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카미 테츠하루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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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 ||||
1951 | 1952 | 1953 | 1955 | 1961 | |
1963 | 1965 | 1966 | 1967 | 1968 |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rowcolor=#ccac00> No.1 | No.3 | No.4 |
오 사다하루 | 나가시마 시게오 | 쿠로사와 토시오 | |
<rowcolor=#ccac00> No.14 | No.16 | No.34 | |
사와무라 에이지 | 카와카미 테츠하루 | 카네다 마사이치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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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49c00> 1936春夏~1937秋 | 1938春 | 1938秋 | 1939 | 1940~1941 |
사와무라 에이지 | 빅토르 스타루힌 | 마에카와 하치로 | 카와카미 테츠하루 | 빅토르 스타루힌 | |
<rowcolor=#f49c00> 1942 | 1943 | 1944 | 1946 | 1947~1948 | |
히로세 슈이치 | 빅토르 스타루힌 | 후지모토 히데오 | 곤도 사다오 | 카와사키 토쿠지 | |
<rowcolor=#f49c00> 1949 | 1950 | 1951 | 1952 | 1953 | |
타다 후쿠조 | 후지모토 히데오 | 벳쇼 다케히코 | 후지모토 히데오 | 벳쇼 다케히코 | |
<rowcolor=#f49c00> 1954 | 1955~1956 | 1957 | 1958 | 1959~1960 | |
오토모 타쿠미 | 벳쇼 다케히코 | 오토모 타쿠미 | 후지타 모토시 | 이토 요시아키 | |
<rowcolor=#f49c00> 1961 | 1962 | 1963 | 1964 | 1965~1966 | |
나카무라 미노루 | 조노우치 구니오 | 이토 요시아키 | 타카하시 아키라 | 카네다 마사이치 | |
<rowcolor=#f49c00> 1967 | 1968~1969 | 1970 | 1971 | 1972~1973 | |
조노우치 구니오 | 카네다 마사이치 | 타카하시 카즈미 | 와타나베 히데타케 | 호리우치 츠네오 | |
<rowcolor=#f49c00> 1974 | 1975~1978 | 1979 | 1980 | 1981 | |
타카하시 카즈미 | 호리우치 츠네오 | 니우라 히사오 | 에가와 스구루 | 니시모토 다카시 | |
<rowcolor=#f49c00> 1982 | 1983 | 1984 | 1985 | 1986 | |
에가와 스구루 | 니시모토 다카시 | 에가와 스구루 | 니시모토 다카시 | 에가와 스구루 | |
<rowcolor=#f49c00> 1987 | 1988~1989 | 1990 | 1991~1992 | 1993~1997 | |
니시모토 타카시 | 쿠와타 마스미 | 사이토 마사키 | 마키하라 히로미 | 사이토 마사키 | |
<rowcolor=#f49c00> 1998 | 1999 | 2000~2006 | 2007 | 2008 | |
쿠와타 마스미 | 발비노 갈베스 | 우에하라 고지 | 우츠미 테츠야 | 타카하시 히사노리 | |
<rowcolor=#f49c00>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
세스 그레이싱어 | 우츠미 테츠야 | 도노 슌 | 우츠미 테츠야 | 미야구니 료스케 | |
<rowcolor=#f49c00> 2014~2016 | 2017 | 2018~2022 | 2023 | 2024 | |
스가노 도모유키 | 마일스 마이콜라스 | 스가노 도모유키 | 타일러 비디 | 토고 쇼세이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4번 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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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49c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나가사와 후지오 (永沢富士雄) |
이토 켄타로 (伊藤健太郎) |
나카지마 하루야스 (中島治康) |
츠츠이 오사무 (筒井修) |
마에카와 하치로 (前川八郎) |
|
1936夏 | 1936夏-1943 | 1936夏-1948 | 1936秋 | 1937秋 | |
<rowcolor=#f49c00>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미즈하라 시게루 (水原茂) |
카와카미 테츠하루 (川上哲治) |
아오타 노보루 (青田昇) |
키구레 리쿠조 (木暮力三) |
나카무라 마사미 (中村政美) |
|
1937秋 | 1939-1958 | 1943-1952 | 1943 | 1943-1944 | |
<rowcolor=#f49c00>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스다 히로시 (須田博) |
콘도 사다오 (近藤貞雄) |
카와바타 히로시 (川畑博) |
쿠로사와 토시오 (黒沢俊夫) |
코마츠바라 히로키 (小松原博喜) |
|
1944 | 1944 | 1944 | 1946 | 1947 | |
<rowcolor=#f49c00>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히라야마 키쿠지 (平山菊二) |
우노 미츠오 (宇野光雄) |
미나미무라 후카시 (南村不可止) |
테즈카 아키하루 (手塚明治) |
미야모토 토시오 (宮本敏雄) |
|
1948 | 1951-1953 | 1951-1952 | 1953-1954 | 1955-1961 | |
<rowcolor=#f49c00>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히가사 카즈오 (樋笠一夫) |
후지오 시게루 (藤尾茂) |
카시와에다 분지 (柏枝文治) |
