이 잘 못 살던 나라였으니 (본인도 한국인이면서)한국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남아 있었던 건지 한국인들에게는 얕잡아보는 태도가 뚜렷했던 반면, 선진국으로 알려진 캐나다 백인 여성에게는 오히려 자신 쪽에서 낮추며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스테파니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요양병원을 소개해주자 "나에겐 당신이 유일한 가족이다"라는 말까지 하면서 친구를 넘어선 가족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물론 같은 외국인이라도 흑인이나 아시아계 노동자가 말을 걸었다면 과연 '가족'으로 받아들였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서초구 사는 외교부 후배가 같이 살자고 하니 그 동네 가난해서 마음에 안 든다며 거절하고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던 권하자가, 서구의 백마 탄 왕자 아우라가 느껴지는 영어권 백인 여성에게는 말 한 마디에도 감동하고 마음을 열었기에, 한국인들이 권하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권하자가 한국인들을 무시했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어쩌면 과거 자신이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된 처량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더 완강히 거부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 백인 여성이 대단한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 도움보다는 요양병원에서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며 요양병원으로 연결시켜줬는데, 서초구에서 같이 살자는 제의도 거부하던 권하자는 쉼터보다 못한 요양병원에 입원하라는 백인 여성의 권유에는 묵묵히 따랐다.

스테파니 세자리오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미소만 지어보였을 뿐이에요. 할머니에게는 대화할 친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만약 당신이 아주 좋은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직업을 잃었다고 상상해보세요. 누가 당신에게 동정심을 갖길 바라진 않을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는 도움받길 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많이 아프고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약간의 돈을 건네기는 했지만, 한 번도 할머니가 불쌍해서 돈을 건네지는 않았어요. 도와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로 생각하고 다가갔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걸 두고 마치 한국인들의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한국인 방송국 기자는 미소를 지으며 단순한 대화를 시도했지만 권하자는 벌레 보듯 쳐다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백인 여성과 '영어로' 대화할 때는 행복을 느끼며 친구로 받아들였다.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 딱히 대단한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말동무를 했을 뿐이지만, 영어로 백인과 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월의식을 충족할 수 있었는지 만족해했다. 권하자는 '대화'와 '친구'가 필요한 것은 맞았으나, 안타깝게도 평범한 한국인들과는 대화하거나 친구가 되는 것에 흥미가 없고 '선진국 출신'의 '백인' 혹은 '백마 탄 왕자' 급을 원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맥도날드에 거처한 것 역시 맥도날드가 외국계 기업이고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것에서 그곳에 거처했을 가능성이 있다. 누추한 권하자가 품위를 그렇게 중요시 하면서 맥도날드에 머물러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이야 흔한 패스트푸드점이지 1988년 처음 생겼을 당시에는 맥도날드는 서민층 아이들은 생일때나 파티하러 가볼 수 있는 나름 고급 식당이었다. 굳이 24시간 하는 다른 많은 업종들 냅두고 밤을 지새러 찾았던 가게 리스트에 카페, 교회와 더불어 맥도날드가 포함된 것은 결국 그나마 손 닿는 범위 내에서라도 허영을 채우려 했던 것.

권하자는 약 20년 간 한국 맥도날드에서 노숙을 하였는데, 이런 환경에서 영어의 사용 빈도는 높을래야 높을 수 없다. 하지만 할머니는 긴 노숙 생활을 했음에도 습관적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고, 굳이 영어로 된 신문을 읽는 것을 드러내는 등 서양 문화를 의도적으로 많이 접하고 과시하려 했다. 프랑스 외교 일을 했었던 엘리트 경력이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미련과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권하자의 말투를 들어보면 품위를 유지하려는 모습이 들린다. 좋게 말하면 엘레강스한 말투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과시적인 말투이다. 보통 할머니들 말투는 절대 아니다. 남들이 깨뜨릴 수 없는 강한 허영심을 가진 할머니로 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한마디로 극한의 공주병을 앓다 간 나르시시스트라 할 수 있겠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도 참고.

8. 그 외

이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 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2022년작)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실화와 동일하나 장편소설인 만큼 각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담겨 있어서 어떻게 권하자가 맥도날드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힌트를 준다. 단,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넣은 것이지 실제 권하자의 자서전은 아니기 때문에 권하자의 생각을 이 소설만 보고 판단하긴 어렵다. 그녀의 어리석음과 낭비벽에 대해서도 분명히 묘사하고 있기는 하나, 결국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아주 동정적이고 우호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며 그녀 편을 들어주는 작품이라는 한계가 있다.

