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0:07:14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
현무문
천하제일복지천
오운각 옥련정
벽화실 청와대 관저
청와대 본관 청와대 녹지원 춘안당 융문당
칠궁 양정재 수궁(구 관저터) 융무당 태화궁
지희실 경농재(관풍루) 대유헌 경무대
청와대 위민관,헬기장
수궁 청와대 춘추관
마장 관가문 희맹공신단
금화문 팔도배미
청와대 영빈관,경호실
추성문 금위군직소 춘화문 춘생문
신무문 수문 계무문 광무문 춘도문 수문
숙문당 수문장청 군사방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각감청 관문각
건청궁
서녹산 어구 동녹산
태원전 영사재 대왕대비전 세답방
순화궁 세답방 중궁전 세답방 종각
빈궁 세답방 공묵재 왕대비전 세답방 가회정 보현당 남여고 육우정 녹직처소 내재실
동장고 통화당 순화궁 외소주방 숙경재 서진설청 선원전 동진설청 경안당
순화궁 내소주방 진전 소주방 진전 생물방 화락당 나인처소
회안전 문경전 서장고 향원정 만화당 벽혜당(왕대비전 생물방) 대향당 나인처소
정훈당
함화당 집경당 전기등소 만경전 건기당(왕대비전 내소주방) 요광당(왕대비전 외소주방) 어린이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나인처소
숙설소 영훈당
빈궁 생물방 상궁처소 다경합 건복합
회광당(빈궁 내소주방) 광원당(빈궁 외소주방)
원역처소 수인문 흥복전 중궁전 수방 대왕대비전 수방 제수합 영보당 벽월당(상궁처소)
중궁전 침방 대왕대비전 침방
제관방 원역처소(접견소) 장방 원역처소 아미산 자미당 자경전 집희당(대왕대비전 내소주방) 춘소당(대왕대비전 침방) 취운당(대왕대비전 수방) 나인처소
침채고 예춘당(대왕대비전 생물방) 벽로당(상궁처소) 웅향당(상궁처소)
함정당(대왕대비전 외소주방) 계응당(상궁처소)
임향당 나인처소
국별장직소 함원전 건순각
인지당 나인처소 보월당(상궁처소) 자운당(상궁처소) 나인처소
경회루 함홍각
교태전 원길헌
복희당(대전 생물방)
국출신직소 흠경각
양의문 대전 내소주방 난지당(대전 외소주방) 대소대금방(나인처소)
무겸직소 응지당 강녕전 연길당
북소위장직소 경성전 연생전
수문 파수각 향오문
영추문 수문장청 내각( 규장각) 검서청( 규장각) 대전장방( 내시부) 천추전 사정전 만춘전 자선당 비현각 장방 수문장청 건춘문
습회당 협오당 장원당 중궁전 수랏간 왕대비전 수랏간 등촉방 등촉방 장방 관리사무소
군사방 수정전 별감방 군사방
초관직소 장무관직소 입심억석( 내의원) 주원( 사옹원) 수정문 사정문 오상방 원역처소
훈국군번직소 침의청( 내의원) 약방( 내의원) 내반원( 내시부) 협의문
융무루ㅓ
근정전 계인문
융문루
통장청 문기수청 춘방
서소위장직소 의약청( 내의원) 영화문 계방
옥당
( 홍문관)
검서청( 규장각) 대전 수랏간 계조당 훈국군번처소 초관처소
누국 당후( 승정원) 정원( 승정원) 숭양문 월화문 근정문 일화문
일영대 선전관청 빈청
기별청
유화문
수각