요나미네 카나메 (与那嶺要) |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茂雄) |
|
1955 | 1955-1961 | 1955 | 1958 | 1958-1974 | |
<rowcolor=#f49c00>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사카자키 카즈히코 (坂崎一彦) |
쿠니마츠 아키라 (国松彰) |
오 사다하루 (王貞治) |
이케자와 요시유키 (池沢義行) |
모리 마사아키 (森昌彦) |
|
1959-1962 | 1960-1968 | 1962-1980 | 1963 | 1964-1965 | |
<rowcolor=#f49c00>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
아이바 요시히로 (相羽欣厚) |
요시다 카츠토요 (吉田勝豊) |
타나카 쿠스오 (田中久寿男) |
타카쿠라 테루유키 (高倉照幸) |
모리나가 카츠야 (森永勝也) |
|
1965 | 1965 | 1967 | 1967 | 1967 | |
<rowcolor=#f49c00>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시바타 이사오 (柴田勲) |
스에츠구 토시미츠 (末次利光) |
야나기다 마사히로 (柳田真宏) |
장훈 (張勳) |
아와구치 켄지 (淡口憲治) |
|
1969 | 1970-1975 | 1974 | 1976-1979 | 1976 | |
<rowcolor=#f49c00>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
데이비 존슨 (ジョンソン) |
존 시핀 (シピン) |
야마모토 코지 |
로이 화이트 (ホワイト) |
나카하타 키요시 (中畑清) |
|
1976 | 1978-1979 | 1979-1980 | 1980-1982 | 1981-1988 | |
<rowcolor=#f49c00>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
게리 토마슨 (トマソン) |
마츠바라 마코토 (松原誠) |
하라 타츠노리 (原辰徳) |
레지 스미스 (スミス) |
워렌 크로마티 (クロマティ) |
|
1981 | 1981 | 1982-1995 | 1983-1984 | 1984-1990 | |
<rowcolor=#f49c00> 제51대 | 제52대 |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
루밍쑤 (呂明賜) |
코마다 노리히로 (駒田徳広) |
요시무라 사다아키 (吉村禎章) |
마이크 브라운 (ブラウン) |
필 브래들리 (ブラッドリー) |
|
1988 | 1988-1992 | 1990-1998 | 1990 | 1991 | |
<rowcolor=#f49c00> 제56대 |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제60대 | |
로이드 모즈비 (モスビー) |
제시 바필드 (バーフィールド) |
오카자키 카오루 (岡崎郁) |
오쿠보 히로모토 (大久保博元) |
오치아이 히로미츠 (落合博満) |
|
1992-1993 | 1993 | 1993 | 1993 | 1994-1996 | |
<rowcolor=#f49c00> 제61대 | 제62대 | 제63대 | 제64대 | 제65대 | |
히로사와 카츠미 (広沢克実) |
마츠이 히데키 (松井秀喜) |
셰인 맥 (マック) |
키요하라 카즈히로 (清原和博) |
이시이 히로오 (石井浩郎) |
|
1995-1998 | 1995-2002 | 1996 | 1997-2005 | 1997-1999 | |
<rowcolor=#f49c00> 제66대 | 제67대 | 제68대 | 제69대 | 제70대 | |
타카하시 요시노부 (高橋由伸) |
도밍고 마르티네스 (マルティネス) |
로베르토 페타지니 (ペタジーニ) |
코쿠보 히로키 (小久保裕紀) |
이승엽 (李承燁) |
|
1999-2014 | 1999 | 2003-2004 | 2004-2006 | 2006-2008 | |
<rowcolor=#f49c00> 제71대 | 제72대 | 제73대 | 제74대 | 제75대 | |
니오카 토모히로 (二岡智宏) |
아베 신노스케 (阿部慎之助)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小笠原道大) |
알렉스 라미레스 (ラミレス) |
초노 히사요시 (長野久義) |
|
2006 | 2007-2019 | 2007 | 2008-2011 | 2011-2016 | |
<rowcolor=#f49c00> 제76대 | 제77대 | 제78대 | 제79대 | 제80대 | |
무라타 슈이치 (村田修一) |
호세 로페스 (ロペス) |
존 보우커 (ボウカー) |
레슬리 앤더슨 (アンダーソン) |
프레데릭 세페다 (セペダ) |
|
2012-2017 | 2013-2014 | 2013 | 2014-2015 | 2014 | |
<rowcolor=#f49c00> 제81대 | 제82대 | 제83대 | 제84대 | 제85대 | |
오오타 타이시 (大田泰示) |
사카모토 하야토 (坂本勇人) |
나카이 다이스케 (中井大介) |
카메이 요시유키 (亀井善行) |
개럿 존스 (ジョーンズ) |
|
2014-2015 | 2015~ | 2015 | 2015 | 2016 | |
<rowcolor=#f49c00> 제86대 | 제87대 | 제88대 | 제89대 | 제90대 | |
루이스 크루즈 (クルーズ) |
케이시 맥기 (マギー) |
알렉스 게레로 (ゲレーロ) |
오카모토 카즈마 (岡本和真) |
마루 요시히로 (丸佳浩) |
|
2016 | 2017-2018 | 2018 | 2018~ | 2020 | |
<rowcolor=#f49c00> 제91대 | |||||
나카타 쇼 (中田翔) |
|||||
2022 | |||||
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2) 볼드체는 일본야구전당 헌액자. |
1941년 일본프로야구 MVP | ||||
스다 히로시 ( 도쿄 교진군) |
→ |
카와카미 테츠하루 ( 도쿄 교진군) |
→ |
미즈하라 시게루 ( 도쿄 교진군) |
195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고즈루 마코토 (쇼치쿠 로빈스) |
→ |
카와카미 테츠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벳쇼 타케히코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5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스기시타 시게루 ( 주니치 드래곤즈) |
