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3:59:03

FC 바이에른 뮌헨/하인케스 체제(3-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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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파니
( 콤파니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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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챔스 우승 : 리그 우승 : 포칼 우승 : 슈퍼컵, 리가포칼 우승 : 유로파 리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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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이에른 뮌헨
하인케스 체제 (3, 4기)
[[유프 하인케스|
파일:jupp.jpg
]]
제52, 55대 감독
유프 하인케스
<colbgcolor=#dc052d><colcolor=#fff> 감독
[[독일|]][[틀:국기|]][[틀:국기|]] 유프 하인케스 / 제52, 55대 감독
주장
[[독일|]][[틀:국기|]][[틀:국기|]] 필립 람 / (2011~2013)

[[독일|]][[틀:국기|]][[틀:국기|]] 마누엘 노이어[1] / (2017~2018)
코치
[[독일|]][[틀:국기|]][[틀:국기|]] 페터 헤어만 (수석 코치)

[[독일|]][[틀:국기|]][[틀:국기|]] 헤르만 게를란트 (수석 코치)
계약 기간 2011년 6월 27일 ~ 2013년 6월 1일
(2년 / 704일)
2017년 10월 6일 ~ 2018년 5월 19일
(8개월 / 225일)
계약 종료 (은퇴)
연봉 €12M
전술 스타일 강력한 전방 압박 기반의 공격 축구
4-2-3-1 기반 게겐프레싱
┗ 많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압박 및 스위칭+트랜지션 속도
┗ 상대에 따른 유연한 전술 변화 및 운영
┗ 측면 공격수와 풀백의 극대화
┗ 중원에서의 압박과 공격 가담을 통한 수적 우위 확보
성적 0경기 0승 0무 0패 (승률 --.-%)
2011-12 분데스리가 (준우승)
2011-12 DFB-포칼 (준우승)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2012 DFL-슈퍼컵 (우승)
2012-13 분데스리가 (우승)
2012-13 DFB-포칼 (우승)
2012-13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17-18 분데스리가 (우승)
2017-18 DFB-포칼 (준우승)
2017-18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1. 개요2. 활동
2.1. 2011-12 시즌2.2. 2012-13 시즌2.3. 2017-18 시즌
3. 평가

[clearfix]

1. 개요

FC 바이에른 뮌헨의 52대, 55대 감독 유프 하인케스 체제를 정리한 문서.

2. 활동

2.1. 2011-12 시즌

2011-12 시즌, 하인케스는 이사진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공-수 양면의 선수 보강을 통해 2010-11 시즌 무관으로 죽을 쑤던 것과는 달리 팀을 한 시즌 만에 유럽 정상급 팀으로 탈바꿈시킨다. 특히 지난 시즌 '3골을 먹히면 5골을 넣어서 이긴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안 좋은 수비력을 보이던 바이에른의 수비진은 무려 1011분 무실점을 기록할 정도의 통곡의 벽의 수비진으로 탈바꿈한다. 제롬 보아텡 하피냐, 마누엘 노이어 등 수비진-골키퍼의 알짜배기 영입에 하인케스의 수비 전술의 변화 덕택인 것.

바이에른은 전반기 2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승점 4점을 앞선 선두로 마감한다. 후반기에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부상 공백에 토니 크로스 아르연 로번, 토마스 뮐러 등이 동반 부진에 빠지며 무 재배-뜬금패-무 재배의 부진을 겪는다.

