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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0><colcolor=#fff> 크로아티아 반 트르피미르 1세 Trpimir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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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트르피미르 1세 (Trpimir I.) |
출생 | 미상 |
사망 | 864년 (향년 미상) |
재위 | 크로아티아 공국의 반 |
845년 ~ 8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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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서 전해지는 크로아티아 공국의 제5대 반(Ban).2. 행적
845년경 미슬라브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로타리우스 1세를 주군으로 섬기면서도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작센인 신학자 고트샬크(Gottschalk, 805 ~ 868/869)에 따르면, 846년에서 848년 사이에 바다와 육지에서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그에게 소속된 네레트바니족이 베네치아 도시 카오를레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자다르의 동로마 총독이 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또한 고트샬크는 불가리아 제1제국이 854년에서 860년 사이에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트르피미르가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보스니아 북동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격퇴했다고 밝혔다. 고트샬크는 예정설을 주장했다가 이단으로 기소되자 동프랑크 왕국에서 탈출해 트르피미르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852년 3월 4일, 트르피미르는 말리 코자크(Mali Kozjak) 산의 경사면인 푸탈리에 세워진 성 유르자 교회에 기부하고 증서를 발행했다. 일명 <트르피미르 공작의 기증(Povelja kneza Trpimira)>으로 알려진 이 기증서에서, 그는 자신을 "신의 은총으로, 크로아티아인의 통치자(Tirpimir, dux Chroatorum , iuuatus munere diuino)>라고 밝혔으며, 전임 반 미슬라브가 스플리트 대교구에 푸탈리의 재산을 기부한 것을 확인했다. 증인 목록에는 5명의 총독, 궁정 관리자, 3명의 신부, 다른 고위 인사 5명이 언급되었다.
한편, 트르피미르는 아펜니노 반도의 베네딕토회 중심지인 몬테카시노에서 몇몇 베네딕토회 수녀들을 초대해 클리스(Klis) 기슭에 있는 리지니체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정착하도록 했다. 수도원에 정착한 베네딕토회 수녀들은 종교 생활과 교육 생활, 그리고 읽고 쓰는 능력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지니체에는 아래의 문구가 새겨진 제단 들보 조각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도 했다.
...pro duce Trepim(ero)
트르피미르 공작을 위해
트르피미르 공작을 위해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트르피미르를 크레시미르 1세의 아버지라고 일컬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을 10세기로 정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 이반 부제는 즈데슬라브가 트르피미르 가문 출신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트르피미르는 15세기와 16세기의 두 연대기로 구성된 <코로나 베네토룸(Corona Venetorum)>에서 크로아티아의 트르피미르 왕(Trpimir re di Croatia)으로 언급되었다.
시비달레 복음서(Evangelario di Cividale)에 따르면, 트르피미르는 장남 페타르와 함께 산 조반니 디 두아노 수도원을 순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864년에 사망한 뒤 페타르가 아닌 도마고이가 뒤를 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페타르는 일찍 죽었고 또다른 아들 즈데슬라브가 뒤를 이었지만, 트르피미르 가문 출신이 아닌 도마고이에게 전복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설에 따르면, 도마고이가 페타르를 살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