→ |
카와카미 테츠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벳쇼 타케히코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53년 일본시리즈 MVP | ||||
벳쇼 다케히코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카와카미 테츠하루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스기시타 시게루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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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테츠하루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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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 ||||||||||||||||||||||||||||||||||||||
미즈하라 시게루 (1950~1960) |
→ |
카와카미 테츠하루 (1961~1974) |
→ |
나가시마 시게오 (1975~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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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6 | |
카와카미 테츠하루 川上哲治 / Tetsuharu Kawakami |
|
<colbgcolor=#000000><colcolor=#fd5a1e> 출생 | 1920년 3월 23일 |
쿠마모토현 쿠마군 오오촌 (現 쿠마모토현 히토요시시) |
|
사망 | 2013년 10월 28일 (향년 93세) |
도쿄도 이나기시 |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쿠마모토현립 공업학교[1] |
포지션 | 투수 → 1루수 |
투타 | 좌투좌타[2] |
선수 경력 | 토쿄 쿄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 (1938~1942, 1946~1958)[3] |
지도자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조감독 (1951~1957, 선수 겸임) 요미우리 자이언츠 수석 코치 (1959~1960)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61~1974) |
[clearfix]
1. 개요
현역 시절 | 감독 시절 |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이자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1루수.
초창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써, 현역 시절엔 역대 최초로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 탁월한 타격 실력으로 '타격의 신(打撃の神様)' 으로까지 칭송받았고 선수 은퇴 후엔 감독으로써 9년 연속 우승을 포함한 일본시리즈 11회 제패 등 요미우리의 최전성기를 이끌며 선수와 감독직에서 모두 대성공을 거두고 요미우리의 명문 구단으로써의 지위를 확립시킨 야구인이었다.
2. 선수 시절
고등학교 시절에는 쿠마모토현을 대표하는 좌완 투수로, 코시엔 대회에서 2차례 준우승을 거뒀다.[4]고등학교 졸업 후인 1938년 토쿄 쿄진군에 투수로 입단해 한동안 투타겸업을 했으나 고등학교 시절 혹사의 영향으로 제구와 구위가 떨어진 탓에 투타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 타자에 집중하기 위해 1루수로 포지션을 바꿔[5] 2년차인 1939년 타율 .338 4홈런[6] 75타점으로 수위타자, 타점왕을 수상하며 단번의 쿄진군의 주축 선수로 자리잡았고, 이후에도 3년 연속 3할을 포함해 1940년 홈런왕 및 역대 최초 1루수 베스트나인, 1941년 수위타자 및 타점왕, MVP를 수상하며 쿄진군의 중심 타자로써 맹타를 휘둘렀다.
그러다 1942년 시즌 종료 후 군복무 문제로 쿄진군을 퇴단해 태평양 전쟁 후반부인 1943~1945년에 잠시 야구계를 떠났고, 종전 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 일에 전념하다 프로야구가 재개된 1946년 시즌 도중에 팀명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바뀐 쿄진군의 러브콜을 받고 다시 프로에 복귀했다.[7] 복귀 후에도 맹타를 휘두르며 1947~1949년에 3년 연속 베스트나인, 1948년 홈런왕을 수상한 데 이어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열된 후인 1950년엔 역대 최초 개인 통산 100홈런, 1951년엔 당시 역대 최고 기록이었던 타율 .377[8]을 기록하며 팀의 첫 센트럴리그, 일본시리즈 제패와 함께 수위타자 및 베스트나인, 생애 2번째 MVP를 수상했다. 이후에도 쿄진의 중심선수로 꾸준히 뛰면서 수위타자 2회, 타점왕 1회, MVP 1회, 베스트나인 5회 수상과 함께 요미우리를 3번 더 일본시리즈 제패로 이끌었고 1956년엔 역대 최초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이후 노쇠화가 찾아오며 1958년 시즌을 끝으로 통산 타율 .313, 2351안타 181홈런 1319타점 220도루 893사사구의 대기록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특이 사항으로 1950년 559타수 29삼진, 1951년 374타수 6삼진[9]의 뛰어난 컨택과 더불어 은퇴 시즌인 1958년을 제외하곤 단 1번도 볼삼비가 미만으로 가지 않는 등 당시의 프로야구 자체가 삼진이 적었던 점을 감안해도 뛰어난 선구안을 보여주며 타격의 신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진기록을 보여준 바 있다.
