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웹소설 경제왕 연산군에서 개변된 역사.2. 조선
2.1.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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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를 바탕으로 하는 조세 효율의 개선과 재정 건전화
원래 역사에서는 1971년에나 도입되는 신용 화폐를 조선에 도입한다. 이때 작중에서 박경식이 신용화폐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실제 재정학에서 다루는 내용이라 작중 신료들도 거의 다 못 알아듣고 독자들도 못 알아듣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화폐를 최대한 활성화하기 위해, 전국 주, 목급의 군현과 조창에 화매소를 설치하고, 각지 마다 다른 가격으로 지폐와 쌀을 바꿔주어 지방의 쌀을 한양으로 운반하고 반대로 한양의 지폐가 지방으로 퍼져 돈이 돌도록 하여 지폐를 전국에 보급하고, 공납을 폐지한 뒤 세금을 1결당 10전(1냥)으로 통일해 온전히 지폐로 지불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도입 1년 만에 세금이 목표한 약 1600만 전에서 10% 정도만 부족한 약 1400만 전을 수취해냈으며, 재정을 수치상으로는 10배, 호조의 체감상으로는 5배로 폭증시키는 데 성공했다. 도입 2년차에도 평균 1500만 전의 수취에 성공하면서 제대로 자리잡는다.
한 독자의 계산에 따르면 # 16세기 조선의 전세 수입은 23~24만 석, 그중 쌀은 10~13만 석이고 나머지는 조나 콩 등 잡곡인데, 경식조선이 2년차에 거둔 세수 1400만 전이면 쌀과 잡곡 각각 104만 석(풍년으로 떨어진 곡가로 계산)을 구매할 수 있으니, 작중에서 언급된 수치상 9~10배 정도가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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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납 폐지, 경매 도입과 가격 공시제 도입
원래 역사에서는 조선은 개항 이후에나 경매가 도입되지만, 가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장경쟁을 도입하기 위해 경매장을 창설한다. 원래는 공납하러 올라온 서리들에게서 물건을 뺏어 사는 사주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경강의 포구들을 윤은로 사건 때 쓸어버리고 경매장으로 개조한다. 이 시점 이후로 공납, 방납으로 받던 물건들은 조정 각사가 경매장에서 구입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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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의 도입
농민들이 지폐를 장롱에 숨겨서 디플레이션이 발생[1]한다는 것을 눈치챈 주인공이, 민간 금융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농민들을 시장 경제에 연결시킬 방법을 고심하여 떠올렸다.
원래 역사에도 존재했지만 연산군 시기에는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면리제를 상술한 대간 혁파 이후 선거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비해놓은 상태였는데, 그대로 면리의 우두머리인 면임과 이임들을 활용하여 화매소에 지역 특산물을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덕분에 지역 주민들도 팔면 적잖은 돈이 될 특산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로 인해 지역 향리/양반들과 농민/중앙 관리들간의 마찰이 발생해 대부분은 향리와 향반들이 손잡고 140% 투표율을 달성하기도 하고[2], 함양에서는 향리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고 관인을 들고 튀어버려서 그들이 유사시 이런 소요를 진압해야 할 중간관리층이었으니 손발이 묶인 수령이 농민들에게 "관인이 없으면 네놈들도 장사를 못 한단 말이다!"라고 알리자 한양에 물건 팔아 돈 벌 생각에 싱글벙글하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소규모 공성전 수준의 향전이 일어나는가 하면, 어디에서는 평범하게 화매소 수익을 공개하고 이익을 나눠가졌으며, 제주에서는 토호들이 장악했지만 그나마 백성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는 등 지역의 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 이렇듯 '이세계 용사 박경식'의 개혁에 '합리적인 경제적 주체'인 현지인들이 대응하는 모습이 익스트림하게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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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관리론의 도입
주인공이 군제 개혁을 하려다가, 무기와 갑옷이 형편 없을 정도로 적은데다가 생산능력도 터무니 없이 적은 상황을 보고서, 마포 지역에 행궁까지 차리면서 생산 기술을 강력하게 개혁하며 도입한다. 구체적으로 군기시에 보유한 갑옷이 5천 개, 개중 철갑은 1천개가 안 되며 갑옷장이 30여 명인데[3] 종이갑옷을 한 달에 10벌 만들 수 있었다. 상비병 1만 2천 명을 철갑도 아닌 종이갑옷으로 무장시키는 데 100년이 걸리는 판국.
기존 군기시 인원들을 총동원하여 강력한 분업 체제, 테일러 시스템, 동작 연구, 시간 연구 등 20세기 초 경영학 지식[4]을 전부 때려박은 결과 하루마다 검 등 단병기가 400개, 창 등 장병기가 600개, 철갑이 80개, 화살이 1000개가 생산되는 체계가 3개월 정도만에 완성된다.
이에 병조 관헌들은 이대로라면 4년 만에 고구려 같은 10만 철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며 국뽕을 들이키지만, 철 생산 능력의 부족으로 3천 명 정도만 무장시키는 선에서 생산이 멈추고 만다. 경식은 처음부터 철물이 부족할 것이라고 예측했었지만 신료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재료 부족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것으로, 예상대로 신하들은 경악함과 함께 분업의 묘리를 사용할 방법을 궁구하게 된다. 근기시는 이후로는 생활용 철물을 생산하고 있으나 일본 주둔군의 무장이나 철근콘크리트용 철근 등 필요하면 대량의 철물을 생산할 능력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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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 산업 투자
원래 역사의 연산군 3년 봄, 13세기 원나라 때 만들어진 <왕정농서>를 수입하여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 수력방적기(수전대방차)를 도입하고 흉년으로 발생한 유랑민들을 고용하여 직물산업 단지를 만든다. 작중 묘사나 미주에 따르면 중국의 수력방적기는 '산업 혁명이 일어날 뻔했는데 일어나지 못한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의 문제 때문'이라는 예시라고.
경식 4년차까지는 실을 대량으로 생산해 싸게 공급하고 그것으로 베를 짜는 정도지만 백성들이 별개로 저렴한 실을 이용해 오승포나 추포가 아닌 제대로 된 베를 짜기도 하고, 어째서인지 동양에서는 섬유 재료로 사용하지 않던 아마의 가치를 찾아내서 아마포를 개발하기도 한다.
또한 서울 인근에 직물공작 '통직'을 설립. 사신에 끼워서 중국에 지속적으로 유학생을 보내서 비단을 짜는 법을 공부하게 시킨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직 비단은 유구, 여진, 일본 등으로 수출되는데 2, 3년차에는 중국산과 구별이 어려울 만큼 고급스러워져서 조선의 수출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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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권(특허) 제도 신설
조선 전기의 기록과 기술들이 소실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주인공이 조선 전기의 기술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만든 제도. 유럽의 급격한 기술 발전과 산업 혁명에 큰 기여를 한 제도라는 설명도 붙는다.
첫 대상은 바로 청기와로, 주인공이 공공화장실 제도를 통해 염초 생산량을 대거 늘리자 염초를 원료로 쓰는 청기와가 민간에서 생산되기 시작하고, 사치 풍조가 퍼져서 사찰에 청기와를 올리는 것이 유행하자 불교 탄압도 할 겸[5] 기술을 뽑아내고 세금을 매기기 위해 도입한다. 애초에 청기와 장인들은 그냥 기술을 비밀로 유지하는 것이 더 안전했으므로 금란권 따위는 필요 없다 하고 있었더니만 다른 지역의 금란권을 받은 장인들을 부추겨서 금란권을 내지 않는 장인들을 단속하고, 금란권을 받은 장인들을 등록하고 조직화하여 기술심리관으로 뽑거나 협회를 만드는 등 장인들 파악을 더 조밀하게 만드는 효과도 나타난다.