부상자가 속출했던 것은 팀의 얇은 스쿼드로 분데스리가, DFB-포칼,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모두 병행하며 컨디션이 극도로 저하된 것이 원인이었다. 2011-12 시즌 바이에른은 베스트 11은 유럽 정상급이었으나, 그에 비해 서브진은 매우 부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장 아르연 로번이나 프랑크 리베리 등 2선 공격 자원들이 부상당하면 벤치에서 기다리는 건 기복왕 프라니치, 2009-10 시즌 한 번 불태우고 폼 떨어진 올리치, 일본산 유니폼 판매원 우사미 등이었다. 센터백도 다니엘 반 바이텐이 거의 유일한 서브였고, 콘텐토는 서브로도 잘 못 나올 정도로 유리몸이었다. 그나마 아나톨리 티모슈크가 수비형 미드와 센터백을 오가며 땜빵을 할 수 있었으나 말 그대로 땜빵이 가능한, 급한 불 끄기용 자원일 뿐 주전급으로 쓰기엔 영 좋지 않았다. 특히 중원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마땅한 대체자도 없어서 부상으로 쓰러지자 공-수 밸런스를 잡아줄 중원 사령관이 없어졌다. 게다가 챔스 4강 레알 마드리드전과 포칼 4강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를 치렀고, 이런 상황에서도 전술했던 대로 서브가 워낙 부실한지라 교체 카드를 1장밖에 안 썼다. 결국 30R 도르트문트와의 단두대 매치에서 1:0으로 패했고, 31라운드에서는 1. FSV 마인츠 05와 0:0 무승부를 거두며 도르트문트와는 승점 8점 차가 나버려 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짐으로써, 가을 챔피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르트문트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했다.

DFB-포칼 결승에서 다시 한번 데어 클라시커를 치렀으나 졸전 끝에 5:2로 대패하며 자국 리그, 컵 대회 모두 라이벌 도르트문트에게 내준 데 이어 레알 마드리드와의 혈투 끝에 결승에 진출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홈에서 첼시의 영혼의 10백과 디디에 드록바에게 당해 승부차기에서 이비차 올리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실축하며 빅 이어를 내줘야만 했고, 결국 2011-12 시즌 결과는 그 유명한 트리플 러너업이 되고 말았다. 축구 역사상 바이에른을 제외하고 단 한 팀만이 이 업적을 이뤘는데, 그 팀은 바로 2001-02 시즌의 바이어 04 레버쿠젠이다. 특히 양 팀에 모두 소속됐었던 한스외르크 부트 골키퍼는 준우승 트레블만 두 번 기록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부트는 2011-12 시즌이 끝나고 은퇴해서 2012-13 시즌 바이에른의 트레블 우승에 함께하지 못했다.

2.2. 2012-13 시즌

그렇게 절치부심한 2012-13 시즌에는 서브 부실로 피눈물을 흘렸던 바이에른은 다시 한번 분노의 영입을 시전하며 하비 마르티네스 단테, 마리오 만주키치, 제르단 샤키리, 클라우디오 피사로를 사왔다.

독일 슈퍼컵에서 열린 시즌 첫 데어 클라시커에서는 신입생들의 활약으로 도르트문트를 꺾으며 우승하면서 전 시즌의 복수를 어느 정도는 했다.

이후 리그에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10월 말까지 무려 8전 전승 26득점 2실점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다만 10월에 약간 삐걱대긴 했는데,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2차전에서 바테 보리소프에게 충격패를 당했고, 리그에서 홈에서 레버쿠젠에게 패하며 압도적인 기세가 살짝 꺾였다.[2]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은근히 간과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하인케스호의 12/13 시즌이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10월의 위기 아닌 위기를 넘기고 나서도 리그에서 무승부를 세 번이나 더 거두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4승 1무 1패로 조 2위 발렌시아 CF와 승점이 같았는데 승자승 원칙으로 간신히 조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후반기의 하인케스호는 그야말로 미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반기의 시작을 알린 리그 18라운드부터 마지막 34라운드까지 무려 17전 16승 1무 54득점 10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이 중에는 함부르크 SV를 상대로 거둔 9대2 대승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2010년대에 뮌헨이 한 리그 경기에서 넣은 최다골 기록으로 남아있다.[3] 그리고 리그 종료를 6경기나 앞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리그 28라운드에서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었다.