3. 감독 시절
현역 시절에도 당대 최고의 타격 실력을 보유한 위대한 선수로 칭송받던 카와카미였지만, 감독으로써도 현역 시절 이상의 뛰어난 실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명문팀으로써의 기반을 굳혔다.은퇴 후 2년 동안 요미우리의 수석 코치를 맡던 카와카미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니시테츠 라이온즈와 난카이 호크스에게 4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를 내주는 바람에 점차 입지가 좁아지다 1960년에 만년 하위팀이었던 타이요 훼일즈에게 센트럴리그 우승을 내주는 끝에 계속되는 우승 실패의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1961년에 미즈하라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
감독으로 취임한 카와카미는 스파르타 훈련과 취재진과의 접촉을 차단하여 정보유출을 방지하는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기삿거리가 없어진 기자들에게 소련의 대 동유럽 정책에 빗댄 '철(哲)의 장막'[10]이란 비아냥을 받았으나. 그런 매스컴의 조롱과는 상관없이 카와카미는 뛰어난 지도력를 발휘하여 14년의 감독생활 동안 무려 11번의 일본시리즈 우승, 그것도 11승 무패라는 대기록을 남기며 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이 중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달성한 일본시리즈 9연패는 일명 V9이라는 약칭과 함께 요미우리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현재까지 강렬하게 남아있다.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요미우리는 당대 최고의 강타자들을 보유했지만 카와카미 시절 요미우리의 전략은 수비와 주루, 작전에 방점이 찍힌 흔히 말하는 '일본식' 스몰볼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일본에서 스몰볼을 본격적으로 체계화하고 신화로 만든 사람이 바로 카와카미라고 할 수 있는데, 1961년 감독으로 취임한 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합동 스프링캠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저스 코치 출신의 알 캄파니스가 쓴 'The Dodgers' Way to Play Baseball'[11]에 감명받아 이에 기반한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했고 사인, 히트 앤드 런, 번트 시프트 등 당시 일본에서 일반적이지 않았던 전술들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다저스가 브랜치 리키 단장 주도 하에 당시 야구계를 뒤흔든 여러 혁신의 선두주자로 여겨졌던 걸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야구 문물을 도입한 셈인데, 요미우리가 V9 성공가도를 걷자 다른 팀들도 이러한 모습을 벤치마킹하고 히로오카 타츠로[12], 모리 마사아키 등이 선수시절 V9의 경험을 토대로 지도자로서 성공을 거두며 스몰볼이 일본 야구의 지배적인 트렌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센트럴리그 우승을 내주며 10년 연속 우승이 무산된 1974년을 끝으로 1866경기 1066승[13] 739패 61무라는 기록을 남긴 채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구단 전무로 전임했다가 카와카미를 내켜하지 않았던 쇼리키 토오루[14] 오너에 의해 1년 만에 퇴임하고 1976년부터 NHK 야구 해설자로 전임했다.
