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롱소드 검술(Langschwertfechten)은 양손으로 쥐는 장검인 롱소드를 사용하는 검술을 가리킨다.2. 역사
2.1. 14~15 세기
양손으로 쥐는 롱소드는 1200년부터 있었지만, 롱소드 '검술'은 14세기에 독일 검객 요하네스 리히테나워가 동유럽의 각국을 여행하면서 익힌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가장 오래된 것이 1389년 되브링엔의 사제 한스(Hanko Doebringer)가 작성한 문서번호 MS 3227a이며, 이 문서 이후로 리히테나워 검술을 기록한 문서들과 마스터들이 확인된다. 리히테나워류 검술을 전수받은 마스터들이 게젤샤프트 리히테나워(리히테나워 협회)를 설립하여 일종의 길드를 형성하고 "공인된" 마스터들의 이름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다양한 경로로 리히테나워류 롱소드 검술이 전파되었다. 당시 리히테나워에서 가르친 것은 검술뿐만 아니라 검을 사용하는 유술, 갑주 전투술, 마상검술, 캄프링겐, 단검술을 포함한 종합무술이었다. 이는 당시에 특정 무기의 사용법뿐만 아니라 모든 싸움 방법을 다 가르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종종 리히테나워 마스터들의 책에서는 리히테나워가 아닌 다른 중세 검술인 소드&버클러 검술이나 메서 검술까지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방법을 모든 싸움의 방법을 다 다룬다는 뜻으로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이라고 불렀다. 이는 당시에 『Martial arts』라는 단어가 없어, ∼전투술, 전투의 예술, 방어의 예술, 방어의 과학으로 부르는 게 흔했기 때문이다.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피오레 디 리베리에 의해 롱소드 검술이 정립되었고, 리베리의 영향을 특히 강하게 받은 마스터로는 필리포 바디가 있다. 그 외 사이드 소드 전문으로 알려진 볼로냐의 다르디 학파 마스터들도 롱소드 기예를 일단 관련 서적에 기록해놓기는 했다.
영국에도 롱소드 검술이 존재하고, 영국만의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림 해설이 없어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길드에 속하지 않는 계통의 검객으로는 1570년에 검술서를 출판한 요아힘 마이어(Joachim Meyer)가 대표적이다.
2.2. 교양과목 및 스포츠화
16세기가 되자 인구가 밀집된 도시가 늘어나면서 좁은 도심에서는 롱소드같은 큰 무기를 호신용으로 사용하기 힘들어졌고[1] 또 전쟁터에서는 총기가 슬슬 흔해져 기사가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구도가 뒤집혔다. 그래서 파이크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방진을 형성하여 싸우고, 기사나 중기병들은 권총과 짧은 한손검으로 무장하다보니 롱소드를 휘두를 일이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에 따라 더 작고 가벼운 사이드 소드가 주력 도검이 되고 인기를 얻으면서 롱소드는 찬밥신세가 된다. 길이만큼은 롱소드에 필적한 레이피어는 아예 찌르기에 주력했으며, 검술 스타일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본산인 독일에서도 처지는 비슷했으나 그래도 워낙 롱소드 전통이 확고해서 실전검술로는 배우지 않더라도 <모든 무기술의 기본>으로써 반드시 롱소드를 교육시켰다. 현대 MMA 선수라면 누구나 복싱, 레슬링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게와 길이가 적당하고 기술이 복잡한 무기이므로 (리히테나워) 롱소드로 무술 실력을 키우고, 실전에서는 아예 커다란 츠바이핸더나 비교적 작은 카츠발거, 메서 같은 걸 휘두르라 한 것이다. 앞서 말한 마스터 요아힘 마이어가 바로 이 시대의 사람으로, 온갖 다채로운 롱소드 기술과 함께 메서, 단검, 레이피어 검술까지 총망라한 검술서를 냈다. 비교적 투박하게 베고 찌르고 레슬링하는 기법이 실린 이전 시대 검술서와 달리, 마이어 검술서에는 상대의 베기를 파훼하는 온갖 기교와 십수가지의 변형 베기도 실려있다.