결국 하인케스호는 역대 최다 승(29승), 역대 최소 패(1패), 역대 최다 승점(91점), 역대 최단기간 우승(28라운드)[4], 2위와의 최다 승점 차(25점), 역대 최소 실점(18실점), 개막전 기점 최다 연승(8연승), 최다 원정승(15승), 최단기간 전반기 우승(14라운드) 등의 기록을 쓰며 분데스리가의 역대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갈아치우며 우승하였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다소 삐걱댔던 조별리그와는 다르게 토너먼트에서는 가면 갈수록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 우선 아스날을 원정에서 3대1로 꺾고, 홈에서는 0:2로 패배했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8강에 진출했다. 이 패배가 사실상 이 시즌에 뮌헨이 겪었던 마지막 위기였다.

8강에서는 이탈리아 챔피언 유벤투스를 만났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고 평가받은 이 경기에서는 전반 27초만에 터진 데이비드 알라바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1차전을 2:0으로 이겼고, 2차전도 어렵지 않게 2:0으로 유벤투스를 침몰시키며 유유히 4강으로 향했다.

그리고 4강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바르셀로나 토마스 뮐러의 맹활약을 앞세워 홈에서 4:0, 원정에서 3:0으로 승리를 거두며 합산 점수 7:0이라는 기절초풍할 스코어로 대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 경기들 전까지만 하더라도 뮌헨이 굉장히 흐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라이트팬들은 아직 그 위력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4강에서 바르셀로나를 말 그대로 자비 없이 줘패버리며 세계 축구팬들 전체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승전은 공교롭게도 영국 축구의 심장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데어 클라시커. 이전 시즌에 계속 뮌헨을 물먹였던 도르트문트였기에 뮌헨 팬들과 선수들의 마음은 더더욱 남달랐다. 경기는 하인케스와 위르겐 클롭의 현란한 공격 축구와 골키퍼 들의 선방쇼로 지켜보는 모든 팬들의 눈을 즐겁게 했으며, 끝끝내 지난 시즌 도르트문트 전에서 연이어 피눈물을 흘렸던 아르연 로번의 극적인 결승골로 2:1로 승리, 팀 역사상 다섯 번째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하인케스 본인은 커리어 두 번째 유럽 정복에 성공했다.
파일:attachment/유프 하인케스/1468784_585813934825249_966371023_n.jpg
여정의 끝을 트레블로 마무리짓다![5]

그리고 포칼은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순항 그 자체였다. 4강까지 5경기에서 단 1실점밖에 하지 않았으며, 그 1실점한 경기에서도 1골을 받고 6골로 맞받아치는 대승을 거둔 끝에 손쉽게 결승에 진출했다. 심지어 8강에서 최강의 상대 도르트문트를 만났음에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VfB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3대0으로 리드했으나 2실점을 하며 살짝 마지막에 똥줄을 타긴 했다. 하지만 끝끝내 리드를 지켜서 3대2로 승리, 역대 최다 득점으로(20골) 우승에 성공하며 바이에른 뮌헨의 독일 클럽 사상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했다.[6][7]

2012-13 시즌 바이에른이 기록한 골은 무려 153골. 시즌 중이었던 2월에 2012-13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던 하인케스는 결국 팀의 트레블 달성 후 아름답게 은퇴하게 된다.[8] 은퇴 선언 이후 바이에른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사장과 마티아스 자머 단장은 하인케스를 구단의 기술 고문으로 임명하여 자문을 하려고 했으나, 하인케스는 트레블을 이룬 자신이 구단에 잔류할 경우 후임인 펩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렇게 하인케스는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소일거리를 하며 실버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2.3. 2017-18 시즌

그런데 과르디올라의 후임으로 온 카를로 안첼로티가 2017년 9월 28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자, 대체자를 구하던 바이에른은 하인케스에게 SOS를 청했고, 하인케스는 10월 9일자로 "사랑하는 팀의 부름에 오게 되었다"라며 은퇴한 지 4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가족과 상의한 끝에 복귀를 결정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감독을 맡아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심지어 하인케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개까지 복귀를 동의했다고 하는데, 개가 두 번 짖는 걸 동의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계약 기간은 2017-18 시즌이 끝날 때까지이다. 바이에른 감독 부임만 무려 네 번째이다.

