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1:48:39

테우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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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동고트 계열 초대 군주
Theudis | 테우디스
파일:테우디스.jpg
제호 한국어 테우디스
라틴어 Theudis
스페인어 Teudis
생몰 년도 미상 ~ 548년 6월
재위 기간 531년 ~ 548년 6월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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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동고트계 초대 국왕. 동고트 왕국의 국왕인 헬데바두스의 삼촌이자, 토틸라의 종조부이다.

2. 행적

테오도리크 대왕의 측근으로, 테오도리크가 이탈리아 국왕 오도아케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라벤나 공방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511년 아말라리크를 서고트 왕국의 군주로 옹립한 테오도리크 대왕에 의해 아말라리크의 군사 방면 후견인으로 선임되어 히스파니아에 파견되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그는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연간 세금을 꼬박꼬박 바쳤지만 히스파니아 내에서 왕처럼 군림했다고 한다.

531년, 아말라리크가 프랑크 왕국의 킬레베르투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군에게 참패하여 바르셀로나로 피신했다가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100여 년간 이어지던 발티 왕조가 단절되자, 서고트 귀족들은 몇달 동안 새 왕으로 누구를 세울 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테우디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동고트 계열이던 그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건 오랜 기간 군사 업무를 맡았고 2,000명의 사병을 갖추고 히스파니아의 로마 귀족가와 결혼 동맹을 맺어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데다 동고트 왕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해 국경지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프랑크군이 점령한 셉티마니아 일부 지역을 탈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고, 나르본을 완전히 떠나 바르셀로나로 천도했다. 다만 수도를 정식으로 정하지는 않았고, 툴레도와 세비야도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다. 그리하여 남부 갈리아를 사실상 포기한 그는 그 대신 이베리아 반도 남부 해안 지역 공략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이베리아 남부 해안 지역은 한때 수에비 왕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5세기 중반 수에비 왕국이 서고트족에게 참패한 뒤 서고트 왕국 역시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베티카의 여러 도시는 동로마 제국에 명목상 충성을 바쳤지만, 실제로는 무제한의 자치를 누렸다. 그는 이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기록이 미비해서 공세의 진행 과정은 알 수 없다. 다만 곡창지인 과달키비르 계곡 일부 지역을 공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지브롤터에 이르렀을 때 반달 왕국의 군주 겔리메르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이를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카르타고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달 왕국은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거절했다.

그 후 서고트군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세우타 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곧 공세에 착수해 세우타를 공략하고 그곳의 고트 수비대를 섬멸했다. 동로마군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세우타에 강력한 요새를 세우고 함대를 배치해 고트군의 상륙을 저지했다. 뒤이어 반달 왕국이 소유했던 발레아레스 제도도 동로마 해군에 의해 공략되었다. 540년, 동고트 왕국의 군주이자 조카인 헬데바두스는 고트족끼리 힘을 합쳐 동로마 제국에 맞서자고 제안했다. 그 역시 동로마 제국의 연이은 공세에 위협을 느꼈기에 지원군을 곧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541년 헬데바두스가 피살당하면서 연합 계획은 중단되었다.

541년 또는 542년, 클로타르 1세 킬데베르 1세가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왔다. 여기에 테우데베르 1세가 두 삼촌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스크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팜플로니아를 점령한 뒤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프랑크인들은 성 빈센트에게 바치는 마을 사람들의 기도에 겁을 먹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군이 49일간의 포위전 끝에 사라고사를 함락했다고 하며, 사라고사의 교회 유물인 성 빈센트의 튜닉이 프랑크군에 약탈당했고, 킬데베르 1세는 파리의 성문에 튜닉을 갖다대고 못을 박았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그는 보복을 결심하고 테우디기셀 휘하 고트군을 피레네 산맥에 매복시켰다. 프랑크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짊어진 채 귀환하다가 산길에 매복하고 있던 고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에 돌아갈 길이 끊기자, 프랑크군은 테우디기셀에게 뇌물을 줘서 하루 동안 길을 열게 했다. 테우디기셀은 그들이 산길을 지나가는 걸 허용했다가 후위대만 추격해 섬멸했다. 그렇게 프랑크군을 물리친 테우디스는 베르베르 부족들의 습격으로 아프리카 속주가 혼란한 틈을 타 세우타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547년에 감행된 세우타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고트군은 처음에는 요새를 맹렬히 공격했지만 주일이 되었을 때 무기를 벗어두고 예배에 전념했다. 동로마군은 이 때를 틈타 적진을 공격했고, 적 함대가 바다를 가로막는 바람에 빠져나가지 못한 고트군은 전원 피살되었다고 한다.

한편, 테우디스는 고트인과 로마인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려 노력했다. 그는 고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였지만, 로마인들이 신봉하는 가톨릭에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르셀로나, 예이다, 발렌시아에 대성당을 세우는 걸 허용했으며,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 역시 허락했다. 또한 그는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채택하면서 자신의 혈통이 플라비우스 왕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모든 히스파니아 지방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이래 히스파니아에서 플라비우스 왕조에 대한 선망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등 당대 로마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는 군주들이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체택한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546년 11월 24일, 테우디스는 로마인과 고트족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률을 반포했다. 이 법은 로마인과 관련된 알라리크 2세의 법전에 추가될 예정이었지만, "모든 신민"에게 적용된다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고트족에게도 유효했다. 그는 모든 지방 당국과 법원에 이 법전을 보내면서 앞으로 판결을 내릴 때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고트족과 로마인들의 법적 통합을 향한 첫 단계였다.

548년 여름, 그는 세비야의 한 궁전에서 살해되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오랫동안 미친 척하며 사람들을 속인 사내가 광기를 능숙하게 연기하면서 왕에게 접근한 뒤 순식간에 단검으로 등을 찔렀다. 그는 피를 흘리며 지지자들에게 "이것은 지난날 주군을 배신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일 뿐"이라며 살인자를 처형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강요한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동고트 출신 사령관 테우디기셀이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