그러나 스포츠화가 더욱 진행되며 찌르기를 금지하는 등 실전검술이 아닌 도장검술로써 안전에 보다 치중하는 변화를 보이게 된다. 17세기에 들어서면 독일에서조차 롱소드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다만 18세기에도 독일의 검술학교를 묘사한 판화에서는 롱소드 검술과 메서가 스포츠화된 종목인 두삭(Dussack)이 보인다. 물론 그 그림에도 몇몇을 제외하면 절대다수가 스몰소드와 같은 근대 검술을 훈련하고 있으며, 롱소드는 17세기 말에는 완전히 스포츠화되어 날이 아닌 평면으로 때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6세기의 주스팅 토너먼트 대회에서도 롱소드 검술 대회가 열렸으며, 여기에서는 방어구를 착용하고 승부를 겨루는 방식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특유의 룰이 존재하여 실제 검술이 활약하기는 힘들었다. 손과 하체 타격은 금지, 상체와 머리만 타격할 수 있으며 찌르기는 금지되었고 칼날로 쳐서도 안되고 평평한 옆면으로만 때려야 했다. 가드나 퍼멀로 타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런 안전 룰이 존재했고, 왕과 도전자 룰과 같은 게임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한 룰도 있었다. 왕과 도전자 룰이란 챔피언이 왕이고 도전자들이 왕을 상대하는데, 왕은 기회가 2번 있어서 도전자에게 한 대 맞더라도 바로 직후에 도전자를 맞추기만 하면 왕이 이긴 것으로 간주되는 룰이었다. 이런 토너먼트만 찾아다니며 참가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검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검술 마스터들은 토너먼트가 인위적인 룰로 진행되는 게임이라는 이유로 토너먼트는 검술이 아니라고 했으며, 실제로 검술 길드끼리의 친선 대결에서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고 평소 훈련하던 방식으로 진행했다.
16세기 들어 롱소드 훈련에서 찌르기는 안전 문제로 금지되었으며, 법률에 의해 연습중의 찌르기는 살인미수, 사적인 결투에서는 일종의 특수폭행으로 처벌받았다[2]. 반대로 레이피어나 사이드소드, 봉으로는 찔렀다고 문제삼지는 않았다.
검술 도장을 가진 검객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광장이나 적당한 빈터, 혹은 야외에서 지도가 이루어졌다.
당시에도 도장 검술(Schulfechten)과 실전 검술(Ernstfechten)의 차이와 인식이 있었다. 슐펙텐은 영어로 스쿨 파이팅에 대응되는 단어이며, 검술학교에서 유술기를 비롯한 여러 기술을 다칠 정도로 거는 것이나 찌르기, 강한 타격을 금지하여 다양한 룰을 이용하여 안전을 우선시하여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에른스트펙텐에서 Ernst는 실전에서의 진지함을 뜻하는 단어[3]로,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허용된 살인 실전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식이 등장한 것은 안전상의 이유로 검술학교에서는 진검이나 진검 타입의 블런트를 사용하지 않고 피더슈비어트 만을 활용하여 연습하고 다양한 안전 규정이 있었던 탓에 실전과는 어느정도 괴리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15세기에는 찌르기까지 포함해서 연습하였기에 그래도 실전 검술에 더욱 가까웠지만 16세기에는 찌르기를 일체 금지하고 봉인함으로써 일부 기술들의 변질이 이루어졌으며[4] 이로 인해 양자의 인식의 간격이 더 벌어진 감이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유행한 다르디 학파에서도, 비록 사이드소드 검술이기는 하되 도장에서는 손을 때리지 않고 몸만 때리며, 모든 자세와 기술을 다 써서 연습하지만 시합이나 실전에서는 손부터 먼저 때리고, 오른발만 앞에 내민 상태에서 싸우는 경향이 컸다고 하며 이에 따라 다르디 학파의 마스터들도 이 두 가지를 분류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2.3. 현대의 복원 시도
현재 서양 검술계의 중심이다. 과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롱소드를 기본무기로 여겼기 때문에 자료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5] 그 덕에 세계 각국에 많은 강사들이 있다.다른 무술을 하다온 경우나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접근해오는 일이 많은데 비해, 처음부터 롱소드로 시작하여 실력을 쌓은 경우가 드물어서, 메뉴얼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룹이 적다.[6] 게다가 300년 전에 계보가 끊겼기 때문에 누구를 딱히 정통이라고 하거나 맞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인터넷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그룹끼리 키보드파이팅이 벌어지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현재는 옛날처럼 방어구 없이 피더슈비어트만으로 훈련하는 곳이 거의 없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기술 연습을 하는 곳도 많으나, 스파링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는 옛 방식을 고수하는 곳은 서양 검술 단체 중에서도 ARMA와 그 중에서도 존 클레멘츠가 운영하는 IronDoor Studio와 한국의 서울 스터디그룹 정도 뿐이고, 대개 안전 문제 때문에 보호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한다. 피더슈비어트로도 충분히 피를 볼 수 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조치. [7]
대회나 토너먼트에서도 방호구를 철저하게 갖추고 피더슈비어트를 사용하여 대결한다. 대회로는 자본을 갖춘 스폰서가 후원하고 실력자들이 참여하는 미국의 Longpoint, 유럽의 Swordfish 등이 유명하다. 그런데 스폰서가 붙은 시합양상에 대한 의견도 가지각색이다.
