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7:55:35

아타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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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발티 왕조 2대 군주
Athaulf | 아타울프
파일:아타울프.jpg
제호 한국어 아타울프
라틴어 Athaulf
생몰 년도 미상 ~ 415년 8월 14일
재위 기간 410년 ~ 415년 8월 14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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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2대 군주. 서로마 제국과 갈등을 벌이다가 히스파니아 정착을 시도했으나 도중에 암살당했다.

2. 행적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참가한 고트족 귀족 알아테우스의 아들이라는 설과 고트 전쟁 동한 로마군에 복무한 또다른 고트 귀족 모다레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제기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르마티아 여인과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낳았다고 전해지며, 역사학자 헤르윅 볼프람(Herwig Wolfram)은 <고트족의 역사>에서 그가 알라리크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발티 왕조의 일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401년 판노니아 일대에서 로마군이 고트족과 맞붙을 때 고트 분견대 지휘관을 맡았으며, 408년 게르만인과 훈족이 혼합된 판노니아 방면군 사령관을 맡았다. 409년 알라리크와 합류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베네토 일대로 진군했다. 이후 피사로 이동했으나 올림피아스가 이끄는 훈족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하지만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알라리크와 합류할 수 있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이 정착할 땅을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얻으려 했으나, 호노리우스가 협상에 응하지 않자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압박했다. 원로원은 알라리크의 압박에 따라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가 로마로 들어가던 곡물을 함대로 차단하면서 로마에 기근이 들면서 민심이 이반되자, 알라리크는 410년 아탈루스를 폐위하고 황제의 의복을 벗겨서 호노리우스가 있는 라벤나로 보내면서 협상을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그 후 알라리크와 아타울프는 호노리우스의 심복인 요비우스의 초대를 받고 아리미누스에서 열린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사루스가 이끄는 적병 300명의 습격을 받자, 알라리크를 호위해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알라리크는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 약탈을 감행했다. 그 후 로마의 유력 인사들이 서고트족의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중에는 호노리우스의 누이이자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안 갈라 플라키디아가 있었다.

서고트족은 로마 약탈 후 시칠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캄파니아로 남하했지만 함대가 폭풍우로 침몰하면서 저지되었다. 이에 작전을 중지하고 북상하던 중 알라리크가 병에 걸려 코센차에서 사망했다. 알라리크는 자식을 두지 못했기에 그가 새 지도자로 옹립되었다. 그는 앞으로 어찌할 지 고심한 끝에 아우렐리아 가도를 통해 서해안을 따라 행군하면서 캄파니아, 라티움, 에트루리아, 리구리아 일대를 철저히 약탈했다. 로마군은 이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고, 많은 피난민들이 이들을 피해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도망쳤는데, 그 중에는 히에로니무스도 있었다.

412년 초, 아타울프는 파다나 평원에 도착한 뒤 토리노 근처에 잠시 정착한 후 이탈리아를 떠날 채비를 했다. 2월 말이나 3월 초에 무리를 이끌고 포 강의 지류인 도라 리파리아 강을 따라 몽제네브르 고개를 통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에 진입했다. 이후 아를 인근에 도착한 그는 갈리아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요비누스와 협상하여 거주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요비누스는 지난날 알라리크와 아타울프를 죽이려 했던 사루스에게 옹립된 처지였던 터라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기야 요비누스는 사루스의 동생 세바스티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요비누스로부터 어떤 것도 얻지 못하게 되자, 아타울프는 호노리우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그는 호노리우스에게 반역자들을 물리쳐주고 로마와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아키텐에 정착하고 곡물과 보조금을 받겠다고 요청했다. 호노리우스는 이 제안을 수락했고, 아타울프는 10,000명의 고트군을 이끌고 사루스를 공격해 주살한 후 413년 발렌티아에서 요비누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요비누스와 세바스티아누스는 포로로 집한 뒤 나르보로 끌려가 참수되었고, 그들의 수급은 8월 말 라벤나에 거주하는 호노리우스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아프리카 총독 헤라클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곡물 운송이 끊어지면서, 로마 정부는 곡물을 보내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그는 나르보, 톨로사, 보르도를 점령했다. 그해 말 마르세유를 공격했으나 보니파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퇴했고 전투 도중 부상을 입었다. 이후 향후 거취를 놓고 고심한 끝에 414년 초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황녀와 혼인함으로써 로마인들의 지지를 얻어내어 독립 왕국을 이루길 희망했다. 그해 말 콘스탄티우스 3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를을 봉쇄하자, 그는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보르도에서 다시 로마 황제로 선임했다. 그러나 해상 봉쇄로 인해 기근이 갈수록 심해지자, 414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히스파니아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타울프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해안 지대의 도미티아 가도를 따라 이동하여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그곳에 궁정을 세우고 갈리시아에 정착했던 반달족을 격파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갈라 플라키디아로부터 아들을 낳고 아내의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1세를 기려 '테오도시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아이가 몇 달만에 사망하면서, 로마인들의 협조를 받으려 했던 그의 계획이 틀어졌다. 귀족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풍요로운 아프리카로 진출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호노리우스와 협상할 여지를 마련하고 싶었기에 거절했다. 이에 아직도 로마와의 협상에 연연하는 그에 대한 반감이 귀족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415년 8월 14일, 아타울프는 궁전 마구간에서 말을 보살피던 중 두비우스 또는 에버울프라는 이름의 하인에게 살해되었다. 이 인물은 아타울프에게 주살된 사루스의 추종자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해된 뒤 사루스의 형제였던 시게리크가 서고트족의 새 지도자가 되었으나 7일만에 살해되었고, 아타울프의 친척인 왈리아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