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06:14:50

하노이 락스

파일:hanoi rocks logo.jpg
가장 잘 알려진 1982~1984년도의 라인업.
왼쪽부터 내스티 수어사이드, 새미 야파, 마이클 먼로, 앤디 맥코이, 래즐
HANOI ROCKS
출신지 핀란드 헬싱키 파일:핀란드 국기.svg
멤버
해체 당시 멤버
마이클 먼로 ( 보컬)
앤디 맥코이 ( 리드 기타)
코니 블룸 ( 리듬 기타)
앤디 A.C. 크리스텔 ( 베이스)
조지 아틀라직 ( 드럼)
이전 멤버
얀 스텐포스 ( 리듬 기타)
새미 야파 ( 베이스)
래즐 ( 드럼)
집 카시노 ( 드럼)
페키 시롤라 ( 드럼
네도 소이니넨 ( 베이스)
스테판 피어스낵 ( 리드 기타)
텀피 바로넨 ( 드럼)
테리 차임스 ( 드럼)
르네 버그 ( 베이스)
티모 칼티오 ( 베이스)
라쿠 ( 드럼)
팀파 라이네 ( 베이스)
코스텔로 하우타마키 ( 리듬 기타)
스티비 클라슨 ( 리듬 기타)
장르 하드 록, 글램 록, 글램 펑크
활동 기간 1979년 ~ 1985년, 2001년 ~ 2009년
데뷔
1980년 싱글 I Want You / Kill City Kills
1981년 앨범 Bangkok Shocks, Saigon Shakes, Hanoi Rocks

1. 개요2. 소개3. 멤버4. 역사5. 하노이 락스의 영향력6. 디스코그래피
6.1. 스튜디오 앨범6.2. 라이브 앨범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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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하노이락스단체사진.jpg
1979년 마이클 먼로 앤디 맥코이를 중심으로 결성된 핀란드의 글램메탈의 전신 격인 밴드.[1]

밴드명은 Johnny Thunders and The Heartbreakers의 노래 Chinese Rocks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생산되는 핑크 헤로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2. 소개

그야말로 메탈 음악이 팝 수준의 위상을 차지하여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스트라토바리우스, 나이트위시 등 수많은 핀란드 밴드들의 대선배격인 아티스트이지만, 정작 하노이 락스와 그 후배들의 음악적인 유사성은 하드 록 사운드 빼고는 거의 적은 편이다. 핀란드 국내보단 주로 영국과 미국, 일본에서 활동하였고,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던 편이다.

칩 트릭[2], MC5, 뉴욕 돌스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3. 멤버

4. 역사

하노이 락스의 시작은 교회 지하실에서 시작되었다. 펑크 밴드 브리아드의 기타리스트인 앤디 맥코이는 밴드 연습 장소로 교회 지하실을 빌려 매드니스란 밴드와 함께 사용했다. 매드니스엔 보컬 겸 기타 막케 파거홀름이 있었다. 둘은 곧 친구가 되었고 막케는 브리아드와 함께 베이스와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앤디가 막케에게 브리아드로 들어오라고 요청했지만, 막케는 브리아드의 리더, 피트 말미가 펑크밴드 브리아드에 들어오려면 긴 머리를 자르라며 요구한 것에 반발심을 가지고 합류하지 않았다. 그 후, 앤디는 피트와 의견 차이가 생겨 브리아드를 나오게 되었고, 이후 둘은 같은 밴드에서 연주하며 더욱 친분을 쌓았다.

1979년, 앤디와 막케는 밴드를 결성할 생각을 했다. 앤디는 평소 좋아하던 조니 썬더스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의 곡 이름 Chinese Rocks[3]를 생각해 냈고 버스에서 막케에게 Chinese Rocks를 밴드명으로 하자며 제안했다. 하지만 막케는 밴드명을 조니 썬더스의 곡에서 직접적으로 따오는 것은 싫다며 거절했고, 이후 앤디가 베트남에서 가공 된 핑크색 헤로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얻어 Hanoi Rocks라는 이름을 막케에게 다시 제안했고, 그게 그들의 밴드명이 되었다.

첫 번째의 하노이 락스는 헤르토니에미의 올드 스웨디쉬 학교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곳에선 밴드 펠레 밀주나 & 1980의 앨범 발매 기념 LP 프로모션 파티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앤디는 막케와 스테판 피어스낵을 서로 소개시켜 주었다. 그 당시 스테판은 마약 때문에 펠레 밀주나의 밴드에서 해고된 상태였다. 파티를 하는 동안 막케와 스테판와 앤디는 셋이서 밴드를 결성할 생각을 했지만, 앤디는 후에 펠레 밀주나 오이에게서 연락을 받고 펠레 밀주나 오이의 소속이 되어 초기 하노이 락스의 멤버가 되지 못했다. 앤디에 의해 막케에게 소개된 앤디의 학교 친구 얀 스텐포스는 두 번째 기타리스트로 고용되었다. 베이스는 예수 하말라이넨, 페키 시롤라는 드러머로 고용되었지만, 예수는 곧 네도 소이니넨으로 교체되었다. 1980년 봄, 페키 시롤라가 밴드에서 나가고 펠레 밀주나 오이의 텀피 바로넨이 밴드에 드러머로 합류했다.

