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5f5f5,#050505><colcolor=#333,#ddd> 강경대
姜慶大 | Kang Kyungd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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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2년 2월 4일 |
서울특별시 | |
사망 | 1991년 4월 26일 (향년 19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학교 정문 앞 거리[1] | |
사인 | 폭행 치사 |
학력 |
휘문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 경제학 / 명예학사) |
부모 | 아버지 강민조, 어머니 이덕순 |
형제자매 | 누나 강선미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학생 운동가이다. 노태우 정권 시기 명지대학교 학원 자주화와 군사 정권 타도 운동[2]에 참여하여 시위를 하다가 입학 2개월도 되지 않아 전투경찰의 집단구타로 인해 사망하였다.
2. 생애
2.1. 학생 운동
1972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90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재수하여 1991년 명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고서 민중가요 노래패 '땅의 사람들' 에 가입해 활동했다.1990년 3당 합당 이후 학생운동 세력은 학생운동은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비롯한 학내 투쟁을 사회변혁을 운동하는 전진기지로서 삼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학내 투쟁이 주요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노태우 정권을 비롯한 보수 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학생운동 세력은 이런 상황에서 잘못된 정세 판단으로 말미암아 더 과격한 투쟁이 변혁의 관건이라고 판단하고 급진화·과격화 한다. (불과 다음해 소련이 해체되었다.)[3]
학생운동의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등록금 인상 반대를 위시해 학내 문제 해결을 주장하면서도, 학교 밖으로 진출해 가두를 점거하고서 투쟁하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저항하는 방식이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당국이 백골단을 비롯하여 폭력을 이용해 과잉진압하는 시도를 반복했고 학생운동을 공안 정국으로 몰아가 탄압한 작태는 학생운동이 급진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학생운동은 여전히 가두 투쟁 중심이었고 엄숙주의가 혼재하여 준군사조직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991년 3월 22일 명지대학교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면서 가두를 점거하고 화염병 투척 시위하다가 이것을 추적해 학교 내에 불법으로 진입해 폭력을 휘두르던 경찰관들이 쏜 최루탄에 의해 안면을 부상당하기도 했다.
1991년 4월 24일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면서 연세대학교 집회에 참석한 후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경찰관에게 불법으로 연행당했고, 이에 그는 등록금 시위에 참가할 당시 시위대의 퇴로와 비상 탈출로를 확보하려는 정찰조 역할을 맡았다.
2.2. 죽음
이틀 뒤인 4월 26일 명지대학교 앞에서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가 개최되었고, 백골단을 위시한 전경이 쇠파이프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면서 시위 진압을 시작하자 강경대는 학교 쪽으로 후퇴하고자 높이 1.5m 담을 넘으려다 경찰관 5명에게 붙잡혀 쇠파이프로 두부에 심각한 타박상을 입고 방치되었다. 이 광경은 다른 학생들에게 즉시 목격되어 2층 보건실로 옮겨졌으나 성가병원으로 후송 중 사망했다.당시 강경대를 부검한 박동국 성가병원 외과과장은 오른쪽 눈썹 위가 둔기로 맞은 듯 사선 방향으로 7cm가량 찢어졌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사후 학생들은 강 군의 시신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영안실을 지키며 시위를 벌였고, 그의 주검은 망월동 시민묘지 제3묘역( 망월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3. 시위와 분신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4월 27일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사건을 두고 문책해 당시 내무부 장관직에 있던 안응모를 경질시켰고, 서울지방검찰청은 경찰로부터 강경대를 살해한 서울특별시경찰국 4기동대 94중대 3소대 소속 이형용 일경(22), 김영순 상경(22), 장광규 상경(22), 임천순 상경(22) 등 전경 4명의 신병을 넘겨받고, 이들 외에 같은 소대에 소속된 김형두 상경이 강경대 구타치사에 가담한 사실을 알아냈다. 이어 다음날에 강경대 살해전경 5명의 구속영장을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아 구속을 집행했다.4월 27일부터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연세대학교에서 규탄대회를 벌였고, 이후 부산, 광주 등 전국 20개 대학에서 강경대의 폭행치사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4월 29일 오후 6시 연세대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군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폭력살인정권 규탄 범국민결의대회’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규탄집회가 열렸다. 범국민결의대회 참석자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대국민 공개 사과와 내각 총사퇴, 이종국 치안본부장 등의 책임 경찰간부 구속을 요구했다.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교문을 나가 경찰의 저지를 뚫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일부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폭력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같은 날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 집회 중 분신하였고, 이어서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 총 9명이 잇따라 분신하는 이른바 ' 분신정국' 이 조성되었다.