그다지 소재로 쓰이지는 않으나, 망원경과 자전거가 특허로 등록되었다던가, 연은분리법이 특허를 얻어서 원래 역사보다 더 빠르게 발명되었다던가 하는 에피소드가 외전으로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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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세 도입
마찬가지로 청기와가 첫 대상으로, 금란권 등록 과정에서 파악한 매출을 기반으로 소비세를 부과한다. 청기와장들은 세율 100% 의 세금폭탄을 맞지만, 정부에 납품하면 200% 세액공제를 받기 때문에[6] 강제로 진상을 시킬 때와 달리 적극적으로 납품을 하는 효과도 얻는다. 금란 등록 과정 하나에서 이 정도로 많은 뽕을 뽑아내는 왕을 보고 호조 관헌들이 혀를 내두르며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해서, 향후 말 안 듣는 장인들에게는 세금폭탄이 떨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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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계 설립
조선의 삼림자원을 관리, 효율적인 확보를 위해 설립했다. 일종의 공유지 취급이라 민둥산 문제가 불거지던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공동체에 소유권을 불하하고 규율을 만들어 관리를 위탁하는 것으로, 숲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완전 벌목하는 것, 그 벌목한 자리에 새 나무를 심는 것, 심은 나무를 관리하는 것, 벌목한 목재를 파는 것, 숲에 누가 드나들어서 땔감이나 임산물을 채취하는지에 대해서도 관리한다. 빠르게 지나가지만 언급되는 설정들을 살피면 당장 현실에 적용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되어 있는데, 현실 역사에서 근대 독일의 삼림 관리제도, 근세 프랑스의 삼림 관리제도, 일본의 삼림 관리제도가 전부 결합된 것이기 때문. 다만 서민들 입장에서는 그냥 산 기슭 어드메서 주워오던 땔감이 갑자기 상품으로 변해서 땔감 값이 급등하긴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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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업과 낙농업 발전
경식이 왕이 되자마자 아침밥으로 나온 타락죽이 다름 아닌 요거트인 것을 보고 조선에도 유제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며, 한우의 우유 생산량을 집계하고 조선도 낙농업을 개발하려면 개발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여 덴마크가 낙농업으로 산업 혁명을 일으킨 것을 본받아 농업 혁신을 일으킨다. 물론 영국의 구매력에 의존할 수 있었던 덴마크와는 환경이 다르니 조선식으로 바꿔야 했고, 방식은 덴마크에서 했던 농업 협동조합 방식을 그대로 도입한 '목계'를 이용해서 농민들을 묶어 대규모 농장화하고, 정부에서 자본을 빌려주고 기술을 알려주는 구조다.
흔히 대역에서는 한우의 우유 생산량은 적어서 우유를 생산할 수 없다고 말하며, 우유 생산량이 매우 많은 홀스타인종을 도입하는 전개가 나오는데, 사실 원래 역사에서는 홀스타인도 상당히 후대에 퍼진 품종이라 전 세계적으로 우유가 필요하면 갓 낳은 송아지를 도축해서 어미의 젖을 뺏는 것으로 우유를 생산했다. 그래서 우유를 먹는 문화권에서는 송아지를 조리한 음식 레시피가 따로 있을 정도. 그 사실을 경식이 알고 있어서 그대로 도입하는데, 원래 역사에서도 송아지가 먹을 우유를 뺏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반대했던 사대부들은 왕의 식성이 잔인하다며 충격을 받았고, 백성들도 송아지를 도축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독자들도 우유 생산의 어둠을 알고 놀라 대체역사 갤러리는 하루 종일 시끌벅적했을 정도.[7] 물론 소의 개체수가 제법 늘어나자 백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적극적으로 도축했다(...).
2.2.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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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 혁파와 원시적 의회제도 도입
원래 역사대로, 대간들이 성종의 상 중에도 왕에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부터 시비를 걸자 열받은 주인공이 3년상을 치르고 온다면서 궁을 떠나며 파업해버렸다. 안 그래도 세자 시절 병약하던 왕이 갑자기 1월 한겨울에 가출해버리자, 군신 간의 균형을 위해 대간을 편들었을 뿐이던 의정대신들은 대간 진압에 동의해서 대간을 혁파해버렸다. 처음 저격당한 사간원 혁파 소식에 기함한 홍문관, 사헌부는 아예 시위까지 하면서 사간원의 자리를 지키려 했으나, 경식이 권력의 핵인 이조전랑을 저격해서[8] 대부분의 대간들을 파직시키고, 대신 사간원의 원래 취지가 언로를 보장한다는 점이었다는 명목으로 지방의 유향소(훗날의 향청)에서 투표를 통해 사간원의 사간들을 뽑아 올리게 만든다. 기존의 대간들은 지폐를 도입하면서 설치된 지방의 화매소로 보냈으며, 이들은 거친 화매소 생활을 통해 실무능력까지 갖춘 완전체로 발전하고 있다는 묘사가 있다.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사헌부와 사간원은 기존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고, 홀로 남은 홍문관도 서적 편찬과 분배 등의 업무로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경식의 역덕 취미로 미래에 소실될 서적들에 언해를 달고 대량으로 간행하라는 명령들이 계속 쏟아져 정신없는 실정이라 주인공 경식은 매우 빠르게 절대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밀어붙이게 된다.
그런데 경식이 현대와 개발경제학의 영향으로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신경쓰는 편이라서 원시적 의회를 도입하려 했으나, 후술할 농협 도입 과정에서 지방 민회가 토호 지주들에게 점령 당하는 꼴을 보고 실제 중앙 의회는 개설하지 않고 지방 민회에서 멈춘 상태. 홍범을 반포한 최신화 시점에도 중앙의회는 제대로 개설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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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징수 도입
지폐를 도입한 첫 해에, 아직 화폐 경제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아서 수세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 경식이 대영제국의 지혜를 빌려서 시행한다. 뉴딜을 시행하여 부른 요역부들에게 준 급여도 원천징수로 40% 가량을 빼고 줬고, 세금을 내려 쌀을 팔러 온 농민들에게도 원천징수를 시행했고, 이후로도 갑사들에게 주는 급여도 장비 값이나 말 값을 원천징수해서 거의 용돈만 남은 수준으로 주고 있다고 하는 등 아주 많은 곳에 적용되고 있는 모양. 덕분에 갑사의 수를 늘이고 급격히 정예화하여 세입의 90%가 군사력에 들어가는 수준인데도[9] 원천징수로 얻은 수입을 이용해서 정부를 정상적으로 굴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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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진 선발에 시험 도입
원래 역사에서도 '취재'라고 하는 서리와 아전을 선발하는 시험이 존재했으나, 이 시기쯤에는 기강이 문란해지고 관리들이 노비 등 개인적인 인맥을 서리로 동원해서 실무진으로 사용했다. 주인공이 이 기강을 다시 강력하게 잡아서 실무진을 취재로 선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새로이 등판한 이들이 주인공이 기존에 군속에 넣고 부양하던 난민 출신 병사들, 그리고 폐해가 심해 내수사에서 면천을 명목으로 내쫓은 노비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왕을 뒷배로 두고(그런 줄 알고) 행패를 부리기도 해서 적잖은 수가 장을 맞거나 해직당했으나 대신들은 이를 왕이 자신의 영향력을 실무진까지 확대해 사대부들을 감시하려는 것으로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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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 개편
1502년 어느 시점에 관제 개편이 되어서 6조에서 부 체계로 바뀌었다. 내무부, 외무부, 탁지부, 병무부, 법무부, 농상공부, 학무부의 7부가 행정부이자 내각인 의정원의 휘하고, 궁내부가 군주 직속으로 8부가 된다. 또 중추부가 중추원으로 개정되어 의회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가 공개한 것으로는 이런 구조다. # 작가가 공개한 설정을 해석하면 왕(황제)이 의회 의원들도 마음대로 뽑고, 정규군 조직과 분리된 육군 일부와 해군 상당수를 사병으로 부리는 전형적인 20세기 초의 일본 제국이나 독일 제국 같은 외형적 입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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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제건원과 홍범 반포
1504년 갑자년, 원래 역사에서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해에 원구단에서 제사를 올리고 칭제건원하여 국호를 한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하며 유교 경전에서 나오는 '홍범구주'를 따와 헌법 개념인 홍범을 반포한다. 본작의 경식의 행보가 원 역사의 대한제국을 오마주한 것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에피소드. 다만 서구 열강의 침공으로 중국의 권위가 바닥에 처박혀 있고 국제법 개념이 형성되어 있어서 눈치를 보지 않고 칭제할 수 있던 원 역사와 달리,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외왕내제로 칭제했다. 홍범의 내용 역시 오직 절대권력을 추구한 고종과 달리 오직 근대를 추구하는 경식답게 원 역사의 홍범 14조, 대한국 국제보다도 진보한 것으로, 백성의 기본권, 의회의 설치, 인민주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 묘사되는 것을 보면 아직 조선인들을 믿지 못하는 경식이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여러 꼼수를 써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있다는 양면적인 면모가 있다.