하인케스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어려운 상황이지만 팀이 정상 궤도를 찾을 거라 확신한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 또한 독일어를 못하는 하메스 로드리게스를 도울 것이고[9] # 국가대표에 차출된 아르투로 비달의 조기 복귀를 요청했다. #

파일:하인케스.jpg
파일:하인케스1.jpg
파일:하인케스3.jpg
복귀 후 첫 훈련 모습 사진이 공개되었다.

리그 8라운드에서 프라이부르크를 상대로 무려 5:0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바이에른의 훈련에 1,500여 명의 관중이 찾아왔고 프라이부르크전 대승에 환호했다. #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B조 3라운드 셀틱과의 경기에서도 3:0으로 완승, 조 2위로 올라섰으며 성공적인 챔스 복귀전을 치렀다. 바이에른이 완벽히 정상화 된 것, 그리고 폼이 하락했던 토마스 뮐러에게 자신이 알던 뮐러가 돌아왔다며 칭찬했다. #

11월 1일 시점에서는 현재 그야말로 하인케스 매직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공식 경기 5연승에 리그 1위 자리를 되찾았고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토마스 뮐러가 전부 결장하게 되어 전문 공격수가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셀틱 원정을 떠나 그야말로 뚝심으로 이겨내 조기 16강 확정을 이뤄냈다.

스피드만 빠르지 크로스나 컷백 정확도는 0에 가까워 팬들로 하여금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게 만들던 킹슬리 코망을 전성기 프랑크 리베리가 생각나게 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윙어로 만들더니, 활용도가 애매하던 하메스 로드리게스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프리시즌에 오랜만에 중앙으로 뛰어보았으나 크게 떨어진 기량으로 팬들을 실망시켰던 하비 마르티네스는 다시 미드필더로 대활약 중이며, 가장 결정적으로 토마스 뮐러가 부활했다. 하인케스 복귀 후 승점 5점 차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선두를 허용했던 바이에른은 리그 1위 자리를 탈환했고[10], 챔스는 16강행을 확정지었으며, 전승 행진을 달리고 있다.
리그 선두를 결정짓는 11월 5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1위 자리를 탈환하였다.

11월 18일 아우크스부르크전에서 3:0 승리를 거두며 선수 시절 포함 분데스리가 500승을 달성하였다.[11] 또한 분데스리가 30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파일:갓인케스.png
안첼로티 시절의 바이에른과 비교하면 하인케스 바이에른의 상황이 모든 면에서 좋아졌음을 알수 있다.

계약 연장을 언급한 울리 회네스 회장의 발언에, 하인케스 감독은 "계약은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며 연장 없이 내년 6월 30일까지만 바이에른을 이끌 것이라며 올 시즌까지만 팀을 이끌고 은퇴할 것임을 못박았다. #

많은 팬들의 시선이 모아졌던 조별리그 6차전 파리 생제르맹과의 일전에서는 주전이 다수 빠졌음에도 말 그대로 풀 주전의 파리를 3:1로 무너트리며 연륜과 클래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안티 네이마르 플랜과 파리의 약점들을 정확히 공략한 하인케스의 전술은 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쿼드 면면을 보면 어느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중원의 핵이자 플레이메이커 티아고 알칸타라와 최고의 수문장 마누엘 노이어가 장기 부상으로 쓰러졌고, 베테랑 돌격대장 아르연 로번 역시 부상으로 이탈했으며, 토마스 뮐러, 아르투로 비달 제롬 보아텡은 부상 여파로 후반 막판에 잠깐 뛰거나 아예 벤치에서만 지켜봐야 했다. 이들의 공백을 거의 완벽에 가까이 메워낸 건 로타어 마테우스에게 비아냥을 듣던 백업 골리 스벤 울라이히와 갓 이적해온 제바스티안 루디, 그리고 마찬가지로 갓 이적해 왔으며 22세, 23세에 불과한 코랑탱 톨리소 니클라스 쥘레였다. 프랑크 리베리 역시 장기 부상에서 돌아와 주말에 교체 투입 한 번 뛴 다음 두 번째 경기였는데 전술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유프의 플랜을 이행했다. 이토록 스쿼드가 거의 반토막났는데도 팀을 최강으로 유지시키는 것을 보면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능력이 경이로울 따름.

