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20:19:57

개천 제14호 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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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평안남도 정치범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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价川第十四號管理所

Kaechŏn 14th Internment Cam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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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개천 수용소_구글 어스.png
▲ 개천 제14호 관리소의 위성 사진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다른 이름 개천수용소(价川收容所)
설립 1959년
목적 ✔ 체제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 응징
✔ 사회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체제 오염 방지
정치범 활용을 통한 노동력 착취
규모 부지면적 155㎢[2]
수용인원 15,000명
상위 조직 파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보위성 휘장.png 국가보위성 농장감시국
운영 여부 운영 중
주소

개천 제14호 관리소
( 평안남도 개천시 외동리)[3]

1. 개요2. 특징
2.1. 참고 링크
3. 기타

[clearfix]

1. 개요

북한 정치범수용소. 평안남도 개천시 외동리에 있다. 일명 '개천수용소'로 불린다.[4]

대동강을 따라 대건선이 통과하며 외동역이 있다.

2. 특징


바로 옆의 개천 제18호 관리소와 달리 100% 완전통제구역으로 운영되고 있다.[5]

대건선 외동역 인근에 있으며 대동강이 수용소 남쪽을 가로막고 산이 수용소 북쪽을 가로막고 있다. 개천시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넓이 155㎢, 수용인원 1만 5천 명.[6] 이 155㎢라는 면적이 서울특별시의 1/4이며 개천시 전체의 면적의 1/5 수준이기 때문에 사실 신뢰하기에는 충분히 무리가 갈 만한 수치지만, 독일 슈피겔 지에서 위성 사진으로 표시한 명간 제16호 관리소의 충격적인 넓이를 보면(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고) 이 넓이가 신뢰할 만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동강이 있기 때문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18호 수용소인 개천 제18호 관리소와는 직선 거리상으로만 놓고 보면 불과 3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 이유는 수용소의 분리 작업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수용소 인근에서 대동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대건선의 철교를 건너는 것뿐이다. 그쪽에도 수용소가 하나 있다는 문제만 빼면.[7]

장진호 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군이나 영국군도 이곳에 수용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하지만[8] 한국 전쟁 당시 포로 관리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51년부터 포로 관리는 100% 중국군에 이관되었다. 이미 20명 이상의 자발적 미송환자를 확보한 중국의 뜻을 어기고 북한이 임의로 수십 년 동안 미국인 포로를 억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9]

오히려 월북 미군이나 석연찮은 이유로 외국에서 실종 납치된 외국인이 여기에 들어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80년대 월북한 미군의 경우 다른 월북 미군과는 달리 대외 활동도 없었으며, 미국 가족들에게 대동강에서 수영하다 죽었다는 통보와 함께 유해나 묘지 사진도 없이 처리된 경우도 있는 걸 보면...

출처. 김용(가명)이 탈북에 성공한 후 인터뷰한 기사. 신분을 밝히지 않기 위해 쓴 가명이다. 그가 살아 남을 수 있던 건 14호로 수감되기 전 친분이 있던 사람이 손을 써서 1~2년새에 18호 혁명화 구역으로 옮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18호에서도 혹독한 취급을 받다가 어머니가 사망한 계기로 탈출해서 탈북에 성공했다. 더 상세한 증언은 2000년 5월 월간조선에 실린 김용삼[10] 기자와의 인터뷰를 참고하자. # 현재 신동혁의 증언들이 거의 거짓으로 밝혀진 마당에[11] 완전통제구역 출신 수감자 중 유이한 생존자이다.[12]

