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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 국장 | |
1765년 ~ 1867년 | ||
위치 | 중동부 유럽 트란실바니아 | |
수도 |
헤르만슈타트[1](1711~1791, 1848~1861) 클라우젠부르크[2](1791~1848, 1861~1867)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대공(Großfürst)[3] | |
공용어 | 독일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 |
역사 |
1765년 대공국으로 승격 1806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종주국으로 승격 1867년 폐지후 헝가리 왕국에 편입 |
|
통화 | 굴덴 | |
성립 이전 | 트란실바니아 공국 | |
해체 이후 | 헝가리 왕국(1526년~19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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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11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은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1765년 대공국으로 승격되어 1867년까지 존속되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령이다.2. 역사
트란실바니아 공국 내 기득층 권력의 결집과 개신교 귀족들의 영향력 감소를 위해 합스부르크 제국은 중앙 권력의 확장 외에도 가톨릭을 권장하였다.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들로 하여금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의미하는 그레코-가톨릭 교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다. 종교의식의 자유를 위한 루마니아 정교회 신자들의 평화로운 움직임이 이러한 정책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는 궁극적으로 루마니아인[4]으로 하여금 사회적 지위의 획득과 정치적 기득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7세기말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에 통합되면서 빈 황실에서는 이 지역에서 루마니아 공동체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 연합인 그레코-가톨릭 교회라는 형식을 빌어서 루마니아인의 정교회를 붕괴시킬 방안을 제시하였다.합스부르크 왕가는 트란실바니아의 기득권층인 ‘3민족연합'[5]의 재산과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가톨릭 개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르파티아산맥을 교차하여 서진하는 정교회의 영향을 감소시키는 것은 물론 당시 중앙집권화 정책에 문제시되었던 루마니아인의 종교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집권층인 헝가리인 귀족들을 견제하고 특권층인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세력을 와해시키거나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합교회의 설립을 제안했다.
연합교회의 탄생은 트란실바니아에서 루마니아인 성직자들을 주축으로 한 지식인 계층의 탄생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적 지위의 상승과 경제적 안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짐에 따라 루마니아인에 대한 민족 정체성 그리고 그 권리 행사에 대한 생각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성직자들의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일련의 무리는 초기 아르데알[6] 학파(Şcoala ardeleană)의 근간을 마련하게 되었고, 서구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과 성직자들이 중심이 된 구성원들은 역사와 언어를 통한 루마니아 국가의식과 민족 정체성 그리고 ‘라틴성’[7]을 깨우치기 위한 일련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레코-가톨릭 신부인 미쿠클라인(Ioan I. Micu-Clain)은 그의 비망록에서 루마니아인이 처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언급하며, ‘동등한 민족적 권리의 승인, 정부와 의회로의 진출, 부역의 감소와 농노제 경감, 성직자 면세 그리고 루마니아인을 위한 학교, 기술, 상업 활동 허용 등을 지적하였다. 그의 노력과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러한 투쟁은 지방에서 더욱 격화되었다.
호레아(Horea)[8]는 3/4이상이 농노로 전락한 루마니아인 농민의 열악한 현실을 빈에 알리고자 노력하였으며, 루마니아 농민을 착취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당시 사회에 대한 적의를 사회적 민족적 투쟁으로 표출하였다. 1784년 가을 농노 출신인 호레아, 클로슈카(Cloşca), 크리샨(Crişan) 등이 주축이 된 농민들이 귀족을 공격하며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봉건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 폭동은 요제프 2세에 의해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지만, 1785년 트란실바니아에서 농노제가 폐지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사무일 미쿠(Samuil Micu), 게오르게 쉰카이(Gheorghe Şincai), 페트레 마이오르(Petre Maior), 이온 부다이델레아누(Ion Budai-Deleanu)등이 주축이 된 아르데알 학파로 이어졌고, 그들의 결실은 ‘루마니아인의 권리주장 청원서(Supplex Libellus Valachorum Transilvanise)[9]로 표출되었다. 의회의 거부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는 청원을 거절하였지만 이는 트란실바니아 내 루마니아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루마니아인의 권리 쟁취에 대 한 노력은 아르데알 학파에 의해 혁신되었다. 1840년대는 루마니아인의 민족정체성 확인 그리고 독립과 통일의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었다.