4. 이후
상술했듯 요미우리 구단을 떠난 후 1976년부터 1992년까지 NHK에서 야구 해설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여름방학마다 열리는 'NHK 소년야구교실'에서 주임강사로서 어린 유망주들을 가르쳤고[15], 이외에도 유명 스포츠 신문인 '닛칸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도 겸임했다.노년까지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 행사 등 여러 이벤트에 참석하며 공석에서 꾸준히 모습을 보였으나, 2009년 이후로 공석에서의 활동이 뜸해지다 2013년 10월 28일에 도쿄도 이나기시 요미우리랜드 케이요 병원에서 노환으로 향년 93세에 사망했다. 봄까지 건강을 유지했으나 자택에서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요양에 들어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5. 선수 성적
5.1. 타자 성적
통산 기록 | |||||||||||||||||
<rowcolor=#fe5a1d>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1938[16] |
요 미 우 리 |
62 | 193 | 42 | 3 | 3 | 3 | 24 | 26 | 2 | 23 | 17 | .250 | .340 | .357 | .697 | 1.4 |
1939 | 94 | 385 | 116 | 17 | 12 | 4 | 60 | 75 | 8 | 37 | 19 | .338 | .404 | .493 | .897 | 5.2 | |
1940 | 104 | 446 | 122 | 23 | 9 | 9 | 51 | 66 | 7 | 50 | 27 | .311 | .389 | .485 | .874 | 6.5 | |
1941 | 86 | 388 | 105 | 21 | 9 | 4 | 44 | 57 | 5 | 46 | 21 | .310 | .395 | .460 | .856 | 5.6 | |
1942 | 72 | 321 | 73 | 7 | 3 | 3 | 22 | 27 | 5 | 46 | 18 | .266 | .374 | .347 | .721 | 4.4 | |
1946 | 70 | 317 | 85 | 20 | 4 | 10 | 45 | 67 | 2 | 38 | 13 | .305 | .388 | .513 | .901 | 3.2 | |
1947 | 119 | 510 | 137 | 30 | 7 | 6 | 56 | 57 | 16 | 65 | 17 | .309 | .400 | .449 | .849 | 6.4 | |
1948 | 135 | 566 | 150 | 26 | 6 | 25 | 69 | 105 | 12 | 58 | 26 | .298 | .375 | .522 | .896 | 7.1 | |
1949 | 134 | 597 | 180 | 36 | 10 | 24 | 84 | 129 | 9 | 49 | 24 | .330 | .388 | .565 | .953 | 6.2 | |
1950 | 138 | 619 | 175 | 34 | 6 | 29 | 102 | 119 | 34 | 56 | 29 | .313 | .380 | .551 | .931 | 6.1 | |
1951 | 97 | 424 | 141 | 27 | 2 | 15 | 74 | 81 | 14 | 48 | 6 | .377 | .450 | .580 | 1.031 | 5.9 | |
1952 | 118 | 522 | 153 | 28 | 4 | 4 | 62 | 82 | 15 | 42 | 21 | .320 | .377 | .421 | .798 | 4.3 | |
1953 | 121 | 518 | 162 | 26 | 6 | 6 | 74 | 77 | 8 | 44 | 14 | .347 | .411 | .467 | .878 | 5.8 | |
1954 | 129 | 561 | 164 | 27 | 8 | 8 | 64 | 87 | 8 | 41 | 25 | .322 | .374 | .453 | .827 | 4.7 | |
1955 | 120 | 516 | 147 | 15 | 1 | 12 | 55 | 79 | 17 | 69 | 33 | .338 | .432 | .460 | .892 | 5.8 | |
1956 | 128 | 542 | 160 | 23 | 4 | 5 | 54 | 67 | 16 | 46 | 36 | .327 | .388 | .420 | .808 | 4.7 | |
1957 | 128 | 519 | 132 | 26 | 3 | 5 | 54 | 52 | 6 | 40 | 37 | .284 | .346 | .385 | .731 | 3.8 | |
1958 | 124 | 480 | 107 | 19 | 2 | 9 | 34 | 66 | 4 | 25 | 39 | .246 | .295 | .361 | .656 | 1.1 | |
NPB 통산 (18시즌) |
1979 | 8424 | 2351 | 408 | 99 | 181 | 1028 | 1319 | 220 | 823 | 422 | .313 | .383 | .467 | .850 | 88.2 |
5.2. 투수 성적
역대 기록(NPB)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세 | 홀 | 이닝 | ERA | 탈삼진 | WHIP | ERA+ | WAR |
1938[17] | 요미우리 | 12 | 2 | 3 | 0 | 0 | 65.2 | 2.60 | 27 | 1.34 | - | 0.9 |
1939 | 18 | 6 | 4 | 0 | 0 | 102.2 | 2.36 | 54 | 1.42 | 88 | 0.9 | |
1940 | 6 | 3 | 2 | 0 | 0 | 27 | 1.00 | 15 | 1.48 | 132 | -0.1 | |
1941 | 3 | 0 | 0 | 0 | 0 | 4.2 | 17.36 | 1 | 3.43 | 15 | -0.1 | |
NPB 통산 (4시즌) |
39 | 11 | 9 | 0 | 0 | 200 | 2.61 | 97 | 1.45 | 90 | 1.7 |
6.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리그 순위 | 일본시리즈 |
1961 | 요미우리 | 130 | 71 | 53 | 6 | .569 | 우승 | 우승 |
1962 | 134 | 67 | 63 | 4 | .515 | 4위 | 진출 실패 | |
1963 | 140 | 83 | 55 | 2 | .601 | 우승 | 우승 | |
1964 | 140 | 71 | 69 | 0 | .507 | 3위 | 진출 실패 | |
1965 | 140 | 91 | 47 | 2 | .659 | 우승 | 우승 | |
1966 | 134 | 89 | 41 | 4 | .685 | 우승 | 우승 | |
1967 | 134 | 84 | 46 | 4 | .646 | 우승 | 우승 | |
1968 | 134 | 77 | 53 | 4 | .592 | 우승 | 우승 | |
1969 | 130 | 73 | 51 | 6 | .589 | 우승 | 우승 | |
1970 | 130 | 79 | 47 | 4 | .627 | 우승 | 우승 | |
1971 | 130 | 70 | 52 | 8 | .574 | 우승 | 우승 | |
1972 | 130 | 74 | 52 | 4 | .587 | 우승 | 우승 | |
1973 | 130 | 66 | 60 | 4 | .524 | 우승 | 우승 | |
1974 | 130 | 71 | 50 | 9 | .587 | 2위 | 진출 실패 | |
총계 | 1866 | 1066 | 739 | 61 | .591 |
센트럴리그 우승 11회 일본시리즈 우승 11회 |
7. 기타
-
선수 복귀 후인 1946년 8월 말에
긴자의 운동도구 메이커로부터 후원을 받아 빨간 방망이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이 빨간 방망이는 시즌 종료 후 갈색, 검정색 이외의 착색 방망이 사용이 금지되는 바람에 반 년도 채 가지 못했지만, 빨간 방망이로 뛰어난 타격을 선보이는 카와카미의 모습은 당시 팬들의 인상에 깊게 남아 같은 시기
오시타 히로시의 푸른 배트,
후지무라 후미오의 장대 배트와 함께 본인의 상징 겸 종전 직후 재개된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한 장면이 되었다.