분데스리가 후반기 첫 경기인 레버쿠젠 원정 경기에서도 그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최전방 원톱 레반도프스키가 가벼운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어 뮐러를 또 한번 원톱에 배치했는데, 그러고서도 3:1 완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가 의미있는 것은 하인케스 감독이 트레블을 달성할 당시의 승리가 레버쿠젠 원정에서 바이언의 마지막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은퇴하고 무려 4시즌 동안이나 승리가 없던 레버쿠젠 원정 경기에서 완승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22라운드 샬케전에서는 독감으로 벤치에 앉지 못하고 수석 코치 페터 헤어만이 대신 지휘봉을 잡았다. 헤어만의 말에 의하면 경기가 끝나자마자 승리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헤르타 베를린과의 리그 24라운드가 종료된 현재, 공식전 22승 2무 1패를 기록 중이다. 저 2무는 RB 라이프치히한테 승부차기로 이긴 것, 헤르타의 극단적 텐백에 무를 캔 것이다. 부상자가 속출했던 와중에 포칼에서 라이프치히와 도르트문트를 연이어 만나는 등, 순탄치만은 않은 일정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성적이라 할 수 있다.

하인케스는 다시 한번 본인의 계약이 이번 시즌까지임을 재확인했다. 바이에른 보드진이 후임 감독 선임에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하인케스 감독에게 재계약을 제안했었으나 하인케스 본인이 이번 시즌까지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아버렸다. #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나이가 만 72세를 넘은 고령임을 감안한다면 더 이상 감독 생활을 하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다.[12]

그리고 2018년 4월 13일, 현 프랑크푸르트 감독인 니코 코바치가 바이에른의 후임 감독으로 확정되었다.

4월 7일 아우크스부르크와의 리그 경기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나흘 뒤 치른 세비야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는 0:0 무승부를 거두며 합계 점수 2:1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참고로 4강 상대는 유럽 대항전 바이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하인케스의 친정 팀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 시즌 초반에 리그 우승은 커녕 챔피언스 리그 진출조차 힘겨울 거라고 여겨졌던 바이에른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으니 정말 특급 소방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심지어 4월 17일 치른 포칼 4강전 레버쿠젠 원정에서는 무려 6:2 대승을 거두며 손쉽게 결승에 진출했다. 뮐러가 4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챔스 4강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고, 5년 전 바르셀로나를 만났을 때처럼 자신은 레알을 잘 알고 있다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감을 내비치며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전반적으로 뮌헨은 레알을 상대로 약우위의 경기력을 보이며 트레블 명장의 클래스를 보여주었지만, 1차전 초반에 나온 로번과 보아텡의 부상은 그가 교체 투입을 통한 전술 변화를 꾀하는 것을 방해하고 전반적인 게임 플랜을 꼬아버렸으며, 여기에 하피냐의 치명적인 패스 미스가 쐐기를 박으며 패배하고 말았다. 2차전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이번에는 부상을 없었지만 하필이면 시즌 내내 훌륭하게 노이어의 공백을 대체해준 스벤 울라이히가 치명적인 판단 미스로 골을 내주면서 합산 점수 3:4로 탈락하고 말았다. 전반 막판 마르셀루의 명백한 핸드볼 파울이 PK로 선언되지 않는 오심을 당하기도 했다.