덕양문
수각
봉선문 별군직청 주차장
영제교
춘방책고대청 상의원 면복각
신당 덕응방 북마랑 흥례문
전사청 연고 내사복시 거달처소 중마랑 동마랑 용성문 어도 협생문 계방 오위도총부
우마랑 국립고궁박물관 좌마랑 내구 연지 수문장청
매표소
군사방
수문장청
매표소
남소부장청 동소부장청
견마배청 남마랑 군사방 초관처소 영군직소
측사
측사 충장장청
서십자각 수문 광화문
( 월대)
수문 동십자각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경복궁 사정전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정식 편전 경복궁 사정전
景福宮 思政殿
창덕궁 선정전
昌德宮 宣政殿
창경궁 문정전
昌慶宮 文政殿
경희궁 자정전
慶熙宮 資政殿
부 편전 경복궁 수정전
景福宮 修政殿
창덕궁 희정당
昌德宮 凞政堂
창경궁 숭문당
昌慶宮 崇文堂
경희궁 흥정당
慶熙宮 興政堂
덕수궁의 편전은 한 건물에 고정되어있지 않았다.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편전 정문 · 편전 · 내정전 · 동궁 · 선원전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757호[1] 1759호 1760호
양산 신흥사 대광전 벽화 경복궁 사정전 경복궁 수정전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1759호
경복궁 사정전
景福宮 思政殿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세종로)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2012년 3월 2일
제작시기 조선 시대, 1395년 창건, 1867년 중건
파일:경복궁_사정전_전경.jpg
파일:경복궁_사정전_근경.jpg
<colbgcolor=#bf1400> 사정전[2]
파일:경복궁_사정전_설경.jpg
눈 내린 사정전 풍경[3]
1. 개요2. 이름3. 역사4. 정문5. 구조6. 여담7. 부속 건물
7.1. 만춘전(萬春殿)7.2. 천추전(千秋殿)7.3. 사정전 동행각(思政殿 東行閣)7.4. 사정전 서행각(思政殿 西行閣)7.5. 사정전 남행각(思政殿 南行閣)
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경복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2. 이름

조선 재상이었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는 《 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했으며, 정도전은 이 말의 뜻에 대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늘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고 설명했다.

정전 근정전 북쪽, 의 침전인 강녕전 남쪽에 있다.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이조판서였던 조석우(曺錫雨)가 썼다.

3. 역사

1394년( 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지어졌다. 당시에는 지붕을 문양이 새겨진 청자 기와들로 뒤덮어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4][5] 1429년( 세종 11년)에 고쳐 지었고 1553년( 명종 8년)에 화재를 입은 후 재건했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탔다가 1867년( 고종 4년)에 중건했고 이후 동,서행각은 1876년( 고종 13년) 화재를 입었다가 재건해 오늘에 이른다.

일제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경복궁 내 전각들을 철거할 때도 무사히 남았으나 일제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 때 박애관으로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사정전을 2012년 3월 2일에 보물 제1759호로 지정했다.

4. 정문

景福宮 思政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사정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구조

파일:경복궁 전도 교태전 강녕전.png
<colbgcolor=#bf1400> 〈경복궁전도〉에서 묘사한 내전 영역
  • 영조 때 만든, 조선 초기 경복궁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를 보면 부속 건물없이 이어져있다. 이는 완전히 영역이 떨어진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 장대석 3벌대로 만든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전각[6]이다. 조선 궁궐의 편전 중 규모가 가장 크다.[7] 기단 부분에서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 그러니까 중앙 칸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양 옆 신하들이 드나드는 칸에 소맷돌이 없는 계단이 있다. 건물 좌, 우면에 계단은 없고 북측의 계단은 어칸에만 놓여있다. 초석은 원형초석이며 이에 따라 기둥 역시 둥글게 되어 있다. 어칸을 협칸보다 2배 가까운 길이로 넓게 잡았고, 측면에서도 어칸을 훨씬 크게 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모두 회칠로 처리한 뒤 그 위에 취두와 용두, 그리고 잡상을 배열했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8]과 평방[9]을 짜돌리고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의 공포[10]를 놓았다. 공포는 가장 장중하고 복잡한 다포 양식으로 하여 편전의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
파일:사정전 내부.png
<colbgcolor=#bf1400> 사정전 내부[11]
  •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제일 북쪽 중앙에 옥좌가 있으며 당가[12]를 설치하여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다.
  • 위 이미지를 보면 옥좌 위에 굉장히 화려한 그림이 있다. 구름이 얽혀있는 그림으로 이름은 《운룡도(雲龍圖)》이다. 구름은 신하를, 용은 을 상징하며, 그림처럼 왕과 신하가 서로 어우러져 좋은 정치를 하길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여담으로 원래는 벽화였는데 훼손이 심해지자 2000년 대 초에 따로 떼어서 별도로 보관한다. 기존에 운룡도가 있던 자리에는 실제 크기만 한 천에다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복사해서(...) 걸어놓았다.
  • 4면을 벽 없이 전부 으로 구성했다. 문의 창호는 띠살이며, 그 위에 교창[13]을 설치했다.
  • 바닥은 마루이다. 그래서 주로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사용했고, 가을에서 봄까지는 양 옆에 있는 보조 편전인 천추전 만춘전을 주로 이용했다.