2.3.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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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의 발명
미래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는 인쇄기가 없는 불완전한 기술이어서 그다지 생산성에 도움이 안 되는 상태여서, 필요한 지폐의 수량[10]을 찍어낼 수 없는 상태였다. 주인공이 그것을 보고 (조선에 있을리 없는) 와인압착기 대신 국수틀을 활용하여 구텐베르크식 인쇄기로 발전시켜서 1분에 10장을 찍어내는 수준으로 급격히 발전시켰다. 조선이 글에 진심인 국가이다 보니 신료들 모두가 주인공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행정문서들이나 교재 역시 찍어냈다는 언급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지폐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는 모양. 실제로 찍어내는 인쇄공들은 피폐한 표정으로 종이를 중심에 놓고 누르기... 종이를 중심에 놓고 누르기...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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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화장실 도입과 우물 정비
상하수도를 정비하는 겸 염초 생산을 늘이기 위해 도입한다. 원래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 시기 라부아지에가 만든 공중화장실 제도를 본떠서 만든 정책. 공중화장실의 똥과 오줌을 써서 염초를 굽는데, 서울에서만 매년 16만 근(96톤)의 염초를 생산해낸다. 원 역사 조선 전기에는 군기시에서 매년 1000근을 생산한 것과 비교하면 생산량이 160배 폭증한 것으로, 병사들에게 마음껏 실탄 사격 훈련을 시키고 사표를 만드는 등 화력이 폭증했다. 남아도는 염초가 민간에 풀려서 청기와를 자발적으로 굽는 장인들이 나타날 정도이며, 병조에서는 왕이 명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착각할 지경. 그런데 경식의 언급에 의하면 원 역사 프랑스는 공중화장실 징발로 염초를 연간 8170톤 생산했다며, 이 수치를 인구 비례로 계산해서 조선도 2700톤은 생산해야 한다며 불만족스러워한다.
공중화장실을 만드는 김에 우물도 정비하는데, 원 역사 조선의 서울은 흙에 스며든 똥오줌이 우물까지 오염시켜서 우물물이 짠 맛이 날 정도로 위생 상태가 처참했는데, 베네치아의 모래 우물을 참고하여 상수도 위생을 개선시킨다.
화장실이랑 우물을 만든 계기가 염초 생산이다 보니, 상하수도를 병조가 담당하는 이상한 구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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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혁파와 학당 도입
원래 역사에서 연산군 시기는 향교가 제 기능을 잃고 그냥 군역 회피용 도피처로 활용되는 실정이었고, 곧 사림들이 지방에서 성장하여 서당이 형성되는 분기점이었으나, 주인공이 쓸모없던 지방 향교의 대부분을 밀어버리고 소학 수준까지 가르치는 학당으로 개편하여 원래 역사의 서당의 역할을 대신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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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 확충
중전 신씨의 해산일이 다가오자 주인공이 의서를 읽어대며 중전을 챙기다가, 의녀의 수가 늘어나 부인과 의술이 대중적으로 퍼지면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착안하여 기존의 30명 정도의 인원에서 300명 정도로 확 늘이기로 계획한다. 이때 '생각해 보니 대장금도 이 무렵 사람인 거 같다'는 독백을 하며 미래 후손들을 위해 사극 소재를 뽑아 놓겠다는 개드립을 친다. 물론 대장금은 소설과 사극이라 실제 역사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전지적 시점 서술에서는 사극으로 역사를 배우면 안 된다고 디스당한다.
60화에서는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시험하려고 백성들이 사업계획을 제출하면 이웃들에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본 뒤 소액대출을 해 주는 사업을 일으키는데, 마을 아낙들도 베를 짜서 판다거나 하는 계획을 내놓았고, 남녀유별하므로 이런 여성들의 사업 신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의녀들이 파견되어 맡아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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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문화 발전
유구 항로가 개척되면서 조선에서 귀물로 여겨지던 설탕과 후추가 대량 공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후추는 1년 정도가 지나자, 양민들도 잔치나 기념일이라면 약간의 부담만 갖고 먹어도 될 정도로 가격이 헐해졌다. 반면 설탕은 여전히 시세를 유지했는데, 이는 단순히 조선인들이 설탕에 맛을 들이면서 나날이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조선은 원역의 소빙기 기후를 반영하여 1490년대 후반기 들어 흉년이 이어졌다.
경식의 여러 개혁으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많이 늘기는 했으나, 화학비료도 없는 시대에 농기구 개선과 수차 설치 정도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일본의 하카타나 각지 화매소에서 비축한 양곡을 들여오기는 했으나 효과가 부족했다. 이에 경식은 한민족의 식사량을 줄이기 위해 크기를 줄인 그릇을 만들어 분배하고, 선전 포스터를 만들기도 하며 노력했다. 그 과정 중 하나가 밀가루 요리의 보급이었다. 이미 진가루(밀가루) 음식은 고급품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므로 수차를 이용해 진가루를 저렴하게 공급하자 조선 사람들은 나라의 은혜에 감격하며 밀가루도 흡입했다. 덕분에 순식간에 밀값이 쌀값만큼 오르는 조선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으나 화매소에 그 사실이 공개되자 상인들이 신나게 달려왔으므로 어느 정도 물가가 안정되었다.
이후로 북부 지방은 밀이 주식으로 변하고 있으며, 조는 기근인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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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포스터와 절식,
혼분식 장려 운동
연달아 이어지는 흉년과 한민족의 식사량에 경식도 도저히 버티지 못해 한민족은 밥을 너무 많이 처먹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이극돈의 주장[11]을 받아들여 경식이 이전에 도입한 인쇄술을 활용해서 도입한다. 덮어놓고 많이 먹으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라는 문구나, 높은 곳을 바라보는 주상, 그 아래 밀가루 자루를 든 농민과 뒤에서 돌아가는 수차 등등 매우 공산주의스러운 구도에, 현장에서는 이 포스터를 어진 취급해서 애지중지하는 등 공산독재국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 조성되며 조선이 20세기 공산국가 수준의 마케팅에 도달했다는 빈정거리는 서술이 나오는 등 상당히 블랙 코미디적인 에피소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알고 있다면 알아보겠지만 덮어놓고 운운의 프로파간다 문구도 혼분식 장려 운동도 실제 역사에서는 공산국가가 아니라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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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천정요(憲天政要) 및 주해헌천정요 편찬
경식이 신료들에게 강의한 경세론을 조선인들이 나름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편집하고 정리한 이 세계선 최초의 경제학 서적.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정관정요의 형식을 베꼈다고 한다. 경식의 강론을 편집한 것이니 저자는 당연히 왕일테고, 편찬자는 언급된 것으로는 박숭질, 이극규, 홍귀달, 유자광, 윤필상 등.
왕이 정책을 펼칠 때 이야기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서술된 것은 동일하지만, 경식의 경세론을 어떻게든 유학의 범주에서 이해하려고 했던 신하들에 의해 경식은 언급하지도 않은 유학 서적이 대량으로 인용되었다. 경식은 이를 읽어보고 유학을 가지고 자기 말을 이렇게 뒷받침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지만, 유학으로는 자본주의를 위한 기반 사상을 뒷받침할 수 없다고 생각[12]하여 스스로 지은 30장 가량의 주해를 더해 주해헌천정요를 편찬한 후 이를 바탕으로 가르치는 학문을 경제학[13]이라 이름 붙인다.
경식이 덧붙인 내용은 인간이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는 권리를 자연으로 정의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지키기 위해 법과 정부를 스스로 구성한 것이며, 스스로 구성한 법과 정부 아래에서 마땅히 보호받고 가져야 할 권리를 자주(自主)로 정의하고, 나아가 정부가 자주와 자연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개념이다. 이 모든 내용은 상술했듯 겨우 30장 정도 분량. 경식 본인도 '이게 분량이 이렇게 짧아도 되나?' 같은 고민을 할 정도였으나, 김겨울과 만나고 갑자기 내용이 생략되더니 '조선인들도 바보가 아니니 알아먹겠지'라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던지는 개그씬이 나온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해서 문제지 내용 자체는 다들 이해하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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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건설
연산군 입장에서는 그냥 놀고 싶어서, 경식 입장에서는 기병 육성 및 축산업 발전 및 공익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설립했다. 묘사 자체는 그냥말딸경마랑 별 차이가 없으나, 조선에서는 좋은 말도 쉽게 다루기 위해 무조건 거세하는 폐습이 있었기 때문에 거세마는 참여할 수 없게 제한을 두는 등 전마 양성과 관련된 조건들이 걸려 있다는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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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문화의 변화
경식이 조선 전기의 옷감을 많이 써서 펑퍼짐하고 활동성이 부족한 옷을 보고 옷감도 아끼고 활동성을 올리겠다며 군복의 핏을 줄이는 개혁을 한다. 문제는 몸을 공유하고 경식의 지식을 다소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연산군이 개입한다는 것인데, 원래 역사에서 기생들의 의상을 직접 프로듀스했던 연산군의 행보와 경식의 미래지식과 둘의 취향이 합쳐져서 북포를 써서 투명하게 비치는 저고리, 미니스커트, 가터벨트와 스타킹, 기모노의 오비 등으로 이뤄진 파격적인 여성복도 만든다.[14] 군복은 남성복으로 평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여성복은 기생들이나 입는 외설적인 옷으로 받아들여지는 중. 이 옷이 나온 뒤로 유교 말살적 패션이네, 유교 파멸자 왕이네 하고 내레이션에서 놀린다. 개그성 장면이긴 하나, 스타킹에 진심인 경식이 스타킹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조선에 스타킹을 만들 뜨개질 기술을 도입하여 기술 발전의 조짐도 보인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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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추쇄 금지
조선의 노비제는 경식이 조선 개혁의 키로 여기고 있는 도시화의 최대 문젯거리였다. 상경하면 도시화의 최대 중요 자원인 임노동자가 될 농민들이 그냥 인근 부호의 노비로 전락해 세금도 안 내고, 임금 평균을 낮추는 데다, 임금이 없으니 시장경제에 제대로 편입도 안 되어 생산도 소비도 안 잡히는 노비가 수백 만[16]씩 있어봤자 조선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요소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지주들이 탈세하려고 노비들 이름으로 재산을 달아놓거나, 세금을 못 내서 사민 대상이 된 백성들이 잡으러 가니 이미 노비가 되어있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경식의 개혁이 궤도에 오르자 조선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난해서 노비가 될 처지의 백성들은 그냥 도시로 도망쳐서 임노동자가 되거나, 사민에 지원해서 함경도와 두만강 너머로 이주해버렸다. 기존 노비들 역시 마찬가지로 주인의 대우가 너무 박하다 싶으면 그대로 탈주해버렸다. 본래 이런 노비들을 형조에서 잡아들이곤 했으나, 경식의 명령으로 노비 추쇄가 금지되어 되려 노비를 잡으려는 주인이 곤장을 맞게 되었다.