비록 4강에서 탈락하면서 트레블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5년 전에 비해 상당히 노쇠하고 망가진 스쿼드를 가지고도 레알을 끝까지 몰아붙인 그의 전술적 역량은 축구 팬들에게 감탄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특히나 이번 탈락의 경우는 선수들의 실수와 부상 변수가 워낙 치명적이었다는 것을 축구 팬들도 인지했기 때문인지 하인케스 감독이 비판받는 일은 없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마지막 챔피언스 리그였지만 끝까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며 바이에른 팬들 이외의 해외 축구 팬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심어줬던 복귀였다.

하인케스 감독은 이후 인터뷰에서 더 이상 벤치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이제 완전한 은퇴를 하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

마지막 경기였던 포칼 결승에서는 프랑크푸르트에게 다소 충격적인 1:3 패배를 당하면서 더블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했다.[13] 하지만 팬들은 패배 직후 감사를 표하는 플래카드를 꺼내며 하인케스 감독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 날 뮌헨 마리엔 광장에서 열린 리그 우승 축하 행사에도 많은 팬들이 찾아오며 감독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이에 하인케스 감독은 전날 밤 패배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줘서 고맙다며 팬들에게 맞인사를 해주었다.

이어 그는 "뮌헨은 내가 80세가 됐을 때 또 부르면 안 된다"는 농담으로 다음 복귀는 없음을 명확히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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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ke, Heynckes!

3. 평가

하인케스의 뮌헨 3기는 바이에른 뮌헨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열어젖힌 시기로 평가받는다.

사실 새천년을 맞은 바이에른 뮌헨은 2001년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도 하고, 여러 차례 도메스틱 더블도 기록하는 등 꽤 괜찮은 행보를 이어왔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분명 강팀 자격은 있었지만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기에는 약간 아쉬운 면도 있었다. 심지어 2007년에는 아예 유로파 리그로 떨어지는 등 삐걱거리기도 했던 바이에른이었다. 이 삐걱거림이 절정을 맞은 때는 2008년부터였는데, 위르겐 클린스만이 역대급 졸전에 졸전을 거듭하며 팀을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렸다가 하인케스 본인이 간신히 구해내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만 땄었다. 그 다음 시즌에는 루이 판할의 지휘 하에 리그/포칼 더블에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이라는 호성적을 거두었지만, 역시 경기력은 다소 시원찮았고, 다음 시즌에는 아예 리그 3위까지 추락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어두운 상황에서 하인케스가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와 단숨에 팀을 탈바꿈시킨 것이다.

물론 복귀 후 첫 시즌은 부실한 뎁스로 인해 모든 대회에서 잘해놓고 정작 마지막에 미끄러지며 준우승 트레블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하인케스 휘하의 팀 전체가 모두 절치부심한 결과 2012/13 시즌에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선보이며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이라는 감격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절대강자라고 하기에는 약간 아쉬웠던 바이에른을 그야말로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린, 즉 마지막 단계를 완벽하게 완성시킨 하인케스 매직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분위기를 탄 바이언은 무려 분데스리가 11연패, 트레블 2회, 전관왕 1회 등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10여년을 보내게 된다. 하인케스가 구단 최고의 황금기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인케스 휘하의 12/13 시즌은 거의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물론 가끔 가다 리그에서 약팀을 상대로 쩔쩔맨 적도 있었고, 챔스에서도 바테 보리소프에게 충격패를 당하는 등 아예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이 정도 미끄러짐은 아무리 강팀이라도 어느 팀이나 다 겪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거의 다 시즌 초반에 일어난 일이었고, 시즌 중후반으로 치닫을수록 하인케스호는 점점 완벽해졌다. 결국 하인케스호는 가장 중요할 때 최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시즌을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다.