부정적인 측에서는 보호구가 잘 갖춰져 있고, 먼저 쳐야 득점이 인정되므로, 방어나 보호에는 신경쓰지 않고 어떻게서든 더 빨리 공격을 가하려고만 하여 15세기 검술가들이 추구한 방향과 맞지 않은 양상을 보인다며 불만을 나타낸다.
긍정적인 측에서는 현재 롱소드 검술은 많은 사람들이 부상이나 사망의 위험 없이 안전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레져 스포츠의 목적이 강하고, 시합 양상도 현재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발전된 것인데, 왜 굳이 살인이 목적이었던 과거 방식에 매달려야 하냐며 반발한다.
또한 상호간 실력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보호구 없이 훈련하게 되면 상대를 다치게 할까봐 심리적인 위축이 일어나 본래 목표인 상대의 몸이 아닌 칼만 치게되거나 충분히 강한 공격을 낼 수 없게되는 부작용이 발생하며, 보호구는 앞선 단점에도 이러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유용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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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대회 SWASH 2013 하이라이트 영상 |
3. 복원된 학파
검술서가 많이 남아있고, 복원 학회나 스포츠 토너먼트 등에서 교과서삼는 학파들이다. 롱소드 자체는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전역에서 쓰였다고 추정되나, 무술로서 집대성된 건 아래 두 계통이다.3.1. 독일의 리히테나워
현재 독일의 리히테나워 유파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는 다른 유파도 많아 리히테나워 유파의 한코 되브링어(되브링엔의 사제 한스)는 다른 유파의 검술을 비난한 바 있다.[8] 따로 비난을 할 정도로 그렇게 싸우는 검객들이 많았겠지만, 다른 계열 검객들이 남긴 문헌은 현재 남아있는 전체 문헌의 20% 밖에 안 되므로 제대로 복원할 수 없는 실정이다.추세가 그랬던 것인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도 따로 책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는 검술을 배운 사람은 이해할 수 있는 구결(Zedel)을 말로서 남겼고, 이것을 한코 되브링어가 해석을 덧붙여서 1389년에 문서로 기록하였다.[9] 이후 본격적으로 리히테나워 검술서들이 간행되었다.
리히테나워 검술은 15세기까지 단일 계통으로 전수되다가[10] 16세기부터는 성 마르코 형제단과 피더페히터 등 두 검술 길드를 통해 2개의 계통으로 나뉘었다. 물론 분파가 되어 둘은 용어나 설명 방식에서 차이를 두었지만 검술의 근본 원리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리히테나워 검술은 주로 독일 남부와 동유럽에서 발전했다. 15세기 검술서는 독일어일 경우 남독일 사투리로 적혀 있으며, 피오레 디 리베리의 스승인 요한의 출생지 슈바벤도 남독일이다. 16세기 리히테나워 검술 전통의 양대 산맥을 이룬 성 마르코 형제단과 피더페히터의 경우, 피더페히터는 체코 프라하에서 창설되었다.