1811~1834년 동안 해산 되었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1834년 재소집되어 봉건제 일소 등 사회 정치적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헝가리 귀족과 빈 황실 사이의 반감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헝가리 지도층의 주된 목적은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을 헝가리 왕국으로 다시 귀속시키는데 있었고, 인구의 55% 정도를 차지하던 루마니아인은 여전히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842년에 통과된 헝가리어를 공식어로 지정하는 법령은 트란실바니아 의회의 비례의석 차지는 물론 중앙관직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던 루마니아 지식인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언어법 제정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를 계기로 루마니아인은 거국적 민족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정치조직화 하지는 못하였지만 트란실바니아 내 루마니아인의 민족의식이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1848년 혁명은 현대 루마니아를 구성하는 세 공 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계몽주의와 아르데알 학파의 기여로 민족과 민족의식의 개념에 대한 자각을 도모하기 시작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은 루마니아의 나머지 두 공국과도 밀접한 교류와 접촉을 이어갔다. 하지만 세 공국에서 발생된 혁명의 양상은 다소 상이했다. 프랑스의 혁명사상과 서구의 계몽사상이 혁명 이전부터 루마니아인에게 유입되었고, 1848년 2월부터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848년 3월 8일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 이아시(Iaşi)에서, 동년 5월 3일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의 벌라주펄버(Balázsfalva)[10]에서, 그리고 6월 9일 왈라키아 공국에서 혁명으로 불거졌다. 이 혁명은 그해 여름을 지나면서 민족적 정통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민족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으나, 연말에 와서는 대부분 유럽의 혁명운동이 주춤하기 시작했고, 특히 오스트리아 제국이 러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체제복귀에 성공한데다가,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이러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 독립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1851년에는 유럽 전체가 이전의 체제로 완전 복귀했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점차적으로 시민 계급이 형성되는데 기여했으며, 이러한 루마니아 민족적 움직임은 이후 1859년의 통일과 1920년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편입의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
혁명의 해였던 1848년[11]은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커다란 갈등을 경험하는 해였다. 헝가리인은 주권 회복과 트란실바니아 완전 병합을 목표로 부더와 데브레첸,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서 1848년 헝가리 혁명을 일으켰고, 헝가리 후사르 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그해 11월 트란실바니아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지휘 아래 루마니아인과 작센인이 함께 폴란드계 장군 유제프 벰(Józef Bem)이 이끄는 헝가리군과 교전했다. 그는 공격적으로 트란실바니아를 수성하였고, 아브람 이안쿠(Avram Inacu)는 아푸세니 산맥의 거친 산악지대로 퇴각하여 그곳에서 벰 장군의 군대와 게릴라전을 지속하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개입으로 1849년 8월 테메슈바르(Temesvár)에서 벰 장군의 군대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혁명 진압과 더불어 오스트리아는 군사 관료들을 파견하며 헝가리에 억압적인 절대왕권을 행사한 반면 루마니아인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주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40년대 이후의 몰다비아는 러시아 세력이 우위권을, 그리고 왈라키아에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두 세력이 패권을 다투는 정세가 펼쳐졌다.
1848년 이후 빈 황실은 트란실바니아에 절대주의를 도입하며, 정부와 의회를 폐지시켰다. 트란실바니아를 6개의 군사지역으로 나누었으며, 절대적 중앙집권화와 오스트리아식 행정구역화를 1850년대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이러한 절대주의 속에서도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 모든 민족에게 경제, 교육, 종교에 대한 개별적 향유를 허락하고 있었다. 특히 봉건제 폐지와 토지 양도는 루마니아인의 경제상황을 개선시켜주었으며, 정치, 문화적 기반의 향상을 계기로 루마니아 중산층이 형성되고, 각종 학교와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시류에 편승하여 루마니아 정교회 역시 자치권 획득을 요구하나 거절되고 결과적으로 동방 가톨릭 대주교만 그 설립이 허용되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1859), 프로이센(1866)과 계속된 전쟁에서 패하고, 1848년 헝가리 혁명도 러시아의 도움으로 겨우 진압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급속도로 그 세력이 약화된 반면 제국 내 헝가리의 세력은 점점더 강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루마니아인의 사회적 정치적 요구는 번번이 헝가리에 의해 묵살되었고, 이때마다 동방 가톨릭과 정교회는 결속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1863년 다수의 루마니아인이 투표에 참여하는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헤르만슈타트(Hermannstadt)에서 구성되었다. 48석을 차지한 루마니아 하원은 입법권을 행사하며, 정치적 차별을 극복하고 국민의식 신장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독일어, 헝가리어와 더불어 루마니아어도 공식어로 인정되었으며, 정교회 대주교구 설립(1864)이 승인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도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쇠퇴로 오래 가지 못하고 트란실바니아의 종주권은 다시 헝가리로 넘겨졌다. 1791년 구선거법으로 1865년 콜로주바르 의회를 소집하여 의회를 장악한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를 병합하는 투표에 착수하는 한편 헤르만슈타트 의회에서 제정된 루마니아어 공식어 법령을 무효화시켰다. 200년 가까이 지속된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는 1867년 헝가리와 이중제국 설립을 위한 정치적 타협으로 종식되었는데, 이때부터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은 다시 헝가리 왕국의 직접 영향권에 놓였다. 같은 해 6월 국민회의는 국왕의 법령으로 해산되며 그동안 콜로주바르 지방의회에 부여되었던 입법권 역시 폐기되었다. 헝가리와 작센인 귀족에게 부여되었던 기존의 권리가 복권되었으며, 오스트리아 법률과 경제관련 조항들이 헝가리 법률제정으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이중제국의 출현은 루마니아인에게 있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을 의미하였다.