밴드의 첫 공연은 라토사리에서였고, 1980년 6월 4일에 타바스티아에서 두 번째 공연을 했다. 밴드는 주로 칩 트릭의 곡과 막케의 자작곡을 연주했다. 타바스티아 공연을 본 세포 베스테리넨은 공연 후 밴드를 극찬했고, 밴드와 만나기로 했다. 앤디와 막케는 세포와 매니저 계약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렇게 몇 번의 공연을 했으나, 막케와 얀만이 밴드에서 어울릴 뿐이었고, 밴드의 음악적 방향에 대한 멤버들의 생각은 맞지 않았다. 음악적 성공을 진지하게 원했던 막케는 그저 재미로 연주하는 밴드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1980년 리드 기타 스테판이 헬싱키 경찰 마약 부서에게 체포되었을 때 밴드는 마침내 해체되었다.

펠레 밀주나 오이를 선택함으로써 막케, 얀과 함께하지 못한 앤디(당시 앤디 먼로)는 펠레 밀주나 오이의 라플랜드 투어 직전에 하노이 락스를 재결성할 생각을 한다.앤디는 얀(당시 내스티 맥코이)에게 내스티 수어사이드란 이름을 주었고 자신의 이름을 앤디 맥코이라고 바꾼 후, 막케와 내스티를 자신이 구상한 밴드로 데려갔다. (막케는 그쯤 앤디의 옛 예명 중 하나의 성이었던 먼로를 따서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 먼로라고 지었다.) 예수 하말라이넨이 하노이 락스의 베이시스트가 될 계획이었지만 거절당했으며, 스톡홀름의 비외른 프뢰버그가 자신이 하노이 락스의 베이시스트가 되겠다며 연락을 주었지만 앤디 맥코이는 그의 전화번호를 잃어버렸고, 후에 앤디는 런던에서 막 돌아온 펠레 밀주나 오이의 새미 타카마키를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새미가 펠레 밀주나 오이를 탈퇴하고 자신의 밴드인 하노이 락스에 합류하도록 그를 설득했고, 새미는 3초 정도 고민한 뒤 동의하였다. 새미가 펠레 밀주나 오이에서 나와 하노이 락스에 합류하자 마이클과 앤디, 내스티는 새미에게 새미 야파[4]라는 예명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두 번째 하노이 락스가 결성되었다.

내스티의 기타 부품이 부족해지자 밴드는 구금 상태였던 스테판의 앰프와 기타 줄을 훔친 후 스톡홀름으로 떠났다. 스톡홀름에서는 마이클과 앤디의 오랜 친구이자 밴드메이트였던 예스퍼 스포레, 즉 집 카시노를 밴드의 드러머로 고용했다. 늦가을에 세포는 다시 그들의 매니저가 되었다.

부유한 여자친구와 별장에서 동거중이었던 앤디, 그리고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에 살았던 집을 제외한 마이클, 내스티, 새미는 옷과 악기 이외의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스톡홀름의 지하철 역과 거리에서 구걸하고 다니며 노숙자 생활을 했다. 하노이 락스는 스톡홀름의 한 콘서트 홀에서 두 번째 하노이 락스로써 첫 공연을 했다. 11월, 밴드는 요한나 레코드와 음반 계약을 맺었고 같은 달 앤디의 솔로 앨범으로 발매 될 예정이었던 싱글 I Want You / Kill City Kills를 하노이 락스의 이름으로 발매했다. 스톡홀름에서는 집과 함께 녹음을 했으며, 집이 헬싱키에 갈 수 없어 헬싱키의 스튜디오에선 마우카 페루스얏카의 드러머 케이모 히르보넨이 집 대신 드럼을 연주했다.

1980년 12월, 밴드는 핀란드로 다시 돌아가 비르타이 워커스 하우스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102회 공연이 잡힌 투어를 돌았다. 앤디의 말에 따르면 이 무렵 멜로딕한 하드 락이 하노이 락스의 음악적 방향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핀란드엔 공연장에서 밴드의 노래를 들으며 춤추는 십대 문화가 유행이었는데, 여느 때와 같이 하노이 락스의 공연에서 춤을 추려던 핀란드의 청년들이 하노이 락스의 노래가 너무 시끄럽게 연주되고 있어서 멜로디가 잘 돋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춤도 추지 못하겠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후에 하노이 락스는 시끄럽고 활기찬 연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81년 2월 두 번째 싱글 앤디가 15세 쯔음에 작사/작곡한 Tragedy가 실린 Tragedy / Café Avenue가 발매되었고, 같은 달 첫 번째 정규 앨범 Bangkok Shocks, Saigon Shakes, Hanoi Rocks가 발매되었다. 앨범의 프로듀서는 머디 트윈스(마이클과 앤디)였으며 Bangkok Shocks, Saigon Shakes, Hanoi Rocks는 핀란드 앨범 차트 5위에 올랐다.

