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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반왕 Flavius Paulus |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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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
라틴어 | Flavius Paulus | |
생몰 년도 | 미상 ~ 미상 | |
재위 기간 | 673년 봄 ~ 673년 9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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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반왕. 왐바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2. 행적
이베리아-로마인 출신 장군으로, 672년 9월 1일 귀족과 사제들이 톨레도에서 왐바를 왕으로 추대할 때 참여했다. 673년 봄 셉티마니아의 림 백작 힐데리크가 반란을 일으키자, 왐바는 그에게 군대를 맡겨 반란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르본에 입성한 뒤 현지 주교 아르데발트를 몰아내고 왕을 참칭하고 레카레드 1세가 지노라의 성 펠릭스 교회에 기증한 금관을 머리에 썼다. 힐데리크 역시 파울루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후 당시 궁정 관료를 맡고 있던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라노신드의 지지를 받았고, 프랑크 왕국 및 바스크인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는 왐바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서쪽의 왕으로 칭하고 왐바를 동쪽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는 파울루스가 왕국을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걸 의미했다.왐바는 바스크인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칸타브리아에서 파울루스의 반란 소식을 접했다. 그는 7일 안에 바스크인들의 영역을 파괴하고 인질과 조공을 받아낸 채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칼라호라와 우에스카를 거쳐 나르본으로 진격했다. 바르셀로나, 지로나가 잇따라 항복한 뒤, 그는 피레네 산맥에 접근하면서 군대를 3개의 분견대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카리타니아 지역의 주요 도시인 카스트룸으로 향했고, 두 번째는 아브손 시를 통해 피레네 산맥의 중앙 능선으로 이동했으며, 세 번째는 해안가를 지나가는 로마 가도를 따라 이동했다. 코콜리베라(현재 콜리우르), 불투라리아, 카스트룸을 공략한 뒤, 토벌대는 칼루수라 요새를 공격해 수비대의 저항을 물리치고 함락했고, 뒤이어 사르도니아 요새로 진군하여 비티미르 백작을 물리치고 요새를 장악했다. 이후 평야 지대로 내려가 전군을 규합한 뒤 나르본으로 이동하면서, 별도의 분견대에게 해상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파울루스는 왐바의 군대가 나르본에 접근해오자 님으로 후퇴하면서 비티미르에게 나르본을 지키게 했다. 이어진 공성 끝에 토벌대가 성문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를 장악하고 반군을 제압했다. 비티미르는 교회로 피신한 뒤 얼마 동안 농성했다가 곧 체포되었다. 비테라(현재 베지에)와 아갈프 시가 뒤이어 항복했으며, 마갈로나 시를 사수하던 후밀트 주교는 왕의 군대가 포위 공격을 준비하는 데다 바다에서 함대가 접근해오는 걸 보고 파울루스에게 달아났다. 지도자 없이 남겨진 마갈로나 시는 곧바로 왐바에게 항복했다.
673년 8월 31일, 왐바의 군대는 파울루스 일당이 숨은 님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프랑크군이 곧 도와주러 올 거라고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다음날, 왐바는 프랑크군이 후방에서 공격할 것을 우려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도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예비대를 공방대에 투입했다. 토벌대는 곧 성벽을 점령했고, 파울루스와 추종자들은 원형 극장으로 피신했다. 도시를 공략한 토벌대는 약탈을 자행하다가 주민들과의 충돌로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원형 극장으로 피신한 반군 사이에서 내분이 벌어졌다. 지역 귀족들은 파울루스와 함께 온 자들이 자신들을 덫으로 유인했다고 비난하면서, 왕의 사면을 받기 위해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파울루스는 나르본 주교 아르게바드는 보내 왐바에게 자비를 구했다.
왐바는 약탈을 중단하고 군대를 도시 밖으로 이동하여 전투 대형을 구축했고, 원형 극장에 있던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이후 파울루스 편에서 싸운 프랑크족과 색슨족을 조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이베리아 반도로 끌고 갔다. 한편, 왐바는 파괴된 나르본의 복원을 수행하고 성벽의 틈을 수리하고 불타버린 성문을 대신할 새로운 성문을 세웠으며, 방치되었던 시신을 묻고 약탈한 재산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게 했다.
얼마 후, 루파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비테레 일대를 침공하자, 왐바는 즉시 그들을 향해 진군하면서 적의 매복 공격을 격퇴한 뒤 프랑크군 앞에 나타났다. 루파는 그제야 파울루스가 패배했다는 걸 깨닫고 즉시 퇴각했다. 톨레도로 돌아온 왐바는 재판을 거행했다. 단순 가담자는 사면되었고, 파울루스와 52명의 추종자들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다. 왐바는 그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실명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렇게 실명형에 처해진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머리를 밀고 수염이 잘린 채 더러운 옷을 입고 맨발로 낙타가 끄는 병거를 탄 채 톨레도 시가지에서 조리돌림 당했다. 그의 머리에는 검은 가죽이나 청어 뼈로 만든 모조 면류관이 쓰여졌다고 한다.
그 후 감옥에 갇혀 있던 그는 683년 왐바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에르위그에 의해 사면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