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0:29:42

페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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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sinkevich.info/pechka1.jpg

참고로 이 사진에선 페치카 위에 침구가 있는데, 대한민국의 아랫목처럼 자기도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오븐이 당신을 굽습니다.

1. 개요2. 대한민국 군대에서의 페치카3. 기타

1. 개요



본디 러시아 벽난로를 가리키는 용어로, 아궁이 안에 밀가루 반죽 등을 넣어 오븐처럼 굽거나 냄비 등을 아궁이 앞이나 위에 놓아 데우기도 한다.

또한 러시아와 그 주변국에서는 넓은 영토 곳곳에 별장(다차) 들을 지어놓고 이걸로 난방을 하기에 현재에도 많이 존재한다.

대한민국 국군 막사도 과거엔 이걸로 난방을 했으며, 빼(뻬)치카로 불렀다.

2. 대한민국 군대에서의 페치카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BBS_201409040559228540.jpg
그땐 그랬지...사라진 내무실 2제 - 국방일보, 2014년 9월 4일, 사진 출처
페치카 최초 보급을 선전하는 대한뉴스. 영상 속 부대는 3군단 시절의 (구)이기자 부대다.

페치카가 언제 군에 설치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1958년 12월 5일자 경향신문에서는 동부전선 3군단이 최초라고 한다.

과거에 군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애증의 물건이었고, 이 당시를 재현한 코미디 동작그만 에피소드 일부에도 페치카가 한켠에 형식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라디에이터 온돌 난방이 대중화된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옛날 군대에는 내무반 한켠에 벽돌과 진흙(혹은 시멘트)으로 만든 페치카란 난로가 존재했고, 동절기 때 이 안에 석탄가루(분탄)와 진흙을 섞어 만든 혼합물[2][3]을 넣어 난방을 했으며, 연기는 벽과 천장을 뚫어 만든 연통 밖으로 나왔다.

게다가 보급받은 석탄의 질이 좋지 않아 불이 수시로 꺼졌기에 막사별로 이를 전담해 관리하는 빼당(치카 번병)[4]을 한 명 이상 두었으며, 그 대상은 빼조[5] 경력이 있는 상등병 혹은 연륜 있는 병장 중에서 자원시키거나 강제로 차출해 관리시켰다. 게다가 빼당은 불침번과 달리 밤새 잠을 못 자고 빼치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항상 옆에 붙어서 지켜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아차 하는 순간 불이 꺼져 페치카가 차갑게 식어버리면 빼당은 그야말로 경을 치는 날이었다고 한다.[6]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으로 빼당은 다음 날 근무 취침과 웬만한 작업이나 훈련 열외도 허용되었다.

게다가 혹한의 땅에서 들여온 문물답게 화력은 강했으나 ( 온돌에 비해) 열 효율이 나쁘고 균열을 통해 일산화탄소가 새어나올 수 있다는[7] 단점이 있었다.[8] 하지만 반대급부로 식는 데 8~12시간이나 걸리는 온기라는 장점도 있었으며 한창 달궈진 페치카 위에 물이 담긴 주전자를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끓어올랐기에 이를 응용해 심심하면 반합이나 식기 안에 라면을 넣고 올리거나 혹은 물에 적신 종이[9]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라면 봉지( 뽀글이)를 올려 끓여먹기도 했다.[10] 참고 기고문[11] 거기에 페치카는 화력이 균일하게 퍼지지 않아 어느 자리는 뜨겁고 어느 자리는 추웠다. 적어도 온돌은 화력이 균일하게 퍼져서 어느 자리든 일정 이상 따뜻한 것과 대조되게 페치카는 불을 피운 자리에서 가까워야 따뜻했다.

페치카는 1980년대까지 부대 막사의 난방기기로 활약하다가 1980년대를 기점으로 라디에이터 온돌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이 무렵 2~3층 정도 높이의 콘크리트 통합막사가 도입되면서 기름 보일러를 설치, 페치카가 보일러에 밀려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빼당 대신 보일러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2000년 초 페치카를 운용하던 12사단 예하 부대[12]. (2001년 4월 5일에 최초 방영)

언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위 기고문에서는 1999년까지라고 하지만 국방홍보원 국방저널의 2012년 10월호(20, 21페이지 참조)에 보면 2001년까지라고 한다. 확실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인 03군번(2003년)쯤 가면 페치카를 본 사람이 확실히 없어지는 걸로 봐서는 국민의 정부 말엽(2001년 ~ 2002년)에 전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 서방권에서는 독일의 '카헬오펜'(Kachelofen)과 스웨덴의 '카켈루근'(kakelugn)이란 난방 장치가 러시아의 페치카와 구조가 제일 유사하다.

[1] 루스카야 페치(러시아식 난로) [2] 이 당시엔 석탄 보급이 불규칙하고 적게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섞어야 가늘고 오래 땔 수 있었다. 다만 중앙에서 정해놓은 메뉴얼이 없었기에 부대마다 페치카의 형태와 혼합물의 혼합비율,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도 장교급에만 석탄을 보급하고 이를 알아서 반죽해 써야 했기에 과거 이웅평 소위가 자괴감을 느끼고 탈북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3] 연탄 가내수공업 버전이다. 연탄의 원료가 석탄가루와 진흙이기 때문이다. [4] 혹은 뻬치카나 기타 난방장치의 연료로 쓸 땔감용 나무 등을 전담한다고 해서 화목병(火木兵)으로 칭하기도 한 모양이다. #, #, # [5] 당을 보하는 역할로, 쉽게 말하자면 페치카 운용을 도우면서 운용법을 도제식으로 전수받는 부사수였지만 빠릿해야 했기에 주로 똘똘한 일등병이 맡았다고 한다. [6] 그나마 불씨가 남아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화목에 불을 지펴 넣어야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1960년대 사병으로 복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선 직후 당선자 신분으로 자신이 복무했던 부대를 방문해 둘러보고는 과거 빼당 시절에 툭하면 꺼져서 고생했는데 수십년 지난 지금도 병사들의 생활환경은 그대로라며 말한 적이 있다. 이 불 꺼뜨려서 난리나는 건 조선시대 며느리들이 솥단지 불씨를 애지중지하며 꺼뜨릴까 노심초사하는 거랑 똑같다. 꺼뜨리는 날엔 소박맞아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성냥과 라이터의 발명 전까지는 인간의 삶에서 불씨를 보존하는 것은 삶의 질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7] 그래서 십자매, 카나리아 새장을 옆에 두었다. [8] 페치카에서 발생된 열이 내무반 전체에 고루 퍼지지 않고 가까운 곳은 후덥지근하고 먼 곳일수록 냉기에 떨어야 했다. 사실 전통 러시아 페치카도 열 효율이 30% 이하로 좋지 않다. 그래서 불 한 번 때는 데 작은 나무 하나 자른 걸 다 넣어야 한단 소리도 있다. [9] 설거지가 귀찮을 때 쓰는 방식으로, 종이가 열을 흡수해서 라면 봉지가 타지 않는다. [10] 다만 이런 경우는 석탄가루 보급이 잘 나오고 라면을 구할 수 있었던 여건이 좋은 부대에서나 할 수 있었을 뿐이다. [11] 상단 사진의 한 구석에 벽돌 벽지를 붙인 사각형의 무언가가 페치카다. [12] 제12보병사단 포병연대 제79포병대대에서 촬영했다. 이후 2020년에 해체되어 제52보병여단 52포병대로 재창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