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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0><colcolor=#fff> 크로아트 초대 국왕 토미슬라브 Tomisla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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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토미슬라브 (Tomislav) |
출생 | 미상 |
사망 | 928년 이후 (향년 미상) |
재위 | 크로아티아 공국의 반 |
910년 ~ 925년 | |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 |
925년 ~ 928년 이후 |
[clearfix]
1. 개요
크로아티아 공국의 제11대 반(공작)이자 크로아트 왕국 초대 국왕.2. 행적
출생년도 및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일부 크로아티아 역사가는 크로아티아 공국의 전임 반(Ban)인 문치미르의 아들일 거라 추정하지만, 기록이 희소해 불확실하다. 그가 언제 집권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스플리트 대주교 토마스가 쓴 13세기 연대기 <히스토리아 살로니타나(Historia Salonitana)>에서 토미슬라브가 914년에 벌어진 사건에 언급된 것을 봤을 때, 문치미르는 914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910년 즈음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으로, <베네치아 연대기>를 집필한 안드레아 단돌로에 따르면, 마자르족이 914년과 921년에 크로아트족을 유린했다고 한다.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에 따르면, 토미슬라브는 마자르족을 상대로 혈투를 벌인 끝에 925년경 드라바 강 우안에 있는 요새화되지 않은 지역에서 맞붙은 끝에 마자르족을 축출했으며, 하부 판노니아 일대(일명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그때까지 자기가 통치하던 크로아티아 영역과 통합했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가 집필한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는 크로아트인과 마자르족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마자르족 장군들이 10세기에 드라바 남쪽의 세 요새, 즉 자그레브, 포제가, 부코보를 점령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전에 이 세 요새가 크로아트인들의 손아귀에 있었음을 암시하며, 일부 학자들은 토미슬라브가 드라바 강 연안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세 요새를 점령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닌의 주교이며 토미슬라브의 최측근이었던 그르구르 닌스키(Grgur Ninski, 9세기 후반 ~ 928년 이후)는 928년 스플리트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닌 주교직이 폐지되면서 스크르딘의 주교로 옮겨졌다. 이는 판노니아 크로아티아에 속한 시사크 시가 토미슬라브의 통치를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 외에 판노니아 크로아티아가 토미슬라브에게 통합되었다는 걸 드러내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가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통합했다는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의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 학자들의 논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924년, 시메온 1세가 파견한 불가리아 원정대가 세르비아 지역을 공력해 그곳을 다스리던 크냐지 자하리야를 축출하고 세르비아를 장악했다. 토미슬라브는 자하리야를 비롯한 세르비아 망명자들을 받아들였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로콘술의 직을 받는 대신 달마티아 테마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926년 또는 927년, 시메온은 크로아티아에 알로고보투르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지만, 보스니아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알고로보투르를 비롯한 대다수 장병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참회자 테오파네스,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 게오르기오스 하마르톨로스,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 동로마 제국 역사가들은 시메온 1세는 참패 소식을 접한 직후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술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크로아티아가 기병 60,000명과 보병 100,000명을 배치할 수 있었으며, 각각 최대 4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80척의 대형 선박과 각각 10~ 2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100척의 소형 선박을 보유했다고 기술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토미슬라브 치세 당시 마자르족과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던 걸 볼 때, 크로아티아의 군사력이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라고 본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크로아티아에는 닌, 비오그라드, 벨리신, 스크라딘, 흘리예브노, 스텁, 크닌, 코리, 클로북 등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여럿 있으며, 크로아티아 상인들은 네레트바 지역과 달마티아 만의 항구에서 베네치아까지 항해한다고 기술했다.
925년에 열린 제1차 스플리트 공의회는 교회 관할권과 크로아티아 교회에서 슬라브어가 예배에 사용되는 것이 거론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스플리트의 이반 대주교가 크로아티아 추기경의 명예를 누릴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에 닌의 주교인 그르구르 닌스키가 자신이 주장이 될 자격이 있다고 교황 요한 10세에게 항의했다. 토미슬라브 역시 그르구르 닌스키를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928년에 열린 제2차 스플리트 공의회에서, 스플리트 대주교의 직위가 확정되었고 닌 교구직은 폐지되었고, 그르구르 닌스키는 스크르딘 주교로 옮겨졌다. 또한 슬라브어가 예배에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오직 라틴어만 사용할 수 있었다.
925년, 교황 요한 10세는 토미슬라브에게 답신을 보냈다. 이때 요한 10세는 "크로아티아의 왕(rex)"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에 크로아티아 가톨릭 신부이자 역사가, 정치인인 프라뇨 라치키(Franjo Rački, 1828 ~ 1894)는 토미슬라브가 925년 즈음에 왕을 자처했다고 주장했다.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는 토미슬라브가 달미 들판에서 동로마 황제게 보내준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기술했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정치가이자 크로아티아 고고학의 창시자인 이반 쿠쿨예비치 사크친스키(Ivan Kukuljević Sakcinski, 1816 ~ 1889)는 대관식 장소는 'Duvanjsko polje(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서부의 카르스트 지역 고원 지대)'일 거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교황은 그를 왕으로 인정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임시로' 달마티아 테마를 관리하는 것만 받아들일 뿐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928년 스플리트 공의회에서 언급된 이후로, 토미슬라브에 관한 정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트르피미르 2세가 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었다.
3.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상징
토미슬라브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왕이자 크로아티아를 통합한 인물로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추앙받는다. 많은 크로아티아 도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 기념물이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것은 자그레브와 리브노에 있다. 1925년 크로아티아 전역의 많은 교회 정면에 아래의 문구가 적힌 기념패가 세워졌다.Ujedinjeni i slobodni narod kralju Tomislavu 925. – 1925.
'토미슬라브 국왕에게 통일된 자유국가 925 - 1925.
'토미슬라브 국왕에게 통일된 자유국가 925 - 1925.
또한 보스니아 도시인 두브노는 1925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토미슬라브의 대관식 1,0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토미슬라브그라드'로 명칭이 바뀌었고, 왕국 전역에서 축하행사가 거행되었다. 1941년 사보이아 가문의 일원이자 아오스타 공작인 아이모네는 나치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후 나치 독일과 한편이 된 우스타샤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에 의해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토미슬라브 2세로 추대되었지만, 1943년 7월 31일에 전황이 악화하자 퇴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