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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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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제18호 관리소 价川第十八號管理所 Kaechŏn 18th Internment Cam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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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 제18호 관리소의 위성 사진 | |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다른 이름 |
북창수용소(北倉收容所) 득장수용소(得場收容所) |
설립 | 1956년 |
연혁 |
북창 제18호 관리소 (1956~2007) 개천 제18호 관리소 (2007~ ) |
목적 |
✔ 체제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 및
응징 ✔ 정치범을 격리하여 체제 위협 방지 ✔ 정치범의 강제노동을 통한 착취 |
규모 |
부지면적 73㎢[1] 수감인원 23,800여 명(2024년 6월 기준)[출처] |
상위 조직 | 사회안전성 교화국 |
운영 여부 | 운영 중 |
주소 |
개천 제18호 관리소 (
평안남도
개천시 동림리)[3]
|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평안남도 개천시 동림리에 있다. 일명 '북창수용소' 또는 '득장수용소'로 불린다.초기 위치는 개천군 봉창리였다. 이후 1984년쯤 봉창리가 북창군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2006년에서 2007년 사이에 평안남도 개천시 동림리 지역으로 축소 이전되었다. 북한인권백서 2021[4]
대동강을 따라 대건선이 지나며 봉창역이 설치되어 있으며 득장선 석산역이 동쪽에 있으나 이어지지 않는다.
2. 특징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중 요덕 제15호 관리소 일부와 함께 둘뿐인 혁명화구역이다.[5] 다만 해당 수용소 내부에도 특별한 사유로 인해 수감된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들을 분리해두는 구역이 있다고 하며 바로 옆에 100% 완전통제구역인 개천 제14호 관리소가 보너스로 있는 만큼 이 곳을 혁명화구역으로 하고 여기서 더 악질이다 싶은 정치범을 개천 제14호 관리소로 돌렸을 가능성을 점치는 전문가도 있다.이 수용소의 특징은 바로 사회안전성에서 관리한다는 것이다.[6] 사회안전성은 우리나라의 경찰과 비슷하며 남한의 교도소에 해당하는 ''교화소"를 운영한다. 즉 사회안전성이 관리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교도소와 정치범수용소의 중간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수용소는 정치범만 수감하지 않고 경제범 같은 다른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수감대상이 된다. 대표적으로 쇳물 처형 주장으로 유명한 이순옥.[7]
신동혁이 이 곳에서 태어났는데 완전통제구역인 14호 관리소에서 나왔다고 거짓으로 미국에서 증언을 하고 책을 두 권 냈다가 문제가 되었다. 인권 유린의 인세 지옥이지만 굳이 서열을 매기자면 14호 관리소등 완전통제구역 > 18호 혁명화구역 > 18호 해제민 구역 정도 된다. 해제민은 18호 수용소 처럼 혁명화구역에서 모범수와 가족들을 뽑아 사회로 석방시켜주진 않고 수용소 내에 다른 구역에 배치해서 비록 천민 같지만 혁명화구역보다는 조금 나은 대우를 해주며 일단 북한의 공민으로 인정은 해준다고 한다. 그러기에 학교도 있고 탈출도 용이한 편. 신동혁도 3살 때 있던 대규모 석방 때 석방되어 외부에서 학교도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신동혁이 18호 해제민 출신이면서 14호 출신이라고 거짓 선전을 하여 혁명화 구역 출신자들이 그를 비난한다.
행정구역은 북창군 소속이긴 한데, 인구조사에선 득장지구 소속으로 잡힌다.
무용가 최승희와 안성희 모녀도 이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승희의 제자로 무용가로 활동하다 탈북한 김영순이 "최승희와 그녀의 딸 안성희가 이곳에 끌려가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김영순은 성혜림의 절친한 친구였고, 성혜림이 김정일 관저들 중 하나로 갈 때 그 사실을 통보한 유일한 사람[8]이었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요덕수용소에 10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운 좋게도 풀려나오는 데 성공했고, 수용소에서 겪은 상당한 고생 때문에 이미 북한 체제에 대해서 진절머리가 나서 남한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해제되어 탈북한 김혜숙은 자신의 책 <눈물로 그린 수용소>에서 이곳에서의 일을 다뤘다. 그 책의 내용을 보면 여긴 그나마 수용자들도 조금씩이나마 노임(월급)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미역 등의 부식품을 사서 조금씩 먹기도 했으며, 닭이나 돼지 같은 가축들도 개인 집에서 키울 수 있어서 보위원들에게 뇌물로 주거나 옥수수 등으로 바꿔먹기도 했었다고 하는데, 다른 수용소에 비해서는 그나마 대접이 덜 가혹했던 듯 하다.
여담으로 이 항목은 현재 북한에 존재하는 관리소 중 가장 늦게 작성되었다. 한편 이 수용소도 회령 수용소처럼 사실상 폐쇄된 상태였다가...[9] 다시 수용소가 재개한 정황이 인공위성을 통해 포착되었다. #
3. 기타
- 현재 유일한 완전통제구역 수용자 출신 김용(가명)이 14호 관리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4호 완전 통제구역에서 과거 인맥의 도움으로 18호 혁명화 구역으로 이송된 후의 탈북으로 14호 관리소 시절엔 어디에 수감되었는지 감각도 없었다고 한다. 완전통제구역 출신 경험자가 2명 더 있는데 완전통제구역 안명철 씨로 수감자가 아닌 보위부 출신이고, 김영순은 혁명화구역 수감자로써 완전통제구역의 작업반장으로 일했다.