하노이 락스는 핀란드와 스웨덴을 순회하며 투어를 돈 후, 1981년 9월부터 10월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Oriental Beat은 11월 런던에서 작업 및 녹음되었으며 11월 21일에는 마르키 클럽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했다. 11월 말에 Desperados / Devil Woman 싱글 앨범이 발매되었고, 또 다른 싱글 Dead By X-Mas / Nothing New 가 12월에 발매되었다.

1982년 1월 하노이 락스는 첫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으며, 같은 달에 두 번째 앨범 Oriental Beat가 발매되었다. Oriental Beat는 핀란드와 다른 북유럽 국가에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밴드는 1982년 봄 싱글 Tragedy로 일본 최초의 돌파구를 만들었고, 후 5월에 싱글 Love's An Injection / Taxi Driver와 EP Love’s an Injection / Malibu Nightmare / Taxi Driver / Problem Child / In the Year 79가 발매되었다.

1982년 6월, 밴드는 다시 런던으로 떠났다. 마이클은 조니 썬더스의 라이브 공연에서 하노이 락스의 팬인 래즐을 만났다. 먼로는 래즐을 조니 썬더스라고 착각해 말을 걸었고, 조금 뒤 래즐은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하노이 락스의 보컬이란 것을 깨달았다. 래즐은 마이클의 앞에 나타나 "현재 드러머(집 카시노)의 실력이 형편 없어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을 지경이다. 집 대신 자신이 하노이 락스의 드러머가 되게 해달라"며 말을 꺼냈다. 마이클은 앤디에게 래즐 이야기를 전했고, 1982년 7월 27일, 집은 타바스티아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고 Oriental Beat에서의 형편없는 드럼 연주, 심해지는 마약 중독과 우울증 증세 등을 이유로 해고당한다. 후에 앤디와 마이클은 래즐을 드러머로 고용한다.

7월부터 8월까지 래즐과 함께 생활 한 후 앤디, 래즐은 런던, 네덜란드,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을 거쳐 헬싱키로 돌아왔다. 헬싱키에서 하노이 락스는 래즐과 합을 맞추기 위해 야간 연습을 시작했다. 세 번째 앨범 Self Destruction Blues는 지난 8월 런던에서 발매되었다. Self Destruction Blues 앨범의 드럼은 집이 연주했지만, 앨범 커버 사진 속엔 집 대신 래즐이 드러머로써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0월 핀란드에서 발매된 앨범 Love 's An Injection이 핀란드 싱글 차트 케랑 1위에 올랐고, 케랑!은 밴드에 대한 첫 번째 기사를 냈다. 밴드는 일본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했다.나머지 1982년은 영국과 핀란드를 돌며 공연하였다.

1982년 말,하노이 락스는 마키 클럽에서 10월 25일, 11월 15일, 12월 1일, 9일 총 네 번의 공연을 했다. 새로운 드러머 래즐은 그의 새로운 역할에 익숙해졌으며, 밴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나중에 하노이 락스의 멤버들은 래즐이 밴드의 새로운 멤버가 되지 않았다면 1982년 여름이나 가을 쯤에 밴드가 해체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머틀리 크루는 12월 8일 토요일에 시내에 도착한 하노이 락스를 맞이했다. 머틀리 크루의 보컬 빈스 닐이 그들을 맞이해주었고, 빈스 닐의 집에서 발목을 다친 마이클을 제외한 하노이 락스의 멤버들이 파티에 참여했다. 파티 중, 맥주가 전부 떨어졌고, 래즐은 취한 앤디와 소파에서 자고 있는 새미를 뒤로 하고 빈스와 맥주를 사러가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술을 잔뜩 마신 빈스닐이 속도를 높여 차는 통제력을 잃었고, 반대편에서 오는 두 대의 차와 충돌하게 된다. 차는 래즐 쪽에서 충돌하여 빈스는 거의 다치지 않았다. 래즐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오후 7시 12분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케랑!에 의하면 반대편 차에 타고 있던 승객 한 명은 사망했으며, 두 명은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빈스의 아내는 한참 전에 술을 마신 채로 맥주를 사러 갔던 빈스가 래즐과 함께 돌아 오지 않자 걱정하기 시작했다 앤디와 토미 리는 둘을 찾으러 차를 타고 나섰고, 곧 래즐의 운동화와 부서진 빨간 데 토마소 판테라 차량, 그리고 빈스가 수갑을 차고 경찰에 연행되는 것을 보았다. 둘은 경찰에게 래즐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병원에서 앤디와 토미는 래즐이 죽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화가 난 앤디는 매니저 세포에게 전화해 나머지 멤버들을 병원으로 오게 했다.