2.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설립과 헝가리에 의한 트란실바니아 주도권 행사를 접한 루마니아인은 게오르게 바리치우(George Bariţiu)와 이온 라치우(Ion Raţiu)가 기초한 결의서를 황제에게 보냈다. 여기에는 이중제국에 대한 반대는 물론 합병 반대와 루마니아인의 자치권 요구가 담겨 있었다. 1867년 표면상 하나의 제국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와 헝가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자체 의회와 국무위원회 그리고 군대를 보유하게 된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12], 슬라보니아, 보이보디나 지역을 자신의 왕국으로 귀속시켰다. 헝가리 왕국 내 민족 분포와 비율에서 헝가리인의 수는 열세였다. 이러한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타민족 동화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1880년 46.6%였던 헝가리 인구비가 1910년 59.55%까지 올라갔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해산되었고 정부 역시 그 자치권을 상실함에 따라 트란실바니아는 헝가리에 점차 종속되었다. 동화정책의 한 방편으로 헝가리는 1868년 하나의 국민으로서 헝가리인 신분과 헝가리어 사용을 법으로 제정하였다. 1874년 선거법에 따라 루마니아인의 도시 거주가 금지되어 루마니아인에 대한 원천적 차별이 시행되었고, 1879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개정된 학교법에서는 헝가리어만 사용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헝가리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루마니아인 학교가 폐쇄되었다. 루마니아인의 정치 사회적 활동도 매우 위축되어 19세기 말 루마니아인 공무원의 수치는 6%에 머물렀다. 또한 지명, 인명이 독일어에서 헝가리어로 변경, 개명되었고, 언론법을 제정함으로서 반민족 행위에 대한 규제도 마련하였다. 이중제국 반대에 대한 루마니아인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868년 벌라주펄버에서 국민회의가 재개되어 자치권의 재허용과 법률 재고를 요구했으나, 국민선동을 이유로 주동자들은 처벌되었고 그들의 바람은 좌절되었다.이 시기의 루마니아 정치 지도자들은 소극적 저항주의와 적극적 저항주의의 두 가지 경향을 보였다. 전자는 바리치우와 라치우가 대표적인 인물로서 정치무대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소명과 결의로 루마니아의 권리 동의를 얻고자 한 반면, 정교회 대주교인 샤구나(Andrei Şaguna)가 대표적인 후자의 경우는 정치의 중앙무대로 직접 나아가 루마니아인의 권리를 표명하고 지키려 하였다. 루마니아인들의 저항이 결집된 국민회의는 나중에 트란실바니아 내 루마니아인 국민정당의 기초를 마련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또한 다양한 문화, 문학단체들 역시 주기적 모임이나 연례모임을 가지며 정치, 문화적 저항 전략을 구상하였다. 1870년대 초 루마니아계 은행과 교회, 재단, 부유한 개인들은 이러한 단체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75년부터 가속화된 헝가리의 동화정책은 많은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인들을 자극하였고, 이들은 카르파티아 동남쪽의 루마니아인들과의 교류를통해 독립에 대한 의지를 싹틔우기 시작한다. 1881년 바나트(Banat)와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국민회의가 헤르만슈타트에서 개최되어 하나의 루마니아 국민당(Patidul Naţional Român)으로 연합되고, 1884년에는 트란실바니아 최초의 일간지인 <연단(Tribuna)>이 슬라비치(Slavici)의 편집 하에 발간되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메모랜덤(memorandum)’ 사건으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국민당 지도부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냉각기를 이용하여 루마니아인의 권리 의결을 표출한 ‘메모랜덤’을 1892년 5월 빈 황실으로 보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루마니아 국민당 외교단의 접견을 거부하고, ‘메모랜덤’을 헝가리 정부로 송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루마니아인의 충성도는 약화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을 향해 지난 18세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루마니아의 청원운동도 종결되었다.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인의 삶은 다시 피폐해지기 시작하였고, 국민당 지도부 역시 반정부행위를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러한 시련은 루마니아인의 정치적 삶에 큰 타격이 되었지만, 오히려 루마니아인으로 하여금 민족적 자각과 민족의식의 결속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1905년 루마니아 국민당은 정치적 독립체로서의 루마니아 민족발전, 자유와 민주 권리 존중, 소농민 지원, 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배려 그리고 행정, 사법, 군대에서의 루마니아어 사용 등을 주요 골자로 한 행동주의 강령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헝가리 정부의 동화정책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다. 이후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요구와 투쟁은 궁극적으로 공국 내 민족자결권의 확보는 물론 루마니아의 다른 두 공국과의 민족적 통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가 가시화되자 제국에 속했던 민족들은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 국민당과 사회민주당 당수의 지휘 하에 트란실바니아 국민의회 내 루마니아 의원들은 12월 1일 줄러페헤르바르(Gyulafehérvár)[13]에서 하나의 국가로서 모든 루마니아인들의 통합을 결의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연합국에 가담해 싸웠던 루마니아에게 트란실바니아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은 좀 더 나아가 트란실바니아를 포함한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새로운 국경을 정하였다.