6. 여담

  • 1435년( 세종 17년)에 세종이 지으라고 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다른 이름이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이다. 당시 세종이 이 곳에 주로 머물며 짓게 했기 때문이다.
  • 세조 때에는 사정전 앞 복도에 큰 을 달고 관련 정사를 보살필 때마다 호령을 대신하여 이 종을 쳤다.
  • 사정전 남쪽의 우측 계단 옆을 보면 돌기둥으로 감싼 해시계 앙부일구가 있다. 원래 다리 부분도 돌기둥 속에 들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드러났다. 물론 현재도 비오거나 흐린 날 빼고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파일:detail-in-f5.jpg
<colbgcolor=#bf1400> 사정전 앞에 있는 앙부일구[14]

7. 부속 건물

7.1. 만춘전(萬春殿)

景福宮 萬春殿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만춘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2. 천추전(千秋殿)

景福宮 千秋殿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천추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3. 사정전 동행각(思政殿 東行閣)

파일:사정전 동행각 배치도.png }}} ||
<colbgcolor=#bf1400> 사정전 동행각 내부 구성도
景福宮 思政殿 東行閣
남쪽의 사현문(思賢門) 북쪽의 연태문(延泰門) 사이의 행각인 정면 12칸, 측면 2칸의 건인각(建寅閣)이고 전면 반칸은 툇간이다. 1876년( 고종 13년) 화재 이후 재건되었고 원래는 현판이 걸려있으나 어느샌가 떼어져 버리고 현판은 고궁박물관에 있다.

7.4. 사정전 서행각(思政殿 西行閣)

파일:사정전 서행각 배치도.png }}} ||
<colbgcolor=#bf1400> 사정전 서행각 내부 구성도
景福宮 思政殿 西行閣

남쪽의 숭현문(崇賢門) 북쪽의 이름없는 문(門) 사이의 정면 12칸, 측면 2칸의 행각이다. 1876년( 고종 13년) 화재 이후 재건되었고 부엌을 기준으로 남쪽의 용신당(用申堂), 북쪽의 협선당(協善堂)으로 나뉜다. 일제강점기에 남쪽 일부가 훼손되었다가 1993년 복원했다.

7.5. 사정전 남행각(思政殿 南行閣)

파일:사정전 남행각 내부 구성도.png }}} ||
<colbgcolor=#bf1400> 사정전 남행각 내부 구성도
景福宮 思政殿 南行閣
사정전의 남쪽 행각은 사정문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누어 창고로 사용했는데 이름을 천자문 순서대로 지었다. 서쪽의 천자고(天字庫)부터 동쪽의 월자고(月字庫)까지 총 창고 10개가 있고 창고 하나는 정면 3칸, 측면 1.5칸씩 구성했다.

8. 대중매체에서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편전으로 많이 나왔다. 물론 외견만 나오고 실내는 방송사 스튜디오에서 따로 촬영했다.

2004년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부안영상테마파크에 조선 왕궁 세트장이 생기면서 사정전 세트도 같이 지었는데, 이상하게 강녕전과 비슷한 외형의 건물에 사정전 현판을 붙여놓았다.(...)

2008년 경상북도 문경에 《 대왕세종》 세트장이 생기면서 사정전 세트 역시 지었는데, 부안과는 달리 실제 사정전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2015년 징비록 촬영을 전후하여 가운데 칸과 정문 사이에 복도각을 설치하여 현재는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실내에 옥좌를 마련하고 용상체험을 할 수 있게 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1] 보물 1758호는 원래 포항 중성리 신라비였으나 국보 318호로 승격하면서 영구결번이 되었다. [2]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립문화유산포털. [4]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2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중략)...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중략) [5] 즉 사극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고종 시기를 제외한 세종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의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은 청기와 건물로 표현해야 옳은 재현이라는 것이다. 세종 이후라 하는 이유는 1443년( 세종 15)에 근정전 취두(鷲頭, 치미나 용두와 같은 망새로서 용마루 양쪽 끝에 세워 놓은 대형 장식 기와)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는데, 비싼 청기와와 아련와(牙鍊瓦,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만든 기와)중에 무엇으로 덮을지 고민하면서 청기와를 정밀하고 좋게 구워 만드는 기술을 시험해 보라는 실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유력하다. 기존에 청기와가 덮여 있었을 시 아련와를 고민한다는 것은, 더 값싼 아련와를 정전에 덮는 꼴이 되고, 편전은 이미 청기와가 있으니 격이 떨어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 후술하겠지만 사정전은 1553년( 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청기와로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어 선조 대의 사정전은 어떠했는지가 애매한 위치에 있다. [6]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 [7]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편전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8]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 [9]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 [10]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건축 부재. [11] 사진 출처 - 카카오맵. [12]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13] 창문 위쪽에 가로로 길게 짜서 붙박이로 설치하는 채광창. [14]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75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75 ( 이전 역사)
문서의 r879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