3.2. 이탈리아의 피오레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피오레 디 리베리에 의해 롱소드 검술이 정립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스승을 찾아다니며 검술을 배웠고 그중 독일인 스승인 슈바벤 사람 요한에게 리히테나워 검리를 전수받았었다. [11] 피오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마스터로는 필리포 바디가 있으며 그 또한 검술서를 출판하였다. 그 외 다르디 학파 사람들인 아킬레 마로쪼와 안토니오 만촐리노도 롱소드를 다루기는 다루었으나 이들의 주 골자는 사이드 소드였다.이탈리아 롱소드 검술은 독일식과 똑같은 것을 이름만 다르게 부르거나, 자세나 상태를 일컫는 명칭이 더 많아 다른 검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검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근거로는 애초에 이탈리아에 롱소드 검술을 전파한 피오레 디 리베리의 스승 중 한 명 요한[12]이 독일인이었다는 점, 이후 근대 유럽 검술이 용어까지 통일되어 각국이 같은 검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든다. 독일의 리히테나워와 이탈리아의 피오레의 차이점[13]은 단지 마스터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가르치는 스타일이 각기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국경이 오랫동안 단절되어 각국의 문화적 차이가 뚜렷한 동북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은 각국이 모두 고대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라 국경을 넘어 많은 교류를 했으며, 당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프랑스, 잉글랜드 등에 건너가 검술 도장을 차리는 등 다른 나라로 가서 활동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는 사실 또한 근거로 한다. [14]
그러나 개념이나 세부적인 교리까지 완전히 동일하진 않다. 리히테나워와 피오레는 전투영역에 대하여 접근하는 패러다임부터 다소 상이하며[15], 리히테나워의 핵심인 푈른과 뷘든 개념이 피오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팔다리 모두 있는 사람의 몸으로 양손검을 다루는 과정에서 큰 틀은 비슷하게 수렴진화하더라도 세세한 부분에선 차이가 나게 된다. 여기서 공통점만 보고 두 무술을 동일하다고 주장할지, 차이점만 보고 다른 무술로 구분할지는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3.3. 그 외
리히테나워 계통을 비난하거나 반박당하는 걸로 묘사되는 독일의 ‘일반 검술(Gemeinfechten)’이나, 피에트로 몬테의 검술 관련 구절 등, 리히테나워나 피오레가 아닌 롱소드 검술도 찾자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힘들고, 그나마 알아보기 쉬운 동작들은 리히테나워나 피오레의 기본 전술에 카운터당하는 대항군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현대 복원단체에서도 비중있게 수련하기에 애매하다.4. 사회인식과 대우
검술 학교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어떠하였는지 하나만 예로 들자면, 영국에서는 일종의 깡패 양성소로 취급되었다. 굳이 영국만이 아니더라도 몇몇 도시에서는 포고령을 내려 검술을 가르칠 수 없게 하였던 적도 있는데, 이유는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드는 <사악한 기예>를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삽화에서도 검술 학교는 창녀촌, 목욕탕[16]과 함께 그려졌는데, 이는 퇴폐의 온상으로 여겨졌던 목욕탕이나 창녀촌과 똑같이 취급되었다는 뜻이다.그래도 독일에서만은 검술가들이 제빵사, 회계사, 출판공 등 전문 기술을 갖춘 장인 그룹과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당시 장인 그룹들이 길드를 형성하고 독점권을 얻은 것과 같이 도시에서 검술 교습에 대한 독점권을 받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인 대접도 보다 나은 편이었다. 검술가 및 검술서 편찬자들의 본업을 봐도 가수, 공무원 등 중세 시민 계급이 은근히 많았다.
대개 경제적으로 성공한 자들이 책을 내고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고, 그들보다 훨씬 많은 마스터들이 배를 곪으며 객사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당시는 자기의 도장을 열고 도시에 정착해서 검술을 가르치는 자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언제까지 일해 준다는 계약을 맺고 기사나 시민,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계약이 연장되지 않으면 떠나야 했다. 명성을 떨치거나 잘 알려진 마스터들은 사정이 나았지만 그렇지 못한 마스터들은 마땅한 일자리도 찾지 못한 채 구걸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6세기에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해져서 검술 수요는 사이드 소드, 레이피어가 다 가져가 버리고, 롱소드 검술은 구시대의 유산으로 여겨져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물론 레이피어도 인식은 좋지 않아서 영국에선 레이피어와 버클러를 차고 돌아다니는 불한당들을 스워시버클러(swashbuckler)라고불렀는데, 움직일 때 버클러가 칼과 부딪혀 나는 쇳소리에서 유래된 말이다.