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아(Marie of Edinburgh) 왕비는 1922년 줄러페헤르바르에서 루마니아 국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치렀고 헝가리는 졸지에 인구의 31.6%를 잃었다. 그리고 이 31.6%에 해당하는 166만여 명의 헝가리인은 하루아침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1940년 8월 2차 빈 중재에서는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 할양하도록 승인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조약(1947)에서 할양된 영토는 루마니아로 재반환되었다. 파리 조약에 의해 승인된 2차 대전 이후의 국경은 결국 1920년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고 특히 공산정권 수립과 더불어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계 주민, 즉 작센인들은 서독으로 철수하였다. 트란실바니아 내 민족구성은 2002년 다수민족으로서 루마니아인이 76%, 헝가리계가 20% 그리고 기타(집시, 독일계 등) 4%이며 헝가리계 구성원의 다수는 세케이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수치는 1차 대전 이후 루마니아인 54%, 헝가리계 32%, 독일계 10%였던 것에 비해 상당한 비율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수치의 변화는 상대적인 것으로 1차 대전 이전 시행된 헝가리의 동화정책에 의해 헝가리계로 전환된 사람들의 숫자도 포함된 것으로 추측된다. 헝가리계 주민 비율이 32%에서 20%로 하락했지만, 166만 명을 전후로 한 헝가리계 인구수는 수십 년의 세월동안 그대로 유지된 셈이다. 1989년 혁명 이후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 소수민족은 하르기타(Harghita), 코바스나(Covasna) 그리고 무레슈(Mureş)의 일부가 포함된 세케이인 지역에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자치권을 원하는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 사이의 갈등의 소지가 되고 있다.
[1]
헝가리어로는 너지세벤(Nagyszeben)
[2]
헝가리어로는 콜로주바르(Kolozsvár)
[3]
합스부르크 왕가 수장이 겸임.
[4]
주로 루마니아인
농민.
[5]
헝가리인 귀족,
세케이인 군인,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상공시민.
[6]
아르데알(Aredeal)은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어인 에르데이(Erdély)에서 유래한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어이다. 19세기 말 언어순화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루마니아에서도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어 발음에서 음차한 아르데알로 불렀다.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 역사에 속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7]
아르데알 학파의 대표인물 중 한 명인 사무일 미쿠(Samuil Micu)는 그의 저서에서 언어, 풍습, 성격과 기질을 통하여 루마니아인의 로마적 기원을 환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8]
본명 바실레 니쿨라(Vasile Nic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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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로 ‘트란실바니아 블라흐인들의 청원서’라는 의미를 가진다. 블라흐는 고대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트라코-다코민족과 로마화된
다키아민족의 후손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주 내용은
레오폴트 2세 황제에게 루마니아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다른 세 민족과 동일하게 대우하여 줄 것과 의회, 정부기관에서 비례에 따른 루마니아인의 진출 허용 그리고 루마니아인의 종교였던 정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주 내용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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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루마니아 알바주 블라지(Bl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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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역은 농산물의 흉작으로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을 맞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실업과 사회불안이 최고조에 달했다. 1848년
프랑스 왕국에서는
2월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복원되었다.
독일 연방 역시
3월 혁명으로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계속되는 혁명시위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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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왕가, 헝가리와의 타협을 통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구성하여 사실상 자치국가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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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Alba Iulia). 과거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수도였다. 20세기 무렵에는 몰락한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으나 헝가리의 민족혼을 유지하게 해준 에르데이 공국의 수도였던 곳에서 통합 선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헝가리에게 엿먹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