링크를 따라가면 여러 가지 충격적인 일화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고 처절한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체육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농구 선수가 있는데 아버지가 지주였던지라 이 수용소로 들어오게 되었다. 수용소의 참상은 정치범수용소/북한 항목에 나와 있으니 잘 알겠지만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한데, 이 농구 선수가 소 꼬리로 만든 채찍을 물에 삶아서 먹었다. 그러자 열 받은 감시관이 죽도록 매질하고 변소에서 회충을 억지로 먹인 것. 결국 그는 3일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신동혁이 쓴 <북한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 밖으로 나오다>라는 책 역시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동혁 항목에 보충된 것처럼 신동혁은 실제로는 개천 수용소 인근이지만 혁명화구역으로써 덜 가혹한 개천 제18호 관리소에 수감되었으며, 개천 수용소에 대한 그의 증언 일부가 심하게 과장되었음을 본인이 시인하였다. 이후로도 14호 수용소 출신이라고 했다가 다시 18호 수용소 출신이라고 하는 등 주장이 계속 바뀌고, 다른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거짓말이 여럿 드러나면서 현재로서는 거의 신빙성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는 칼럼에서 거짓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고 신동혁을 비판하며 그가 일반적인 수감자가 아니라 해제민 출신으로 보았다. # 해제민이란 수용소에서 죄수 신분은 벗어났지만 북한에서는 주소를 두려면 받아줘야 돌아갈 수 있는데 온 지 오래되거나 범죄자라 받길 거부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계층을 말하는 것으로, 일단 죄수가 아니기에 천민 취급은 받긴 하지만 일단 북한의 공민으로 인정은 받으며 수감자보다는 덜 감시 받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형기란 말을 쓸 수 없는 게 북한 수용소는 수용자가 무슨 죄목으로 잡혀 왔는지, 몇 년을 살아야 하는지 형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여러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신동혁이 18호 관리소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며, 그가 3살이던 1985년 대규모 사면이 있을 때 사면된 것으로 보인다.

2016년에 사격장과 양식장을 설치하는 등 시설을 확장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했다. #

2.1. 참고 링크

3. 기타

  •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의 등장인물 송중호(코드명 베를린)가 탈북 실패 후 수감되었던 장소로 나온다. 그렇게 수감되고 25년 만에 송중호는 추종자들과 함께 폭동을 일으켜 경비들을 살해한 후 수용소를 나왔다.

[1] 'internment'를 쓰는 이유는 개천교화소가 있기 때문이다. [2] 수용소를 확장했다는 의혹이 있다. [3]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평안남도 개천군 봉동면 중리, 오봉리, 덕천군 잠상면. [4] 개천교화소는 별개의 시설로서, '개천 1호 교화소'이다. 이 두 시설은 대략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5] 완전통제구역은 처음부터 수용자를 가둬두고 착취하다가 죽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나치 독일의 절멸수용소와 동일한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수감된 사람은 처음부터 짜낼 수 있을 때까지 짜낸 다음 죽도록 방치해두는 노예로 취급되며, 이는 수감된 경우와 현지에서 태어난 경우 모두 동일하다. [6] 5만 명이란 설도 있는데 산악지대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무리가 있다. 출처 [7] 개천 제18호 관리소의 경우 본래 완전통제구역으로 여겨졌으나 이곳에서 석방된 뒤 탈북, 한국에 온 김혜숙은 이곳이 혁명화구역이라고 주장한다. 완전통제구역일 경우 김씨 일가의 아주 특별한 사면 조치 외에는 살 길이 전혀 없기 때문에 증언이 맞다면 석방되어 나온 만큼 혁명화구역이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다. 참고로 개천 제18호 관리소는 2013년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 해체되었다고 결론이 났지만, 이후 2006년에서 2007년 사이에 개천시 쪽으로 축소 이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8] 증언 당사자도 직접 보거나 이야기한 게 아니라 그냥 풍문으로 들은 것. [9] 물론 한국 전쟁 전후로 극동에서 격추된 후에 석연찮은 이유로 미귀환한 조종사들은 많다. 이들 대부분은 러시아에서 억류되었다는 의혹과 증거가 있다. [10] 먼 훗날에는 반일 종족주의 공저자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을 설파하는 뉴라이트 인사로 전락했지만, 이는 이 기사를 쓴 지 거의 20여 년 후의 일이라 이 기사의 신뢰도를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참고로 황장엽 망명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기자가 바로 젊었을 적의 김용삼이다. [11] 심지어 후술하듯 신동혁은 혁명화구역 출신이었고, 3살 때 사면되어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실질적인 기억도 사실상 없는 수준이었다. [12] 다른 한 명은 요덕 제15호 관리소에 수감되었던 김영순. 그녀는 김정일의 내연녀 성혜림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1970~1978년까지 수용소 신세를 져야 했는데, 사실 그녀는 첫 5년 동안은 혁명화구역에서 수감 생활을 했고, 완전통제구역에 있던 나머지 3년 동안은 파견근로자로서 작업반장으로 일했기에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더구나 김영순의 증언은 극히 간략한 수준이다. 완전통제구역의 실상에 대한 증언을 남긴 또 다른 사람으로는 완전통제구역과 관련하여 본인이 그린 삽화를 곁들일 정도로 상세한 증언을 남긴 책을 출판한 안명철도 꼽을 수 있지만 이쪽은 보위부 요원이자 수용소 경비원이었지, 수감자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