5. 국내 수련 단체
5.1. 성향
본고장인 서구권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국내에도 소규모나마 연구 및 수련 인구가 있다. 전부 독일의 리히테나워를 메인으로 다룬다. 수련 성향은 독일 르네상스 검술의 원형 보존을 위해 노마스크 대련을 지향하느냐, 무술 원리 자체를 탐구하기 위해 펜싱 마스크 및 히마 재킷, 경쟁형 스파링 등 현대 문물이나 여타 지역 무술까지 다루느냐 등등으로 갈린다. 검리 지키면서도 대련에 활발하고 피지컬도 잘 갖춰진 동유럽 그룹이나 펜싱 선수 출신 마틴 파비앙의 모습을 대체로 이상적인 모델로 삼는다.특기할 점으로, 판이 워낙 좁고 장비 구하기가 힘들다보니 장비 구매대행, 자체제작을 제공하는 회원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양질의 HEMA 장비가 고가 라인업은 유럽에서, 저가 라인업은 중국에서 주로 나오기 때문이다. 직구 시 중국어와 불친절한 타오바오 인터페이스의 장벽, 또는 유럽 도검사들과 영어를 제 2 외국어로 쓰며 메일을 주고받는 상황+주문에 수개월이 걸리는 난점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해당 과정을 도와주거나 미리 쟁여뒀다가 싸게 팔아주는 동호인이나 셀러들을 볼 수 있다. 약간 다른 장르지만 피더슈비어트와 비슷한 물성의 카타나[17] 관련 정보도 찾아볼 수 있고, 보호구 유통, 자체제작만 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보호장구는 비싼 제품으로 가면 숨막히게 비싸기 때문에 중국 직구/구매대행 도움을 받는 게 가성비가 좋다. 또한 피더슈비어트 관련 정보 구하기 힘들다보니 상기한 ‘스파링 카타나’ ‘카타나 피더’는 물론 중국-조선 쌍수도 피더 같은 것도 구하는 등, ‘피더와 유사한 지향점을 가진 탄성강 연습용 검’ 전반에 대한 정보를 구하러 의외로 다양한 분야 무술인들이 모인다.
단체의 배경과 성향, 주 회원 및 관심층에 따라 분위기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구 ARMA 멤버 중 실전지향파가 많이 들어간 HFFK에선 00-10년대 인터넷 분위기(…)와 함께 중국, 대만, 독일 등을 가리지 않는 고문헌 해석이나 풋워크, 공방 등에 대한 진지한 수련 팁도 볼 수 있고, 비교적 연령층이 젊은 서양검술협회에서는 미성년자, 20대 초 회원이나 검도, 현대 격투기, 스포츠, 밀리터리/택티컬 등등 다양한 분야에 발 걸친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또한 상술했듯 무술 판이 워낙 좁다보니 발 넓은 멤버들끼리 서로 아는 경우도 흔하고, 이런저런 무술 하다 온 사람들도 흔하다.
전반적으로 고학력자나 다국어 구사자, 전문가까진 아니더라도 역사, 외국 문화 등에 폭넓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장르의 특성상 각 단체 인스트럭터들도 다 원전을 번역하고 복원하는 고생을 거쳤고, 조금이라도 고급 정보를 얻으려면 영어, 중국어 정도는 깔려있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 롱소드의 원전은 중-근세 독일어라 보통 사람들이 쉽사리 알만한 분야는 아니다.