- 당대 최고로 손꼽힌 타격 실력에 비해 수비에선 평가가 좋지 못했다. "잡을 수 없는 공은 처음부터 잡으러 가지 않는다"라는 태도를 보이며 조금이라도 잡기 힘들 것 같으면 흘려보낸 탓에 동료들의 원성을 샀을 정도로, 세이버메트릭스가 활발해진 현대 야구로 따지면 수비 범위가 매우 안 좋은 선수라 할 수 있는 셈. 그나마 감독 취임 후엔 상술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합동 캠프를 통해 수비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아 타카다 시게루, 도이 쇼조 등 수비가 좋은 선수들을 중용했다.
- 장훈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어린 시절 화상으로 흉하게 망가진 자신의 오른손을 가족들 외의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보여주지 않았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카와카미에게만 현역 은퇴 후 열린 좌담회에서 그 오른손을 보여줬다고 한다. 장훈의 오른손을 보고 놀란 카와카미는 "이런 손으로 어떻게.."라고 말문이 막힌 채 눈물을 흘렸다고.
-
감독 시절의 흑역사로, 1970년 드래프트 1순위로 요미우리에 지명된 좌완
투수 유구치 토시히코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카와카미와 2군 감독 나카오 히로시의 심한 질책으로[18] 인해 정신적으로 몰린 끝에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에서 요양하다 1973년 3월 22일 병상에서 변사체로 발견된[19] 일명 유구치 사건이 있었다. 유구치가 우울증을 앓게 된 것이 카와카미를 위시한 코칭스태프들의 과도한 질책이 원인이라는 게 명백했다 보니 당연히 여론의 비판이 일게 되었고, 여기에 카와카미가 이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이 더 화를 부르고 말았다.
巨人こそ大被害を受けましたよ。大金を投じ年月をかけて愛情を注いだ選手なんですから。
せめてもの救いは、女性を乗せての交通事故でなかった事です
쿄진(요미우리)이야말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큰 돈과 세월을 들여 애정으로 키웠던 선수였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성을 태운 교통사고 같은 건 아니었다는 겁니다.
거의 망언이나 다름없는 이 한 마디에 카와카미는 물론 요미우리 구단에 대한 여론의 비난은 더욱 심해졌고, 1973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가 지명한 7명 중 무려 상위 지명자 3명을 포함한 4명이 입단을 거부하는[거부1][거부2][입단1]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며 요미우리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이 업보로 돌아온 것인지, 다음 해인 1974년 요미우리는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근소차로 밀려 10년 연속 센트럴리그 우승에 실패하며 센트럴리그 우승을 허용하고 말았고, 그것이 카와카미의 감독으로써의 생애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 요나미네 카나메와는 상술한 히로오카 타츠로와 마찬가지로 현역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수 시절부터 수위타자를 두고 경쟁하던 라이벌 관계였고, 말년에 카와카미가 감독으로 취임한 후 요나미네를 방출시킨 건[23] 때문에 사이가 더욱 험악해졌다. 이러한 전적 때문에 요나미네는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으로 취임한 후에 카와카미를 향한 강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보였고, 결국 1974년에 주니치를 우승으로 이끌어 카와카미가 이끄는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우승을 저지시키는 것으로 복수에 성공했다. 히로오카와는 다르게 요나미네와는 이후에도 화해하지 못해서 요나미네가 카와카미의 후임으로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을 맡던 1978년에 요미우리에 코치로 복귀했으나 1980년 시즌 종료 후 나가시마가 감독에서 해임되자 후술할 소문이 나돌던 카와카미에게 반발해서 사표를 던진 채 함께 퇴단했고, 이후에도 카와카미가 관련된 요미우리 OB 행사엔 절대 참여하지 않았다.