2.4.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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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 개발
주인공이 마포행궁에서 군기시 개혁을 진행하면서 함께 개발한다. 이름 붙이기만 소총이라 불렀을 뿐, 실제로는 개머리판이 달린 조총 수준이라 강선은 없다. 미래 한국에 있을 시절 유튜브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만든 <타임슬립 대비, 조총을 배우자>라는 영상을 봐서 제작법을 숙지해놨다고 한다. 하도 웃기는 설정이라서 편의적으로 넘어가는 부분인줄 알았던 독자들이 해당 영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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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로와 도가니 제강법의 도입
주인공의 졸업논문 주제와 깊게 관련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실전 공돌이 지식 중 하나. 다만 세밀한 기술적 내용은 모르는 상태였으나, 사실 동양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비슷한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17] 철장들이 뚝딱뚝딱 만들어서 납득하고 오히려 주인공이 "이게 왜 되는 거지?" 하고 놀란다. 철장들은 이론적으로는 몰라도 경험적으로는 비슷한 기술을 이미 알고 있었고, 덕분에 주인공의 지시를 자기들이 아는 기술을 변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그렇다고 주인공이 별 일 안 한 것은 아니고,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도제식으로 전수되어 개량을 시도할 엄두도 못 내던 기술을 주인공이 건드려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반사로로는 품질은 떨어지지만 대량으로 철을 양산해내고, 도가니법으로는 소량이지만 당대는커녕 앞으로 몇백 년 뒤에도 고급 강재로 인정받을 강철을 뽑아내어 싸게 써먹을 철제 도구와 품질이 중요한 철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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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리위무사 창설(동만주 개척 주식회사)
성종 시절부터 주인공 빙의 시점의 조선은 담비 모피(초피)로 사치하는 것이 대유행이었고, 그 시기에 마침 함경북도 육진 지역에서 여진 부족들이 국경을 침탈한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이에 주인공은 병력들을 정예화 할 겸, 그 돈을 벌충하기 위해 동만주를 개척하는 주식회사 형식의 관아를 창설하기로 한다.
1496년 10월, 3천 철갑 갑사가 중점이 되어 두만강을 넘은 동북에 4진 요새를 개척한다.[18] 기존 함경 북방의 육진은 초피를 공물로 바치느라 여진족에게 철물을 주고 비싸게 초피를 사야 해서 나날이 피폐해지는 와중이었으나, 이젠 공납이 폐지되고 되려 시장이 설치되어 초피를 마음껏 비싸게 팔 수 있어진 함경도민들은 시장에서 강철제 무기를 구하고, 조정의 승인에 힘입어 닥치는 대로 야인들에게 모피를 헐값에 강탈해댔다. 모피와 인삼 거래에 면세 혜택까지 내리자 외부에서 수천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인근 여진족인 성저야인들은 공물에 시달리는 함경도 주민들에게 '우리가 값을 얼마를 매기건 니들이 이거 안 사면 공물 못 내고 끌려갈 거다'라는 갑질을 시전해왔기에, 묵은 원한까지 터뜨린 함경도 주민들의 무자비한 복수에 시달렸다. 설치된 시장의 철제 장비로 무장한 육진 백성들의 전투력은 어지간한 여진족을 능가한 데다가, 뒤에는 4진의 갑사들이 뒷배로 있으니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조선 팔도의 모피 시세가 요동칠 정도로 성저 여진족의 경제는 무너져 내렸다. 성저 야인들은 약탈이나 바가지는커녕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결국 동만주의 여진 부족들은 조선에 굴복하지 않을 거면 도망치거나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눈치 빠르게 조선에 귀순한 여진 부족들은 이전처럼 간만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위무사에 협조해 병사들까지 동원해서 반조선 부족들을 공격했다. 알타리 부족 같은 경우는 두만병마사와 같이 우디거 부족을 공격해 파멸시키기에 이른다.
수년이나 걸릴 것도 없이, 겨우 몇 달 만인 1497년 초, 동북에서 조선에 신종하지 않는 여진예거들은 구축당하기 시작했다. 지도 이후 위무사는 독단적으로 요동과의 교역로까지 개척하기에 이른다.
조선 지형 특성상 북방은 태백산맥 탓에 동서 교류가 활발하지 못한데, 이 덕에 황형과 동아망개 등은 건주위에게서 강탈한 칙서로 교역한 중국 물자를 4진 지역에 팔았고, 이것이 수도권이 아니라 남방 지역에 공급되고 있다고 한다. 1498년에는 4진에서 추가로 북진해 울지령, 동구, 삼기에 3진이 추가로 세워진다. 해당 지역에는 각지에서 빚을 못 갚은 주민들이 들어가서 살게 된다.[19] 다만 아직도 치안은 불안하여 탈주한 여진 노비들이나, 조선군에게 마을을 잃고 숲으로 들어간 야인들이 조선인의 정착촌을 습격하며, 호랑이나 곰 등 맹수도 드글드글해서 마을마다 목책을 두르는 등 방호 시설을 갖춘 상태로 서서히 내지화를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을들이 역참 역할을 병행하여, 울지령 이북의 니마차 여진을 공격할 때 보급로 역할을 하여 번리 야인들이 니마차 여진을 더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1499년 번리도원수가 이계동, 두만 병마사가 여자신으로 교체되었다. 이 둘은 돈이 목적인 전임자들과 달리 말 그대로 강역 확장이 목표라 더 적극적으로 여진족의 영역을 넘보며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서쪽으로는 모련위 여진족이 건주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 북쪽으로 (교과서 기준) 과거 발해 상경성 터(당대에 용동경성/책성 터로 알았다.)가 있는 목단강 일대까지 영역을 넓힌다. 물론 정복과 통치가 다른 영역이기는 하나 현재 조선의 군사력상 정복 자체는 가능하기에 성공한다면 조선 팔도는 십도 이상의 확충이 가능해진다. 지도 때문에 만주 곳곳에 조선군이 주둔하는 성형요새가 건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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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사 창설
번리위무사가 북방 무역을 독점한다면, 이쪽은 일본 무역을 독점하는 관아. 일본과의 독점적인 무역권, 밀매상들에 대한 단속권, 왜구 단속권 등을 부여받는다. 사실 경식의 진짜 의도는 사략선단 창설이다. 유교 국가에서의 윤리상 사략선을 용납하기 어려우니 수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
주인공이 육군에는 신경 썼지만 수군에는 영 신경을 쓰지 않아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발전이 없었는데, 양적으로나마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의 제도인 사략선과 매관매직 제도, 그리고 조선의 제도인 공명첩을 떠올리고 조합하여 만든 혼종 같은 관아. 배를 바치는 상인들을 무관직에 임명하고, 그대로 그 배의 선장으로 삼는 제도로, 1년 동안 200척, 수군 1만 3천을 모아내는 성과를 보인다. 매관매직이라고 항의하던 젊은 성균관 유생들은 강제로 해동제국사에 배속되었으며, 창설 시점이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거론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사관들도 굴복해서 '금상은 상을 비판한 어린 유생들을 용서하고 크게 쓰시니 (중략) 여간 교화가 아니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냥 상선을 징발하는 것과 무슨 차이인가 싶겠지만, 사실 이 시대 동아시아 수군이란 게 다 그 수준이고, 되려 경식이 해동제국사로 들어온 배들에게 새로 만들어진 화포와 소총을 지급하고 훈련하여 웬만한 일본 해적은 격퇴할 수 있는 화력을 가지게 되었다. 덤으로 총과 화포 값도 해동제국사 무관들에게 빚으로 달아놓는 철두철미함을 보인다. 빚을 갚으려면 해동제국사 무관들은 열심히 왜구를 털든지 일본과 교역하든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 덤으로 납전무관이 해서는 안 되는 수십 가지 행위를 친절하고 자세하게 언문으로 적어주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배를 바치고 그대로 배의 선장으로 임명되어서 공짜로 관직을 얻은 기분이었던 해동제국사 무관들은 나라에게 돈을 털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창설되자마자 그 해 초에 있었던 왜구의 군관 살해 사건을 빌미로 대마도 주변을 계속 순찰하며 " 왜구"들을 잡아대는 실적을 보인다.