한편 국민연합,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신민당 등 44개 단체 및 정당으로 구성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는 5월 4일까지 강군 추모 기간 중 각종 규탄대회와 추모행사를 열기로 하였다. 범대위 측은 5월 2일 발표한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현 상태에 대한 본질을 직시하지못한 채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이 진정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진다면 국민에게 공개 사과하고, 공안내각 총사퇴와 내무부장관 등 관련자 5명 구속, 백골단 해체 등 3개의 요구사항에 대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이들은 1991년 5월 4일 오후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4. 폄하 발언
1970년대 유신 독재에 반대했으나 당시 분신정국에 대해서 냉소적인 원로들의 망언도 잇따랐다. 대표적으로 김지하는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썼으며, 연세대학교 김동길 교수는 대규모 서양문화사 교양 강의 중에 강경대를 직접적으로 폄하했다.[4]폭행 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어린 나이에 뭘 알아서 데모를 나갔겠느냐는 식으로 폄하했고, 이것을 학생들이 교내 대자보로 비판하자 결국 5월 8일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학생들이 교실에서의 강의 내용을 갖고 스승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현실에 배반감을 느껴 결국 사표를 낸다"고 발언했다.[5] 당시 <서양문화사 강의를 듣는 한 연세대 학우>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대자보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김 교수가 지난날 29일 1교시 서양문화사 시간에 '입학한 지 2개월 된 신입생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얼마나 느끼고 행동했길래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가?', '그는 배후조종한 선배들에 이끌려 시위 도중 도망가다가 맞아 죽은 것일 뿐', '강씨를 배후조종해 죽게 만든 선배들은 내빼고 난 뒤 그를 다시 열사로 만들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 김 교수 특유의 비약 논리로 강씨의 죽음을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하찮은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출처: 한겨레신문 1991년 5월 2일자.
다만 이는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강경대는 고등학생 때부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농성 지지 방문 등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을 전개해 온 바 있다.출처: 한겨레신문 1991년 5월 2일자.
5. 장례
5월 14일 명지대학교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을 끝내고 운구 행렬은 서울특별시청으로 이동하여 노제를 지내려고 했으나 전의경들이 저지한 탓에 이동하지 못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5월 18일 노제 장소를 서울역으로 옮기고 영결식을 다시 진행하였으나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서 경찰관들이 또 다시 저지한 탓에 결국 공덕동에서 노제를 지냈다. 우여곡절 끝에 5월 20일 광주광역시 망월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이천 민주화묘역으로 이장되어 현재까지 그곳에 유해가 모셔져 있다.
6.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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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위대는 명지대학교 등록금 인상 반대를 주장했으나 등록금 인상 반대 이외에는 집회와 시위 대부분을 당국이 불허하는 상황에서, 이것은 사실상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런 이유로 강경대는 민주화 운동 과정 중 살해당한 사람으로서 평가되었고 강경대를 열사로 추모하는 사업이 조성되었다.
당시 민중가요 노래패인 '조국과 청춘'은 강경대 열사의 복수를 다짐하는 노래인 복수가(조국과 청춘) 를 불렀다.
현재도 명지대학교에는 강경대 열사 추모사업회( 홈페이지 페이스북)가 서울캠퍼스 학생회관 건물 내에 위치해 있으며, 매년 교내에서 추모제를 열고 다양한 사회 운동 및 집회•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북한은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다만 이는 북한이 멋대로 진행한 것으로, 이 때문에 남한의 극우 세력에서 음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이 상은 김구도 받았을 정도로 자신들이 맘대로 추서하는 상이다.
7. 같이 보기
[1]
현재 ‘강경대 거리’로 명예도로명이 부여되었다.
[2]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
[3]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잘못된 정세 판단의 원인은 과거 군사정권이 펼친 정보 통제였다. 사실 1980년대부터 과격 투쟁으로 정권을 얻은 공산 세력의 붕괴는 가시권에 놓이고 있었는데 한국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정보 통제로 이런 사실들도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과거 적대 세력 동조자 양성을 막기 위한 정책이 수십년 뒤 학생운동의 몰락과 강경대의 죽음에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4]
시점에 주목해보면 4월 말으로 강경대가 사망한 4월 26일 바로 다음주에 벌어진 발언이다. 1980년대 복직 이후 김동길 교수의 강의는 작은 교양강의가 아니라 대강당에서 대규모 학생들의 참석 속에서 치러지던 강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파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5]
다만 이후로 김동길 교수가 정치권 제3정당을 거쳐 극우로 한발한발 나아가면서, 이 폄하 발언은 85년의 '낚시론' 이후 김동길의 변절을 상징하는 주요한 증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