또한 하인케스가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뮌헨 구단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다는 데에 있다. 이전까지의 뮌헨은 다소 구시대적인 축구를 구사하며 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었는데, 하인케스가 부임하고 나서는 강력한 압박과 빠른 공격 전개, 체계적이면서 시원시원한 플레이와 이에 따른 엄청난 득점력으로 단순히 바이언 팬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 3자 팬들도 매혹시켰다. 실제로 현재 바이언을 응원하는 젊은 팬들은 하인케스 체제를 기점으로 바이언에게 반한 팬들이 상당히 많다. 특히 당시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FC 바르셀로나를 그야말로 일말의 동정도 없이 무자비하게 박살내버리는 모습을 전세계의 축구팬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알렸고, 이러한 강한 모습에 매료된 수많은 팬들이 바이언으로 몰리게 되었다.

하인케스의 이러한 성적과 플레이 스타일은 사실 단순히 바르셀로나전 승리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세계 축구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이다. 2008년부터 이어진 스페인 대표팀과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로 대표되는 플레이 스타일, 그리고 거둔 성공은 당시 세계 축구의 가장 이상적인 참고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4] 심지어 하인케스가 트레블을 달성하기 바로 전년도에 스페인 대표팀이 유로 2연패에 성공하며 스페인식 축구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케스는 무적에 가까워 보이던 티키타카를 충격적으로 박살내버리며 티키타카에 대한 완벽한 카운터를 제시했고, 이듬해 독일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 그리고 스페인 대표팀의 조별리그 광탈과 함께 티키타카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센세이션하게 등장한 전방압박은 2020년대 현재까지도 현대 축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됐을 정도로 뿌리를 내려버렸다. 물론 하인케스만 이것을 한 것은 아니고, 같은 시즌에 위르겐 클롭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시 레알 마드리드를 관광태우며 전체적으로 게겐프레싱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러나 게겐프레싱을 기본 틀로 잡고 그 안에서 다양한 세부전술을 보여준 하인케스가 가장 완성되고 이상적인 압박 전술을 구사한 것은 사실이다.[15]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기껏 확립해놓은 바이언의 정체성이 하인케스의 은퇴 + 펩 과르디올라의 부임에 따라 많이 희석되었고, 이어 카를로 안첼로티 니코 코바치를 거치며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펩이 오지 않고 차라리 하인케스가 몇 년 더 맡았으면 챔스를 최소한 한 번은 더 들지 않았을까 하며 입맛을 다시는 바이언 팬들을 아직까지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정체성을 2019년에 하인케스 본인의 추천으로 한지 플릭이 되살렸으며, 이에 따라 바이언은 귀신 같이 두번째 트레블을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플릭이 자진사임 한 이후 율리안 나겔스만 토마스 투헬을 거치며 또다시 정체성이 희석되다 못해[16] 투헬 체제에서는 완전히 반대되는 수동적이고 지루한 축구로 퇴화해버렸다. 결국 바이언 수뇌부는 새로운 감독을 찾으면서 경험은 부족할지라도 철학이 바이언의 정체성과 최대한 비슷한 감독을 선임하고자 초짜 감독인 뱅상 콤파니를 골랐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하인케스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2017/18 시즌에는 안첼로티 휘하에서 엄청 흔들리고 있던 바이언을 구하기 위해 소방수로 부임했는데, 4년의 공백기가 무색하게 불과 며칠 만에 팀을 다시 최정상급으로 올려놓았으며, 완전히 망할 위기에 놓인 시즌을 분데스리가 우승, 포칼 준우승, 챔스 4강이라는 호성적으로 마무리했다. 심지어 4강에서는 일부 선수들의 실수만 아니었다면 또다시 우승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물론 마지막 경기인 포칼 결승을 진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어쨌든 성공적인 시즌이긴 해서 하인케스는 박수를 받으며 다시 은퇴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하인케스는 뮌헨에게 최고의 성적과 경기력을 모두 선물한 감독으로 남게 되었고, 은퇴한지 오래된 현재까지도 바이언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17]