밴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원동력이 된 인물이 2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나자 밴드는 좌절했다. 래즐의 죽음에 대해 들은 후 새미 야파는 밴드를 나가겠다고 한 자신을 설득한 래즐에게 넘어간 자신을 탓하며 완전한 절망에 빠졌고, 내스티는 말을 잃었다. 또 마이클은 큰 충격에 빠졌고, 앤디는 격노했다. 세포는 래즐이 여느 유명한 락스타들처럼 짧고 굵게 살다 떠나갔다고 말하며 멤버들을 위로했다.

12월 10일 머틀리 크루는 하노이 락스에게 밴드 합병을 제안했다. 합병에 대한 이야기는 1985년 봄까지 계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되지는 않았다. 로스 앤젤레스의 헤드라인은 온통 래즐의 죽음에 대한 기사였으며, CNN부터 일본 TV까지, 많은 방송사들은 래즐의 죽음 이후에 하노이 락스 멤버들과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롤링 스톤과 같은 유명한 음악 잡지들은 래즐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글을 썼다. 마찬가지로 신디 로퍼, 트위스티드 시스터 등의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도 래즐을 추모했다. 래즐의 죽음에 대한 여파로 하노이 락스의 모든 공연은 취소되었고, 밴드에 크게 기여한 맥코이도 밴드를 해체하는게 어떻겠냐고 얘기를 했다. 하지만 마이클과 내스티는 계속하고 싶었고, 취소되지 않은 유럽 A-Go-Go 공연을 위해 새로 고용한 드러머 테리 차임즈와 공연 준비를 했다.

빈스 닐은 결국 25,000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1985년 7월 닐은 200시간의 지역 사회봉사와 30일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며 19일 동안 사회봉사를 하다 조기석방되었다. 닐은 또한 래즐의 부모에게 2,600,000 달러를 지불했다.

유럽 ​최고의 락밴드들이 유럽 A-Go-Go 쇼에 선정되었다. 핀란드의 대표 밴드는 하노이 락스였다. Hanoi Rocks는 3월 3~4일 목요일과 금요일에 헬싱키 컬처 하우스에서 공연을 했다.. 금요일 콘서트는 유럽 A-Go-Go 쇼를 위해 유로비전에 방송되었다. 유럽 A-Go-Go 콘서트는 래즐의 사망 이후 밴드가 취소하지 않은 유일한 공연이었다.하노이 락스는 이러한 공연을 래즐 추모 콘서트로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하노이 락스는 1월 2일 수요일, 런던에서 헬싱키로 떠났다. 래즐의 죽음은 밴드의 해체 시기를 당겼고, 헬싱키에 도착한 날 새미는 갑작스레 밴드를 떠나겠다며 말을 꺼냈다. 특히 콘서트 전 마이클은 밴드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지쳐있었다. 영국 음악 잡지 사운즈의 독자 설문 조사에서 하노이 락스는 1984년 마릴리온 이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좋은 밴드로 선정되었다. 하노이 락스 뒤에는 아이언 메이든, ZZ 탑, 디오가 있었다. 하노이 락스의 싱글 Underwater World와 엘피Two Step From The Move가 투표에서 5위를 차지했다. 밴드의 콘서트 비디오는 2위를 차지했으며 퍼포머로서 밴드는 3위를 차지했다. 마찬가지로 마이클 먼로 자신도 올해의 남성성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앤디 맥코이는 기타리스트로 높은 순의를 꿰찼고 9번째로 좋은 키보드 연주자로 선정되었다. 래즐은 그가 존경했던 랫 스카비스를 제치고 5번째로 뛰어난 드러머로 뽑혔다. 하노이 락스와 밴드의 멤버들은 다양한 투표 목록의 상위권에 머물렀다. 케랑!의 여론 조사에서 하노이 락스는 9번째로 중요한 신인과 10번째로 좋은 앨범 기록을 낸 뮤지션이란 기록을 세웠다.

밴드의 새로운 드러머인 테리 차임스는 처음으로 콘서트에서 공연했다. 그는 5일만에 밴드의 노래를 외웠으며, 그는 콘서트에서 정확하고 명확하게 연주했지만 밴드의 영구 멤버가 될 의도는 없었다. 당시, 하노이 락스의 드러머는 더 댐드의 랫 스카비스가 될 예정이었다.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도 하노이 락스에서 연주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투어 때문에 미국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금요일 컬처 하우스의 콘서트는 오후 7시에 시작될 것으로 보였으나 밴드는 오후 8시 30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발을 짚고 걷던 먼로가 나머지멤버와 함께 나와 관중들에게 "Hei tytöt(안녕 소녀들)"이라고만 말했고 비명소리가 컬처 하우스 전체를 가득 메웠다. 밴드는 컬처 하우스의 공연을 실제 하노이 락스의 마지막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콘서트는 정석적으로 몇가지 곡만 연주했고 솔로나 그 이상의 앵콜은 없었다. 그 밴드는 콘서트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내스티가 이미 사운드체크 단계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로 인해 음향 스탭이 "기억하세요, 당신들은 여기에 그냥 재미만 보려 온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비록 밴드는 활기차게 공연에 임했지만, 콘서트의 분위기는 어딘가 슬퍼보였다.