유구, 고토 군도, 하카타와 사카이 항로를 개척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역의 활성화에 불을 당긴다. 반년도 안 되어서 부르는 게 값이던 중국산 비단 등의 수입품 시세가 폭락할 정도에 후추와 설탕도 대량으로 유입된다. 특히 후추는 조선 내에서만 소화가 안 되어 중개무역으로 북경까지 팔려고 가는데 묘사가 수레 수십 대 분량이라고 묘사될 정도. 특히 원 역사에서 동시기 연산군이 사치를 부린다고 서울 전체에서 긁어모은 후추의 양이 몇십 근 수준이라는 서술을 넣어 큰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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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훈련원 설립
해동제국사를 설립하면서, 물길을 알고 항해술에 숙련된 상인이나 선원들이 들어오자 그들의 지식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유하며 후대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한다. 위치는 강화도.
양계의 화매소가 대간들이 간 곳이었다면, 여긴 성균관 유생들이 많이 배속되는 곳. 하필 위치한 곳이 원래부터 유배지로 많이 쓰이던 곳이고, 수군 자체가 천역으로 여겨지다 보니 수군훈련원으로 배속되면 다들 죽는 것이 확정된 유배로 여겨지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반대로 경식은 성균관을 수군사관 강제배속 대기소 정도로 취급하는 판.
화매소에서는 대간들이 실무를 익힌 완전체가 되었다면, 여기로 배속된 유생들은 선원들에게 동화되어서 점점 해병화되고 있다. 성균관 선비라고 하면 점잖은 이미지이지만, 사실 원 역사에서부터 면신례, 반촌과의 유착, 유흥가의 단골 손님인 등 상당히 세속적이고 전근대적으로 야만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게 숨기지도 않는 뱃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더욱 폭발해서 노골적인 해병문학 패러디가 되어 전개되는 개그가 일품이다.
조선의 항해술 역량이 낮다고는 하지만 민간까지 그런 건 아니었던 덕에 빠른 속도로 발전했으며 처음에는 죽는 줄 알고 좌절한 유생들과 그 친가에서도 반년~1년 정도 지나자 별로 호들갑 떨지 않고 그냥 업무적 인사이동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심지어 공을 세우면 휴가도 자주 나올 수 있었기에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오자 버선발로 뛰쳐나오던 가족들이 나중엔 외박이 너무 잦은 공군 병장 보는 느낌으로 "어 또 왔냐?" 하는 개그가 나온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돈벌이도 좋은데, 한성 일대가 위수지역처럼 되어버려서 한성 상인들과 여악계의 호구 취급당하는 모양.
심지어 5년쯤 지나 1502년에는 성균관 입학은 후배인 조광조의 해병대 기수를 물어보는 등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선비는 수군을 갔다와야 한다 등의 문화가 퍼졌다.
소설이 워낙 개그성으로 쓰이고 있어서 넘어가기 쉬우나, 당대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 지식, 그리고 경식의 미래 지식을 동원한 최첨단의 천문학과 지리학을 가르쳐 상당히 정예한 항해사들이 양성되고 있다. 또한 서양의 해군이나 사략선들은 자국 선박이고 뭐고 마구 약탈해대었으나 조선의 수군은 뭐든지 등록된 서류가 있어서 밀수가 아니라는 것만 증명되면 선원들 주전부리나 쌈짓돈 정도만 털고 그냥 보내주는, 이 시기 전 세계 최정예라 할 만한 직무정신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본인들은 역교화당해버린 성균관 유생들의 흔적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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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훈련원 설립
사민될 백성들을 훈련하는 기관. 위치는 경기도. 이전부터 사민될 백성들을 교육 훈련하고 조직화해서 사민된 백성들이 사민되고 1년 만에 빚을 갚을 정도로 성공 중이라고 나왔는데, 86화에서야 구체적인 훈련 과정이 나온다.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실체는 전근대인인 조선 백성들을 강제로 근대인으로 바꾸는 군사적 교육기관으로, 시간표에 맞춘 일과에 따라 살아가게 강제하며, 오와 열을 맞추는 등 근대적 규율을 가르치고, 농사는 물론 각 특기에 맞는 직무 기술을 가르치고, 언문을 가르치고, 농사를 짓다가도 여진족이 오면 진형을 짜서 방어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 훈련을 시키며, 이때 편성한 군사 조직 그대로 북방으로 이주시킨다. 독자들은 경식의 사민 정책의 실체를 보자마자 동북을 통째로 프로이센으로 만들고 있다며 경악하는 중. 프로이센이라는 평가가 틀린 건 아닌 게 프로이센이 군사 대국으로 변모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군대가 국민 교육 기관을 겸임하게 된 것에도 있기 때문이다.
3. 국외
3.1.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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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도 실질 점유
해랑도는 요동반도 남쪽의 현 장산군도 지역이다. 이 시기에는 명과 조선 둘 다 해금 정책을 시행 중이라서 무주공산으로, 중국인 해적들이 점유 중이며 조선인들도 밀무역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 드나들기도 하고 중국인들과 섞여 같이 살기도 하는 섬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연산군 6년에 전임을 파견하여 해적들을 토벌하나, 본작에서는 수군훈련원 설립 과정에서 해랑도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냥 회색 지대로 남긴 채 무역 거점으로 쓸 겸 물고기 잡이나 강치 잡이를 위해 쓰기 위해 해동제국사 배가 드나들 수 있게 허락한다.
그러나 이 해랑도를 드나들 수 있게 허가받은 해동제국사 선박들이 해랑도에 있던 중국 해적들을 단속한다는 핑계로 대포로 겁박하며 중국 해적들이 본토에서 훔쳐온 물건을 헐값으로 받아와서 조선 본토에 파는, 즉 해적질 외주와 아웃소싱을 하는 기적의 경영술을 발휘한다.
아울러 조선에 흉년이 들자 막대한 쌀과 밀이 해랑도산으로 택갈이되어 조선으로 유입된다. 조선에서도 비좁은 해랑도에서 곡식이 이렇게 많이 날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흉년에 식량을 수입해오는 걸 방해할 만큼 바보는 아니라 곡물이라고 속이고 다른 물품을 밀수하는 것만 검사했을 뿐, 곡물 자체는 문제 없이 수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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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 여진족의 쇠락
상단의 번리위무사와 이어지는 변화. 조선을 위협하는 북방 야인 세력이던 야인 여진 우디캐는 성종조의 토벌도 피하고 계속 조선을 위협했으나, 번리위무사의 창설 이후 조선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황형을 비롯한 조선 무장들은 정예 갑사와 조총 부대를 이끌고 원정까지 다니면서 우디캐와 니마차 부족을 약탈했다. 알타리, 골간 등의 친조선 번리 부족들도 지금껏 간을 보던 태도를 바꿔서 이를 도왔다. 본래 이들은 우디캐와 니마차보다 약했으나, 번리위무사와 연합한 전력은 명백히 우디캐와 니마차를 아득히 능가했다. 4진과 가까웠던 반조선 부족들은 번리여진과 조선군 연합의 반격에 모조리 밀려났다.
심지어 도원수 윤필상은 위무사가 적자를 볼 것 같자[20] 번리여진들의 반발을 각오하고 병작반수, 염철 거래 독점, 공납 등을 신규 4진의 번리들에게 강요했는데, 번리여진들은 이미 자기들 나름대로 조선과의 라인을 구축한 이후라서[21] 윤필상의 생각만큼 타격이 크지 않았다. 아울러 그러고도 남은 타격은 우디캐와 니마차에게 전가되어 더 격렬하게 약탈당하고, 병작반수가 걸린 밭은 번리여진들과 갑사들이 잡아온 반조선 부족 포로들이 갈아야 했다. 이렇게 번리부족들은 갈수록 조선과 가까워졌고, 또한 강해졌다.