-
감독 시절 팀의 간판 4번 타자였던
나가시마 시게오와도 감독 퇴임 후에 사이가 악화되었다. 나가시마가 감독으로써 자신이 감독으로 있던 시절에 비해 계속해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남기자[24] 나가시마에 대한 구단 OB들의 맹렬한 비판이 계속되었는데, 이 비판이 카와카미와 친해서 일명 '카와카미파'로 분류되는 OB들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카와카미가 이 비판을 뒤에서 주도한 흑막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악감정을 가지게 된 나가시마와 관계가 악화된 것.
결국 1980년에 나가시마가 감독에서 해임될 당시 카와카미가 구단주에게 나가시마를 비난하여 퇴임으로 몰고 갔다는 소문이 결정타가 되어 둘의 사이가 완전히 갈라졌고, 카와카미가 구단 OB회 회장을 맡을 동안 나가시마는 계속 결석을 이어가다 "더 이상 OB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제명하겠다"란 통보가 와서야 겨우 OB회에 출석해 카와카미와 화해했다고 한다.
8. 관련 문서
[1]
現 쿠마모토 공업고등학교. 코시엔 통산 44회 출전 기록을 보유한
쿠마모토현을 대표하는 야구 강호로, 카와카미 외에도
이토 츠토무(도중에
사이타마로 전학),
마에다 토모노리,
아라키 마사히로 등을 배출했다.
[2]
원래는 오른손잡이었지만 5살 때 자갈길에서 넘어져 오른팔의 완전 회복까지 반년이 걸릴 정도로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오른팔이 다 나을 동안 왼손만 쓰다
왼손잡이로 교정되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까지
좌투우타였다가 이후 좌타자로 전향했다.
[3]
1942년 시즌 종료 후 군복무를 목적으로 퇴단해 입대.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타치카와 육군항공 정비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4]
1936년 대회 결승전에서 패한 뒤
한신 코시엔 구장의 흙을 주머니에 담아가 모교의 운동장에 뿌렸다고 한다. 이것이 코시엔 대회에서 패배한 학교의 선수들이 코시엔 구장의 흙을 가져가는 유래가 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5]
1루수 전향 후에도 한동안
투수를 계속 맡았지만 결국 오래 가지 못하고 1942년을 끝으로 타자로 완전히 전향했다. 투수로써의 통산 성적은 39시합(25선발) 8완투 2완봉 11승 9패 97탈삼진 평균자책점 2.61이다.
[6]
참고로 이 4홈런도 당시 막 문을 열었던
일본프로야구가 극심한
투고타저의 시기였기 때문에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당해 홈런왕을 차지했던
츠루오카 카즈토조차 홈런 갯수가 10개였다.
[7]
이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부양 문제로 프로 복귀에 대해 고민하던 카와카미는 요미우리 구단에 "3만엔을 주면 쿄진에 복귀하겠다"라고 제안했고, 이 제안을 요미우리가 받아들이면서 다시 프로에 복귀하게 되었다. 일명 "3만엔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화는 프로야구 최초로 선수가 구단에게 계약금을 요구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8]
현재 최고 기록은 1986년
랜디 바스가 기록한 .389다.
[9]
골드스타(이후의 다이에이 스타즈/유니온즈, 1957년 시즌 종료 후
마이니치 오리온즈와 합병)의
감독 겸 선수였던 츠보우치 미치노리가 1946년 393타수 6삼진, 그리고 다이에 스타즈의 사카자와 마사오가 1951년 363타수 6삼진으로 카와카미와 타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0]
철(鐵, 일본식 한자로는 鉄)의 장막과 哲의 음독 발음이 동일(테츠)해서 나온 조롱.
[11]
다저스가
브루클린에 있던 1954년에 발간된 책으로, 1957년
정신과 의사이자 야구광이었던 우치무라 유시에 의해 '다저스의 전법'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일본에 소개되었다. 우치무라 유시는 무교회주의 기독교인으로 잘 알려진
우치무라 칸조의 아들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야구기구 제 3대 커미셔너를 지내기도 했으며 많은 야구서적을 번역했다. 커미셔너 재임 시기 대표적인 활동으로
무라카미 마사노리를 둘러싼 난카이와 샌프란시스코 사이의 이중계약 문제를 중재한 것이 있다.
[12]
정작 히로오카와는 선수 시절부터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선수-감독 시절엔 히로오카가 야구 잡지에 칼럼을 연재하는 것을 감독 비판으로 간주하여 중단시키거나
트레이드로 방출시키려다 오너의 만류와 언론의 비판으로 취소한 적이 있었고, 결국 아예 히로오카의 출장기회를 박탈시켜서 은퇴로 내몰았다. 히로오카가 은퇴 후 해설가로 전임해 요미우리의 캠프를 취재하러 왔을 때도 요미우리 선수들에게 히로오카와의 인터뷰를 금지시켜서 히로오카가 자신을 박대하는 카와카미의 태도에 살의까지 느낄 정도로 격노하는 등 험악한 관계를 이어갔으나 이후엔 서로 화해했다고 한다.