5.2. 수련 단체 목록
- ARMA Korea 카페 - 미국에 본부를 둔 르네상스 무술 단체인 ARMA의 한국 지부다. 국내 관련 단체 중 가장 오래되었다. 이름대로 중세-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무술이라면 독일, 이탈리아, 이베리아 등 계열과 무기를 가리지 않고 수련하지만, 세이버 같은 근대 검술과 아시아 등 다른 지역의 검술은 다루지 않는다. 시합보다는 연구 중점적이며, 그만큼 당대의 고증에 따른 수련법(보호구를 사용하지 않는 노마스크 스파링)을 최대한 지향한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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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소드검술 마이너 갤러리폐쇄. 하지만 해당 갤러리에서 ARMA Korea 일부 멤버들이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으며, 성향에 따라 아래의 두 단체를 열거나 옮겨간 멤버들도 많다.국내 서양검술판 떡밥이나 밈 같은 것도 대부분 근간을 구 롱갤에 둔다.
- 고전검술한국연맹(HFFK) (구 Gesellschaft Schwertmann(게젤샤프트 슈비어트만)) 카페 - 과거 다년간 ARMA Korea에서 수련한 멤버들이 검술 해석과 수련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탈퇴 후 설립한 단체다. OldSwordplayer( 채널)가 인스트럭터로 있다. 진검으로 싸우는 실전을 시뮬레이팅한다는 목적에 따라 적극적으로 보호장구를 사용하며, 동유럽쪽 HEMA 그룹들과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장도를 사용하는 명나라의 신유도법[18] 및 조선세법, 본국검 등 조선 검술도 수련하며, 근대 세이버 검술, 브로드소드 검술 등도 다룬다. 상세한 건 해당 단체 인스트럭터 및 고참 회원들의 특기별로 다양하게 접할 수 있가. 연구 단체로서 성향이 강하면서도 스파링 및 대타, 타 무술 연구에도 열려있다. 궁극적으로 '공격과 방어의 기예'가 성립하는 무술이라면 전부 좋게 본다. 게젤샤프트 슈비어트만으로 오래 활동했으나, 동양검술 위주의 제 2 훈련도감 등 친선관계 단체들과 연합해서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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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검술협회(Korea HEMA Association)
홈페이지,
카페,
오픈채팅방- 유튜버이자 검술 연구가인
김상윤이 설립한 단체다. 세션은 유료 강습으로 진행되며, 르네상스 무기들과 근대
세이버도 다룬다. 그 외 유튜브에는 가벼운 흥미성 컨텐츠도 올라오는 편이다. 회원 성향 및 배경에 따라 수련 세션에서 르네상스 무기부터 장병기, 동아시아 도검까지 다양한 무기를 볼 수 있으나, 기본 수련과정은 리히테나워 롱소드 베이스다. 초보자에게는
피더슈비어트를 대여해주며 진행한다. 수련 방법론은 HFFK와 마찬가지로 마스크+글러브 스파링까지 포함하며 노마스크로는 대타 내지는 카운터드릴을 주로 한다. 남는 시간에는 자유대련을 하거나 다양한 배경의 회원들끼리 이종무기 교류를 하기도 한다.
HFFK 회원 놀러오는 날HFFK와 마찬가지로 기술 숙련도에 따른 자체 단, 급이 있다.
6. 관련 항목
[1]
어느 정도였냐면 현대 한국의 다세대주택 사이의 좁은 골목이 당시에는 평범한 수준의 길이었다. 이런 곳에서 1.2m가 넘어가는 롱소드를 자유롭게 휘두를 수는 없었다. 미드
왕좌의 게임의 킹스랜딩이나 에소스의 미린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층 이해하기가 쉽다. 민간용으로 찌르기 좋은
레이피어가 흥한 데에는 이런 환경의 영향도 있다.
[2]
여담으로 독일에서 검술 결투 중 살상이 살인죄로 인정받게 되는 건 한참 뒤, 18세기였다.
[3]
Ernest, Honest
[4]
Kurtzhau라는 기법이 그러하다. 15세기의 안드레 파렌하잇 매뉴얼에서는 상대 검 아래쪽으로 돌려서 바이코니오로 끝나는 찌르기이지만, 16세기 후반의 요아힘 마이어 매뉴얼에서는 막타 때 찌르는 대신 더 높이 칼끝을 들어서 상대의 검을 가드로 받아내면서 뒷날베기로 끝낸다.
