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06:06:03

7군단 클라우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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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록 갈리아 전기 · 내전기
기타
정책 삼두정치,( 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사건 · 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기타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 차르 · 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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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egio VII Claudia. 상징은 황소.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도나우 전선에 배치되어 4세기까지 발칸 반도의 방위를 담당했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58년 갈리아 전쟁을 단행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소집되었다. 이들은 갈리아로 집단 이주하던 헬베티족과의 전쟁에 참여했고, 뒤이어 게르만계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보주 전투에서도 참여해 결정적인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의 벨가이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사비스 전투 당시 12군단 빅트리스와 함께 좌익에 배치되어 네르비족과 대적했다. 두 군단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매우 용맹한 네르비족의 맹공에 고전하다가 좀더 높은 고지에서 싸우기 위해 후방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장교를 잃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7군단과 12군단의 군단기가 네르비족의 손에 들어갔고, 모든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이 전사했으며, 2명의 레가투스 중 한 명도 전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카이사르의 독려에 힘입어 끝까지 버티다가 다른 군단들이 적군을 물리친 뒤 네르비족을 협공한 덕분에 가까스로 승리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7군단장으로 세우고 대서양 연안 부족들을 복종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크라수스는 이 임무를 잘 수행했고, 기원전 56년 카이사르가 베네티족을 정벌할 때 갈리아 서남쪽으로 이동해 다른 갈리아 부족들이 베네티족에 호응하는 것을 막았다. 기원전 55년과 54년에는 브르타뉴의 부족들을 복종시키는 원정을 수행했다. 기원전 52년, 7군단은 아르망송 전투에서 벨로바키 족과 하이두이족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카이사르의 본대와 합류한 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연합군과 수 차례 전투를 치렀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선배 군단들과 함께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51년에는 카이사르에 여전히 반항하는 벨로바키 족을 복종시키는 원정을 수행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다른 갈리아 군단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카이사르의 1차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여 일레르다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함께 하여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여했고, 뒤이은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9군단, 10군단, 12군단과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캄파니아에 주둔한 채 카이사르가 자신들에게 보상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망명하려 했다가 살해된 이집트에 들어갔다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소식이 끊겨버렸고, 세간에서는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베테랑 장병들은 이러다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일부 고위 장교가 살해되었고, 여러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했다. 카이사르를 대신해 로마를 통치하던 기병장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들을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기원전 47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소아시아에서 침략 행위를 벌이던 폰토스 왕국 파르나케스 2세 젤라 전투에서 격파한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 돌아온 뒤 반란을 일으킨 군단병들과 협상한 끝에 큰 보상을 해주는 대가로 폼페이우스파가 준동하고 있는 아프리카 원정에 동참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47~46년 북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한 카이사르는 7군단 참전 용사들을 소환했고, 7군단은 기원전 46년 4월 6일 탑수스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카푸아와 루카 등지에 정착했던 그들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옥타비아누스에 대거 가담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 해 가을에 7군단을 8군단과 함께 재편성했다. 이후 무티나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대적했고, 2차 삼두정치가 결성된 뒤 삼두파 휘하 군대의 일원이 되어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해방자파 군대를 격파했다. 기원전 41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서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대적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시칠리아를 점령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 맞서 시칠리아 내전을 단행했을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다. 또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도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역시 분명하지 않다. 7군단 퇴역병들은 갈리아 남부에 주로 정착했으며, 나중에는 마우레타니아 지방에도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로마 제국 첫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7군단을 갈라티아에 주둔했다가 나중에 마케도니아 속주로 이전시켜서 도나우 전선을 지키게 했다. 서기 6~9년 일리리아 대반란 이후에는 달마티아의 해안가인 부르눔(현재 크로아티아 카스탄예)에 11군단 클라우디아와 함께 주둔했다. 7군단 정착병들은 티베리우스 치세 때 나로나(현재 크로아티아 메트코비치) 시에 정착하기도 했다.

42년 달마티아 총독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7군단과 11군단은 스크리보니아누스의 매수에 넘어가지 않고 클라우디우스 1세를 끝까지 따랐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반란을 진압한 뒤 이에 보답하고자 두 군단에게 '클라우디아 피아 피델리스(Claudia Pia Fidelis: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하고 충실하다)'라는 칭호를 선사했는데, 훗날 클라우디아로 약칭되었다. 58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도나우 전선에 있던 4군단 스키티카를 차출했을 때, 7군단이 이를 대체하고자 베오그라드 동쪽의 비미나키움(현재 세르비아 코스톨라츠)으로 이전했다.

4. 네 황제의 해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

68년 네로 황제가 자살한 후 새 황제에 오른 갈바의 실정으로 인해 69년 내전이 발발했을 때, 7군단은 도나우 방면 로마군 중 처음으로 갈바를 시해하고 제위에 오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편에 섰다. 이후 다른 도나우 전선군과 함께 오토를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내세운 라인 전선군이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오토를 격파하고 오토가 자결하면서 실패했다. 비텔리우스는 7군단을 포함한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켰다.

