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2 08:10:45

프랭크 화이트

프랭크 화이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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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캔자스시티 로열스 엠블럼(1979~1985).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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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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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버스비 에이모스 오티즈 딕 하우저 쿠키 로하스 폴 스플리토프
데니스 레너드 할 맥레이 조 버크 래리 구라 프레디 파우텍
유잉 카우프먼 조지 브렛 프랭크 화이트 무리엘 카우프먼 존 메이베리
댄 퀴즌베리 화이티 허조그 윌리 윌슨 제프 몽고메리 데니 매튜스
브렛 세이버하겐 마이크 구비자 아트 스튜어트 케빈 에이피어 조지 토마
마이크 스위니 네드 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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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0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신설 프랭크 화이트
( 캔자스시티 로열스)
그렉 네틀스
(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77년 ~ 198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2루수 부문 골드 글러브
바비 그리치
( 볼티모어 오리올스)
프랭크 화이트
( 캔자스시티 로열스)
루 휘태커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6년 ~ 1987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2루수 부문 골드 글러브
루 휘태커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프랭크 화이트
( 캔자스시티 로열스)
해럴드 레이놀즈
( 시애틀 매리너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86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2루수 부문 실버 슬러거
루 휘태커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프랭크 화이트
( 캔자스시티 로열스)
루 휘태커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19번
바비 누프
(1971~1972)
프랭크 화이트
(1973)
넬슨 브라일스
(1974~1975)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20번
배리 라지아노
(1973)
프랭크 화이트
(1974~1990)
결번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20번
제프 리차드슨
(1993)
프랭크 화이트
(1994~1996)
팻 마홈스
(1996)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20번
결번 프랭크 화이트
(1997~2001)
영구결번
}}} ||
파일:Frank White.jpg
<colbgcolor=#004687><colcolor=#ffffff> 캔자스시티 로열스 No. 20
프랭크 화이트
Frank White
본명 프랭크 화이트 주니어
Frank White Jr.
출생 1950년 9월 4일 ([age(1950-09-04)]세)
미시시피 주 그린빌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링컨 고등학교
신체 180cm / 74kg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0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KC)
소속팀 캔자스시티 로열스 (1973~1990)
지도자 보스턴 레드삭스 1루 주루코치 (1994~1996)
캔자스시티 로열스 1루 주루코치 (1997~2001)
정당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 MiLB 시절2.2. 캔자스시티 로열스 시절
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이모저모6. 연도별 성적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의 前 야구 선수, 야구 코치이자 現 정치인.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내야수, 그 중에서 2루수로 활약했다.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셋 밖에 없는 영구결번자( 조지 브렛, 딕 하우저, 프랭크 화이트) 중 한 명[1]이며, 역시 조지 브렛과 함께 로열스의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 팀의 내야진을 지탱하며 헌신했던 선수다. 별명은 'Smooth' 혹은 'Hoover'로, 둘 모두 그의 뛰어난 수비 실력 때문에 붙여졌다.[2]

통산 성적은 18시즌 .255/.293/.383, OPS 0.675, 순장타율 .128, BB/K 0.40, wRC+ 84, 2006안타 160홈런 886타점 178도루.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 MiLB 시절

미시시피 주 그린빌 태생으로, 6살 때 캔자스시티로 이주해왔다. 젊은 시절 야구를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화이트가 다니던 학교는 야구부가 없던 탓에 학교에서는 야구보다는 농구나 축구 등을 주로 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마땅히 정착하지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 돌아다니며 근근이 먹고 살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다가왔으니, 지역 메이저리그 팀인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일명 '로열스 아카데미'[3]를 만들어 실력 있는 아마추어 선수들을 모집하겠다고 나선 것. 화이트는 이내 관심을 가졌고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미혼자만 아카데미에 참여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4] 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봤던 로열스 측에서 '기혼자임에도 아카데미에 합류하겠다고 한 선수도 있다', '합류하게 되면 아내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며 설득했고, 화이트는 이에 응하며 1970년 입단 계약을 맺고 로열스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마이너 리그에서는 루키 리그부터 트리플 A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밞아가며 실력을 키워갔고, 1973년 주전 유격수였던 프레디 파텍[5]이 부상으로 잠시 로스터에서 빠지자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콜업되면서 입단 3년 만에 첫 메이저 무대를 밟는다. 이는 로열스 아카데미 출신 선수가 처음으로 메이저에 데뷔한 사례기도 했다.[6]