공연의 정점은 락발라드 Million Miles Away였다. 래즐에게 헌정된 이 노래는 앞서 마이클이 "이 노래는 몇 주 전에 떠난 드러머인 래즐에게 헌정된 노래에요."라고 말했다. 마이클은 노래를 시작했지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참고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동시에 관중은 담배 라이터를 키고 들어올려 조용히 옆으로 흔들었다. 이 상황은 나중에 락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상황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공연이 끝난 후, 새미는 래즐과 함께 하노이 락스에 작별을 고했다.

지난 1월 음반사 CBS는 하노이 락스가 9월에 새로운 LP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밴드는 데모 녹음을 시작했다. 앤디는 새로운 노래를 작곡했고 밴드는 계획된 월드 투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슬픔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멤버들이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밴드는 2개월간의 휴식기를 가졌지만, 멤버들은 이미 잠정적으로 하노이 락스를 떠난 뒤 만들 솔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었다. 마이클과 앤디는 1월 9일 인터뷰에서 잘 될 것이라고 밴드를 안심시켰다. 앤디 맥코이가 스리랑카에서 휴식을 하며 작곡을 하던 1월에, 마이클과 내스티는 밴드의 드러머로 테리를, 베이시스트로 르네 버그를 선택했다.앤디는 르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마이클은 르네에게 호의적이었다. 1월 19일, 테리가 하노이 락스의 드러머가 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같은 뉴스에서 마이클은 테리가 비건이며 담배나 마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드러머로 들인 것을 좋은 선택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 당시 르네의 소식은 보도되지 않았다.

2월에 마이클은 밴드의 부진한 마케팅 및 예상보다 낮은 음반 판매 문제에 대해 CBS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밴드의 매니저인 세포는 여전히 ​​밴드의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었고 느리지만 확실히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믿었다. 밴드는 자신의 락 스타일을 강조했고 타 글램메탈 밴드처럼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헤비메탈쪽을 우선으로 두고 싶지 싶지 않았다.

3월엔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세포는 르네의 지배적인 스튜디오 작업에 만족하지 못했다. 르네는 다른 멤버들의 연주와 노래를 강제로 멈추고 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말해주었고 그를 계기로 르네에 대한 다른 멤버들의 태도도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폴란드 투어가 이미 준비되었기에, 투어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5월 9일,하노이 락스는 10일간의 폴란드 투어를 시작했다. 첫 공연이 끝난 후, 르네를 밴드에서 해고하기로 결정했고, 투어가 끝날 무렵, 하노이 락스는 락케리아 페스티벌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였다. 하노이 락스의 멤버들은 더 이상 이 밴드에서 연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라인업 (마이클, 앤디, 내스티, 르네, 테리)에서 1980년대 Hanoi Rocks, Rock & Roll Divorce의 마지막 앨범이 나왔는데 이는 폴란드 투어의 라이브 녹음이었다. 앨범은 밴드의 운명과 최후를 따서 명명되었으며 릭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폴란드 투어의 공연은 어떤 희망도 없이 고통스럽게 끝났다.

6월 폴란드 투어가 실패한 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모든 투어 계획과 버뮤다에서의 녹음 및 공연 계획이 취소되었다. 세포는 밴드에 "인력과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고 라인업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직후 밴드는 르네 버그를 해고하고, 티모 칼티오가 베이시스트로 고용되었다.

6월 17일, 마이클이 밴드를 떠났다고 발표되었고, 인기 멤버이자 중요 멤버가 밴드를 떠남으로써 마침내 밴드는 해체되었다. 밴드가 해체된 이후 8월 Hanoi Rocks, Rock & Roll Divorce 앨범이 발매되었다. 하노이 락스는 해체되었지만 1990년 초까지 그들의 인기는 지속되었다.


1985년 8월, 남은 하노이 락스 멤버들(앤디, 내스티, 티모, 테리)은 체리 밤즈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밴드의 보컬은 앤디의 지인 아니타 첼레마였다. 하지만 1986년 가을, 밴드는 하노이 락스 수준에서 성공하지 못하자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밴드는 하노이 락스 멤버들이 결성한 가장 성공적인 밴드들 중 하나로, 몇 번의 앨범 발매만으로도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이클 먼로는 1985년 가을 룸메이트 스티브 베이터스와 함께 일했고, 1985년 11월부터 12월까지 미국에서 솔로 가수로 활동했다.