이에 원한을 품은 채 도나우 전선으로 돌아간 그들은 유대 반란 진압을 도맡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며 반기를 들었다. 7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도나우 전선군을 규합하여 이탈리아로 진격해 69년 10월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병들을 격파하고 크레모나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로마로 진격해 그해 12월 시가전 끝에 로마를 공략하고 비텔리우스를 처단함으로써 복수를 마무리했다.

69/70년 사르마티아 계열 유목 종족이 모이시아를 침공했을 때 모이시아 총독 폰테이우스 아그리파의 지휘하에 이를 저지하려 했다가 참패했다. 아그리파는 전사했고, 7군단 병사 다수가 전사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루브리우스 갈루스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고 사르마티아인들을 정벌해 승리를 거둔 뒤 7군단의 결원을 보충했다. 그 후 집권한 도미티아누스는 1군단 이탈리카, 3군단 아우구스타, 3군단 플라비아 펠릭스, 4군단 마케도니카, 5군단 마케도니카, 5군단 알라우다에 및 7군단의 퇴역병들을 새로 건설된 도시 스쿠피(현재 북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에 정착시켰다.

85/86년 겨울, 데케발루스 왕이 지휘하는 다키아 전사들이 도나우 강을 도하해 모이시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모이시아 총독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를 전사시키고 모이시아 전역을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7군단은 86/87년에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의 지휘하에 전투에 나섰으나 큰 타격을 입었고, 푸스쿠스는 전사했다. 88년 집정관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의 휘하에 재차 다키아군과 맞붙어 타페 전투에서 데케발루스를 격파했다. 그러나 라인강 전선의 게르만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사르마티아 부족과 마르코만니 족이 동방에서 로마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전선이 위험해지자, 도미티아누스는 데케발루스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였다. 로마는 매년 다키아에 8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바쳐야 했고, 그의 왕위 지위를 인정했다. 대신 로마의 '친구'가 되었고, 다시는 로마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에는 모이시아 수페이오르 속주에 있는 비미나키움으로 이전했다.

5.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98년 제위에 오른 트라야누스는 101년 다키아 전쟁을 감행했다. 7군단은 이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 중 하나였다. 그들이 주둔한 기지인 비미나키움은 로마군의 주요 작전 기지로 사용되었고, 7군단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일명 '트라야누스 다리'를 건설했다. 106년 데케발루스가 연이은 패배 끝에 자살하고 다키아 전역이 평정된 뒤, 트라야누스는 이번에는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다. 7군단은 113년부터 단행된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116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유대 반란군이 탈취한 키프로스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그 후 스코페로 돌아가 도나우 전선 방위를 수행하던 7군단은 161~166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 또다시 동방으로 이동했다. 원정을 마치고 도나우 전선으로 복귀했지만, 그 사이에 안토니누스 역병이 창궐하면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마르코만니 등 게르만 부족들과 록솔라니 등 사르마티아 계열 유목민족들이 이때를 틈타 도나우 전선을 돌파하여 로마 제국을 침략하면서, 마르코만니 전쟁이 발발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7군단 등 여러 군단을 동원해 이들을 상대로 악전고투한 끝에 격퇴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과 물자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마르코만니 전쟁이 한창이던 169년에는 7군단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신병 모집의 두 배를 징집해야 했다고 한다.

6. 이후의 행적

다섯 황제의 해 시기인 193년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를 자칭하자, 7군단은 즉시 그의 대의에 합류헤 그가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7군단은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해 198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철저하게 약탈했다. 216년 카라칼라의 파르티아 원정 때도 가담했을 것으로 보이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 때도 참여했을 수 있다. 동방의 여러 비문에는 7군단 군인들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지만, 이들이 어느 원정에 속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군인 황제 시대 당시 7군단의 행적은 모호하다. 248년 파카티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했을 때 그를 따랐는지 아니면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를 지지했는지는 불명확하다. 249년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데키우스와의 내전 당시 어느쪽을 지지했는지도 불명확하다. 이후 도나우 전선에서 로마군이 아브리투스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패배해 큰 손실을 입었는데, 7군단 역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갈리에누스 황제 치세에 황제를 따라 여러 전쟁에 참여했고, 갈리에누스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7군단에 'Pia VI Fidelis VI(6 번 헌신하고 충실함)'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는 내용의 동전을 주조했다. 269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휘하에 들어가서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물리칠 때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우렐리아누스 로마 재통합 전쟁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기록이 미비해서 불명확하다.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를 진압하기 위해 7군단과 함께 11군단 클라우디아, 3군단 플라비아 펠릭스, 1군단 일리리쿰의 분견대를 동원했다. 298년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 투입되었고, 7군단은 다른 부대들과 함께 아라비아 페트라리아 지방에 약 550km 길이의 도로를 건설해 보스라와 바시아니스 요새를 연결했다. 한편, 7군단의 일부 부대는 브리타니아 제국을 건국해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카라우시우스에 가담했다. 콘스탄티우스 1세가 297년 브리타니아 제국를 멸망시킨 후, 이들은 콘스탄티우스 1세 휘하로 귀속되었다. 그 후 4군단은 4세기 말까지 도나우 강 중류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