2.2. 캔자스시티 로열스 시절

파일:Frank White Royals.jpg
팀을 위해 헌신했던 캔자스시티 로열스 시절.
그렇게 메이저 리그로 올라온 화이트였지만, 커리어 초반에는 그리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유틸리티로 내야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1976년부터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하지만, 이전의 주전 2루수가 팀의 인기 선수였던 쿠키 로하스[7]였기에 팬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8] 거기다 화이트의 성적은 489타석에 들어섰음에도 슬래시라인 .229/.263/.307로 OPS가 6할도 안 되는 처참한 성적이었기에[9] 비난은 나날이 더해만 갔다. 하지만 이에 기죽지 않고 자신의 강점인 수비를 갈고 닦으며 절치부심한 화이트는 1977년 62경기 연속 무실책 등 탄탄한 수비력을 내세우며 생애 첫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고, 이듬해(1978년)부터는 타격도 타율 .260에 OPS 0.7 정도는 찍어주는 수준으로 올라오며 로열스의 2루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화이트는 주전으로 도약한 1977년부터 1982년까지 6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에 올스타전에도 4회 출전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다만 포스트시즌에서는 번번이 ALCS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막히며 고배를 마셨고, 1980년에는 자신의 맹활약에 힘입어(타율 .545)[10] 드디어 숙적 양키스를 물리쳤지만, 월드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막히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조금씩 발이 느려지기 시작하며 도루 페이스가 꺾인 1982년부터는 타격 스타일을 바꾸며 어느 정도 한 방이 있는 타자로 거듭났고, 연일 커리어 한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하며 타격에서 한 층 더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85년과 1986년에는 두 시즌 모두 22홈런을 쳐냈고, 이 중 1986년에는 생애 유일한 실버 슬러거 수상이라는 영광을 누리기도. 이외에도 1985년에는 팀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자 4번 타자의 중책을 맡아[11]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고, 팀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하면서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반지를 얻었다. 다만 월드 시리즈에서의 4번 타자 출장은 화이트의 타격이 4번 타자 감이었다기보다는 다른 요소로 인한 것이었는데, 당시 월드 시리즈는 홀수 해였던 터라 내셔널 리그 룰에 따라 치러졌고, 이에 따라 지명타자가 소멸하면서 기존의 지명타자였던 할 맥레이가 출전하지 못하게 되며 딕 하우저 감독이 그 자리를 그나마 팀 내 홈런 3위였던 화이트에게 맡긴 것.[12]

이후 1989년까지도 변함없이 로열스의 2루를 지키며 골드 글러브도 2회 더 수상(1986~1987)했고,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0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지만 시즌 말미에는 구단 측에서 그의 노쇠화를 이유로 출전 기회를 제한하며 감정의 골이 다소 깊어졌고, 결국 시즌 종료 후 반강제적으로 은퇴하기에 이른다.

3. 은퇴 후

은퇴 후로는 주로 지도자 경력을 쌓으며 야구계와의 인연을 이어갔는데, 은퇴 과정에서 겪었던 진통 탓에 처음에는 친정팀 로열스가 아닌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루키팀 감독으로 1992년을 보내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메이저로 승격돼 1994~1996년 3년 간 레드삭스 1루 주루코치로 있었고, 이듬해(1997년)부터는 그간의 앙금을 풀고[13] 친정팀 로열스로 컴백해 역시 1루 주루코치직을 2001년까지 맡았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로열스 산하 더블 A 팀 감독을 지냈고, 2007년 시즌 종료 후 로열스의 감독직이 공석이 됨에 따라 감독 후보군으로 올랐으나 최종적으로는 트레이 힐만[14]에게 감독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후로는 잠시 팀을 떠나 2008년부터 캔자스시티 지역 방송국의 경기 분석가 겸 리포터로 활동했고, 2011년 방송 일을 그만둔 이후로는 다시 팀으로 돌아와 구단 프런트에서 일했다.

그렇게 야구와 관련된 삶을 이어가던 2014년, 뜬금없이 민주당 소속으로 잭슨카운티 의회 의원직 출마를 선언해 모두를 놀라게 했고, 이 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계에 입문한다. 이후 2016년에는 의회 임원 자리에까지 오르고 2018, 2022년에도 재선에 성공하며 정계에서도 나름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다.