앤디와 내스티는 수어사이드 트윈스를 결성했지만 앨범 하나를 내고 1986년 말 내스티가 앤디를 밴드에서 해고시킨 것을 끝으로 수어사이드 트윈스 프로젝트는 결렬되었다. 그 후, 앤디는 잠적하였고, 내스티는 르네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한편 1987년, 마이클의 첫 솔로 앨범인 Nights Are So Long이 미국에서 발매되었다. 마이클은 솔로 가수로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1989년 빌보드 리스트에 169위에 도달했다. 앨범 Not Fakin 'It을 녹음할 무렵 건즈 앤 로지스와 작업을 시작했다. 건즈 앤 로지스는 그들의 롤모델을 기리기 위해 같은 해 자신의 음반사인 Uzi Suicide에서 하노이 락스의 Two Steps From The Move와 Rock & Roll Divorce를 발매했다. 액슬 로즈와 슬래쉬가 특히 관련있었던 마이클과 건즈 앤 로지스의 작업은 1992년까지 계속되었다.

1988년엔 앤디의 첫 솔로 앨범 Too Much Ain't Entough가 발매되었다. 그 해 말, 잠적했던 앤디와 그의 가족은 런던을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BMG와 음반 계약을 맺었다. 1989년 앤디는 이기 팝의 투어에서 기타리스트로서 참여했고, 투어 후엔 건즈 앤 로지스와 함께했다. 1990년에 그의 이름이 적힌 앨범을 제작한 밴드의 슈팅 갤러리를 결성했고, 1994년, 슈팅 갤러리는 핀란드로 순회공연을 돌았다. 1995년 앤디는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인 Building On Tradition을 내고 투어를 하였다. 맥코이는 자신이 전에 소속되었던 펑크밴드인 브리아드에 집중하려고 노력했고, Briard Revisited (The 69 Eyes의 아츠지와 유시 소속)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를 가지고 앨범을 내놓았다. 1999년, 앤디의 삶에 대한 영화 "The Real McCoy"가 완성되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새미는 스톡홀름에서 아내와 아들 니콜라스 야파(래즐의 본명 니콜라스 딩글리에서 따왔다.)와 함께 살았다. 당시 야파는 새미 야파&펠레 알그르 프로젝트에서 하나의 EP를 발매했다. 1988년 샌프란시스코 글램메탈 밴드 젯보이는 새미에게 베이시스트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지만 2년 뒤인 1990년에 탈퇴했다. 그 다음, 새미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마이클, 스티브 스티븐스와 함께 예루살렘 슬림을 결성했으며 한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하지만 마이클과 새미는 예루살렘 슬림의 앨범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스티브 스티븐스가 빈스 닐의 밴드에 합류하여 예루살렘 슬림은 해체되었다.

2001년 2월, 마이클과 앤디는 1985년 이후 처음으로 핀란드 투르쿠에서 함께 공연했다. 그들은 2001년 여름에 "Hanoi Revisited"라는 이름으로 다시 투어를 돌았다.

마이클과 앤디의 합의 하에 하노이 락스가 재결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미는 "이는 (두 사람이 말했듯) '재결합'이 아닌 '재탄생'이라"고 평했다. 그도 그럴것이 먼로와 앤디 이외의 원년 멤버들은 새로운 하노이 락스에 동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래즐은 죽었고, 내스티는 약사가 되었으며 새미는 매드 후아나라는 뉴욕 밴드와 뉴욕 돌스의 베이시스트였다. 또 집은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이클과 앤디는 마이클의 솔로 밴드에서 드러머 카리 '라쿠' 라흐티넨, 베이시스트 팀파 라이네를 데려왔고, 핀란드의 락밴드인 포페다에서 기타리스트인 코스텔로 하우타마키를 영입했다.

마이클과 맥코이는 공동 작곡가가 되기로 합의했다. 2002년까지 둘은 앨범에 쓸 충분한 곡을 썼고 Twelve Shots on the Rocks가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핀란드와 일본에서 히트를 쳤다. 이 앨범은 2003년에 리믹스되었다.

2003년과 2004년의 대부분은 순회공연을 돌았고 코스텔로는 포페다와 함께 일을 계속하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 그는 곧 기타리스트 스티비 클라슨으로 대체되었다. 허나 그는 그가 다른 밴드 멤버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2004년 가을 해고되었다. 팀파는 가족 문제로 인해 떠났다.

2004년, 밴드는 앨범 Another Hostile Takeover를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향했다. 허나 밴드엔 베이시스트도 기타리스트도 없었기 때문에 마이클이 베이스와 기타 파트 일부를 연주해야 했다. 2005년 초, 밴드는 새로운 기타리스트 코니 블룸을 영입했다. 그는 그와 함께했던 베이시스트 앤디 "AC" 크리스텔도 밴드에 합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새 앨범 Another Hostile Takeover에 대해서 반응이 갈렸다. 비평가들은 앨범의 다양성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용기를 좋아했지만, 일부 올드 팬과 하드락 팬들은 1980년대 이후 하노이 락스가 너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2005년과 2006년, 밴드는 유럽과 아시아를 순회했다.

Street Poetry가 2007년 9월 5일에 발매되었고 첫 번째 싱글 " Fashion "의 뮤직비디오가 촬영되었다. 또 이 앨범은 마이클과 앤디 이외의 다른 멤버들도 작곡에 참여했다.