9. 같이 보기



[1] 본인 포함 [2] 권하자는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났다. 무연고 변사자는 묘지에 묻힐 수 없고 무조건 화장해서 봉안당 안치 혹은 산이나 바다에 뿌려진다. [3] 이 내용의 대부분은 SBS < 궁금한 이야기 Y>에서 권하자 본인과 권하자의 여동생, 그리고 지인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4] 권하자의 막내 여동생은 "언니가 공주로, 어머니 시녀로 살았어요."라고 표현했다. 반면 막내인 자신은 오히려 심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성격조차 차이가 나서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피를 나눈 자매로서 이런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지금도 난 언니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게 두려워요"라고 말했다. [5] 기사1 기사2. [6]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 진학률이 낮아 대학만 입학해도 지식인 대우를 받을 정도였으니, 부모가 얼마나 권하자를 지극정성으로 지원했는지 알 수 있다. [7] 기사3 [8] 다른 언론사들에는 주일본 영사관에서 3년 근무한 것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까지 합치면 그는 외무부에서 18년을 근무한 셈. [9] 기사4 [10] 외교부 혹은 대사관, 영사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공무원만 있는게 아니다. 공무원인지 공무직인지 여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11] 지금 기준으로도 백화점에서만 물건을 사는 것은 꽤 까다로운 사람 취급받을 일이지만, 70~80년대 백화점의 위상은 서민은 꿈도 꿀 수 없는 부유층을 위한 장소였다. 적어도 외무공무원 월급으로 매번 드나들 수 있는 장소는 절대 아니다. [12] 퇴직 후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았다는 것은 확실히 알려졌지만, 공무원연금은 20년 미만 재직하고 중도에 퇴직하는 공무원들은 연금수혜 대상에서 제외되는데 근무연수를 채우지 못해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 [13] 10년대 후반 이후부턴 꾸준히 올라온 물가와 인식의 변화로 스타벅스가 딱히 고급 커피까진 아니게 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스타벅스 커피는 짜장면 한그릇보다 더 비싼 사치재였다. [14] 하지만 후에 벌어진 권하자와 이광필의 몸싸움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과연 이것이 이광필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였을지 의심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광필(가수) 문서로. [15] 다만 이것은 권하자의 주장으로 정식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질의를 넣어 권하자가 정말로 메이퀸에 뽑혔는지 확인된 바는 없다. 반 세기 전에 졸업한 사람이라도 학적 기록 같은 거야 의뢰한다면 찾아줄 수야 있겠지만 누가 학교생활 당시 주변의 평가가 어떠했는가까지는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으니 확인해줄 방법은 없다. 게다가 당시 대학 동년배로 생활한 사람들도 그 시점이면 사망자도 상당한 데다가 어디엔가 살아있다고 해도 학우들 중 누가 퀸카 대접을 받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거짓일 가능성이 있지만 의외로 사실일 수도 있다. 허영이 심할 뿐 허언증세가 있었다는 증언은 없고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었던 특성상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16] 다른 형제는 이미 사망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상술했듯 형제들중 당장 바로 윗 형제는 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해서 생전엔 얼굴도 못봤다. [17] 이 3남매의 사례는 같은 방송사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방송되었다. [18] # # [19] 종로, 중구 쪽에 회사를 다니는 회원들의 목격담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몇몇 유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맥도날드 할머니를 맥도날드, 스타벅스, 롯데리아 등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20] 상술했듯이, 후배가 산다는 그 동네는 서초구 양재동이었다. [21]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101131044393&mode=sub_view [22] 권하자의 부모 중 특히 어머니가 권하자에게 유독 편애가 심했다고 한다. 즉, 고인이 된 어머니 대신 자신에게 따뜻한 사랑을 대신해줄 상류층 인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 하지만 그런 맹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부모니까 그렇다. 가족도 아닌 남이면서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몇이나 있겠는가? 실제로 권하자가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23] 여성의 초혼 나이가 많아야 20대 중반에 불과하던 시기에 태어난 사람임에도 이미 중장년의 나이가 되도록 독신이었으니, 이러한 믿음을 구축해 나간 것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상술했듯 최소한 90년대부터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기 시작했으니. 이 정도로 오래 뿌리박힌 것을 치료하는 데는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과 지인이 돕고 싶어하긴 했지만 정신과 의사도 아닌 일반인에 불과했으니 한계가 있었다. 본인도 달라지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으니, 아무리 도우려 해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24] 물론 호텔, 그것도 고급 호텔에 들어가서 살려면 2024년 기준으로 1년에 최소 억대 이상의 주거비용을 낼 수 있는 부자여야 하므로 외무공무원 월급으로는 아무리 모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언젠간 만나게 될 백마 탄 왕자가 그 비용을 전부 해결해 줄 것이라 본 것으로 보인다. [25] 동생 중 한 명이 죽고 바로 다음 태어난 아이가 권하자였기에 죽은 아이가 환생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26] 손위 형제들은 그녀와 달리 가정을 꾸려 친척이 남아있긴 했지만, 도움을 주던 형제자매 당사자들이 사망한 뒤 그 배우자들이나 자녀들, 즉 권하자의 올케/형부들과 조카들은 더 이상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이는 전적으로 권하자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