재미있게도 로열스의 구단주가 바뀌고 잭슨카운티에 새 구장 계획을 내놓은 2023년부터는 화이트가 신구장 부지 및 재원 확보와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 잭슨카운티 측 협상단의 대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타자로서의 화이트는 냉정히 말해 좋은 평가를 주기 어렵다. 통산 OPS는 0.675에 wRC+는 84로 그가 활동했던 시기[15] 2루수라는 포지션을 고려해도 살짝 모자라는 수치이고, 발은 빠른 편이라 시즌 20도루 이상을 3번 기록하기도 했지만 선구안이 좋지 못했던 편이라(통산 BB/K 0.40) 출루율이 낮아서(통산 출루율 .293) 그리 큰 의미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발이 느려지기 시작한 1982년 이후로는 어느 정도 장타를 노릴 수 있는 스타일로 변신에 성공, 이전까지 두 자리수 홈런과 4할 장타율을 함께 기록한 시즌이 1번(1979년)밖에 없었던 똑딱이에서 6년 연속(1982~1987) 두 자리수 홈런+4할 장타율을 기록하는 중거리 타자로 변하며 공격력이 어느 정도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그 반대급부로 삼진도 함께 늘어나면서 전체적인 타격 생산성은 소폭 상승하는 정도에 그쳤다.

파일:Frank White Defense.jpg
이렇게 타자로서는 대체로 평균보다 약간 아래~평균 사이의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가 10여 년 넘게 주전으로 집권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수비다. 특유의 부드러운 수비로 어려운 타구들까지 척척 처리하는 모습은 그가 주전 2루수로 뛰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선수 생활 내내 골드 글러브를 8번이나 수상했고(1977~1982(6년 연속), 1985~1986) 리그 2루수들 중 수비율 1위를 한 시즌이 세 차례(1977, 1983, 1988)나 있을 정도로 고전 수비 스탯에서는 널리 인정받았고, 이후 세이버메트릭스를 통해 레인지 팩터, UZR, TZ 등의 수비 스탯들이 새로이 등장한 이후에도 해당 스탯들에서 상위권에 자리하며 그가 리그 정상급 수비수였음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러한 평가를 반영해 로열스의 홈구장인 카우프만 스타디움에 세워진 화이트의 동상은 다른 타자들과는 달리 수비 시의 동작을 표현해 만들어졌다.

5. 이모저모

  •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투표 자격을 얻은 첫 해(1996년)에 18표(3.8%)를 받으며 함께 자격을 얻었던 팀 동료 댄 퀴즌베리와 함께 일찌감치 탈락했다. 애초에 누적 스탯도 2000안타를 기록한 것을 빼면 상당히 빈약할 뿐더러 비율 스탯은 더 안 좋았던지라 수비로 어느 정도 메운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파일:Frank White Statue.jpg
카우프만 스타디움에 세워진 화이트의 동상
  • 캔자스시티 로열스 구단은 원클럽맨으로서 팀에 기여했던 화이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95년 7월 2일 그의 등번호 20번을 영구결번했다. 이후 화이트는 1997년 로열스에 코치로 복귀하면서 자신의 등번호 20번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 송승준의 미국 마지막 시즌(캔자스 산하 더블A) 당시 감독이었다. 송승준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 딱 공 하나만 메이저에서 던져보고 싶다고 하자, 감독이 직접 구단에 가능성을 타진해주었다. 40인 로스터에서 한 명을 빼야 하는 등, 너무 무리한 일이라 성사되진 않았지만, 송승준의 상황을 가엽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16]