[13]
요미우리 감독 통산 승수 1위였으나 2020년
하라 타츠노리가 경신했다.
[14]
요미우리 신문 창업주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초대 구단주였던 쇼리키 마츠타로의 장남. 2011년 사망.
[15]
이때 같이 강연을 하러 온 OB들에게 "아이들에게 야구를 잘 가르칠 수 없다면 좋은 해설지가 될 수 없다"란 충고를 남겼다고 한다.
[16]
전후기 통합
[17]
전후기 통합
[18]
1972년 팬 감사회에서 열린 팀 홍백전에서 본래 1군 주전 선수들이 출전하는 홍백전 관례상 출전할 예정이 없었던 유구치가 신인 선수들 위주로 출장시키고자 한 카와카미의 의향으로 갑작스럽게 등판하게 되었는데, 전날 기숙사 선수들이 참가한 위로회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숙취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유구치가 홍백전에서 난타당하자 카와카미와 나카오가 "너는 2년 동안 놀고먹기만 했냐!"라고 외치는 등 심한 질책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이 질책으로 심란한 기분이 된 유구치가 차마 합숙소로 돌아가지 못하자 2군 투수코치였던 나카무라 미노루가 자택으로 유구치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위로해 줬는데, 나카무라의 위로를 받고 합숙소에 돌아온 유구치를 나카오가 통금시간을 어기고 돌아왔다는 이유로 구타하면서 우울증이 생기고 말았다.
[19]
사안이 사안이라 자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으나 부검 결과
심부전으로 인한 돌연사로 밝혀졌다.
[거부1]
이 중 1순위 지명자였던 아이치가쿠인대학 출신의 코바야시 히데카즈는 현재까지 유일한 요미우리의 1순위 지명을 거부한 선수로 남아있으며, 코바야시는 이후 프로에 진출하지 않고 사회인야구팀 쿠마가야구미를 거쳐 은퇴한 뒤 모교에서 감독 및 교수를 역임했다. 참고로 훗날 밝혀진 입단을 거부한 이유는 유구치 사건 때문이 아니라 원래 코바야시 본인이 향후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가 되길 희망했고, 당시
야나가와 사건 등으로 험악해진 프로-아마추어 관계로 인해 프로에 입단할 시 향후 아마추어에서의 활동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입단교섭 당시 카와카미가 "(입사가 내정된) 쿠마가야구미는 일이 먼저고 야구가 그 다음이지만, 우린 (생업으로써의) 야구로 자네를 원한다"라는 얘기에 야구를 생업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코바야시는 망설임이 없어져 그대로 입단을 거부했다고 하며, 50대 때의 인터뷰에서 프로-아마추어 관계가 완화된 지금 요미우리에 지명받았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때는 입단했을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거부2]
2순위 지명자였던 쿠로사카 유키오는 3년 후인 1976년에 드래프트 4순위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했으나 6년 간 50경기 0승 1패에 그친 채 27세로 은퇴한 후 야쿠르트 판매부 사장과 구단 상무이사를 역임했고, 3순위 지명자 나카무라 유지는 코바야시처럼 프로에 가지 않고 사회인야구에서만 뛰다가 암으로 30세에 요절했다. 5순위 지명자 오니시 카즈오는 2년 후인 1975년에 드래프트 2순위로
킨테츠 버팔로즈에 입단했으나 6년 동안 9경기 등판에 그친 채 은퇴 후 1989년까지 배팅볼 투수를 맡았다.
[입단1]
4순위 지명자이자 코바야시와는 대학 동기였던 사코마루 킨지로, 6순위 지명자 신타니 유지, 7순위 지명자 카네시마 마사히코는 지명 거부를 하지 않고 그대로 입단했으나 이조차도 신타니와 카네시마는 이미
연습생으로 구단에 들어왔던 상태여서 실질적으로 요미우리가 드래프트로 획득한 선수는 사코마루 단 1명뿐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유일하게 사코마루만 1군에서 출전했으나 이마저도 통산 35시합 출장에 그친 채 1983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은퇴하면서 이 해 요미우리의 드래프트는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3]
카와카미는 요나미네를 방출시킨 것에 대해 "(내가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의) 요나미네는 이미 노쇠화가 완연했던 데다, 일본어를 잘 못해서 코치로써 팀에 남겨두는 것도 힘들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방출시킬 수밖에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24]
나가시마의 취임 첫 해인 1975년에 요미우리는 구단 사상 첫 최하위라는 굴욕을 맛봤고, 다음 해인 1976년부터 2년 연속
센트럴리그 제패로 첫 최하위의 굴욕을 만회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과거 V9 시절 시리즈에서 만날 때마다 압살했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년 연속으로 우승을 내주며 복수를 당한 데 이어 이후 1980년까지 우승 없이
야쿠르트 스왈로즈,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약진을 바라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