-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최장기수 탈북자가 18호 관리소 출신이다. 그 주인공은 김혜숙인데, 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 월남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작 만 13세였던 1975년에 가족들과 수용소에 끌려간 후 2002년까지 27년간 18호 관리소, 정확히는 혁명화구역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나고[10] 한동안 북한에서 살다가 2005년에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북한에서 돼지를 사오라는 중국인 식당 주인의 지시에 다시 북한에 들어갔다가 2007년 10월에 다시 잡혀 6개월 노동단령형을 선고받고 18호 수용소에 재수감된 후, 2008년 3월에 탈옥하여 2009년에 한국에 입국했다. 참고로 그녀의 두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은 2011년 기준으로도 36년째 18호 관리소에 수감 중이었다고 한다. 김혜숙의 증언 수기 탈북자들 중에서는 조작이라고 보는 의견과 18호 수용소가 타 수용소 대비 대우가 나은 것은 맞으니 조작은 아니라는 의견이 공존하는 중. #[11]
- 김일성의 외가쪽 먼 친척 강명도는 혁명화 구역 18호에 수감되어 혁명화 기간을 거쳤다가 복귀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고위층은 혁명화로 내려가도 6개월 ~ 1년이면 한 두 단계 직급이 강등되어 복귀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반 수감자처럼 인권유린을 심하게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 일단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고위간부들을 수용소에 보냈다가 풀어주는 것은 "일반주민들의 삶을 지켜보고 체험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특권층으로 혜택을 누리는지 되새겨보고 정신차리고 충성을 다하라"는 목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딱히 심한 인권유린은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 강명도가 자신의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18호 관리소 창고장으로 10년 이상 근무하다 수감된 황보천이 자신에게 "18호 관리소는 1958년 전후에 세워졌고, 수용자의 70%는 월남자 가족 및 친척들이며 나머지 30%는 악질범들이다." "18호 관리소에는 황해남북도 출신의 월남자 가족이 많았으며, 수감자 대부분은 죄 없고 착한 사람들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
- 장성택 처형 사건의 관련자들과 실패로 끝난 2019년 북미정상회담 책임자들이 이곳에 별도로 지정된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
- 수용소가 처음 생길 무렵 봉골지구라는 곳에 ‘8월 종파마을’이라고 불리는 통제구역이 있었다고 한다.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보이는데, 1동 2세대 20가구 정도 있었으며, 원래는 타 수감자들에 비해 대우는 굉장히 좋았으나 60년대 말[12]에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한다. #
[1]
울릉도와 동급이고, 유럽의
미니국가
산마리노보다도 넓다.
[출처]
데일리NK
[3]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평안남도
개천군 봉동면(군면리 대폐합 이전에는 개천군 조양면 동림리)
[4]
통일연구원에서 발간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데일리NK에서는 '개천 제17호 관리소'가 따로 있고 '북창 제18호 관리소'는 여전히 존재한다면서 상충되게 분석하고 있다.
기사(데일리NK)
[5]
수용소도 혁명화 구역과 완전통제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완전통제구역에 수용된 남자들은
핵실험용 지하 땅굴 같은 위험한 공사장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애초에 이곳이 완전통제구역이란 명백한 증언은 없다. 왜냐면 요덕이야 면적이 상당히 넓어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눌수 있지만 여기는 그리 넓지 않다.
탈북자가운데 김혜숙씨나
강명도는 북한에 있을 때 18호 관리소에 수감되었다고 증언했다. 혁명화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석방이 설명되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강명도는 북한에 있을 때 권력을 가지고 못된 짓을 일삼아(대외 무역 사업을 하면서 김정일을 사칭해서 막대한 외화를 축적했고 남한으로 탈북할 때도 한 몫 챙겨서 왔다.)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하며, 수감된 기간도 김혜숙씨보다는 훨씬 짧았거니와,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한 수감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석방되었다는 증언이 존재하나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화교육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증언이 존재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통제구역에서는 그런 교육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혁명화구역이란 것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김씨 일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는 가에 대한 것을 알아야한다는 점은 필수사항이다.
[6]
14호 관리소,
15호 관리소,
16호 관리소,
22호 관리소는
국가보위성에서 관리, 통제한다.
[7]
2004년 '정치범수용소에서 기독교들에게 녹인 쇳물을 부어 죽인다'는 거짓 증언으로
미국 의회(그녀의 거짓 증언에 낚여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다)와
미국 국무부(북한 인권 보고서에 쇳물 처형을 집어넣었다)까지 낚은 여성 탈북자로, 정체는 경제범으로 수감된
사기꾼이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해당 관리소에 수감된 것으로 보이는데, '평안남도 개천시에 있는 사회안전부 제1교화소' 출신이라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대략적으로 18호 관리소에 수감된 것이 확실시된다. 18호 관리소에 경제범뿐만이 아닌 정치범도 수감된다는 것을 악용해 거짓 증언을 한 셈.
[8]
당시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한다.
[9]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보고로 서울신문에서 보도했다.
[10]
사실 이는 그녀가 결혼 허가까지 받을 정도의 '모범수'였던 것도 있다.
[11]
해제민의 존재도 댓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12]
김일성이 현행 북한 체제를 확립한 시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