2008년 1월 25일,라쿠는 갑자기 포페다에 합류하기 위해 밴드를 떠날 것이라고 밝혔다. 3월 20일, 밴드는 "Hanoi Rocks Steppin' Out Acoustically"라는 이름의 첫 번째 어쿠스틱 투어를 시작했으며, 이 투어에서선 드럼 세션이 드럼을 연주했다. 5월 25일, 밴드의 새 드러머가 스웨덴 드러머인 조지 아틀라직이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이 무렵 마이클과 앤디는 하노이 락스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노이 락스를 살려보려 노력했으며, 밴드가 곧 해체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8년 말, "All Those Wasted Years"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이 출판되었다.

밴드는 헬싱키의 타바스티아 클럽에서 6일 동안 8번의 작별 공연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든 공연이 매진되었고 밴드의 원년 멤버인 내스티가 마지막 공연 중 세 번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라쿠도 마지막 공연에 등장했다.

마지막 공연은 Buried Alive 라는 제목의 DVD로 2009년 후반에 출시되었다 .

하노이 락스가 다시 해체된 이후, 마이클과 새미는 마이클의 솔로 밴드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으며, 앤디도 솔로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내스티 수어사이드는 1990년 중반 쯔음 음악계에서 은퇴하여 약사가 되었다...가 2022년, 20여년만에 'Stenfors'[5]라는 이름으로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다. [6]

2022년 9월 7일 마이클 먼로의 6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위해 일시적이지만 오리지널 라인업으로 재결합을 했다.[7]

5. 하노이 락스의 영향력

하노이 락스의 영향력은 많은 밴드의 음악과 패션스타일에서 볼 수 있다. 건즈 앤 로지스[8],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스키드 로우, 포이즌, 머틀리 크루 등에게 음악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뉴욕 돌스의 외양을 되살리고 어레인지한 하노이 락스 특유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은 글램 메탈, 비주얼계 밴드들에 의해 유행으로 번지기도 했다. 또 빌리 아이돌, 푸 파이터스 등도 하노이 락스의 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푸 파이터스의 기타리스트 크리스 시플렛은 앤디 맥코이와 하노이 락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하노이 락스는 펑크 기반 그런지를 개발하는 데에도 한몫했다. 예를 들자면, 밴드 앨리스 인 체인스는 하노이 락스의 Taxi Driver를 공연에서 연주했고, 그 노래는 여러 데모에 녹음되었다. 펄 잼의 기타리스트 마이크 맥크리디도 밴드가 하노이 락스처럼 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하노이 락스는 또한 핀란드 팝계에서 가장 큰 밴드로도 선정되기도 했다.

핀란드, 스웨덴, 일본, 영국에서는 하노이 락스를 모방한 여러 밴드가 결성되었다. 스마크 인 더 홀리 퍼펫스, 네거티브, 더 69 아이즈, 백야드 베이비스 그리고 엑스 재팬이 그 예다.

건즈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도 건즈 앤 로지스가 하노이 락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고, 1987년 건즈 앤 로지스 케랑! & 마키클럽 공연 인터뷰에서 "우릴 글램메탈에 넣지 말아 줘. 그냥 스타일을 참고했을 뿐이지. 이지가 하노이 락스의 사진을 가져왔어. 난 멋지다고 생각했지. 그때 스타일을 찾느라 보그지도 찾아보고 있었거든.", "우리에겐 두 기타리스트가 있어. 80년대 블루스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와 앤디 맥코이에 환장한 기타리스트. 하지만 우린 그 둘을 조합할 방법을 찾았지."라고 하노이 락스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건즈 앤 로지스의 기타리스트 슬래시는 이렇게 말했다. "하노이 락스는 진짜였다. (Hanoi Rocks were the real deal.)"

2008년 데프 레파드의 보컬리스트 조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노이 락스가 좋은 밴드라고 생각해. 특히 마이클 먼로가 최고야. 난 그가 좋아. 섹시하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난 게이는 아니야. (웃음) 앤디 맥코이는 정말 키스 리처즈같고, 머틀리 크루 포이즌 같은 밴드보다 훨씬 낫지. 하노이 락스는 진짜였어. 나머지 애들은... 나한텐 가짜 같이 보여."

6. 디스코그래피

6.1. 스튜디오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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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lve Shots on the Rocks
Twelve Shots on the R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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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라이브 앨범

  • All Those Wasted Years (1984)
  • Rock & Roll Divorce (1985)