한편 서쪽 건주위 여진족도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이 실제로 만주에 진출해 대군을 배치하자, 국경 일대의 여진족들은 조선의 눈치를 보고 태도를 바꾼다. 동청례의 혈족인 동아망개 부족이 그 필두였는데 두만병마사 황형은 동청례의 중개를 통해 붙은 여진 부족들까지 동원해서 조선과 적대하는 건주위 부족을 털고 다녔다. 그렇게 빼돌린 말과 초피 등은 요동에 팔았다. 그러던 중 바뀐 요동도사가 무역을 거부하자 건주위를 털어서 칙서를 빼돌려서 건주위의 이름으로 마시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하루아침에 칙서를 잃어버린 건주위는 요동도사에게 사정을 봐달라고 요청했으나, 평소라면 통했을 청탁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당시 요동도사가 밀무역을 막지 못한다는 죄로 인해 전임자는 해임당하고, 현직자인 장옥도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불만을 가진 건주여진은 요동 사방을 털면서 명나라 산하에서 이탈했고, 최근 막대한 물자를 뿌리기 시작한 조선에 붙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00년, 목단강 일대 지역까지 여자신과 이계동이 노리기 시작하면서 여진족은 다시 큰 위기를 맞는다. 사실 만주가 춥다지만 목단강 일대는 농사가 가능한 지역이었기에 우디캐의 최후의 기반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 남쪽을 정복한 조선군이 다시 목단강 일대를 차지하러 올라온 것이다. 때문에 도골과 니마차 등 우디캐 여진 부족은 협조하지 못하고 큰 마찰을 일으킨다. 또한 새로 임명된 이계동은 모련위 여진족 사이에서 인망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모련위 여진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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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발해 유적 발굴
본래 요하 일대에는 조선계 유민이 많이 살았다. 이들 역시 번리위무사의 등장으로 만주의 세력구도가 조선 우위로 바뀐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명분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을 명분 삼는다는 것도 명확했다. 특히 전직 번리위무 도원수, 두만병마사라는 무반 최고위직 장수 이계동, 여자신이 광개토대왕릉비 인근에 고구려 유적을 발굴하라는 명분으로 배치되자 조선이 작정하고 만주를 흡수할 생각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고, 만주 사방의 성터 유적을 보수하고 재건해 군사력을 확충했다. 여자신은 황성평 지역의 금나라 도성으로 알려져 있던 터를 발해 상경성 유적이라 정정하며 인근 여진의 항의를 무시하고 차지했다.
그렇게 동만주에 이어 만주 서부에도 점차 조선의 영향력이 급격히 확대되자, 본래 요동에 살던 조선계 유민들은 조선군을 찾아가 조선 백성으로 인정받으며 평양까지도 자유롭게 들어와 제사를 지내고 장사를 했다. 평양-의주-요동-북경으로 이어지는 환전 및 장사가 가능할 정도였다. 자연히 중간인 요동도 조선의 손이 뻗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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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 영국(붕가국) 입조
명나라에서 오랑캐의 입조를 받아주는 것으로 정책을 선회하자, 경식은 바로 대만에 개척을 보낸 동생 이수에게 명령하여 영국이라는 나라를 사칭해서 입조하여 조공무역을 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때 에피소드가 1910년에 실제로 있었던 붕가붕가 사건의 패러디다. 이수가 할 말이 없어서 꺼낸 붕가붕가라는 말이 영국 말로 매우 좋다는 뜻이라고 명나라가 이해해버려서, 한 글자 이름은 예법상 내릴 수 없다고 대외적 국명을 붕가국으로 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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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상인 세력의 출현
명나라 칙사를 따라 조선에 왔던 상인들이 조선의 변화를 눈으로 보고서 조선에 귀화하기를 원했으나, 아직 명나라인을 들이기는 시기상조라 판단한 조정에선 거부했다. 그러자 이들은 귀국길에 요동에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는 요동 상둔직을 사서 요동에 거점을 만들고 요동-조선-명의 무역에 참가하려 한다.
여러 변화가 겹쳐서 일어난 일로 원 역사에서도 쇠락하던 명나라 요동군이 조선의 개입으로 인한 변화로 더욱 쇠락했기에 가능했던 일.[22] 이들은 휘상(안휘), 진상(산서) 등의 중국 거대 상인집단에 비유되면서 그 잠재력이 만만치 않음을 암시한다.
3.2. 일본
본작은 일본이 전국시대 초반 중에 있어서 조선이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쉬우며, 무역 확대가 매우 용이하다는 지리적 요인을 반영하여 타 대체역사소설들에 비해 일본의 이야기가 자주 다뤄지는 편이다.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포함한 현대 일본의 영토도 이 단락에서 다룬다.-
무로마치 막부와 수교
원래 역사상의 연산군 3년 2월 29일, 무로마치 막부의 사절단이 찾아와서는 비단 2만 필, 목면 1만 필, 지폐 10만 전을 달라고 구걸한다. 비단과 목면이야 예전부터 일본이 조선에서 받아가던 것이니 그렇다 치고 조선에서도 유통된 지 얼마 안 된 지폐를 달라고 해 놀란 경식이 조사해 보니, 일본은 이전부터 화폐 경제가 자리잡았으나, 정작 화폐 정책을 운용할 지식이 없어 외국의 화폐를 수입해서 쓰고 있었던 것. 그리고 조선 전국에서 유통되던 지폐가 왜관의 일본인들의 눈에 들어갔고, 목화를 재배하지 못해 조선에게서 항상 수입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조선의 목면 등 물산을 수입하기 위해 지폐를 원했던 것이다. 경식은 화폐 정책 주권을 알아서 가져다 바치는 일본에게 싱글벙글 웃으며 리버스 강화도 조약을 뒤집어 씌울 계획을 짠다.
과연 막부의 사절은 경식이 제시하는 불평등 조약의 문제를 전혀 못 느끼고 그대로 가져가서 순조롭게 조약이 맺어지나 했으나... 막부의 사절과 함께 일본으로 간 통신사가 도착한 타이밍이 어마어마하게 공교로웠다. 조선에서 개항을 요구한 하카타와 사카이 중 하카타 쪽이, 그 해 초에 마침 현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자인 호소카와 가문과 적대하고 있는 오우치 가문의 손에 떨어지고 만 것. 조선에게 너무나 편리한 상황이 되어버려서 경식조차 얼떨떨해 하지만, 1497년에 오우치가 하카타를 점령한 것 자체는 편의적인 전개를 위한 각색이 아니라 원래 역사의 사건 그대로다. 호소카와 역시 조선과의 교역의 필요성을 느꼈고, 오우치 역시 백제왕의 후손 드립을 칠 정도로 조선에 호의적인 가문인데, 두 곳이 동시에 조선과 교역 확대를 요구해서 조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일본 내 정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한편 통신사들은 일이 너무 커지자 자신들 선에서 협약을 맺지 못하고 주상이 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다고 놀라며 돌아와 상세한 보고를 올렸는데, 주상의 눈치를 보고는 왕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울러 경식은 향후 일본의 발전을 방해해 조선의 쌀주머니로 만들 작정으로 조선에서는 경식이 오자마자 접어버린 쌀본위제 수취제도를 전수하려 했는데, 조선과 일본은 처한 상황이 다르니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상의 궤변을 선량한 신하들이 억누르고 제대로 된 세금 수취제도를 전수했다.
그러나 이 일은 단순히 경제적 수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나비 효과를 가져온다. 원 역사에서 오우치 가문은 1507년 이후 자신들에게 의탁한 아시카가 전 쇼군을 내세워 교토 상락에 성공해 천하인에 근접했으나, 격렬하게 저항하는 반대 세력과의 연이은 전쟁과, 본토인 규슈에서 아마고, 쇼니씨의 대두로 인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선이 규슈에 영향력을 펼치면서 착취당하는 것과는 반대로 후방의 위협이 크게 줄어든 데다가 대대 수준의 조총 부대까지 창설하고 대포 부대까지 파견 받으면서[23] 원 역사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공격적인 공세가 가능해졌다. 오우치 가는 이 힘을 이용해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천하인의 자리를 노린다(1500~1501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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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 항로 개척, 고토 군도 개항
제주도에 표류된 유구 사람을 송환하는 겸, 유구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해동제국사에 들어온 인원 중 특별히 항해술이 뛰어난 이들을 선발하여 파견한다. 가는 길에 일본 어선들을 왜구로 오인하고 포를 쏘거나, 가는 길에 있는 아마미오섬을 약탈하거나, 단령을 입고 슈리에서 장사를 해대서 일본인 상인이 사기를 치는 것으로 오해하는 등의 찐빠가 있었으나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다. 돌아오는 중 해적으로 오해받아 고토 영주가 공격을 해오는데, 대포의 힘으로 무사히 승리하고 개항 조약을 맺는다. 고토는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오도라서 오도짜세기합특별자치항이라는 개드립이 나온다. 이들이 가는 길에 한 일들이 굉장히 개판 같지만 작중 시점과 동시기에 인도 항로를 개척하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바스쿠 다 가마와 비교하면 선녀가 따로 없는 수준이라고.