[5]
15세기에 작성된 고문서 교본들은 대충 쓰여있거나, 근대 검술서들처럼 체계적이지 못해 길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가장 상세하게 쓰인 요아힘 마이어의 검술서(1570년)를 중심으로 다른 서적의 내용도 서서히 밝혀졌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6]
매뉴얼대로 하는 그룹 중에서는 동유럽쪽 그룹들 특히
체코와
슬로바키아 그룹이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7]
실제로 2023년, 모 단체에서 노마스크 스파링 도중 찌르기를 잘못 맞아 큰 부상을 당한 일도 있었다. 다치면 하소연할 곳도 없고...
[8]
예컨데 한코는 먼 거리를 유지하고 길게 뛰어들어가거나 상대의 무기를 단순하게 막거나, 의미없이 여러 번 휘둘러대거나 속임수 공격을 쓰는 검객들을 Leychmesiter(시체사범, 송장사범)라고 일컬었다.
[9]
문서의 작성 시기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의 생존 시기에 관하여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한코 되브링어가 자신의 책 MS 3227에서 리히테나워를 언급하면서 당시 고인에게 붙이던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쓰여지던 시점에는 리히테나워가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며, 1960년대의 연구자인 힐스도 되브링어 집필 당시 리히테나워가 생존해 있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었다. 이로 인하여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는 14세기에 활약한 가장 오래된 롱소드 검술가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HEMA 계통의 유명한 연구자인 크리스티안 토블러는 MS 3227이 제작연도가 1389년으로 추정된 것은 책에 1390년부터의 종교 축일 달력이 실려 있기 때문이었지만, 단지 종교적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의 달력이 실린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책의 구조가 여러 사람들의 진술을 한데 모은 형태이므로 한사람이 쓴게 아니라 이름모를 다른 사람에 의해 집필된 문서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MS 3227에는 "니콜라스 폴, 1494"라는 낙서를 근거로 리히테나워가 15세기 인물일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래서 중세-르네상스 검술 위키피디아인 Wiktenaur에서는 한코 되브링어와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를 15세기 마스터로 재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반론도 존재하는데, MS 3227을 제외하고 리히테나워 구결(Zedel)이 실린 가장 오래된 문서가 1410년대에 작성되었으므로 리히테나워 검술이 어느 정도 퍼지려면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는 기간이 있어야 함을 감안해야 하며, 15세기에는 비밀스럽게 전수된다는 구결 자체가 상당히 대중적으로 퍼져있던 것을 감안하면 리히테나워의 사망 년도 자체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1420년 이전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요하네스 리히테나워가 14세기 마스터라는 것은 여전히 정설로 취급되고 있다.
[10]
처음으로 문서를 남긴 한코 되브링어의 내용과 같이 5가지의 기본베기, 4가지의 자세와 4가지 버셋젠 등 개념과 가르치는 방식등이 동일
[11]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이름을 자신의 책인 전투의 꽃에 기록하여 알 수 있다.
[12]
독일계의 대종사인 요하네스 리히테나워일 가능성이 높다고 유력하게 추정된다
[13]
바인딩과 5가지 베기는 독일계 서적에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다루며, 칼싸움 중 쓸 수 있는 유술들에 대해서는 피오레가 조금 더 자세히 취급하는 등
[14]
이탈리아 사람으로 영국에서 도장을 차린 살바토레 파브리스(Salvator Fabris)나, 네덜란드 사람이면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티바울트(Gérard Thibault d'Anvers)등이 있다.
[15]
리히테나워는 칼이 상대 손에 닿는 거리인 안 빈든(An Binden)에서 시작하여 몸을 벨 수 있는 크리크(Krieg)의 거리에서 유술을 포함한 모든 방식의 싸움이 일어난다는 개념이며, 피오레는 검으로만 싸우는 넓은 검술과 유술이 활용되는 좁은 검술로 나눈다.
[16]
당시엔 목욕탕에서
매춘 혹은
원나잇 스탠드가 흔히 벌어졌다.
[17]
SIGI Forge의 시기 카타나 및 서양검술판 확대 이후로, 국내 도검사에서도 금속이되 안전 대련이 가능한 카타나 훈련용품 제작을 시도하고 있다.
[18]
기효신서 장도편과 거기서 파생된 단도법선 등의 민간도법, 조선의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진 도법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