[1] 다만 이 당시 노이어는 장기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날렸고, 주장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상 토마스 뮐러였다. 노이어도 이를 인정하고 우승 세리머니 때 뮐러에게 트로피를 양보했다. [2] 이 레버쿠젠전 패배가 참 아쉬웠던 것이, 만약에 이 경기를 비기기만 했어도 분데스리가 최초의 무패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고, 덤으로 무패 우승 + 트레블이라는 정신 나간 기록까지 달성할 수 있었다. 참 공교롭게도 분데스리가 최초의 무패 우승은 12년 뒤에 이날 뮌헨을 꺾은 레버쿠젠 본인들이 달성했다. [3] 더 흠좀무한 건 이 때는 클라우디오 피사로, 제르단 샤키리 등의 후보 선수들이 일부 포함된 1.4군 라인업으로 뛰었었다. 이 중 피사로는 무려 4골을 넣었다. [4] 이 기록은 다음 시즌에 바이에른이 27라운드(25승 2무)에 우승을 확정하며 1시즌 만에 다시 깨졌다. [5] 지금에 와서는 이때의 바이에른 뮌헨이 21세기 들어 최고의 전성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하인케스 이후에 바이에른 뮌헨을 맡은 명장들이 하인케스 시절만큼 압도적인 공격력과 부분 전술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를 이끌고 역사적인 왕조를 건설한 바 있던 펩 과르디올라 역시 리그는 제패했지만 유럽 무대인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의 후임으로 온 카를로 안첼로티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며 경질되었다. 이 때문에 하인케스가 2년 정도만 더 감독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팬들이 많다. 2012-13 시즌에 역대 최강이라 불리던 리오넬 메시와 그를 뒷받침하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의 바르셀로나를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합계 7:0으로 박살낼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또한 하인케스가 그 날 입은 정장은 바이에른 뮌헨의 구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9-20 시즌 트레블을 달성한 명장 한지 플릭 감독의 바이에른이 매우 강한 포스를 보여주면서 지금까지도 12-13 시즌과 많은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6] 이 때는 이례적으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이 치러지고 난 이후에 포칼 결승이 치러졌다. 즉 챔스 우승을 한 상태에서도 트레블이 확정되지는 않았던 것. [7] 공교롭게도 이 결승전에서 슈투트가르트의 골문을 지키고 바이에른의 트레블을 목도한 선수는 훗날 비이에른으로 이적해 직접 트레블을 경험하게 되는 스벤 울라이히였다. [8] 원래 바이에른 이사진은 하인케스의 잔류를 원했으나, 하인케스는 나이와 건강상의 문제로 가족들과 상의 끝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 후임인 펩 과르디올라의 영입 확정은 그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과르디올라의 선임 이후 너무나 놀라운 경기력에 은퇴를 번복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9] 하인케스 본인이 스페인어에 능통하기에 가능한 것. [10] 물론 페터르 보츠의 도르트문트가 크게 흔들려줘서 하인케스 부임 후 승점을 단 1점밖에 챙기지 못하는 극심한 부진을 겪었던 점도 한몫했다. [11] 선수로서 174승, 감독으로서 326승. [12] 알렉스 퍼거슨과 불과 4살 차이밖에 안 난다. [13] 이 패배는 챔스 4강전과 달리 하인케스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비판받을 만한 충격적인 패배였다. [14] 얼마나 임팩트가 컸냐하면 조광래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대표팀에까지 적용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물론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15] 클롭 역시도 이를 성공적으로 익히게 되지만, 이는 리버풀 시절까지 가서야 확립되었다. 도르트문트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1차원적인 게겐프레싱 전술이 한계에 부딪혀 꽤 부진했었다. 바이언의 두번째 트레블을 이끈 한지 플릭도 하인케스보다는 덜 완성된 프레싱 전술 때문에 두번째 시즌에는 꽤 고전한 경기가 많았다. [16] 나겔스만은 분명히 능력이 있는 감독이지만 철학이 바이언과 완전히 맞지는 않았고,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기복이 심했다. 그래도 바이언 시절에 배운 것을 토대로 독일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해 UEFA 유로 2024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17] 대체로 우도 라테크, 오트마어 히츠펠트, 한지 플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