7. 여담

  • 마이클 먼로의 성 Monroe는 마릴린 먼로에게서 따온 것이 맞다. 인터뷰에서 "먼로, 난 그녀가 죽은 여름에 태어났다. 나는 항상 그녀가 우아하고,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했고, 마이클 먼로는 좋게 들렸다. 처음엔 앤디가 앤디 먼로가 될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 1987년 래즐의 사망 2년 뒤, 마이클 먼로는 살인사건을 내고 돈으로 살인사건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부자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려주는 내용의 노래 "Too Rich To Be Good"을 만들었다. [9]
  • 1983년 7월 중순, 얀 스텐포스는 유사 모르핀 진통제인 돌로레스를 술 두 병과 함께 복용한 후 입원했다고 한다. 앤디 맥코이의 말에 따르면 그는 3-4일 동안 많은 양의 코카인, 헤로인 및 암페타민을 사용했다고. 당연하게도 그의 신장은 망가졌고, 며칠 동안 투석을 받았다고 한다. 내스티의 입원으로 인해 하노이 락스는 잠시동안 다른 기타리스트를 고용해야 했고, 매니저 세포는 그가 자신의 이름인 '내스티 수어사이드'처럼 구는 것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앤디는 내스티의 자살 행위가 "하노이 스타일"에 속한다고 말하면서 흥분하고 칭찬했다... 그해 여름 초 내스티는 이미 런던 클럽 화장실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 일본에는 하노이 락스의 노래를 따로 들을 수 있는 전화 부스가 존재했다.
  • 이기 팝의 노래 Cold Metal의 뮤직비디오에 앤디 맥코이가 출연한다. [10]
  • 건즈 앤 로지스의 노래 Paradise City 뮤직비디오에 내스티 수어사이드가 카메오로 잠깐 출연한다. [11]
  • 아파르트 헤이트에 반대하는 예술가들(Artists Against Apartheid)의 노래 Sun City 뮤직비디오에 마이클 먼로가 카메오로 출연한다.
  • 액슬 로즈는 마이클 먼로의 두번째 솔로 앨범 'Not Fakin' It'의 타이틀곡 "Dead, Jail or Rock 'n' Roll"에 피쳐링하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 마이클 먼로의 말에 따르면, 머틀리 크루의 보컬 빈스 닐과 래즐이 친한 친구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겨우 몇 번 만났을 뿐이고 서로를 거의 알지 못했다고. 래즐이 빈스 닐을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래즐과 빈스 닐이 술자리에서만 만나는 수준의 사이였다고 말했다.
  • 마이클 먼로와 새미 야파는 레미 킬미스터와 친분이 있다. 특히 마이클 먼로와 굉장히 친했다고. 둘과의 친분 덕분인지 레미 킬미스터는 마이클 먼로 밴드의 노래 'Debauchery As A Fine Art'에 피처링을 해주었다.
  • 새미 야파는 젊었을 적 레미 킬미스터의 옆에서 마약을 하다 레미에게 목을 졸린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새미는 '이거 끔찍한데...하지만 정말 멋진걸, 레미에게 얻어맞고 있다니.'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 I Want You는 앤디가 스웨덴 락밴드 Heartbreak의 노래 "vill ha dej" 의 가사를 그대로 영어로 번역만 한 버전이다.


[1] 참고로 멤버들의 이름은 모두 영어권 락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내세운 예명으로 당연히 핀란드식 본명은 따로 있다. 마이클 먼로는 Matti Antero Kristian Fagerholm(마티 안테로 크리스티안 파거홀름, 마이클 먼로란 예명을 쓰기 전엔 Makke Fagerholm(막케 파거홀름)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내스티 수어사이드는 Jan Markus Stenfors(얀 마르쿠스 스텐포스), 앤디 맥코이는 Antti Hulkko(안티 훌코), 새미 야파는 Sami Lauri Takamäki(새미 라우리 타카마키), 래즐은 Nicholas Charles Dingley(니콜라스 찰스 딩글리)이다. (래즐은 핀란드인이 아닌 영국인이다.) [2] 초창기 공연에서 칩 트릭의 곡을 자주 연주했다. [3] 중국에서 가공된 흰색 헤로인을 뜻하는 속어 [4] 앤디의 말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새미 야파가 된 이유는 그가 오렌지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렌지의 한 품종인 Jaffa 오렌지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을 지어줬다고. 새미 자신은 인터뷰에서 그가 읽던 만화 캐릭터의 이름을 따왔다고 말했다. [5] 내스티의 가족들로 이루어진 밴드다. [6] 가끔 마이클 먼로 밴드의 게스트로 참가해 마이클, 새미와 함께 공연을 함께하기도 한다. [7] 드러머는 1집과 2집을 녹음한 초기 드러머 집 카시노가 맡는다. [8] 초창기 리듬기타를 맡은 멤버인 이지 스트래들린이 하노이 락스의 팬이었다. 또 마이클 먼로가 후에 건즈 앤 로지스의 음악 제작을 돕기도 했으며, 슬래시, 그리고 액슬 로즈와 무대를 함께 선 적도 있다. [9] 마이클 먼로는 이 곡에 대해 뭐라고 명확하게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곡의 가사를 보아 머틀리 크루의 빈스닐이 일으킨 교통사고와 그후의 행보를 저격하는 노래인 것 같다. [10] 앤디는 이기 팝과 투어를 같이 하기도 했었다. [11] 4분 20초에 당시 애인이었던 시몬 스텐포스(또는 시몬 수어사이드)와 함께 등장한다. [12] 파일:알렉시기타마이클.jpg [13] 파일:darkthrone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