당시 유구에는 동남아와 중국 남부의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기에, 자연히 해동제국사는 이들과 무역을 트게 된다. 항로 개척 반년도 안 되어 수십 번의 상선이 오갔고, 덕분에 후추 등의 물가가 폭락했다. 엄청난 중독성을 가진 설탕만은 수입량이 늘어난 만큼 족족 소비하며 가격 방어가 되는 중. 또한 조선의 아마포 등도 남중국에 수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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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 교린
유구 중산왕이 팔만대장경을 인쇄해서 보내달라는 사신을 보낸다. 사실 이는 핑계였고 슬쩍 눈치를 보아 화포를 사려는 것이었는데, 화포 기술은 한글로 쓸 만큼 기술 확산을 경계하던 병조에서는 반대했지만 유구가 얼마나 작은지 알고 있는 경식은 이를 받아들이고 대신 조선 기술을 수입한다. 유구는 명나라 시절에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아 조선 기술까지 이전받은 바 있기에 판옥선보다 더 큰 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아울러 상행위를 허가받고 화포와 함께 운용법을 가르칠 군사고문 500명을 보내는데, 유구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투병력이 3천 명 정도인 판국이라 독자들은 다들 저게 군사고문인지 장교진인지 웃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오야케아카하치의 난에 조선군이 끼어들게 되고, 원래 역사 그대로 점을 쳐서 흉일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물러서는 유구군에 어이가 없어진 조선 군관 이지방이 따졌다가 선봉에 서게 되어버린다.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해병들은 겁을 먹었으나 전원 소총으로 무장한 해병들은 내레이션 피셜 '경식이 보았으면 기뻐했을 법한' 씬 레드라인을 구성하고 연속사격으로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그리하여 지금껏 오랑캐들은 강력한 여진과 왜구만 있는 줄 알았던 조선인들은 생각보다 약한 오랑캐들이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받고, 해동제국사는 자신감을 얻어 왜국과 동남아의 사방팔방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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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멸망
세종조 정벌 당시의 대마도 공격은 해안 공세는 성공했으나, 내륙 전투가 지지부진하고 오랫동안 수군을 두기 어려워서 대마도 완전 파괴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경식의 대마도 토벌은 대마도가 조일 무역의 중개지로서 이득을 챙기던 것을 제거하고 조선이 직접 일본 하카타에 조선방을 설치하여 무역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마도에 대한 해안 봉쇄와 해안 약탈, 선박 나포 등을 허가하고 까먹어버린다.
대마도를 다스리는 소씨 가문은 조선이 공격하자 세종조 당시 그랬던 것처럼 청야 전술을 시행한다. 보급이 부담스러울 조선군은 곧 물러날 것이며, 혹여 내륙까지 들어온다면 습격해서 전번처럼 적당히 전쟁을 끝낼 수도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조선 해병들은 대마도를 떠나지도, 내륙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애당초 경식에게 있어 대마도 토벌은 딱히 결정적인 목표가 아니라서 약탈을 허락한 뒤 까먹어버리고 언제까지, 어떤 식으로 끝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리지 않았고, 동시에 해병들은 왜구들에게 겁을 먹어 내륙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계속 해안만 약탈하는 이도저도 아닌 움직임을 취하게 된 것인데, 결과적으로 대마도의 약점을 정확하게 찌르면서 대마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된 것이다.
해병들이 계속해서 해안가를 점령하고 약탈을 수시로 반복해대자 본래 어업, 해적, 무역으로 먹고 살던 대마도의 식량 사정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결국 소씨 가문은 항복하려고 도주의 장남 소 요시모리가 해안가로 나왔지만, 해병들은 기만전술이라고 판단하고 멀리서 포와 활로 응전해주었다. 결국 요시모리까지 그대로 포로가 되어 북방에 노비로 팔려가버려서 대마도는 항복도 못하고 만다.
그로부터 2, 3년 후까지 해동제국사의 대마도 파괴는 계속되었으며, 도주마저 굶어죽으면서 사실상 대마도는 멸망한다. 경식은 4년 뒤인 1501년에야 그러고 보니 대마도가 어떻게 되었나 떠올렸...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본 본토의 소식이 들어온 바람에 또 패스해버리고 그 뒤 경식도 모르는 사이 울산 수영에 배치된 전임의 잔당 토벌 작전으로 무인도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대마도가 실질적 가치야 어쨌든, 가깝다는 이유와 역사적 연원 때문에 대역물에서는 흔히 조선이 먹어버리는 땅이었는데,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유로 보통 멸망을 넘어서 아예 무인도가 되어버린다는, 이스터 섬 같은 느낌의 전개 때문에 독자들은 고스트 오브 쓰시마가 탄생했다며 경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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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막부 수립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반란으로 쫓겨난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오우치의 영지에 의탁해오자 조선이 전폭 지원을 선택하며 규슈 다자이후를 본거지로 하는 괴뢰국을 만들어준다. 오토모, 쇼니 등 규슈의 굵직한 다이묘 세력은 조선군과 오우치의 협력으로 전부 격파하여 장악하고, 점차 소규모 영주들도 격파하며 중앙집권 체계를 수립 시켜주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일본에 대한 경제침탈을 진행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이 일부 지역의 징세청부를 맡거나 곳곳에 수군영을 설치해 해운물류를 장악하고 해병 공제계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줘 돈놀이를 하는 등 핵심기능을 조선이 죄다 파먹으면서 조선이 일본을 위해 잘해주고 있는 거라고 생색을 내는 중. 조선의 개입으로 이미 폐도령을 내려 치안을 안정시키고 있는데, 그걸 두고 일본에게 1945년 이후 수준의 평화를 만들어주고 있다며 이렇게 일본에게 잘해주는 한국산 대역물 주인공이 없다며 일본천자라고 해도 믿겠다는 블랙 유머를 친다. -
요시타네의 상락 도전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조선도 오우치도 자신의 상락에 협조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흉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자기방위를 위해 주어졌던 병력 5천, 소수 자신을 다르는 다이묘들의 지원군 3천을 모아 8천 병력으로 상락할 것을 선포한다.
조선과 오우치 씨 입장에선 지저분하고 긴 전쟁이 될 것이 뻔한 쇼군 내전에 개입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요시타네가 독자적으로 가다가 죽게 둘 수도 없었기에 개입을 준비한다. 조선 수군 지휘관 황형의 협조로 사카이를 쉽게 차지한 요시타네는 자신의 총병 부대를 앞세워 바로 교토로 진격한다. 운좋게도 당시 호소카와 가문은 후계자 분쟁으로 인해 지리멸렬한 상태였고, 총을 상대한 경험도 거의 없던 탓에 요시타네 직하 부대는 잔존 호소카와 병력을 격파하고 손쉽게 교토를 차지했다.
그러나 어려운 건 이제부터였다. 호소카와 가문을 징벌한다고 군을 일으키고는 호소카와 마사모토를 포함해 호소카와 가문의 주요 인물들을 전혀 잡지 못하고, 호소카와가 세운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마저 놓친 것이다. 호소카와의 세력은 여전히 교토 사방에 산재해 있었고, 요시타네가 혼자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하려는 조선군의 방해로 인해 남은 화약은 화재로 전부 소실했다. 심지어 교토는 오닌의 난, 메이오 정변, 호소카와 후계자 분쟁, 근래의 흉년으로 피폐해서 힘을 모으기 좋은 땅이 아니었다. 이에 상락 연합군은 갈라져서 약탈을 벌이기 시작하고 이를 보고 요시타네의 무능함에 실망한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타다마사는 병력을 동원해 교토에 방치된 고카시와바라 덴노를 사카이의 한관에 넘겨버리는 배신을 일으킨다.