6.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프랭크 화이트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3 KC 51 151 31 6 1 0 20 5 3 8 23 .223 .262 .281 .542 -0.3 -0.3
1974 99 215 45 6 3 1 19 18 3 5 33 .221 .239 .294 .533 -0.5 -0.5
1975 111 329 76 10 2 7 43 36 11 20 39 .250 .297 .365 .662 1.1 1.5
1976 152 489 102 17 6 2 39 46 20 19 42 .229 .263 .307 .570 1.6 2.7
1977 152 514 116 21 5 5 59 50 23 25 67 .245 .284 .342 .626 1.7 1.9
1978 143 501 127 24 6 7 66 50 13 26 59 .275 .317 .399 .716 3.2 4.0
1979 127 503 124 26 4 10 73 48 28 25 54 .266 .300 .403 .703 1.3 1.7
1980 154 594 148 23 4 7 70 60 19 19 69 .264 .289 .357 .646 1.4 1.9
1981 94 390 91 17 1 9 35 38 4 19 50 .250 .285 .376 .661 1.1 1.3
1982 145 554 156 45 6 11 71 56 10 16 65 .298 .318 .469 .788 3.5 3.7
1983 146 579 143 35 6 11 52 77 13 20 51 .260 .283 .406 .690 2.1 1.6
1984 129 515 130 22 5 17 58 56 5 27 72 .271 .311 .445 .756 4.2 4.1
1985 149 600 140 25 1 22 62 69 10 28 86 .249 .284 .414 .698 2.0 2.5
1986 151 620 154 37 3 22 76 84 4 43 88 .272 .322 .465 .787 4.3 4.0
1987 154 624 138 32 2 17 67 78 1 51 86 .245 .308 .400 .708 2.6 2.8
1988 150 575 126 25 1 8 48 58 7 21 67 .235 .266 .330 .595 0.5 0.5
1989 135 458 107 22 1 2 34 36 3 30 52 .256 .307 .328 .635 1.7 1.7
1990 82 257 52 14 1 2 20 21 1 10 32 .216 .253 .307 .560 -0.3 -0.1
MLB 통산
(18시즌)
2324 8468 2006 407 58 160 912 886 178 412 1035 .255 .293 .383 .675 31.1 34.8

7. 관련 문서



[1] 재키 로빈슨은 전 구단 영구결번인 관계로 제외. [2] 'Smooth'는 특유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Smooth) 내야 수비 때문에, 'Hoover'는 유서 깊은 진공 청소기 브랜드인 후버 사(社)의 청소기처럼 타구를 귀신같이 빨아들인다고 하여 생긴 별명이다. 역대 최고의 3루 수비를 자랑했던 브룩스 로빈슨의 별명이 '인간 진공 청소기(Human Vacuum Cleaner)'였던 것과 같은 맥락. [3] 1970년대 초반 로열스 구단이 도입한 선수 육성 시스템이다. 다만 시스템 자체는 첫 선을 보인 이후 4년 만에 다시 폐기. [4] 당시 화이트는 이미 기혼자였고 아들도 한 명 있었다. [5] 1970년대 로열스의 유격수를 책임졌던 선수로, 발이 상당히 빨라 8년 연속 30도루에 1977년에는 리그 도루왕 자리에도 오르는 등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6] 로열스 아카데미 출신으로 메이저 무대를 밟은 사례는 화이트를 포함해 딱 3명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한국 팬들에게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으로 잘 알려진 론 워싱턴도 있었다. [7]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뛰다가 1970년 시즌 도중 로열스로 이적해왔고, 1971~1974년 4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상당히 인기가 좋았다. 정작 타격 성적은 화이트와 별 차이가 없었다. [8] 이는 구단 수뇌부도 마찬가지여서, 화이트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메이저로 처음 콜업될 당시 구단 수뇌부가 자신의 콜업을 껄끄러워 했다는 요지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9] 그나마 발은 빠른 편이라 20도루를 기록했으나 동시에 11개의 도루 실패를 기록하며 성공률은 그닥이었다. [10] 이 때 ALCS MVP를 수상했다. 참고로 ALCS는 1979년까지 따로 MVP를 뽑지 않아 화이트가 첫 시리즈 MVP가 되었다. [11] 이는 1952년 월드 시리즈 재키 로빈슨 이후 최초로 2루수가 4번 타자로 출장한 사례였다. [12] 이 다음 해인 1986년 월드 시리즈부터는 각 리그 팀의 홈구장에서는 홈 팀이 속한 리그의 룰에 따라 경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13] 보스턴 코치 시절인 1995년 그의 등번호가 영구결번되고 로열스 명예의 전당에 그가 헌액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4] KBO 팬들이라면 익숙할 前 SK 와이번스 감독이 맞다. [15] 화이트가 주로 활약했던 1970~1980년대는 리그 전체적으로 투고타저 경향이 짙었다. [16] 송승준이 그 해 더블A 플레이오프에서 팀을 위해 열심히 던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5차전에서 7이닝 승리투수가 된 이후, 6차전 9회에 던질 투수가 없어 고민하는 감독에게 자진등판 의사를 밝혔고, 송승준은 9회부터 연장 14회까지 역투했지만 끝내기 텍사스 안타를 맞고 패배했다. 경기가 끝나고 펑펑 우는 송승준에게 감독이 경기에 져서 우는 거냐고 했고, 송승준은 이제 미국에서 던질 수 없기 때문에 운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