결국 원 역사에서도 오우치 씨의 힘으로 쇼군 자리를 되찾았다가, 오우치와 갈라지고 결국 요시즈미에게 다시 자리를 빼앗긴 요시타네는 본작에서도 무턱대고 조선과 단교하고 대책 없이 교토에 눌러앉으면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고 말았다. 조선은 폭주한 요시타네에게 후원을 끊었고, 양방향에 호소카와 잔존 세력이 버티고 있으면서 교토는 다시 고립된다.[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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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관 중점 체제
본래 일본의 조정은 2관 8성 체제로 구성된다. 그러나 율령제의 붕괴 이후로 막부가 수립되면서 무너져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나, 다자이후 막부의 유력자 오우치 가문은 혼슈가 혼란한 틈에 이를 재건하려고 한다. 정확히는 막부제를 폐하고, 귀족회의인 태정관을 확장해 귀족정(오우치 가문)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걸 노린 것이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통일 지원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계속 전국시대로 두어도 관리가 힘든 데다가 폴란드식의 귀족정을 통해 일본 기득권과 영합해 조선의 안정적인 시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계산한 경식에 의해 동맹을 이행하게 된다.
3.3. 동남아시아
본작은 원래 역사의 시대상과 주인공의 대전략이 반영되어 다른 대역물과 다소 다르게 동남아시아 항로의 비중이 상당하다.-
동남아시아 수교
1502년 가을, 태풍이 지난 후 임사홍과 최부를 각기 선단장으로 삼은 두 탐험선단이 떠나 동남아시아를 탐험한다. 탐험 과정에서 만난 것은 필리핀의 톤도 왕국, 보르네오섬의 브루나이 술탄국, 말라카 반도의 믈라카 술탄국, 자바섬의 순다 왕국이다. 이 중 톤도와 순다는 조선의 대포를 보고 매료되어서 경쟁자인 이슬람 국가들을 격퇴하기 위해 조선에 선제적으로 동맹 요청을 해왔으며,[26] 반대로 말라카의 토호들은 조선을 의심해서 견제하는 바람에 말라카와 관계가 악화된다.
톤도 왕국과 브루나이 술탄국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순다 왕국과는 동맹을 맺어 동남아 항로 일부를 점유하는데, 해당 시점의 조선 수군의 대포로도 당대 자바섬에서 만드는 초대형 선박인 종(Djong)선을 이기지 못해[27] 더 이상의 진출이 막힌다.
[1]
미래 한국에 있을 적
IMF 사태와
저축은행 사태를 겪어보고 은행을 믿지 않고 장롱에 돈을 보관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서 조선의 백성들은 대부분 이런 수준일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
그래서 조선의 경제적 안정성이
21세기 산유국에 도달한 데 뒤이어 조선의 민주주의도
21세기 강대국 수준에 도달했다는 너스레가 나왔다.
[3]
이것도 집중된 것으로, 서울 이외의 지방에 있는 갑옷장 다 합해 50명이란다.
[4]
주인공이 4학년 당시 빨리 취직해야 하는데 사학과목이 발목을 잡는다고 짜증을 내던 걸 감안하면 취직 준비를 위해서 경영학 수업을 들었거나 경영학 자격증 공부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5]
경식은 딱히 불교에 유감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으므로 이융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신하들은 아주 반가워했다.
[6]
정부 납품분은 세금이 없고, 같은 양만큼 세금이 공제된다. 즉 정부에 납품한 양 이내만큼에서는 완전면세로 팔 수 있다. 예를 들자면, 200장을 구워서 100장을 납품하면 남은 100장은 세금을 안 떼고 팔 수 있다.
[7]
현대 우유 생산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잔인하진 않다. 낙농업을 주제로 다룬 만화
백성귀족에서는 그걸 직접적으로 밝힌다.
[8]
이조전랑은 정 6~5품 수준이라 별로 고위직이 아닌 것 같지만 대간들에 대한 인사권이 있는 자리라서 권한이 매우 강했다. 본작의 대간들이 의미있는 저항을 못한 이유의 태반도 이조전랑이 대간들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을 들어 단숨에 쳐내진 것이 크다.
[9]
다만 경식이 조선의 물가 산정 과정에서 좀 착각하는 바람에 갑사들에게 수당을 과도하게 많이 주고 있다는 묘사가 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진행된 이후 전개에서는 비중이 많이 내렸을 것이다.
[10]
조선 전국의 결수가 이론상 160만 결 정도여서, 지폐로 세금을 걷으려면 1600만 전이 필요한 상태였다.
[11]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이극돈은 정말로 조선인들이 너무 많이 먹어서 기근에 시달리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이다. 연산군 시절에 활동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무오사화 때 김일손을 고발한 사람으로, 본작 초반에 꽤 언급되는 조연이다.
[12]
당장에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인 사유재산권의 보장이나, 자유시장경제를 위한 자유의 개념 자체가 유교에는 부재하다.
[13]
economy 의 번역어인 경제의 어원은 동아시아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어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 당대 조선인들 입장에서도 매우 자연스러운 이름일 것이다.
[14]
대역갤에서 판단하기로는
세미가 입는 식의 퓨전 한복으로 여기고 있다.
[15]
실제 역사상에서도 이 뜨개질 관련 기술이
산업 혁명으로 이어지는 직물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작중에서 설명한다.
[16]
작 중에서는 200만이라고 언급하고 넘어간다. 실제 역사학에서는 조선 전기 노비 비율은 30~40% 정도로 보고, 작 중 시점인 연산군~중종 시기 조선 인구는 900만 정도로 추산되기에 두 추정을 혼합하면 당시 조선인구 중 270만~360만이 노비인 셈이다. 인구 중 상당히 유의미한 수가 노비였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겐 불쾌한 부분이지만, 본작은 학계의 중론을 반영하되 최소치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17]
공식적으로는 한반도 안에선 실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은 야사로는 철장들이 본인들의 마을 안에서만 비전으로 전수하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18]
4진의 위치는 각각 현재의
훈춘,
옌지,
크라스키노,
투먼이다.
[19]
백성들이 세금을 못 내거나 나라에 진 빚을 갚지 못하면 그것을 불량채권으로 처리해 세금 받았다고 퉁치고 그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사업을 계획하여 진행한 뒤, 인력이 필요한 곳에 불량채권인 백성들을 동원해서 인건비로 갈음하는 구조다. 첫 해에 1500만전 수취는 사실 이런 회계의 꼼수, 혹은 '신용'이 있었던 것.
[20]
반조선파를 다 제압했으니 군축하고 싶었으나 번리여진들은 자기들끼리도 사이가 나쁘다. 완전히 신종한 지금도 힘의 차이나 조선의 지지가 있으면 서로 통수칠 것이라고.
[21]
딸이나 여동생을 조선 갑사들과 결혼시켜 인척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통해서 소금과 철, 초피를 거래해 관세를 절감한다든가.
[22]
요동에 살던 건주여진은 조선 번리위무사군의 무역 약탈 및 세력 확장으로 약체화하거나 조선에 넘어가버렸고, 그 다음인 조선인들이 세력을 불리고 있으며 요동에 식량을 공급하던 해로는 해랑도 해적, 해동제국사의 개입으로 붕괴했다.
[23]
조총은 그대로 지원품으로 주었으나, 대포는 지원군이다.
[24]
다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조선에게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개혁의 기회였다고 언급되는데 상비군, 도시, 교역망, 권위라는 경식이 만드느라 고생했던 것을 운좋게 처음부터 가지고도 구체제의 복구에 몰두하느라 기회를 놓쳤다고 서술한다.
[25]
상비군인 5천 철갑병은 군량 없다고 대책없이 흩어버렸는데, 나중에 다시 모일지는 차치하고 그런 병사들이 철무장을 제대로 관리할 리가 없다. 자신을 지지하는 공가, 사찰 등을 위한답시고 교토 주변 사방의 영지를 휘저은 데다가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교토 인프라 유지를 위한 교역망 보존에는 소극적이던 탓에 중요한 루트인 사카이는 조선에게 막혀버렸다. 심지어 사방이 호소카와 잔존세력에게 포위당한 참이라 교토라는 도시의 상업 기능은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26]
원래 역사에서도 톤도는 스페인이 동남아에 왔을 때 당시 선제적으로 동맹 요청을 했으며, 순다는 포르투갈에게 동맹 요청을 했다.
[27]
작중 조선 수군이 쓰는 대포는 가장 큰 대포도 작중에서 천근포라고 불리는, 원역 기준 12파운드포 수준의 대포이며 그조차도 신료들과 병사들이 과잉화력이라고 자꾸 반대해서 천자총통이나 지자총통 수준으로 다운그레이드되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반면 종선은 당시 시점에 500톤~2000톤에 달하여 18세기의 전열함과도 맞먹고, 동남아에서 많이 나는 경목인 티크 목재로 외판을 4겹 이상 덧댄, 떠다니는 도시 수준의 배였다. 왜구나 북중국 해적 정도를 바르고 다니던 기존의 조선의 배로는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